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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고향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다시 돌아가야겠다.

고향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다시 돌아가야겠다.


                            대천/ 백양사 운문암



 수행자로서 부처가 된다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서로를 격려하면서 말하곤 한다.

 “성불합시다!”

 그러나 20여 년 전, ‘성불합시다’. 라는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에 나오기 위한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부산의 한 절에 가 있을 때였다. 공부하면서 청소년 법회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법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헤어질 때마다 두 손을 모으고 항시 ‘성불합시다’. 그러는 것이었다. 그 소릴 들을 때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왜 괜한 말을 하는가.’ 불필요한 말들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출가에 뜻을 두고 몇 군데 절을 거쳐 태안사로 갔다. 그곳에서 나의 스승이신 청화 큰스님을 뵙고 ‘성불합시다’. 라는 말을 이해했다.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수행이면 수행, 일상생활이면 일상생활 모든 면에서 스승은 완벽했다. 스승이 머무는 도량은 티끌하나 없이 언제나 청정했고 수행을 함에 있어서는 한 치 빈틈없이 엄격했다. 한없이 자비하셨으나 수행에 돌입하시면 인정사정없이 차가우셨다. 신도 분들께 너그럽고 자비로웠으나 자신에겐 한없이 엄격하셨다. 부처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곁에 살면서 나는 이해하고 또 이해했다. 아하! 나도 부처가 될 수 있겠구나. 그것은 출가의 의미를 더욱더 긍정하게 했고 한없는 희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어떻게 저렇듯 한결같이 완벽할 수 있겠는가, 얼마간 저러시다가 때로는 흐트러진 모습도 보이시겠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스님은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십 수 년이 흘러도 한결같이 부처님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스님의 말씀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알고 따랐다.


 출가를 하러 간 나에게 스승은 말씀하셨다. “승가는 용과 뱀이 섞여 사는 곳이라네, 분별을 잘해서 그른 것에 휩쓸리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면서 살게.”

스님께선 상좌, 손상좌를 합쳐 150명쯤 두셨다. 모두 스님 곁에 있다가 학교를 다니거나 사정이 있어서 나가 살고는 했는데, 나는 무슨 인연인지 나가지 못했다. 아니, 나가서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태안사로 출가했을 때부터 스님께 내가 가장 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일을 열심히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새벽 2시 40분 정도에 일어나면 예불을 드리고 나서부터 일을 시작했다. 풀 베고 제사불공을 수발하는 등 온갖 일을 다 했고, 그도 모자라 시간만 나면 일을 찾아다녔다. 옆에 있는 스님들은 ‘일밖에 모른다. 고 내게 핀잔을 주었으나 그것이 내가 스승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복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후 스님께서 포교를 위해 미국에 가 계실 때에는 내가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면 따라오시면서 나무를 심기도 했다.


 태안사에 계실 때 스님은 법을 세우시고자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꿈이 가장 여법한 수행자들과 모여서 사는 것이네. 계행을 바르게 하고 부처님께서 하셨던 방식으로 가장 모범적이고 여법한 수행도량을 만들어 운영하는 게 원이네.”

 그러나 내 업장이 두텁고 부족해서 스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으니 죄송하기 짝이 없다. 흔히 성철 스님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우리스님이 제일 무서웠다.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마음속을 환히 다 들여다보고 계셨다. 나는 속가에 있을 때는 누구 말도 듣지 않았을 만큼 강한 성격이었는데, 스님 앞에선 꼼짝을 못했다. 어린 나이에 양심으로 숨기고 싶은 게 많은데 스님께서 환히 들여다보고 아신다는 게 얼마나 오금이 저리는 일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서울에 광륜사를 개원하고 문서 포교를 담당할 ‘광륜光輪’지를 창간할 때의 일이다. 창간호 창간사를 주지인 내가 써야 하는데 스님께서 쓰시고는 내 이름을 써넣으셨다. 옹졸한 생각에, 부족하지만 나보고 쓰라고 하시든지, 아니면 미리 내가 한번 읽어보게 했으면 했는데, 그렇게 하시질 않은 것이었다. 스님께서 마음속으로 꽁해있는 내 마음을 모르실 리가 있겠는가. 곧 부르시더니, 원고를 내놓으시며 ‘읽어보시게’ 하시는 것이었다. 자그마한 예를 들었을 뿐 스님께선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스님이 성륜사 조선당에 계실 때 모시고 살았던 시자 한 사람은 스님과 한 상에 겸상을 하는 날엔 마음을 들킬까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고백했다. 스님께서 헛기침을 한번하시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고 하니, 얼마나 어렵고 큰 스승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시고 살면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런 눈치를 보이면 찬바람이 불곤 했다. 한 사람이 스님의 옷을 빨아서 잘 손질해놓았는데 그것을 보시고는 다시 물속에 넣어버리셨다. 그리고 당신이 다시 빨아 너셨다. 기력이  다 하실 때까지 손수 청소하고 빨래를 하셨던 스승이셨으니,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시자도 당신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어디를 다니시거나 생활 중에 항상 선정에 들어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인간적인 게 있고 따뜻할게 있었겠는가.

스님께선 오후불식을 원하셨고 많이 먹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 상좌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이면 무색할 정도로 지적을 많이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상좌들 사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싶다.

 스승은 큰 산과 같은 분이셨다. 수행에 무엇보다 강한 힘을 보이신 분이었다.


 젊은 시절엔 공부를 하다보면 감사한 마음이 끝도 없이 올라와서 수건을 얼굴에 대고 우셨던 분이다. 정진하실 때 곁에서 뵈면 눈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바로 쳐다볼 수 없던 분이다.

 평생 하루 일 종식에 장좌불와를 멈추지 않고 피나는 정진을 하셨으면서도 “삼사십 대에 부지런히 공부하고 나이 들어서는 대중교화에 힘써야 하나 공부가 부족한 저는 아직도 묵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시면서 연세가 드셔서도 수시로 홀로 토굴에 들어가 묵언 정진하셨던 수행자였다.

 30킬로에 가까운 몸무게로 열반하실 무렵까지 대중들에게 ‘무아無我’ 법문을 멈추지 않으시며 길 위에 서 계신 수행자였다. 수행과 전법의 길에서 일평생 헌신하시는 스승을 뵈면서 ‘나도 스님처럼 법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여법한 수행자가 되리라’ 했으나 어느 순간 그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스님의 완벽한 모습은 ‘나도 부지런히 수행해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희망은 깊은 절망으로 변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저렇게 완벽할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스승의 저 모습을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하는 절망 때문에 한동안 수행자로서 방황을 하기도 했다.

스승을 모시면서 내가 고향으로부터, 극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가를 느끼곤 했다. 그 느낌은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 극락세계가 있다’라는 경전의 말씀을 이해하게 했다.


 ‘누구나 부처고 다 성불할 수 있다’고 하며 ‘도를 깨치는게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하지만, 실제로 공부하다 보면 성불은 너무나 어려운 길이다.

고향자리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 있음을 알려주시고 스승은 몇 년 전 열반에 드셨다. 떠나온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수행 아닌가. 그래서 나는 지금, 스승이 출가하셨던 백양사 운문암에 와있다. 저 행자시절,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품고 스승이 하셨던 것처럼 하루 일 종식하면서 제대로 정진해보고 싶은 것이다. 멀어진 만큼 다시 돌아가야겠다.


                                                      해인海印 2007년 9월호 취재. 글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