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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88

88.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고 거기에 따르는 바른 행동(行動)을 함으로 해서 바른 깨달음과 위없는 행복(幸福)을 얻습니다.

따라서 바른 생각이 없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든가 무지(無知)라든가 그런 것을 가지고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의 가지가지의 고난(苦難)같은 것은 모두가 연원(淵源)이 무명(無明)으로부터 옵니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다 배워서 아시는 바와 같이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해서 거기에 행동이 따르는 것이고, 또는 우리가 식(識)을 받는 것이고,또 무명(無明)이 없으므로 해서 거기에 따라서 우리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되고 드디어는 깨달음과 행복(幸福)이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無明)이고 어떠한 것이 바른 지혜(智慧)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바른 지혜(智慧)의 가르침, 이른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가르침입니다. 무명(無明)이라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바로 못 보고 우주(宇宙)의 본바탕도 본래 있는 그대로 못 보는 그러한 흐리멍덩한 어리석은 마음 이것이 무명심(無明心) 아니겠습니까.


기신론(起信論)에 무명심(無明心)의 풀이가 아주 간략히 나와 있습니다.

부달일법계고(不達一法界故)로, 모두가 다 본래(本來)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법계실상(法界實相)인데 그러한 청정미묘한 법계실상을 우리가 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홀연염기(忽然念起) 명위무명(名爲無明)이라, 문득 일어나는 한 생각, 이것을 보고 무명이라 한다하는 법문(法門)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사코 무명을 여읜 반야지혜(般若智慧)에 입각하는 공부를 해야만 이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일법계(一法界)라!

이것은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이 따로 있다든가 나와 남이 따로 있다든가 그런 것은 일법계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宇宙)는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일법계입니다. 하나의 법(法)의 세계입니다. 화엄경(華嚴經)식으로 말하면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정토경(淨土經)식으로 말하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극락세계, 화장세계, 즉 일법계(一法界)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과거, 미래, 현재, 그런 시간적인 제한도 없고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衆生)이 어리석어서 법계(法界)의 뜻을 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생각이 나온단 말입니다.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또는 물질이라는 생각, 마음이라는 생각이 나옵니다. 우리 참선(參禪) 수행자(修行者)는 그런 무명심(無明心)을 단연코 돈단(頓斷)이라, 문득 떠나야 합니다. 우리 사고(思考)와 우리 건강(健康)이 절대로 이원적(二元的)이 아닙니다.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생각 잘못하면 이른바 무명심 때문에 성도 내고 탐욕심(貪慾心)도 냅니다. 무명심으로 해서 우리가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라고 생각이 들면 나한테 좋게 하면 탐심을 내고 싫게 하면 응당 진심을 내겠지요.


따라서 무명심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自己)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 권속(眷屬)이나 자기 소유(所有)나 자기 권력(勸力)에 대해서 집착(執着)할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대승적(大乘的)인 공부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무명심(無明心)을 떠난 자리 참다운 법계(法界)자리, 실상(實相) 자리에 입각을 해버려야 이른바 대승적인 공부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반야지혜, 반야바라밀의 지혜에 입각해야 그래야 가정(假定)이 아닌 유루법(有漏法)이 아닌 때 묻은 공부가 아닌 참다운 무루(無漏) 지혜(智慧)입니다.


남한테 우리가 돈 만원 한 장을 베푼다 하더라도 ‘나'라는 관념(觀念)이 있고 '너'라는 관념이 있고, 돈이 많다 적다하는 그런 관념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참다운 보시(布施)가 못됩니다. 이른바 상(相)이 있는 유주상(有住相) 보시입니다. 무주상(無住相) 보시가 될 때는 상이 없는 참다운 보시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물질이 많다, 적다하는 상을 떠나야 합니다. 이 참선 공부는 그러한 무명심을 제거하고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에 입각해야, 그래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계를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