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지자대사(智者大師)의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
정토십의론서(淨土十疑論序)
사랑(애착)이 끈끈하지 않으면 사바고해에 태어나지 않으며, 생각(염불)이 한결같지 않으면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한다〔愛不重, 不生娑婆;念不一, 不生極樂〕. 사바세계는 더러운 땅〔穢土〕이며, 극락세계는 깨끗한 곳〔淨土〕이다. 사바세계의 수명은 유한하며, 저 곳의 수명은 무한하다.
사바세계에는 모든 고통이 두루 갖춰져 있지만, 저 곳인즉 평안히 수양〔安養〕하며 어떠한 고통도 없다. 사바세계에서는 업장에 따라 생사고해를 윤회하지만 저 곳은 한번 왕생하면 영원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며, 만약 중생을 제도하길 원하면 어떠한 업장에도 얽매임 없이 뜻대로 자유자재롭게 할 수 있다.
두 곳의 깨끗함과 더러움, 수명의 장단, 괴로움과 즐거움, 생사윤회 등이 이처럼 천양지차로 판연히 다르다. 그런데도 중생들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 하리요? 아미타부처님께서는 극락정토에서 중생들을 거두어 받아들이는攝受〕 교주이시고, 석가여래께서는 여기 사바세계에서 극락정토를 가리켜 안내하시는 스승이시며,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께서는 부처님을 도와 중생교화를 널리 펼치시는 분들이시다.
이러한 까닭에 석가여래께서 한평생 가르침을 펴신 경전들은, 도처에서 간곡하고 자상하게苦口叮寧〕극락왕생을 권유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께서는 커다란 원력의 배〔大願船〕을 타시고 생사고통의 바다〔生死海〕에 뜨시어, 이 쪽 언덕〔彼岸:사바세계〕에도 집착하시지 않고, 저 쪽 언덕〔彼岸:극락정토〕에도 머물지 않으시며, 중간 물살〔中流:천상이나 중음세계?〕에도 멈추지 않으신 채로, 오직 중생 제도를 불사(佛事)로 행하신다.
그래서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약 선남자 선 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을 듣고 그 명호를 붙잡아 지니기를 하루 내지 이레 동안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으면〔一心不亂〕, 그 사람이 목숨 다할 때 아미타부처님께서 뭇 성인 대중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리니, 이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때 마음이 뒤바뀌지(흔들리지) 아니하면 곧장 극락국토에 왕생하게 된다.”
또 경전〔無量壽經〕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듣고 나의 국토〔극락정토〕를 생각하며,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으면서 나의 국토에 생겨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 기도하여, 정말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면, (나는 결코)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지 않겠노라.”
그래서 기환정사(祇桓精舍:기원정사)의 무상원(無常院:선가에서는 열반당 또는 연수당(延壽堂)이라고 하는데,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스님이나 노스님한테 인생무상을 관조하라고 특별히 배치한 장소. 햇빛이 들지 않는 서북쪽 구석에 두었다고 함)에서는, 병든 환자들에게 서쪽을 향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생각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대저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막힘이나 한량이 없어 시방법계를 두루 비치면서, 염불(부처님을 생각)하는 중생들을 빠뜨림 없이 모두 거두어 받아들이시기〔攝受〕때문이다. 성인(부처님)과 범부(중생)는 본디 한 몸〔聖凡一體〕인지라, 기연(機緣)만 맞으면 서로 감응(感應)하여 통하기 마련이다. 모든 부처님 마음 안의 중생은 티끌 티끌마다 극락세계이고, 중생들 마음 속 정토는 생각 생각마다 아미타부처님이다〔諸佛心內衆生, 塵塵極樂;衆生心中淨土, 念念彌陀〕.
내가 이러한 이치로 보건대, 누구나 쉽게 극락왕생할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심을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선정(禪定)에 드는 이는 마음이 어지럽게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는 온갖 오염을 멀리하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보시를 즐겨하는 이는 나〔我〕라는 생각이 없어서 쉽게 왕생할 수 있다. 또 인욕을 잘하는 자는 성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이는 뒤로 물러나지 않기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그리고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짓지 않는 자는 생각이 오로지 한결같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온갖 죄악을 지어 업보가 눈앞에 나타나는 이는 정말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기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그런데 비록 온갖 선행을 쌓았더라도, 만약 정성과 신심이 없고 깊은 마음[深心]도 없으며 (극락왕생에) 회향 발원하는 마음도 없는 자라면, 상품상생(上品上生)에 왕생할 수 없다.
오호라!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는 지니고 염송하기가 몹시 쉽고, 극락정토는 왕생하기가 매우 쉽다. 그런데도 중생들이 염불할 수 없고(줄 모르고) 왕생할 수 없다면, 부처님인들 그런 중생들을 어찌하랴!
천태지자대사(智者大師)의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1.
의문
모든 불보살님들께서는 대자대비를 본업(本業)으로 삼으신다. 는데, 만약 중생들을 제도하시고자 한다면, 정말로 오직 삼계(三界)에 몸을 나투시어 오탁악세(五濁惡世)와 삼악도(三惡途) 가운데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셔야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스스로 자기 생명만 평안히 수행하며 중생을 내버리고 떠나시려 한단 말입니까? 이는 대자대비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니, 보살이 추구하는 보리도(菩提道)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답변
보살에도 두 종류가 있소. 하나는 오랫동안 보살도(菩薩道)를 닦고 행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분으로서, 이 분들은 진실로 자기 책임(사명, 원력)을 감당할 수 있소. 다른 하나는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분들과 이제 막 보살의 마음〔初發心〕을 낸 범부들이오.
두 번째의 범부보살(凡夫菩薩)들은 모름지기 어느 때고 부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오. 그렇게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면서) 무생법인의 법력〔忍力〕을 성취하여야만, 비로소 삼계안에 몸을 나투어 오탁악세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지도론(智度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번뇌와 업장에 얽매인 범부중생이 제아무리 큰 자비심을 지녔더라도, 오탁악세에 태어나길 발원하여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오탁악세는 번뇌가 매우 강렬하여, 스스로 무생법인의 법력을 지니지 못한 자는 마음이 바깥(사물) 경계에 따라 돌기(흔들리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빛과 소리에 얽매여(물들어) 스스로 삼악도에 떨어질 판인데, 어떻게 다른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가령 인간 세상에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성인의 도(聖道)를 얻기가 어렵소. 더러 보시나 지계 등의 수행으로 복을 지어 인간 세상에 태어나 국왕이나 대신이 된다고 합시다. 전생의 복덕으로 자유자재로이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면, 설령 훌륭한 선지식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가르침)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않고, 그저 탐착과 미혹에 휩싸여 안일하게 방종하면서 온갖 죄악을 두루 짓기 마련이오. 이러한 악업을 짊어지고 한번 삼악도에 들어가면, 한량없는 겁〔無量劫〕이 지나야만 비로소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소.
그것도 몹시 가난하고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고,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또다시 지옥에 떨어지기 십상이오. 이와 같이 생사윤회를 되풀이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지금 사람이란 사람은 죄다 이 모양 이 꼴이라오. 이것을 일컬어 ‘수행하기 어려운 길〔難行道〕’이라고 부르오.
그래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자기 질병도 구제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병든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自疾不能救, 而能救諸疾人)” 또 지도론(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예컨대 두 사람이 똑같이 각기 자기 가족이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다고 비유하자. 한 사람은 감정이 다급하여 곧장 물속에 뛰어들어 구해내려 했으나, 적절한 방편의 힘이 전혀 없어 그만 물에 빠진 사람이나, 구하려는 사람 모두 다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훌륭한 방편을 생각해 내고, 곧장 가서 배나 뗏목(또는 밧줄이나 튜브)을 가져다가 그를 무사히 건져 올려 마침내 둘 다 익사의 고비를 벗어났다.”막 보리심을 낸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은 이치라오. 이처럼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할 수가 없소. 이러한 까닭에 항상 모름지기 부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오.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라야 바야흐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소. 마치 위의 비유에서 배를 얻은 사람처럼 말이오.
또 논 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유하자면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어머니 품을 벗어난다면, 더러 깊은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거나 또는 젖에 굶주려 죽을 것이다. 또한 비유하자면 새끼 새가 날개에 깃털이 완전히 자라나지 않았을 때에는, 단지 나무에 의지하여 가지 사이나 옮겨갈 수 있을 뿐,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지는 못하는 것과도 같다. 날개에 깃털이 온전히 자라나야, 비로소 허공에 날아올라 걸림 없이 자유자재 로이 비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범부 중생은 스스로 힘이 없으므로,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만을 일념으로 생각하고 염송하여 삼매(三昧)를 이루도록 해야 하오. 그렇게 청정한 도업이 성취되기에, 임종에 한 생각 추슬러 결정코 극락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다음, 다시 삼계에 되돌아와 무생법인의 큰 배〔船〕을 타고서 생사고해의 중생들을 구제하며, 자기 뜻〔발원〕대로 자유자재 로이 부처님 사업(事業)을 널리 펼치는 거라오.
그래서 또 논 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지옥에 돌아다니며 노닐고 싶은 자는 (먼저) 저 나라〔彼國: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 다시 생사윤회의 나라〔生死國〕에 되돌아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교화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살들도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노니, 진실로 그 가르침을 잘 알고 따르길 기원하오. 그래서 용수(龍樹) 보살님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정토염불법문을 ‘쉽게 수행하는 길〔易行道〕’이라고 이름 붙였다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2.
의문
모든 법의 본체는 텅 비어〔諸法體空〕 본래 생겨남이 없고〔無生〕 평등하며 적멸(寂滅)한데, 지금 이내 이곳을 내 버리고 저 곳을 좇아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다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란다면, 이 어찌 이치(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또 경전에 이르시기를, “만약 정토를 구하거든 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시킬지니,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국토도 청정해지니라(若求淨土, 先淨其心 ; 心淨故, 卽佛土淨).”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뜻이 통하겠습니까?
답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소. 첫째는 전체(총론)적인 답이고, 둘째는 개별(각론)적인 답이오. 첫 번째 전체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그대가 만약 아미타부처님의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이곳을 내버리고 저 곳을 좇는 행위로 이치(진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이곳에 매달려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하지 않는 것은, 거꾸로 저곳을 내 버리고 이곳에 집착하는 행위로, 이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고 병(病 : 잘못)이 된다오. 또 전계(轉計:사람인지 책인지 미확인)가 이렇게 말했소. “저 곳에 왕생하길 바라지도 않고 또한 이곳에 생겨나길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단멸견(斷滅見)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阿 多羅三 三菩提心)을 내는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斷滅)이라고 설한다고 생각하거든, 이런 생각일랑 하지 말게나. 왜냐하면 보리심을 낸 사람은 법에서 단멸의 모습(斷滅相)을 (보거나) 말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일세.”
두 번째 개별(각론)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무릇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모든 존재가) 생겨나는 인연〔生緣〕 가운데 모든 법이 조화롭게 합쳐질〔諸法和合〕 따름이며,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소〔不守自性〕. 따라서 생겨나는 본체〔生體〕에서 뭔가 찾으려 해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소.
이 생명이 생겨날 때 어디서부터도 오는 바가 없기에〔無所從來〕, 그래서 ‘불생(不生)’이라고 일컫는다오. 또 ‘불멸(不滅)’이란, 모든 법(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 역시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기에 내가 흩어져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소.
이 생명(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도 어디로도 가는 바가 없기에〔去無所至〕, 그래서 ‘불멸(不滅)’이라고 일컫는다오. 인연이 조화롭게 합쳐져 생겨나는 것 이외에 따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바라지 않는 것을 가리켜 ‘무생(無生, 無生法忍)’이라고 일컫지도 않소.
이러한 까닭에 (龍樹보살이 지으시고 구마라집이 漢譯하신) 중론(中論)의 게송에 이런 말씀이 있소.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법을
나는 곧 공(空)이라 하는데
또 가짜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또 중도의 뜻이라 하기도 한다.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名爲假名 亦名中道義
중론(中論)에는 또 이런 말씀도 있소.
모든 법(존재)은 스스로 생기지 않고
또한 다른 것에서 생기지도 않으며,
함께 하지도 않고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런 까닭에 생기지 않음을 안다.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그리고 유마경(維摩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록 모든 부처님 나라와 중생이
공(空)인 줄은 알지만은
항상 정토를 닦아
모든 중생들을 교화한다.
雖知諸佛國 及與衆生空
而常修淨土 敎化諸群生
또 유마경에는 이런 비유도 있소.
“예컨대 어떤 사람이 큰 궁궐을 짓는다고 하자. 만약 그가 텅 빈 땅에 의지(기초)하여 짓는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뜻대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공에 의지하여 지으려 한다면, 끝내 성공할 수 없다.”
모든 부처님의 설법은 항상 두 가지 진리〔二諦〕에 의지하신다오. 즉 가짜 이름〔假名〕을 깨뜨리지(떠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설하시는 것이오.
지혜로운 이는 치열하게 극락정토 왕생을 간구하면서도, 생겨남(왕생)의 본체〔生體〕는 (텅 비어) 얻을 수 없는 줄 훤히 통달하므로, 이것이 진짜 생겨남이 없는 무생(無生)이오. 이런 걸 일컬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이오.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생겨남(또는 왕생)에 얽매여, 생겨난다는 말을 들으면 생겨난다고 알아듣고, 생겨남이 없다〔無生〕는 말을 들으면 생겨남이 없다고 곧이듣소. 그래서 생겨남이 곧 생겨남 없음이며, 생겨남 없음이 바로 생겨남인 줄은 전혀 모른다오.
이러한 이치를 훤히 깨닫지 못하기에 함부로 시비를 다투며, 남들이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것에 대해 핏대를 올리면서 비판하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오? 이러한 자들은 바로 정법을 비방하는 죄인이며, 삿된 견해〔邪見〕에 빠진 외도(外道:異端)일 따름이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3
의문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일체 정토(불국토)는 그 법성(法性)이 평등하며, 그 공덕(功德) 또한 똑같은 줄 압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그러한 일체 공덕을 두루 생각하면서 일체의 불국정토에 왕생하길 염원해야 할 텐데, 어찌하여 지금 꼭 한 부처님(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만 외곬으로 구한단 말입니까? 이는 평등성과 어긋나는 것이니, 어떻게 정토에 왕생하겠습니까?
답변
시방 세계의 일체 불국토는 진실로 모두 평등하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둔하고 마음이 혼탁하며 산란스러운 자가 많소. 그래서 만약 오로지 한 마음으로 한 경계를 붙들어 잡지 않는다면, 삼매(三昧)가 이루어지기 어렵다오.
오로지 ‘아미타불’만을 사념(염송·염원)함이 곧바로 일상삼매(一相三昧)라오. 마음을 오롯이 모으기 때문에 그 불국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수원왕생경(隨願往生經)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보광보살(普廣菩薩)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시방 세계에 모두 정토(淨土:불국토)가 널려 있는데,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오직 서방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만 내세워 찬탄하시며, 오롯이 아미타부처님에 전념하여 극락왕생하라고 권하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보광보살한테 이렇게 답하셨다.
‘염부제 중생들은 마음이 매우 혼탁하고 산란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서방 한 부처님 정토만을 내세워 찬탄하느니라. 모든 중생들한테 마음을 한 경계〔一境:나무아미타불 명호〕에 오롯이 집중(전념)하여 정말 아주 쉽사리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줌이니라.
만약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전부 다 사념할 것 같으면, 염불의 경계(목표)가 너무 넓어서 마음이 산만해지고 삼매가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따라서 정토에 왕생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한 한 부처님의 공덕을 구한다고 해도, 일체 부처님의 공덕과 전혀 차이가 없소.
부처님 법의 성품이 한결 같이 똑같기 때문이오. 이러한 까닭에 아미타부처님을 사념(염송)함이 곧바로 일체 부처님을 사념(염송)함이며, 한 (극락)정토에 왕생함이 또한 곧 모든 부처님의 정토(불국토)에 왕생함이 되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은
곧 한 부처님의 몸이니,
한 부처님의 마음이고 지혜이며,
위신력과 무외심 또한 그러하네.”
一切諸佛身 卽是一佛身
一心一智慧 力無畏亦然
또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유하자면 맑고 둥근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비추듯,
물 속 그림자 비록 수없어도
본래 달은 결코 둘이 아닐세.
이와 같이 걸림 없는 지혜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 이루신 분
일체 국토에 두루 모습
나투시어도
부처님 몸은 본디 둘이 아닐세.”
譬如淨滿月 普應一切水
影像雖無量 本月未曾二
如是無 智 成就等正覺
應現一切刹 佛身無有二
지혜로운 이는 비유로써 이해하고 깨닫는다오. 지혜로운 이여! 그대는 일체의 모든 달그림자가 곧 한 달의 그림자이고, 거꾸로 한 달의 그림자가 곧 일체 모든 달그림자인 줄 깨닫겠소?
달과 그림자가 둘이 아니지 않소? 만약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한 부처님이 곧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시고, 거꾸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곧 한 부처님이신 줄도 아시겠구려. 법신(法身)은 본디 둘이 아니기 때문이오. 이러한 까닭에 한 부처님을 치열하게 지성으로 염송할 때, 곧바로 일체 모든 부처님을 염송하는 것이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4
의문
한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길 염원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 정토에 왕생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시방 세계 수많은 불국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어느 한 부처님의 정토를 염원하여 거기에 왕생하면 될 텐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하필 아미타불만 염송해야 된다고 외곬으로 주장하십니까?
답변
우리 범부 중생들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독단해서는 안 되고, 부처님 말씀을 오롯이 듣고 따라야 하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만 염송하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오.
그러면 어째서(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듣고 따른단 말이오. 위대하신 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한 평생 설법하신 걸 보면, 거룩하신 가르침 곳곳에서 오로지 중생들한테 일심전념으로 아미타불만 외곬으로 염송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소.
예컨대 무량수경(無量壽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왕생론(往生論) 등, 수십여 부의 경전과 논장(論藏)들에서 한결같이 서방정토에 왕생하라고 은근히 가르치고 간곡히 당부하셨소. 그래서 아미타불만 외곬으로 염송하라고 내세우는 것이오.
또 아미타부처님께서는 특별히 대자대비하신 48대 서원을 세워 우리 중생들을 이끌어 맞이하시고 계시오. 그리고 관무량수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아미타부처님은 팔만사천 상(相)을 지니셨는데, 하나하나의 상(相)마다 각각 팔만 사천 호(好)가 간직되었고, 하나하나의 호(好)마다 각각 팔만사천 광명(光明)을 나투시어, 모든 법계의 염불하는 중생들을 두루 비추시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거두어들이시니라.
그래서 만약 아미타불을 염송(사념)하기만 하면, 그 착한 근기와 정성이 부처님의 서원과 서로 감응(感應)하여 틀림없이 결정코 극락왕생하느니라.”
또 아미타경이나 대무량수경·고음왕다라니경(鼓音王陀羅尼經) 등에서도 이르기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들 경전을 설법하실 때, 모두 한 결같이 갠지스 강(恒河) 모래알 수만큼 많은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께서 각각 그 혀를 길게 드리우시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뒤덮으신 채, “일체 중생이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본원력(本願力)의 가피를 받잡기 때문에, 결정코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고 증명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소.
우리는 아미타부처님이 우리 사바세계와 자못 각별한 인연이 있으심을 알아야 하오. 어찌 그런 줄 아는고 하면, 무량수경에 “말세(末世)에 부처님 법이 소멸하는 때, 특별히 이 경전만 세상에 백년 더 남겨 두어 (인연 있는) 중생들이 저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맞이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의 지독히 혼탁하고 사악한 중생들과 자못 각별한 인연이 있으심을 알 수 있다오. 물론 그 밖의 다른 부처님들의 모든 정토도 한두 경전에서 중생들한테 거기에 왕생하길 발원하라고 대략 권하고는 계시오.
그렇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처럼 수많은 경론(經論)이 도처에서 고구정녕으로 은근하고 간곡하게 왕생하길 전하시는 불국토는 전혀 없소.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5
의문
번뇌 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들은 죄악의 업장이 몹시 두텁고 무거워, 한없는 번뇌 망상을 터럭 끝만큼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방정토는 시방 삼계를 벗어나 있다고 하던데, 번뇌 망상에 얽매인 범부중생들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
두 가지 연분(緣)이 있으니, 첫째는 자력(自力:자기 힘)이고, 둘째는 타력(他力:남의 힘)이오. 자력이라 함은, 자기 스스로 이 (사바) 세계에서 도업을 닦는 것이니, 진실로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없소. 그런 까닭에 영락경(瓔珞經)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번뇌 망상에 얽매인 범부중생이 불법승 삼보도 모르고 선악의 인과응보도 알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보리심(菩提心)을 낸 때부터 믿음을 바탕으로 부처님 가르침 안에 머물면서, 계율을 근본으로 삼고 보살계를 받아 지닌 다음 한 생 한 생 계속 이어가며 계율을 지킴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수행해 나간다. 그렇게 하기를 1겁(劫), 2겁, 3겁 계속해 나가야 비로소 초발심주(初發心住)에 이른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10신(信) 10바라밀(波羅蜜) 등을 꾸준히 닦아 가면서, 한량없는 발원 수행〔行願〕을 잠시도 끊임없이 계속하여 1만겁(萬劫)이 꽉 차야 바야흐로 제6정심주(正心住)에 이르게 된다.
만약 여기서 더 한층 정진하여 제7불퇴주(不退住)에 이를 것 같으면, 여기가 곧 종성위(種性位)이다.”이상은 자력 수행의 대강을 말씀하신 것인데, 끝내 서방 정토에는 왕생하지 못하는 것이오.
반면 타력(수행)이라 함은, 아미타부처님께서 염불(念佛: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며 명호를 염송)하는 중생들을 모두 대자대비의 원력을 거두어(받아) 주심을 굳게 믿고서, 곧장 보리심을 내어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수행을 하는 것이오.
시방 삼계에 중생의 몸 다시 받는 걸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며, 신심을 내어 보시와 지계로 복덕을 닦아가되, 하나하나 수행마다 한결같이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회향 발원하는 것이오.
그러면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 가피에 편승하여, 중생 자신의 근기와 정성이(부처님의 원력과) 서로 감응(感應)함으로써, 곧장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그래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사바) 세계에서 도업을 닦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닦기 어려운 길〔難行道〕이고, 다른 하나는 닦기 쉬운 길〔易行道〕이다. 닦기 어려운 길이라 함은,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는 한량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어 중생을 제도하시어도 중생이 아비발치(阿 致跋致:不退轉)를 닦아 얻기가 아주 몹시도 어려움을 말한다.
그 어려움은 수없는 티끌처럼 많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아주 중요한 것만 말하자면 대략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외도(外道)가 착한 모습으로 다가와 보살도〔正法〕를 어지럽힌다.
둘째, 사악한 무뢰한들이 남의 훌륭한 덕을 깨뜨린다.
셋째, 좋은 결과〔善果〕에 걸려 넘어져 청정한 수행〔梵行〕이 무너지기 쉽다.
넷째, 자신만 이롭기 바라는 성문(聲聞)에 머물러 대자비의 보살행에 장애가 된다.
다섯째, 오직 자력 수행만 있고, 타력의 가피가 없다. 비유하자면, 절름발이가 도보로 길을 걷자면, 하루에 고작 몇 십 리도 못 가면서 지극히 힘들고 고생만 하는데, 이것이 자력 수행에 해당한다.
반면 닦기 쉬운 길이라 함은,
부처님 말씀을 믿고 염불삼매의 가르침에 따라 정토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니, 아미타부처님께서 염불 중생을 거두어(받아) 들이시겠다는 원력의 가피를 받아 의심할 나위 없이 결정코 극락왕생함을 뜻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순풍에 돛 단 듯이 나아감에, 잠깐 사이에 천리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타력 수행에 해당한다. 달리 비유하자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시중들게 되면, 하루 밤낮 사이에 네 천하(四天下)를 두루 돌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전륜성왕의 위력 덕택이다.”
만약 번뇌 망상에 찌든〔有漏〕 범부 중생들은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번뇌 망상에 찌든 범부중생들은 부처님 몸(佛身)도 또한 뵈올〔親見할〕 수 없다는 말이 되오.
그런데 염불삼매는 물론 번뇌 망상을 여읜〔無漏〕 선근(善根)들이 들어갈 수 있지만, 번뇌 망상에 찌든 범부중생들도 각자 수행의 정도에 따라 부처님 몸을 거친 모습으로나마 어렴풋이 뵈올(친견할) 수 있다오. 보살 경지에 이른 분들은 미세한 모습까지 뚜렷이 친견하는 것일 따름이오.
극락정토 또한 마찬가지라오. 비록 번뇌 망상을 여읜〔無漏〕 선근(善根)들이 왕생하지만, 번뇌 망상에 찌든 범부중생들도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정토왕생을 발원하면서 늘 염불하게 되면, 그 힘으로 번뇌를 다스려 소멸시키고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다만 각자 염불 수행〔번뇌 소멸〕의 정도에 따라 거친 모습을 어렴풋이 친견하되, 번뇌가 스러진 보살은 미세한 모습까지 뚜렷이 친견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니, 이러한 이치를 어찌 의심한단 말이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이르시기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국토는 한결같이 두루 장엄하고 청정하거늘, 중생의 업장과 수행이 달라 각자 보는 게 같지 않을 뿐일세(一切諸佛刹 平等普嚴淨, 衆生業行異 所見各不同).”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러한 뜻이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6
의문
번뇌 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들이 설령 아미타부처님의 원력 가피로 서방 정토에 왕생한다고 하더라도, 사견(邪見)과 탐진치 삼독(三毒) 등이 늘 일어날 텐데, 어떻게 서방정토에 왕생한 다음 곧장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얻어 삼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답변
서방 정토에 왕생하게 되면, 다섯 가지 인연으로 불퇴전의 경지에 들 수 있다오.
첫째, 아미타부처님께서 대자대비 원력으로 거두어 지켜주시기 때문에 불퇴전을 얻을 수 있소.
둘째, 부처님 광명이 늘 비추기〔佛光常照〕 때문에, 보리심이 늘 증진하기만 하고 줄어들거나 물러남이 없소.
셋째, 물소리·새 소리·나무 소리·바람 소리 등의 교향 음악이 모두, 육도 윤회 중생계의 과보가 본디 괴롭고〔苦〕 비었으며〔空〕, 덧없고〔無常〕 나라고 할 게 없다〔無我〕는 진리를 설하기 때문에,
이를 듣는 사람들이 늘 부처님을 생각하고〔念佛〕 부처님 가르침을 생각하며〔念法〕 그 가르침을 수행하는 분들을 생각하는〔念僧〕 마음을 내게 되어 불퇴전에 머문다오.
넷째, 그 서방 정토에서는 순전히 보살님들만 있어 훌륭한 벗〔良友:道伴〕이 되기 때문에, 사악한 연분이나 경계가 전혀 없소. 밖으로는 사악한 귀신이나 마장(魔障)이 없고, 안으로는 탐진치 삼독 등의 번뇌가 언제까지라도 전혀 일어나지 않기에, 불퇴전이 된다오.
다섯째, 그 서방 정토에 왕생하면, 수명이 보살이나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영겁(永劫)토록 계속되기 때문에, 수행이 후퇴하거나 정체할 염려가 없소.
여기의 사바 고해 오탁악세는 목숨도 아주 짧고 덧없지만, 그 곳은 아승지겁을 지나도록 다시는 번뇌 망상이 일어남이 없이 오래도록 도업을 계속 닦아나갈 수 있소. 그런데 어떻게 무생법인을 얻지 못하겠소? 이러한 이치가 아주 분명하거늘,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소.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7
의문
미륵보살님께서는 일생보처(一生補處)에 계시면서 바로 다음 생에 성불하실 분입니다. 우리 중생이 열 가지 착한 일(十善)1)을 닦아 상품(上品) 수행이 되면, 미륵보살님께서 계시는 도솔천(兜率天)에 생겨날(올라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고 수행하다가, 미륵보살님께서 사바세계에 내려오실〔下生〕 때 함께 따라내려 오면, 세 차례의 법회〔龍華會上〕 교화를 받아 저절로 성인의 과위〔聖果:아라한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꼭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답변
도솔천에 생겨나길(올라가길) 구하는 것도 또한 ‘도를 듣고 부처님을 뵙는다〔聞道見佛〕’고 말들 하니, 외형상 얼핏 보기에는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과 비슷하게 여겨질 듯하오. 하지만 좀 더 세밀히 비교하자면, 우열의 차이가 아주 크게 벌어진다오. 그 논거로 두 가지만 들어보겠소.
첫째, 설령 열 가지 선행을 닦아 지닌다 해도, 꼭 도솔천에 생겨난(올라간)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소. 왜 그런가 하면,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뭇 삼매를 수행하여 올바른 선정에 깊이 들어야만 바야흐로(도솔천에) 생겨날(올라갈) 수 있다〔行衆三昧, 深入正定, 方始得生〕.”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오.
이걸 보면 미륵보살님께서는 그밖에 달리 특별히 중생을 이끌어 맞아들이시는 방편법문을 가지시지는 않는 것이오. 이와는 달리,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본래 서원의 힘과 광명의 위신력을 바탕으로, 단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명호를 염송하는 중생이 있기만 하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거두어 받아들이신다오.
게다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구품(九品)연화의 방편법문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시면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도록 은근하게 이끄시고 간곡하게 당부하셨소. 그래서 단지 중생들이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면서 그 명호를 염송하기만 하면, 근기와 정성이 두 부처님의 자비원력 및 가르침에 서로 감응하여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마치 우리 세간에서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모할 때, 그 상대방이 사모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마음만 내면, 서로 의기(意氣)가 투합(投合)하여 틀림없이 그 일(인간관계, 연분)이 이루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오.
둘째, 도솔천도 기껏해야 욕계(欲界)에 속하기 때문에, 수행의 경지에서 후퇴하는 자가 많다오. 그리고 극락세계처럼 중생들이 듣고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고 번뇌를 여의며 보리심을 낼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물소리, 새소리, 나무소리, 바람소리 같은 미묘한 교향음악도 있지 않소.
또 거기에는 여인이 존재하여, 뭇 천상인간들한테 다섯 욕망〔五欲〕2)에 애착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오. 게다가 도솔천의 여인들은 매우 미묘하고 아름다워서, 뭇 천상 인간들이 그들과 어울려 놀고 즐기기에 정신 팔려 스스로 수행에 힘쓸 수가 없을 정도라오.
그러니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와 같겠소. 극락세계에는 물소리, 새소리,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교향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중생들이 이 소리들을 들으면 모두 한결같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보리심을 내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날 수도 없다오.
또 여인도 없고 성문(聲聞)이나 벽지불( 支佛:緣覺) 같은 이승(二乘:小乘)의 마음이 전혀 없이, 오로지 순수한 대승보살들만이 청정하고 선량한 도반으로 계신다오. 이러한 까닭에 번뇌 망상이나 죄악업장이 언제까지라도 전혀 일어나지 않고, 마침내 무생법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오.
이것만 비교해도 그 우열이 현저히 판가름 나거늘, 어찌 다시 의심할 나위가 있겠소?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몸소 교화하실 때에도, 부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대로 수행했으면서 성인의 과위(聖果:아라한)를 얻지 못한 이들이 갠지스 강 모래알만큼이나 수없이 많았소.
앞으로 미륵부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도 또한 마찬가지로,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 이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오. 그러니 어찌 아미타부처님의 서방정토에 견줄 수 있겠소? 극락세계에는 단지 왕생하기만 하면, 모두 무생법인을 얻게 되고, 어느 한 사람도 다시 삼계에 떨어져 나와 생사윤회의 업장에 묶이는 법이 없다오. 또 서국전(西國傳))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소.
세 보살이 계셨는데, 한 분은 무착(無著)이고, 다른 한 분은 세친(世親)이며, 또 다른 한 분은 사자각(師子覺)이셨소. 이 세 분은 서로 마음과 뜻이 맞아, 다함께 도솔천에 생겨나(올라가)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기로 결의하고서, 누구든지 먼저 죽어 미륵보살님을 친견하는 자가 남아 있는 이한테 그 소식을 알려주기로 서약하였소. 그러다가 사자각이 먼저 죽었는데, 한 번 가더니만 몇 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캄캄 무소식이었소.
그 뒤에 세친이 가게 되었는데. 임종 때 무착이 “만약 자네가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거든, 곧장 되돌아 와서 알려 주게나.” 하고 신신당부를 했다오. 그런데 세친이 간 뒤로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찾아왔기에, 무착이 이렇게 물었다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찾아온단 말인가?”그러자 세친이 이렇게 대답했다오. “거기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님의 설법을 한 바탕 듣고서, 곧장 되돌아 내려와 소식 전하는 것일세. 거기 도솔천은 하루(시간)가 매우 길어, (거기서 잠깐 머물렀는데도) 여기서는 벌써 3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라네.”그래서 무착이 “그러면 사자각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묻자,
세친의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소. “사자각은 도솔천의 즐거움을 누리고 다섯 욕망〔五欲〕을 즐기느라, 이미 바깥 권속이 되어 버렸네. 한번 도솔천에 올라간 뒤로 여태껏 미륵보살님은 뵌 적도 없다네.”(미륵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 내원에 동참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돈다는 뜻인 듯) 경지가 낮은 조그만 보살들은 거기 도솔천에 생겨나도(올라가도) 이처럼 천상의 미묘한 오욕(五欲)에 빠지기 십상이거늘, 하물며 보통 범부 중생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이러한 까닭에,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해서 틀림없이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이르겠다고 발원해야 하며, 도솔천에 올라가서 미륵보살님 뵙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8
의문
우리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無始〕부터 한량없는 악업을 지어 왔습니다. 금생에 다행히 사람 모습을 타고나긴 했지만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였고, 그래서 또다시 죄악이란 죄악은 짓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모든 죄업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臨終〕에 ‘나무아미타불’ 명호 열 번만 염송〔十念〕해 내면 곧장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시방 삼계를 벗어나고 생사윤회의 악업을 끝마칠 수 있다고 하십니까? 도대체 어떠한 도리로 해명하시렵니까?
답변
중생들이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 온 선행과 악업의 종자가 얼마나 많고 얼마나 강한지는 결코 알 수도 없소. 다만 목숨이 다할 때 선지식을 만나 (그 가르침을 믿고 따라) ‘나무아미타불’ 명호 열 번 만이라도 염송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숙세(宿世)의 선행공덕〔善業〕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에 비로소 임종에 선지식을 만나 열 번 염불〔十念〕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오.
만약 악업이 많은 중생이라면, 그런 선지식을 만날 수조차 없는 법인데, 하물며 어떻게 목숨이 끊어지는 그런 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열 번의 염불을 성취할 수 있겠소? 또 그대가 (질문하는 걸 보니)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온 악업만 아주 무겁게(중대하게) 생각하고, 목숨이 다할 때 ‘나무아미타불’ 염송 열 번 해내는 공덕은 대수롭지 않게 가벼이 여기는 모양인데,
이제 세 가지 도리(道理)로 비교해 본다면, 악업만 공덕의 경중이라는 게 꼭 일정하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시간(세월)의 길고 짧음이나 수량의 많고 적음에만 달린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소. 그 세 가지 도리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마음(心)에 달려 있고, 둘째는 연분(緣)에 달려 있으며, 셋째는 의지 결정(決定) 여하에 달려 있소.
첫째, 마음에 달려 있다 함은 이렇소.
중생이 죄악을 지을 때는 허망(虛妄)하고 앞뒤가 뒤바뀐〔顚倒〕 번뇌 망상으로부터 말미암지만, 염불(念佛)하는 것은 선지식으로부터 아미타부처님의 진실(眞實)하고 공덕(功德) 원만한 명호에 대해 설법을 들음으로써 비롯되오.
이렇듯이 하나(죄업)는 허망하고 하나(염불 공덕)는 진실하니, 어떻게 둘을 서로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겠소? 비유하자면 마치 만 년 동안 깜깜했던 암실(동론)에 햇빛이 잠시만 비쳐 들어도 암흑은 단박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소. 어찌 오래된 암흑(죄업)이라고 해서 순간의 햇빛(염불 공덕)에 사라지지 않을 리가 있겠소?
둘째, 연분에 달려 있다 함은 이러하오. 죄악을 지을 때는, 허망(虛妄)하고 어둡고 어리석은 마음이 허망한 경계의 연분을 만나 본말이 뒤바뀌어 죄악을 짓게 되오. 그러나 염불하는 마음은 부처님의 청정(淸淨)하고 진실(眞實)하며 공덕 원만한 명호를 듣고서 더할 나위 없는 보리심〔無上菩提心〕을 연분으로 생겨나기 마련이오.
이처럼 하나는 거짓되고 하나는 진실하니, 어떻게 둘을 서로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겠소?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는데, 독이 극렬하고 화살이 깊이 박혀 근육을 손상시킴은 물론 뼈까지 파괴되었으나, 한번 독약을 말끔히 사라지게 하는 신령스런 북〔藥鼓〕 소리를 듣자마자, 금세 화살이 저절로 뽑혀 나오고 독기운도 스스로 풀려 버리는 것과 같소. 그런데 이 경우 화살이 좀 깊이 박히고 독이 극렬하다고 해서, 어찌 안 빠지고 해독 안 될 리가 있겠소?
셋째, 의지 결정에 달려 있다 함은 또 이러하오. 죄악을 지을 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황에서 이거 한번 해볼까 하는) 한가한 마음〔閒心〕과 (나중에 뉘우치고 속죄할 기회가 있겠지 하고) 뒷날을 은근히 기대는 마음〔後心〕이 으레 있기 마련이오.
하지만 염불할 때는, 지금 당장 숨넘어가면 생명이 끝날 판인데, 그런 한가한 마음과 뒷날을 기대는 마음이 도대체 있을 수 없소. 그래서 착한 마음〔善心〕으로 맹렬하고 예리하게 정신 바짝 차려 염불하게 되므로, 곧장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비유하자면, 열 겹으로 묶은 밧줄은 천 사람도 끊을 수 없지만, 어린애가 칼 한번 휘두르면 순식간에 두 동강 나는 것과 같소. 또 천년 동안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콩알만 한 불씨 가지고도 짧은 시간에 죄다 타버리는 것과 같소.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 평생 동안 열 가지 선행〔十善業〕을 꾸준히 닦아 마땅히 천상에 올라가야 할 인연인데, 임종 때 한 순간의 결정(決定)적인 삿된 생각〔邪見〕을 품음으로써 곧장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과도 마찬가지 이치라오.
악업이라는 게 허망한데도 불구하고, 임종 때 한 생각이 맹렬하고 예리했던 까닭에, 오히려 한 평생 동안의 선행 공덕을 죄다 물리치고 지옥이라는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만든 것이오. 하물며 임종 때 맹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한다면, 한가한 생각 없는 진실한 마음의 선행공덕은 오죽하겠소? 그러한 결연한 마음의 염불공덕으로,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온 악업을 말끔히 물리치고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면, 이는 정말 말도 안 되오.
또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한 순간의 염불 공덕으로 80억 겁 동안 생사윤회의 죄업을 소멸시킨다고 하는데, 이는 염불할 때의 마음이 아주 맹렬하고 예리하기 때문이오. 그렇듯이 악업을 말끔히 소멸시킨다면, 결정코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소.
그리고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씀 가운데, ‘나무아미타불’ 열 번 염송하는 공덕을 성취하는 걸 (금생에 과보를 얻는 게 아니라 내생을 기약하는 인연 종자 정도로) 다른 때〔別時〕의 의미로 판단(해석)하는 견해가 더러 있는데, 이는 결코 그럴 수 없소. 어찌 그런 줄 아는가 하면, 섭론(攝論:無著보살이 지은 攝大乘論)에는 “오직 발원만 하는 까닭에 수행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 나온다오.
또 잡집론(雜集論)1)에는, “만약 안락(安樂:극락) 국토에 왕생하길 원하면 곧장 왕생할 수 있고, 만약 티 없는〔無垢〕 부처님 명호를 들으면 곧장 아누다라삼먁삼보리(阿 多羅三 三菩提:無上正等正覺)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른 때의 원인〔別時之因〕으로 전혀 수행이 없다.”고 하고 있소.
그렇지만 (단지 발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임종의 순간에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한가한 생각 없이 맹렬하고 예리(간절)하게 열 번 염불하는 십념(十念)의 선행공덕까지 (내생의 극락왕생을 위한 인연 종자 정도로) 다른 때〔別時〕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오도(誤導)하는 커다란 잘못이 되겠소?
원컨대, 염불 수행자 여러분께서는 이 이치를 깊이 생각하여 자기 마음을 굳게 다잡아 결연히 행하고, 다른 견해를 잘못 믿어 스스로 함정에 떨어지는 일이 결코 없기를 간절히 바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9
의문
이제 결정코 서방 정토 왕생을 발원하여 구하렵니다. 그런데 어떤 수행 공덕을 닦아야 할 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종자(인연)로 그 나라(극락정토)에 생겨날 수 있습니까? 또 우리 세속에 사는 범부 중생들은 모두 처자식(배우자)이 있는데, 음욕(淫欲)을 끊지 않아도 거기에 왕생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결정코 서방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수행을 갖추면 틀림없이 거기에 왕생할 수 있소. 첫째는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행(厭離行)이고, 둘째는 흔연히 기뻐하며 바라는 흔원행(欣願行)이오. 우리 범부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욕(五欲)에 얽매여 오도(五道:六道 가운데 阿修羅를 뺀 나머지 다섯 문맥상 육도와 같은 의미)를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아 왔소.
그러므로 이 오욕을 싫어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오도 윤회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소. 그러한 까닭에 늘 이 몸뚱이 보기를, 피고름과 똥오줌 등 온갖 불결하고 냄새 나며 더러운 오물 덩어리를 관찰하는 것이오. 그래서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와 같이 육신의 성〔身城〕은 어리석고 멍청한 나찰(羅刹)이 그 안에 살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자라면 누가 이 몸을 좋아하고 즐기겠는가?” 또 경전에 이렇게도 말씀하셨소.
“이 몸은 온갖 괴로움이 모인 곳으로, 일체 모든 것이 죄다 깨끗지 못하고, 온통 종기나 피고름 투성이로 좋고 이로운 것은 근본적으로 없나니, 위로 아무리 높고 훌륭한 천상 세계라 할지라도 모두 이와 같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걷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간에, 늘 이 몸이 즐거움이란 조금도 없이 오직 괴로움뿐임을 관찰하여, 이 몸을 몹시 싫어하고 떠나버리려는 마음을 깊이 내어야 한다.”
그리고 방사(房事:부부관계, 성욕)는 설사 단박에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점차 싫어하고 멀리하는 마음을 내면서 다음의 일곱 가지 부정관(不淨觀)을 하면 좋겠소.
첫째는, 이 음욕의 몸뚱이가 탐착과 애욕의 번뇌로부터 생겨났으니, 바로 그 근본 종자가 깨끗하지 못함을 관조하는 것이오.
둘째는, 부모가 성관계를 맺을 때에 붉은 피(난자)와 흰 정액(정자)이 화합하였으니, 이는 바로 생명을 받음〔受生:受胎〕 자체가 깨끗하지 못함이오.
셋째는, 어머니 태〔母胎〕 속에서 머물 때, 위로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 장기〔熟臟〕가 떠받치고 있으니, 이는 바로 거주하는 곳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넷째는, 또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 오직 어머니의 피를 통해 영양을 먹었(섭취했)으니, 이는 곧 음식 섭취가 깨끗하지 못함이오.
다섯째는, 해와 달이 꽉 차서 머리가 출산의 문을 향해 나올 때, 피고름이 함께 왕창 쏟아져 더러움과 피비린내가 흥건히 퍼졌으니, 이는 곧 첫 출생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여섯째는, 얇은 살갗 한 겹으로 겉만 그럴 듯이 뒤덮여 있을 뿐, 그 안은 어느 곳이나 온통 피고름으로 꽉 차 있으니, 이는 바로 온몸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일곱째는, 그러다가 나중에 죽은 뒤에는 시신이 부어오르고 문드러져 뼈와 살이 사방으로 널려 여우나 이리떼의 먹이가 되고 마니, 이는 바로 궁극까지 깨끗하지 못함이오.
이렇듯 자기 몸이 그러할진대, 남의 몸도 또한 그러할 것은 당연하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경계(境界)나 남녀의 몸 따위도 모두 그러하거니, 늘 깨끗하지 못함을 관조하여 몹시 싫어하고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깊이 내어야 할 것이오.
만약 이와 같이 몸뚱이가 깨끗하지 못함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음욕의 번뇌 망상이 점점 줄어들 것이오. 이와 함께 경전에서 널리 말씀하고 계시는 열 가지 생각〔十想〕 등의 관찰법도 행하면 좋겠소.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원컨대, 제가 삼계에서 온갖 더럽고 냄새나며 오욕에 탐닉하는 깨끗하지 못한 잡식성 남녀의 몸뚱이를 영원히 벗어나서, 극락정토의 법성의 몸〔法性身〕 받아 생겨나길 간절히 바라옵니다.’라고 발원하는 것이오.
그리고 바로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행(厭離行)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소. 첫째는 먼저 극락왕생을 구한다는 뜻을 분명히 함이오. 둘째는 그 극락정토의 장엄들을 보고 믿어 흔쾌한 마음으로 왕생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오. 우선 왕생의 뜻을 분명히 함은 이렇소. “정토왕생을 구하는 까닭은 일체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함인데, 지금 자기 스스로를 생각해 보건대 나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다.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서는 번뇌 망상의 경계가 너무 강렬하여, 나 스스로 업장에 얽매여 삼악도에 떨어지고 한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계속 윤회할 것이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윤회하며 여태껏 잠시도 쉰 적이 없는데, 어느 때나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뭇 불보살님들을 가까이 하려고 구하는 것이오. 그래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야만 바야흐로 험악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가 있소.
그런 까닭에 왕생론(往生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보리심을 낸다〔發菩提心〕 함은 바로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란 곧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이며,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은 바로 중생들을 거두어 들여 부처님 나라에 생겨나도록 이끌겠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원하면, 모름지기 다음 두 가지 수행을 갖추어야 하오. 첫째는 보리문(菩提門)을 가로막는 세 가지 나쁜 법을 반드시 멀리 떠나야 하고, 둘째는 보리문으로 순조롭게 이끄는 세 가지 좋은 법을 모름지기 얻어야 하오.
보리문을 가로막는 세 가지 나쁜 법을 멀리함은 바로 이런 것이오.
첫째, 지혜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자신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내 마음이 내 자신에 탐착하는 걸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둘째는 자비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일체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편안치 못한 중생의 마음을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셋째는, 방편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려하고, 자기 자신을 공경하고 공양하려는 마음일랑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이와 같이 하여 보리문을 가로막는 세 가지 장애를 멀리할 수 있다면, 바로 보리문에 순응하는 다음의 세 가지 법을 얻게 되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온갖 즐거움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無染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菩提〕는 본디 물들지 않고 청정한 곳이오.
만약 자신을 위해 즐거움을 구한다면, 이는 곧 몸과 마음을 더럽게 물들이고 보리문을 가로막는 것이오. 그래서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둘째는,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편안스런 청정한 마음〔安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심은 일체 중생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는 청정한 곳이오.
만약 일체 중생을 건져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는 곧 보리문에 어긋나는 것이오. 그래서 편안스런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셋째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보리(大菩提)와 열반을 얻게 하려고 바라기 때문에, 즐거운 청정한 마음〔樂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와 열반은 궁극의 항상 즐거운〔常樂〕 곳이오.
만약 일체 중생들한테 항상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해 주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보리문을 가로막는 것이오(그래서 즐거운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그러면 이 보리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얻어지겠소? 핵심 요체는 바로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늘 부처님 곁을 떠나지 않는 데에 있소. 거기서 무생법인을 증득한 다음에 다시 생사윤회의 사바국토에 나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되, 자비와 지혜가 안으로 혼융일체가 되어 선정으로 항상 사용하며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운 것이 바로 참된 보리심이오. 이것이 첫 번째 극락정토 왕생을 구한다는 뜻이오.
두 번째 흔쾌한 마음으로 정토왕생을 원한다 함은 이러하오.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이 흔쾌히 일어남은 아미타부처님의 인연 때문이오. 법신(法身)이나 보신(報身)이나 금색 광명 찬란한 가운데 8만4천 큰 모습〔相〕을 나투시고, 큰 모습 하나하나마다 다시 8만4천 작은 모습〔好〕를 나투시며, 작은 모습 하나하나마다 또다시 8만4천 광명을 쏟아내시어, 항상 온 법계를 두루 비추시면서 염불하는 중생들을 빠짐없이 거두어들이시는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 중생들은 극락정토의 칠보장엄(七寶莊嚴)과 미묘한 즐거움 등은 물론,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는 16관법 등의 가르침을 잘 관찰하고 사유하여, 항상 염불삼매와 보시·지계 등의 모든 선행을 함께 닦아나가야 하오. 그래서 그러한 수행공덕으로 일체 중생들이 다함께 극락국토에 왕생하도록 회향 기도하는 것이오. 그러면 결정코 틀림없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이것이 바로 흔쾌한 마음으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이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
정토십의론 후서(淨土十疑論後序)
송(宋) 좌선의랑(左宣義郞) 진환(陳瓘) 씀
사람 마음 덧없고, 법 또한 일정함이 없다. 마음과 법이 천차만별이지만, 그 근본은 여기에 있다. 이것을 믿으면 두루 믿게 되나니, 그래서 화엄경에서 열 가지 믿음〔十信〕을 말씀하셨다. 반대로 이것을 의심하면 두루 의심하게 되나니, 그래서 천태지자 대사께서 정토에 관한 열 가지 의심을 해설하셨다. 의심을 벗어나서 믿음으로 들어가되, 한 번 들어가면 영구히 들어가게 되나니, 여기에서 떠나지 않고 확실히 믿으면 궁극의 경지〔究境處〕를 얻는다.
극락정토란 바로 그러한 궁극의 경지〔究境處〕이다. 이곳에 설법하시는 주체가 계시니, 바로 무량수불이시다. 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심은 일찍이 쉬거나 끊인 적이 없건만, 우리 중생들 의심이 귀를 막아 귀머거리처럼 그 설법을 듣지 못하고, 우리 중생들 의심이 마음을 뒤덮어 흐리멍덩하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죄악의 업습에 편안히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생각〔念佛〕하지 않음을 찬탄하며, 거칠고 산만한 마음을 좋아라고 기뻐〔隨喜〕하면서, 극락정토에서 연꽃 봉오리를 보금자리로 생겨나는 게 허황된 거짓이라고 망령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썩어 문드러질 이 육신이 어떻게 얻어졌고 또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끝내 생각지도 않는다. 모태의 감옥〔胎獄〕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으니, 진실(眞實)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로 업식(業識)에만 믿고 의지하니, 진실한 성품 바탕과는 저절로 거리가 멀다. 한바탕 허깨비 같은 꿈속 경계에서 진실〔성품〕을 못 보고 허깨비〔업식〕에 매달린 까닭에, 생애생애마다 신령스러움을 잃고 성인의 길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석가여래께서 대자비와 연민심을 내시어, 사바고해 오탁악세에서 큰 소리로 저기 서방정토의 지극하고 미묘한 즐거움을 찬탄하셨다.
생사윤회의 고해 가운데 위대한 뱃사공〔船師〕이 되시어, 우리 중생들을 진리의 배〔法船〕에 실어 날라 저 쪽 극락 언덕〔彼岸〕으로 건네주시면서, 밤낮으로 중생을 제도하심에 잠시도 쉴 틈이 없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아미타불의 언덕(정토)은 본디 피(안)차(안)가 없고, 석가여래의 배는 실제로 오고 감〔往來〕이 없다. 비유하자면, 한 등불이 팔방의 거울에 각각 나누어 비치는 경우에, 거울의 위치는 동쪽과 서쪽이 있을지라도 빛과 그림자는 결코 둘이 아닌 것과 같다.
아미타불의 설법은 팔방의 거울에 두루 빛을 비추는데, 석가여래의 방편 법문은 오직 서쪽 거울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피안에 다다른 이는 피안과 차안(의 구별)을 잊을 수 있지만, 아직 법계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들이 어떻게 스스로 동쪽과 서쪽(정토)을 분간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법문 가운데서 아직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방향에 얽매이지도 말고 피(안)차(안)도 가리지 말며, 단지 부처님 말씀을 올바른 생각으로 굳게 믿기만 하면 된다. 이 점이 바로 두 성인(아미타불과 석가여래)의 본래 의도이며, 또 지자 대사께서 믿음을 내신 까닭이다.
믿음이란 모든 선행의 어머니이며, 의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이다.〔信者, 萬善之母;疑者, 衆惡之根〕 선행의 어머니(믿음)에 순응하여 죄악의 뿌리(의심)를 솎아낼 수 있다면, 앞에서 의심의 업장에 귀와 마음이 막힌 중생들도 귀가 트여 다시 듣고 마음이 열려 다시 깨닫게 된다.
또 아직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생사윤회를 벗어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한 중생은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석가여래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라 아미타불을 향해 극락왕생하고, 다시 아미타불의 원력에 따라 나와 석가여래를 돕게 될 것이다.
이렇듯이 시방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 서쪽을 향하여 팔방의 모든 거울에 두루 들어가는 셈이다. 두 성인께서 정토법문을 세우신 이래 이와 같이 행한 사람들이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데, 어찌하여 믿지 아니하고, 또 무엇을 의심한단 말인가? 이러한 법문(진리)을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면, 또 좋은 방편을 마련하여 아직 믿지 못하는 뭇 사람들한테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일깨워야 하리라.
바로 그 때문에 천태지자 대사께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이 정토십의론을 설하신 것이다. 명지(明智) 대사께서 한가운데 우뚝 서서 지자 대사의 도를 배워 본받으셨는데, 그 문장은 따라갈 수 없지만 그 대자비심만은 따르실 만하다. 그래서 또 이 정토십의론을 다시 인쇄 발행하시게 되었는데, 맨 앞의 서문은 양공이 쓰셨으니, 이에 법문이 더욱 널리 전파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여 몇 자 부연 서술한다.
끝.
번역 / 보적(寶積)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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