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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08

108. 이와 같이 계행(戒行)지키기는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계행 이것은 억지로 지켜라, 이러는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공부하려면 앞서 말씀같이 자연(自然)의 법도(法道)에 따르는 것이 불법인데, 우리 인간(人間)의 마음과 몸이 자연의 법도에 따르려면 응당 계행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살생(殺生)하지 말라. 부처님 법은 그냥 원리(原理)나 이치(理致)가 없이 무엇, 무엇 하지 말라 그런 법(法)은 없습니다. 다 원리가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근원적(根源的)으로 밑받침하는 도리(道理)가 있습니다. 어째서 죽여서는 안 되는고 하면 남 죽이면 그 사람이 나한테 와서 나중에라도 혼신(魂神) 즉 영혼(靈魂)이 보복한다는 그런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生命)은 뿌리가 하나라는 생명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모든 천차만별(千差萬別)의 현상계(現象界)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根本)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은 나는 불성(佛性)이 있다. 우리 마음의 근본(根本)은 불성(佛性)이다. 진여(眞如)다. 이와 같이 말은 하지만 내 불성 남의 불성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모양은 차이(差異)가 있다 하더라도 불성이라는 그 점, 부처의 성품(性品)이라는 그 점은 똑 같습니다. 불성(佛性)은 사람한테 있으나, 개한테 있으나, 또는 하나의 먼지 속에 있으나 어떠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불성은 똑 같습니다.


불성은 변(變)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근본은 똑 같은 생명입니다. 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냥 바싹 마른 그런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이치(理致)가 아니라, 불성(佛性)은 일체만유(一切萬有)를 창조(創造)도 하고, 일체만유를 섭리(攝理)하고 있는 그런 참다운 근본생명(根本生命), 이것이 불성(佛性) 입니다. 그와 같이 근본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죽이면 그만큼 같은 생명을, 내 생명을 죽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나다, 이런 모양의 김(金) 아무개, 박(朴) 아무개, 이것이 나다 이렇게 말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나, 이것은 사실은 확실히 잘못 보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이렇게 확장을 시키고, 깊이 파고 들어가면 나와 남과 일체만유가 그때는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박 이라는 사람도 그 뿌리는 하나, 김이라는 사람도 그 뿌리는 하나입니다. 동물(動物)도 식물(植物)도 무생물(無生物)도 모두가 근본 뿌리는 하나입니다. 저 같이 참선(參禪)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問題)만 골똘히 합니다. 좋다 궂다 밉다 음식이 맛있다 하는 생각을 그냥 다 버려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다가도 먼저 한 말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상대(相對) 유한적(有限的)인 문제를 잊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한테만 지향(志向)하는 그 마음, 그 마음만 가지려고 애쓰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다가도 먼저 한 말을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앞서 제가하던 말을 잊어 버려서 변명(辨明)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모든 생명이 하나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모두가 하나로 다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만선동귀(萬善同歸)라! 이런 말씀은 외워둡시다. 일만 만(萬)자, 착할 선(善)자, 한가지동(同)자, 돌아올 귀(歸)자입니다.  만(萬)가지 선(善)을 행(行)한다 하더라도 역시 하나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하나란 무엇인가? 이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법성(法性)이나 불성(佛性)이나 도(道)나 열반(涅槃)이나 극락(極樂)이나 또는 여래(如來)나 다 같은 뜻입니다. 우리 불교(佛敎)를 공부하신 분들은 이와 같이 다 모든 것이 표현(表現)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根本)은 하나로 해서 통일(統一)을 시켜버리는 그런 슬기를 가져야 비로소 불교의 반야지혜(般若智慧), 참다운 불교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지면 불교가 아닙니다. 지금 불교도 종파(宗派)가 있고 뭣이 있곤 합니다만 그것은 다만 사람의 근기(根氣) 따라서 임시 간 그런 것이지 내내야 길은 하나입니다.


만선동귀(萬善同歸)라. 그러면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는 차이(差異)가 있는 것인가? 불교의 선(善)이나 기독교의 선(善)이나 같습니다. 남한테 보시(布施)하면 우리 불교인들은 보시해도 좋고, 기독교인들은 보시(布施)해도 나쁜 것이 아니라 같단 말입니다. 다 같이 남한테 베풀고 그런 좋은 일은 다 같이 진리(眞理)로 들어갑니다. 진리를 북돋우고 빛내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종교에서 하는 것은 좋고 남의 종교에서 선행(善行)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국은 다 똑 같이 모두가 진리로 들어가는 길이고 방편(方便)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의 차이(差異)는 있습니다.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근본(根本) 뿌리에서 봅니다. 어려운 말로는 근본체(根本體)에서 본단 말입니다. 불교를 공부하신 분들은 근본 뿌리인 체(體)라 몸체(體)자, 또는 현상적(現象的)인 것을 용(用)이라 쓸용(用)자, 체(體)와 용(用)이라. 또는 성(性)과 상(相)이라! 성품 성(性)자 서로 상(相)자, 근본 체(體)는 성(性)이라 하는 것이고, 또 용(用)을 상(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상체용(性相體用)이라! 이런 말은 꼭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불교는 눈에 보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本質)을 중요시합니다. 사실은 본질을 모르면 불교가 못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한테 돈 얼마를 보시(布施)한다 하더라도 그냥 체(體)를 미처 못 보고서 형식(形式)으로 구차하므로 드린다. 이 정도는 단지 현상적(現象的)인 보통 윤리(倫理)의 범주(範疇)를 못 벗어납니다. 참다운 불교의 입장은 못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과 나와 원래(原來) 둘이 아니고, 저 사람 생명(生命)과 나의 생명이 원래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天地宇宙)와 나와 둘이 아니다. 그러한즉 말하자면 동체의식(同體意識) 말입니다.


일체의식(一切意識) 이것이 딱 되어 버리고서 남한테 베풀어야 진정한 불교의 베풂입니다. 진정(眞正)한 보시(布施)입니다. 남이라는 상(相)이 있고, 금전 얼마 전해 주었다. 그런 상이 있으면 벌써 현상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고 묶이는 것이지 참다운 불법에 입각한 보시는 못되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불교의 선행(善行)과 다른 종교와 또는 일반 윤리(倫理)와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