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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11

111. 우리는 참선(參禪) 염불(念佛)하면 다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물론 안하는 것 보다야 낫습니다. 그것이 계행(戒行)을 지키는 바탕이 서야 그래야 잘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계율(戒律), 이것은 모두가 다 우리 법성(法性)에 따르는 불성(佛性)에 따르는 하나의 행동이기 때문에 불성에 순종(順從)하는, 어려운 말로 하면 불성에 수순(隨順)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계행을 지키면 그냥 즉시에 그와 동시에 바로 우리 마음은 정화(淨化)되어 옵니다. 분명히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마음을 못 보니까 이제 몸만 있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마는 사실 몸이라는 것은 마음의 그런 생명(生命)의 체(體)위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을 핵(核)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포(細胞)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계행 지키기가 쉽다하는 그런 관념(觀念)을 명확히 가져야 합니다.


그런 계행 지키면 그냥 즉시에 그와 같이 무수한 신장이 우리를 돕고 동시에 우리 마음은 그만큼 불성(佛性)과 우리 본래성품(本來性品)에로 접근되어 갑니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인 것입니다. 앞서 어느 처소(處所)에서 저한테 '우리 인생(人生)이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고 삽니다.


인생의 가치(價値)가 무엇인지 모르고 삽니다.' 이와 같이 점잖은 분이 호소를 했단 말입니다. 내 생명(生命)의 뿌리는 대체로 무엇인가? 내가 지금 서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불교에서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道人)들 말씀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 비칠 조(照)자 돌아볼 고(顧)자 발각(脚)자 아래 하(下)자, 발 뿌리를 보라, 발 뿌리를 보란 말은 "내가 무엇인가 알아라" 그 말과 같겠지요. '나'라는 존재(存在)가 어떤 존재냐는 말입니다.


사회적(社會的)으로 역사적(歷史的)으로 어떠한 존재인가? 지금 어떠한 입장인가? ‘이것이 조고각하라 '이 발 뿌리를 보라' 그런 의미입니다. 너의 생명의 뿌리가 무엇이며 내 생명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쁘기도 하고 짝 없이 소란스럽습니다마는 이걸 모르면 근본을 모르고 말겠지요. 근본(根本)에 입각하면 가장 쉬운 것입니다. 별로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근본을 볼 것인가? 근본을 보는 것도 어려우면 우리가 갈 수가 없겠지요?


우리가 전문적(專門的)인 스님들만 하고 일반 사람들이 못하면 그것도 별로 가치(價値)가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을 보는 것도 굉장히 쉽단 말입니다. 참선(參禪) 염불(念佛)이 근본을 보는 길입니다. 참선하고 염불을 하는 것이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 마음이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이와 같이 흩어지면 우리 마음도 괴롭습니다.


우리 마음이 복잡해 보십시오. 산란스러우면 결국은 마음이 괴롭고 동시에 몸도 아프단 말입니다. 마음이 가지런히 하나로 딱 모아지면 마치 잠자는 잔잔한 파도(波濤) 모양으로 됩니다. 아! 그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원교대사(원교大師)에게 - 원교대사는 국사의 법우(法友)인데 - 자기 법우한테 한 말이 있단 말입니다. '그대 마음을 산심(散心)에서 정심(定心)으로 돌이켜라!' 그대 마음을 산심에서 정심으로 돌이켜서 마치 잔 푸른 파도 모양으로 잔잔한 마음을 만들어라. 그러면 만상(萬象)의 진(眞)모습은 참모습은 거기에 비춰올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나 도인(道人)들은 보통 그와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마음이 내내야 흩어져서 산심(散心)아닙니까. 안정(安定)된 고요한 그때는 이제 선정(禪定)에 들어간 정심(定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산심 정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흩어진 마음이 산심인 것이고, 우리 마음이 그런 어지러움을 거두어서 하나로 딱 모아지는 마음, 이 마음이 정심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그때는 눈도 밝아지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사실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익혀지고 익혀지면 결국은 부처님한테 걸음걸음 다가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종자(本來種子)가 불성(佛性)입니다. 그리고 잘나나 못나나 사람이나 개나 돼지나 다 근본 종자는 불성입니다. 근본 종자는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당(終當)에 가는 길도 불성까지 가버려야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고향(故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향은 내내야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까지 못 가면 결국은 몇 만 생(生)을 그때는 우리가 헤맨단 말입니다. 그래서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면전궁자(面前窮子)라, 마치 갈 길도 모르고 자기 집도 없이 그저 항시 비렁뱅이로 헤매는 그런 거지와 같단 말입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집이 있고 제아무리 지위(地位)가 높다 하더라도 근본을 모르는 사람은 앞서 비렁뱅이와 똑 같습니다. 어디로 갈 곳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몰라버리면 결국 죽어지면 자기 업장(業障)에 그때는 구속(拘束)되어서 자기 지은 대로 자기 몸을 받고 만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