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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청화대종사의 역사적 조명


                     청화대종사의 역사적 조명


                                                     박건주 (전남대 사학과)


      서언

   1. 修證(論)의 의의

   2. 敎化佛事의 의의

      결언



    서 언


  청화대종사(1923-2003)께서 태어나 출가 전까지의 유년기, 修學期는 日帝 치하에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 ‧ 25 동란까지 겹쳐 이어진 힘들고 험한 시기였다. 1947년 출가 이후의 불교사회는 비구 대처의 쟁투가 이어지고, 비구 종단이 거의 전 본사를 차지한 가운데 이제 문중별 본사 차지 다툼, 宗權 쟁취 다툼이 이어졌다. 또 간화선 중심의 수행 풍토가 이어지는 가운데 종단은 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여 한국불교의 전통 내지 정통선법으로 내세우며 불교의 修證法을 이 하나의 법으로 독과점하려는 행태가 전개되었다. 조계종의 종조를 누구로 모시느냐 하는 문제가 쟁론의 대상이 되고 타당성도 없는 종조를 내세우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사안으로 상호 비방하고 배척하였다. 간화선 위주의 불교사회가 되다 보니 佛子는 마땅히 교학을 먼저 넓고 깊이 공부해야 하는 것임에도 이를 꺼려하고 게을리 하는 잘못된 병폐 현상이 만연하였다. 강원은 敎學을 체계적으로 넓고 깊이 학습시켜 주어야 하거늘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였다. 부처님 이래 전하여 온 정통 수증론은 잊혀져  가고 이를 제대로 가르쳐 줄 스승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修證과 교화가 불교의 2대 근간이거니와 수증의 모습은 화두 열심히 챙기고 선문답 하는 모습으로 제한되고, 교법의 활로가 제대로 펴지지 못하다 보니 대중 교화 또한 지지부진하여 해방 이후 그리스트교의 거대한 확장을 방조하였다. 선문답과 祈福의 법문을 2대 근간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 속에서 경제 성장의 덕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지고 외면상 번드르한 盛世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불교서적 읽는 불자 드물고, 계율을 어기면서 세속인 이상의 호화 사치와 거드름을 피우는 승단의 모습들은 대중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두에 길게 현대 불교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기술한 것은 金陀대종사(1898-1948)---淸華대종사로 이어지는 師資의 행실은 정반대로 너무나 큰 귀감이 되는 것이어서 양자의 차이를 뚜렷이 대비하여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대비되는 내용을 통하여 청화대종사의 활동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분야로 나누어 청화대종사의 활동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고찰할 수 있겠으나 크게 修證과 敎化佛事의 양면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修證(論)의 의의


   청화대종사(이하 청화선사)는 스승 금타대종사(이하 금타화상)를 지극히 경배하고 그 遺法을 호지 수증하며 널리 펴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의 修證의 세계는 우선 금타화상의 유법을 통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금타화상의 遺著인 금강심론(청화선사 편저) 또는 수능엄삼매론(법능선사 편저)은 한국불교사상 대단한 성과이며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顯密을 모두 관통하여 아우르며 修證의 전반을 체계적 분석적으로 개괄하면서 그 바탕에는 身證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점이 특출하다. 간화선 일방의 한국불교계의 풍토에서 금타화상은 그것이 마땅한 길이 아님을 알고 자신도 출가 후 그 때까지 18년간 의지하였던 간화선을 과감히 던져버렸다. 그는 그 때 간화선이란 처음 입문하여 1개월 정도만 의지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간화선을 버리니 마음이 열려 원각경의 三淨觀 二十五輪으로 용맹정진 하여 체득할 수 있게 되었고 얼마 후 증득하게 되었다.

 

사실 현대 한국불교는 이 사실이 갖는 의미를 크게 자각해야 한다. 그런데 금타화상의 스승인 만암대종사(1876-1956)는 일제하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은 조동종에 상대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임제종의 기치를 들고 그 운동을 이끄신 분이다. 그리고 그 임제종은 중국에서 송 중기 이래 조동종의 묵조선에 상대하여 간화선을 주창해왔었다. 그러나 송 중기 대혜종고에 의해 간화선이 주창되기 이전에는 임제와 조동종의 선법이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그 취향이 약간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고려 중기 간화선이 들어온 이래 임제종은 곧 간화선하는 파로 고정되어 버렸다. 특히 보조선사가 간화선을 경절문으로서 최상의 선법으로 설하였다는 것은 그 제자 진각혜심이 자신의 뜻을 스승의 글들에 첨가하고 위조한 것인데1) 그 속임수에 넘어가 한국불교는 그 영향으로 간화선이 주도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러한 잘못된 전통이 일제시대에는 민족자결의 항거 정신과 어울려지며 간화선의 임제종을 주창하는 것이 곧 일제불교에 대한 민족전통 불교의 선양이라는 뜻으로 발휘된 것이다.

 

 그러나 금타화상은 자신의 스승이 열심히 주창하던 운동에 거역하여 그 간화선을 폄하하였다. 직접 수증한 결과 간화선은 이제까지 선전되어 온 바와 같은 최상승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스스로 자신 있게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증의 결과 증득한 세계를 크게 3편으로 나누어 세 분의 제자에게 각각 1편씩 전하였다. 대화상은 입적하기 전 1~2년 동안에 금강심론의 三大법문을 세 분 上座에게 전하였다. 먼저 맨 윗 上座인 定修스님을 1947년 元旦에 法蓮堂이라 建堂하고, 수능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와 도결(圖訣)上篇을 전하고, 「금강삼매송(金剛三昧頌)」을 전법송(傳法頌)으로 전하였다. 다음으로 동년 人日에 性起스님을 法能堂으로 建堂하고, 우주의 본질과 形量을 전하였으며, 아울러 「삼륜단공송(三輪但空頌)」을 傳法頌으로 전하였다. 이어 同年 上元에는 性輪스님을 法輪堂으로 建堂하고, 觀音文字를 전하였으며, 아울러 「관음자륜송(觀音字輪頌)」을 傳法頌으로 전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6 ‧ 25 전란이 일어나 스님들이 흩어지면서 아랫 마을에 맡겨두었고, 정수스님과 성륜스님은 진산 태고사에서 焚身하고 입적하시어 그 귀중한 遺著가 유실될 뻔하였는데 청화선사가 그 글들을 찾아 수습하였기에 전해질 수 있었다. 법능당 성기스님은 이에 대해 청화선사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수능엄삼매론서언). 요컨대 금강심론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였고, 이를 정리 교정하여 편찬 유포한 것은 청화선사의 큰 공훈이다.

 

  금타화상과 두 분 首座의 너무 이른 입적으로 그 법이 바로 널리 펴지지 못하게 된 것은 한국불교의 큰 손실이었다. 법능당 성기스님은 2006년 입적하시기까지 강원도 횡성의 能顯寺와 서울의 能顯禪院에서 주석하시며 법을 펴시다가 2007년에 입적하셨다. 그리고 청화선사는 그 이후 우선 自證을 성취하기 위해 장좌불와의 용맹정진, 1종식, 運力, 독경의 정진에 매진하였다. 후일 선사의 여러 법문에 의하면 그 수증의 법은 敎禪一致가 근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장좌불와의 좌선이 연속되는 가운데 틈틈이 경전을 자세히 열독하는 것을 병행하였다. 자주 거처를 옮기시면서 대장경을 운반하여 가지고 가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선사의 법문에는 많은 경론들이 인용된다. 이러한 모습은금강심론에 많은 경론들이 인용되고 설파되어 있는 것과 상통한다. 당시 설법에 경론 인용하는 것을 낮게 보기에 이를 꺼려하던 풍조와는 달리 두 분은 경론을 인용하며 해설적, 분석적으로 법을 설하였다.

 

 한국 근래의 선사들 법문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달마대사의 선법 근간이 「敎에 의거하여 宗(心性)을 깨닫는다」였고, 초기 선종의 선사들은 짤막한 법문에도 여러 경론을 인용하며 문답식, 해설 분석으로 자세히 理智에 통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선불교 본래의 전통이고 정통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현실은 간화선 하지 않으면 외도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경론은 제쳐두고 선문답식 법문으로 일관하였다. 그래서 청화선사는 선가에서 상당한 굴욕적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敎禪一致에 의거하지 않고 성불한 부처님이 없다 하였는데 후에 선가에서 나온 敎外別傳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교를 멀리 하다 보니 교리를 모르고 선을 하는 우스운 모습이 만연하게 되었다. 교리를 自心에서 구현하면 그것이 곧 禪旨가 되고 禪理가 되는 것이다. 무슨 선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교리가 곧 선법이다. 이것은 불교의 기본이고 근간이다. 어찌 길을 모르고 길을 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 하겠는가. 그래서 청화선사는 교선일치와 함께 先悟後修를 항상 강조하였다. 先悟란 꼭 무슨 큰 깨달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경론을 통해서, 설법을 듣고 얻어지는 조그마한 이해도 선오가 되고 이것이 커지면 큰 깨달음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길도 모르고 애쓰고 닦다가 가까스로 깨닫는 先修後悟는 迷修라고 합니다.」(원통불법의 요체, 1993, p.564).


  모르고 애써 닦다가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迷修 : 미혹한 닦음’이라 하였다. 迷修이면 대부분 그 이전에 여러 병폐로 퇴보하거나 어쩌다 깨닫게 되더라고 무덕 더디다.  길을 모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데 어쩌다 좀 깨닫게 된 사례를 읇조리며 이것이 최고라고 한다. 이것은 진실한 최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매함에서 나오는 현상들이다.

  간화선은 곧 그러한 迷修의 전형이고 대표이다. 청화선사는 독경, 염불, 기도, 주력 등과 함께 간화선도 하나의 수행법으로서 인정하되, 단지 진여불성의 자리, 본체를 여의지 않고 해야 올바른 수행이 되는 것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 진여불성의 자리, 극락세계는 지금 이 자리를 떠나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참선도 못되고 불교도 아닙니다. 염불도 제법공 자리에 입각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하나의 방편에 불과합니다. 극락세계가 십만역 국토 저 밖에 가 있다 하면 천지 우주가 다 비었는데 어디 밖이 있고 안이 있습니까. 천지우주는 이대로 극락세계요, 이대로 광명세계입니다. (원통불법의 요체, p.553)


즉 천지 우주 이대로가 진여불성 자리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가. 제법(일체 모든 존재)이 본래 공인 까닭이다. 공인데 둘이 있고, 다름이 있겠는가. 이러한 뜻을 명료하게 알게 되면 본체를 여의지 않는 행이 된다. 그래서 교선일치와 선오후수의 뜻이 동시에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간화선은 그러한가.

  

  현 한국불교계가 금타화상과 청화선사의 수증론에서 배워야 할 사항이 또 있다. 그것은 곧 수증의 階位(次序)에 대한 이해이다. 금타화상은 여러 경론에 나오는 다양한 계위를 대비해서 어느 경론의 어느 位가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고, 새로 해탈16地의 법문을 창설하였다.  수행의 途上에서 미리 그 과정을 알고 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이에 대해 무식하다. 이 또한 간화선이 낳은 병폐이다. 화두만 타파하면 견성이고 성불이라 하니 그러한 수증의 계위를 알려고 하지 않게 된다. 一心의 자리에서는 본래 계위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行者의 事에서는 수행의 성취 分上에 따른 證相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수많은 경론이 수많은 설법을 통해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왜 근래의 한국불교 수행자들은 이를 도외시하고 배우지 않는가. 이러한 것을 우매한 일이라 한다. 두 분의 이에 대한 설파는 그래서 소중하고 當代의 선지식임을 말해주고 있다.


  청화선사는 이른바 염불선을 주창하셨다. 선사는 왕생극락의 법문도 종종 하셨지만 그 염불선은 실상염불이며 自證 성불의 길로 직행하는 선법으로서의 염불선이었다. 자심의 당처가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진여불성을 떠나 있지 않음을 알고 염불하는 행이었다. 아울러 稱名의 효과를 강조하였다. 명호를 자주 부르면 정감으로 가까워지고, 명호가 지니는 공덕의 힘과 도움을 받는다. 금타화상의 법문에 「보리방편문」이 있고, 그 원리는 중론과 천태지관의 一心三觀 및 염불선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불’ 칭념은 곧 법신 보신 화신을 아미타불 一合相의 뜻으로 칭함이다.  청화선사가 필자에게 번역하게 한 능가사자기 도신선사의 법문에 「念佛은 念佛心이고 佛心은 無相이다.」고 하였다. 佛心은 곧 누구에게나 있는 佛性이며, 無相이어서 잡을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향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명호에 의지하는 방편으로 그러한 뜻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간화선의 풍토가 주도하는 한국불교계에 염불선을 크게 창도하는 청화선사의 가르침은 새로운 조류의 형성이며 간화선 일변도를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염불선은 경론에 의거하고 있고, 초기 선종 이래 여러 조사들의 법문에도 설해진 정통의 법문이다. 중기 이후의 선종에서 유행한 선정겸수(禪淨兼修 : 선과 염불의 겸수)에서의 염불은 대체로 극락왕생 위주이지만 청화선사의 염불선은 그것 만은 아니었다.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는 그 자리가 곧 극락왕생의 자리였다. 그래서 염불과 구분하여 염불선이라 칭한 것이다.

 

  따라서 염불선은 정통선으로서의 근거와 대중선으로서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장이 있다. 억지 수행이 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간화선 보다 쉽고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폐해가 적다. 단지 염불선 또한 잘못하면 억지수행이 된다. 五祖 홍인대사의 수심요론

에 이러한 행들은 無爲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 수행이 되어 폐해가 생긴다. 단지 청화선사는 이 無爲로 행해야 한다는 점은 거의 설하지 않으셨다. 그대신 다음과 같이 마음을 打成一片하여 하나로 모아 통일시킬 것을 도처에서 강조한다.


  저는 打成一片이란 말을 거듭 역설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체 만법을 하나의 원리로 통일한 인생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켜 버려야 합니다.  -----. 모두가 하나의 불성이요, 불성이 아닌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질이란 환상이 없어져 버리면 결국은 진여불성만 남지 않겠습니까. (원통불법의 요체, p.554)


모든 부처가 마음을 하나로 하지 아니하고 성불하신 분이 없다 함은 여러 경론에 나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분산되고 흐트러진 마음에서 도가 성취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단지 이를 위한 專念의 행에 作意의 억지가 들어가면 폐해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無爲의 행이 되어야 함이 부수되어 설해지는 것이고, 無爲의 행이 되려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과 알아야 할 내용을 청화선사는 설하였고, 無爲는 거의 언급을 안 하셨다. 먼저 알고 행하다 보면 처음은 作意의 有爲에 의존하지만 익숙해지고 진전되면 無爲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단지 無爲의 필요성을 먼저 일러주어야 그러한 병폐를 겪는데서 벗어나 수준 높은 행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보면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사실 그러한 병폐의 양상이 많은 수행자들에게서 보인다.


  금타화상은 析空觀이나 九次第定, 止觀 등의 근본선을 實修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청화선사는 여러 법문에서 이에 대한 해설과 함께 그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이 또한 간화선 위주의 한국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것이 된다. 부처님 당시 修證論의 핵심이었던 구차제정에 대해 그간 소홀하고 미진하였던 이해 수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것이 소승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3乘 모두가 함께 행하는 共修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我相을 멸할 수 있는 佛法을 통해서 만 이를 수 있는 궁극의 제9 멸진정의 경지와 그 位相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근래 한국불교계는 돈법(頓法)의 뜻을 잘 모르고 이러한 선정상의 진전과정을 도외시하였다. 돈법이라고 해서 이러한 과정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몇 단계를 건너 뛰기도 하고 초지에서 일거에 팔지에 이르기도 하지만 이 또한 단계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점법에 비해 그 진전이 빠르고 폐단이 없으며 힘이 덜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의 位까지 갈수 있어 수승하다고 한다.


  금타화상은 노자를 보살7지, 공자와 예수를 보살5지,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를 보살4지로 인정하였고, 청화선사는 이를 계승하여 모든 종교를 성인의 가르침으로 알아 화합하고 수용하며 함께 연구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세계종교대학을 미국 캘리포니아 온천 휴양 도시 팜스프링 입구 데저트 힐 뒷산에 있는 ‘팜스프링 금강선원 Palm Springs Diamond Zen Center’ 과 곡성 옥과 성륜사에 세우려는 계획을 지니고 계셨다. 비록 실행에는 옮겨지지 못하였지만 그 원력의 因이 언젠가 싹을 틔울 수 있게 되면 세계 종교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금타화상은 우주의 형량과 생성의 사정을 직관의 통찰로 體證하여 數値의 원리로 開示하였다. 思量의 域을 뛰어 넘은 것이라 범부는 무어라 평할 수 없다. 청화선사도 천문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분야에 상당한 안목이 있으셨다고 한다. 「종교는 과학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원통불법의 요체, p.554)는 가르침은 불교와 과학과의 통로를 적극 열지 못하고 있는 현 한국불교계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의 지배력이 지대한 현대에 불교는 그 과학을 리드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두 분의 과학에 대한 통찰력과 관련 법문들이 지니는 의의가 크다.

  

  무엇보다 청화선사의 修證은 여러 선정을 성취하고 여러 신통을 보인 경지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근래 이러한 수증을 성취한 분이 드물고 드물다. 그래서 청화선사의 威德은 더욱 값지다. 그는 불교 修證의 세계가 진실함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현대 한국불교의 귀감이며 자랑이다. 



    2. 敎化佛事의 의의


  청화선사는 초인적인 修證의 생활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교화불사에 매진하였다.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보살행을 모범으로 실천하였다. 도처에서 거처하기도 힘든 도량을 직접 공사하여 짓고 또 지었다. 좋은 곳에서 대접 받으면서 편안히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으름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노동과 좌선의 정진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인연 중생들에게 법을 펴는 것을 쉬지 않았다. 

 

  납자로서 겸양 공경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특히 재가신자에게 항상 다정하게 공경의 말투로 대하면서 겸양하였다. 근래 재가신도에게 반말조로 말하고 거드름피우는 승려를 보면 청화선사의 모습이 대비되어 자연히 떠오르곤 한다. 스님들의 그러한 下待에 기분이 나빠 절에 안 간다는 사람들이 있다. 스님들의 행실은 불교의 얼굴이다. 청화선사의 행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1985년부터 이루어진 곡성 태안사의 정기 매월 법회에 전국에서 수백명이 동참하였다. 하계와 동계의 수련대회에도 150명 내외의 수가 참여하였다. 광주 등 여러 지역에서 재가신도회로서 금륜회가 결성되고 자체 법회가 이루어졌다. 청년회와 고등부 중등부도 결성되었다. 옥과 성륜사, 서울 광륜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이 새로 조성되고 법회가 이어졌다. 합동수계법회나 수륙제 방생회에 수천명이 참석하였다. 재가불자의 상설 선방이 생기고 여러 도량이 확장되었다. 특히 불교세가 미약하였던 호남지역에 청화선사의 법력과 교화에 의해 불교의 청풍이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활동과 성과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청화선사는 본사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교화불사의 진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 또한 현불교계의 문제를 말해준다.

또한 인연이 있어 미국에서 교화를 펼치기도 하였다. 여러 여건의 장애가 있어 소기의 성과를 이루진 못하였으나 미주지역 포교에 큰 징검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여러 불사를 위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후원이 없는 가운데 청화선사는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셨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러 노동에 과로하여 병을 얻을 정도로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捨身의 보살정신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전국 각지의 수많은 초청법회에 응하여 설법하였고, 수증에 중요한 여러 책을 펴셨다. 염불문의 3대 경전을 번역하였고(정토삼부경), 금강심론을 7주일간 집중 해설하여원통불법의 요체란 題名으로 출간하였다. 만년에 병환으로 매우 힘든 상태에서도 입적 직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 하여 육조단경 주석서를 펴내셨다. 선사는육조단경 앞 부분 고사에 비록 뒷 사람들이 위조하여 덧붙인 내용이 있고, 이 때문에 멀리 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법문의 가르침은 실로 중요한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광륜2009 가을호). 선사는 평소에 자신이 ‘강사’가 아니라 ‘禪師’임을 종종 말씀한 바 있다. 그렇지만 육조단경 주석에 그렇게 애쓴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선가의 법전이 되는 것이었고, 기존의 역주서에 만족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사로서 선가의 법전을 펴낸 것이고 또 남다른 인연이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일은 청화선사의 법문이 염불종이기 보다는 선불교에 바탕한 것임을 명시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청화선사의 수많은 법문들은 이후 사부대중에 의해 녹취되고 정리되어 다종의 법문집들이 출간되었다. 이리하여 금타화상과 청화선사의 가르침은 이제 한국에서 상당히 유명해졌고, 그 영향력 또한 크게 증대되었다. 게다가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하여 많은 법문들이 널리 유포되었다. 바야흐로 선사의 입적 후 갈수록 그 淸德과 감화의 향이 더욱 힘을 발휘하며 전개되고 있다.



     결 언


  금타화상과 청화선사의 수증은 身證을 성취한 세계이고, 그 수증론은 원통 내지 정통불교이며, 근본선을 아우른 염불선이다. 간화선은 원통의 佛法을 훼손하는 경향이 많다. 두 분의 성취와 가르침은 간화선에 치우친 한국불교의 병폐에서 벗어나는데 큰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차치하고라도 간화선이 만연한 풍토에서 그 위세에 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수증의 세계를 떳떳하게 펼친 것 자체가 이미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간화선 전래 이후 8백년의 전통에 과감히 맞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밖에 諸佛 공통의 교선일치와 선오후수, 염불선, 근본선, 수행의 계위에 대한 종합적 체계적 이해, 九次第定 實修의 필요, 불교를 통한 과학 세계의 引導, 세계 종교의 화합과 상호 이해 연구의 증진 등 두 분이 펼친 행적들은 모두 한국불교사상 거의 첫 성과이고 방향제시라 할 수 있다.

  敎化佛事에서 보여준 초인적 정진과 교화 활동에 매진한 행적들, 겸양과 공경의 모습들, 위법망구 내지 捨身의 보살행 등은 한국불교의 귀감이고 자랑이다. 그 위업을 올바로 평가하고 수지 실천하며 널리 펴는 것이 그 은혜에 대한 후인들의 보답이고 의무일 것이다.   

   

   




1) 박건주, 「보조선사는 간화선을 唱導하지 않았다」, 전남대호남불교문화연구소집담회발표문, 200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