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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청화淸華 큰스님의 행화行化

 

 

 

 청화淸華 큰스님의 행화行化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전남 곡성의 성륜사(聖輪寺) 조실(祖室) 淸자 華자 청화 큰스님께서는 조선당에 상좌 스님들을 모아놓고 “대중과 화합하고 잘 살아라 승가란 화합이다”를 당부한 후 편안히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80세가 되시고 법랍(法臘)은 56년이다 큰스님께서는 마지막 한 점의 에너지까지 중생들에게 회향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큰스님께서는 출가하신 이후 무안 혜운사, 구례 사성암, 지리산 벽송사, 백장암, 남해 부소대, 두륜산 진불암, 광주 추강사, 상원암, 남미륵암, 장흥 금선암, 월출산 상견성암, 칠현산 칠장사, 동리산 태안사, 내장산 벽련선원, 미국 금강선원 등 제방선원과 토굴에서 56년 동안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 등 용맹정진으로 오로지 수행에만 초지일관 하셨으니, 그 위법망구(爲法亡軀)의 두타고행(頭陀苦行)은 가히 본분납자(本分衲子)의 귀감(龜鑑)이요, 계율(戒律)이 청정함은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라 아니 할 수 없다.


 열반을 예견하신 큰스님께서는 몇몇 제자스님에게 사바세계을 떠나는 게송을 친히 적어 주셨다.

 


 사세게 辭世偈


차세타세간 此世他世間

거래불상관 去來不相關       

몽은대천계 蒙恩大千界

보은한세간 報恩恨細澗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은 상관치 않으나

은혜는 대천세계만큼 큰데

갚음은 작은 시내 같음에 한스러워할 뿐이네


1. 세속시절

큰스님께서 사바세계에 태어날 인연처로 택하신 곳은 전남 무안군 운남면 연리 바닷가에서 불과 50미터쯤 떨어진 곳이고, 때는 서력으로 1923년 음력으로 11월 6일이었다. 

큰스님께서는 숙세의 불연(佛緣)이 깊은 분이셨다. 어떤 분의 증언에 의하면 큰스님께서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 인사를 하면 꼭 합장하곤 했다 그 선생님이 생각하기를 “이 주변은 절도 없는 곳인데 어떻게 합장하는 것을 알까?”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이 변하여 겨울에 눈도 별로 없고 바람도 약하지만, 그 시절에는 눈도 많고 바람도 심했다 그리고 눈길을 빠지면서도 10킬로미터  길을 걸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개근을 하셨다. 그리고 1937년(14세)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으로 5년제 중학교를 다니셨다 1942년 귀국하신 뒤에 망운중학교 설립의 씨앗이 되는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셨다.


2. 발심發心출가出家

큰스님의 청년시절 당시는 일제 말기와 해방 후의 좌우 대립으로 혼란과 갈등의 시절이었다. 당신께서는 동서양의 철학서적을 탐독했지만 세속의 지식공부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음을 통감하시고, 집안 6촌 종제의 권유로 장성에서 50리 길을 걸어서 백양사 운문암에 올라가셨다. 

 

『내가 청년시절부터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서적을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자연히 불교서적을 접하게 되더군요. 불교입문서를 보고 나름대로 윤곽을 잡았었죠. 그런 뒤 절에 있던 집안의 육촌동생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바로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좀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수행하시는 모습을 보고 미련 없이 출가를 해버렸지요.』


『저는 처음에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으로 출가를 했습니다. 운문암에 가서 보니까 큰방에 이 삼매도(首楞嚴三昧圖)가 부착되어 있는데 불교입문 정도는 알고서 출가를 했지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숙세(宿世)의 인연이었던지 그것이 아주 귀중한 보배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착한 것을 제가 뗄 수는 없고 또 그 때는 대중이 다 분산되어 버려서 누구한테 물어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6·25사변 훨씬 전이기 때문에 산중에는 빨치산이 있어서 국군하고 싸우기도 하고 참 험악한 때입니다. 깊은 산중이라 먹을 것도 부족하고 또 조금만 의심쩍으면 끌려가서 문초를 받기도 하기 때문에 스님네가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또한 운문암 가풍은 참선만 시키지 밤에는 절대로 불을 못 켭니다. 그때, 그런 깊은 산중 절에는 초도 없고 석유 호롱불 밖에 없었는데 더러 초가 있을 때는 부처님 앞에만 잠시 초를 밝힙니다. 또 사시(巳時)마지를 올리고서 하루 한 때만 먹기 때문에 사시에 부처님한테 마지 올릴 때만 촛불을 좀 켜고 조석예불은 어두운 법당에서 죽비로 딱딱 치고 예불을 모십니다.

그런 때에 저는 거기서 공양주도 지내고 부목(負木)도 하려니까 너무나 고되기도 해서 '안 되겠구나, 다른 데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데로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이 수릉엄삼매도가 욕심나서 갈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떼어갈 수는 없고 할 수 없이 아직 행자인지라 협착하고 누추한 뒷방에서 밤에 호롱불을 켜놓고서, 그것도 밖에 비치면 어른 스님들한테 꾸중을 들으니까 헤어진 모포로 창을 가리고서 삼매도를 베꼈습니다.

나중에는 금타 스님께서 직접 그려서 복사한 수릉엄삼매도 3장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습니다마는 저로 해서는 아주 인연 깊은 수릉엄삼매도 입니다.』

                                                <원통불법의 요체>에서


큰스님께서 운문암에 가셨을 때는 이미 금타(金陀)화상께서는 열반에 드신 후였다. 그러나 운문암 대중의 여법한 수행과 금타 대화상의 위대함에 감복하여 금타 대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구도의 길에 들어선다.

육성 증언에 의하면 당신께서 운문암에 올라가서 계시는데(1948년 만25세) 해재철이라 금타 대화상의 상좌인 법련스님이 어디에서 결재를 마치고 오셨다고 한다. 법련스님과 큰스님과는 연배가 동갑인데 대단하신 분이었다. 그 분한데 수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를 위패상좌라고 합니다. 옛 적에는 돌아가신 분의 위패를 놓고 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3. 위법망구爲法亡軀정진精進

 1950년 여름 큰스님께서는 금강경을 영어로 번역한다고 광주에 나왔다가 6.25전쟁을 만나서 운문암으로 돌아가시지 못하고 잠시 귀향한다. 고향에 돌아와서 망운 중학교도 설립하고 무안 대박산 혜운사를 창건하시는데 손수 목재를 구하여 절을 짓고 탱화도 손수 그려 모시고 도반들과 함께 용맹정진 하시었다고 한다. 그 후로 철저한 계행과 장좌불좌 일종식의 고행정진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남해 부소대에서는 절벽위에서 밧줄을 내려 주어야 올라갈 수 있는 외진 곳에서 정진하시었다.

벽송사 선원 대중처소에서 정진하실 적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에 입승 소임을 보고 있었는데 24시간 잠 없이 사셨다고 한다. 저녁에 방선 죽비 치면 잠시 누워 있다가 대중스님이 잠들면 일어나 좌선하시고 새벽 도량석 돌기 전에 잠시 밖에 나오셨다가 입선을 같이 하셨다고 한다. 한 철을 그렇게 사시니 해제 날 대중 스님네가 큰스님께 삼배를 했다고 한다.  큰스님께서 토굴에서 정진 하실 적에 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젊은 스님이 찾아왔다.

큰스님께서는 젊은 스님이 산으로 올라오시는 것을 알고 자리를 피했고 그 스님은 “내가 올라오는 줄 아시고 피했구나.” 생각하고 기다렸다.

 긴 긴 여름 해가 기울 때 큰스님께서 나타나서 “미안하네” 하시면서 “저녁공양 하세” 하시더니, 당신은 일종식 하실 때인데 젊은 스님을 위해서 저녁을 공양을 내 놓으시는 데 밥이 얼마나 쉬었던지 수저로 뜨면 풀처럼 쭉 늘어났다. 반찬은 시어 꼬부라진 김치를 잘게 썰어서 내놓으시는 데 젊은 스님은 도저히 못 먹고 쳐다 보기만 하고 있으니 큰스님께서는 당신 바루에다 젊은 스님의 쉰밥과 신 김치를 쏟아 수저로 저어서 다 드시었다고 한다.

큰스님께서 항상 계시는 수행처 앞에는 근고청중(謹告淸衆. 삼가 청정대중에게 알림) 푯말을 내걸어 놓으셨습니다.



 생사사대 生死事大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인데

 무상신속 無常迅速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촌음가석 寸陰可惜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신물방일 愼勿放逸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아라

 

4. 회향回向과 염불선念佛禪 그리고 통불교通佛敎

큰스님께서 월출산 견성암 시절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이 견성암에 찾아가 중생제도를 간곡히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5년 후 견성암에서 3년 묵언 수행을 끝내고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던 스님은 세납 60이 넘은 1985년에 이르러서야 신라말기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태안사에 주석하면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당신께서 공부 경계는


『그리고 저한테 대해서 어떻게 살아 왔는가? 어떻게 공부했는가? 물어 왔는데, 저는 내세울게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선 저는 수행자로서 아직 대각(大覺)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세속적으로도 무슨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잘난 것도 아니며 두드러진 경륜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산 저산으로 다니면서 참선 공부만 했다는 사실 밖에는 없어서 내세울 것은 정말로 없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경계에 관해서는 불가향인설(不可向人說)이라, 자기 공부하는 경계는 스승한테 경책받기 위해서가 아닌 한, 다른 이에게 말하지 말라는 불조(佛祖)의 경책이 있습니다.』

                                                   <원통불법의 요체>에서

하셨지만은 태안사에 주석하시던 시기부터는 당신의 공부를 마치고 중생에게 회향하는 시기였다.

큰스님의 삶을 크게 나눈다면 백양사 운문암(25세)으로 출가하시여 오산 사성암(40여 세)까지는 “용맹정진” 하는 시기며 사성암 이후 태안사 오시기 전 칠장사(60여 세:<정통선의 향훈>법문) 까지를 “보임수행” 하는 시기며 태안사(62세) 이후부터는 “중생회향”하는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85년 10월 큰스님은 20여 명의 도반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태안사에서 95년까지 주석하시면서 3년 결사정진을 감행하시고 재가불자들을 위한 참선수행을 위해 정중당(淨衆堂)을 개설하셨습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결정이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수행에는 출재가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큰스님께서 주창하시어 일대 파란을 일으킨 염불선(念佛禪)은 중국선종(禪宗) 초조(初祖) 달마대사로부터 육조혜능까지 행해졌던 수행법이다. 그 수행법을 계승한 정중무상스님(淨衆無相 680-756 신라스님)의 법손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혜철선사(惠哲禪師 785-861 신라스님)가 이 땅에 퍼뜨린 게 1,3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서 우리의 선(禪)은 오로지 대혜종고(大慧宗고) 1088-1163 중국 송나라스님) 이후에 유행한 간화선(看話禪:화두선(話頭禪))에만 치우치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염불선의 불씨가 태안사에서 청화(淸華) 큰스님에 의해 피어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염불선(念佛禪)을 이 땅에 들여온 혜철(惠哲)선사가 주석하던 곳이 바로 태안사(泰安寺)였으니, 혜철(惠哲)과 청화(淸華)큰스님, 태안사와 염불선의 인연은 1,30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맺어진 것이다. 청화(淸華)큰스님이 태안사를 맡을 당시만 하더라도 태안사와 혜철(惠哲)선사, 염불선(念佛禪)의 관계가 규명되기 전이었으며, 큰스님 역시 그런 인연을 알고 태안사를 택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큰스님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선(禪)과 염불(念佛)을 회통한 무상대사(無相大師 680-756 신라스님)의 교화행각은 문파와 종파를 초월했으며 불문(佛門)과 종교 일반의 고질인 법집(法執)의 계박(繫縛)을 초탈한 선교(禪敎)의 방편(方便)이어서 모든 종교인의 귀감이 된다.”


이렇게 큰스님께서 다시 주창하고 널리 퍼뜨린 염불선(念佛禪)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스님 자신의 법문이 있다.

 

“지적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 걸맞을 공안선(公案禪)이나, 의지력이 많은 사람에게 걸맞을 묵조선(默照禪)을 모두 긍정합니다. 그러나 정통선(正統禪), 즉 염불선(念佛禪)이란 내 마음이 곧 부처고 천지우주가 역시 부처요,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는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이 빈틈없이 틀어쥔 상태의 수행인데 지(智),정(定),의(意) 모두를 요하는 회통의 방법이지요. 누구에게나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하게 성불(成佛)할 수 있는 수행 방법이 바로 염불선(念佛禪)입니다.”


하지만 공안(公案), 혹은 화두(話頭)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염불선(念佛禪)은 여전히 낯선 주제다. 이에 대해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그 마음이 바로 염불선(念佛禪)입니다. 염불은 원효대사에서부터 서산대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위대한 분들은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을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보고 실행하셨습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곧 염불(念佛)이죠, 그러므로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단순히 복을 비는 방편 염불(念佛)에 지나지 않지만, 대상을 떠나 본체를 부처로 설정하고서 그것을 안에서 구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念佛禪)이 되지요.”


큰스님은 또한 자신이 주창한 통불교에 대해서도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했다.


"종파성을 지양한 원융한 원통불교는 우리 불교가 앞으로 마땅히 지향해 가야 할 부분입니다. 진리 자체가 둘이 아니고 원통무애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정통조사라고 하는 분들은 다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신라의 원효(元曉),의상(義湘), 고려의 보조(普照),나옹(懶翁), 조선의 서산(西山),사명(四溟) 등 시대를 주름잡은 분들이 모두 원통불교를 부르짖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회통이 안 될 수 없었는데, 원통불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불성의 체험에 역점을 두어 정진한다면 반드시 원통불교로 회귀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자신이 주창한 염불선(念佛禪)만을 유일한 수행의 방편으로 고집한 분은 아니었다. 공안선(公案禪)과 묵조선(默照禪)을 모두 인정했고, 사람마다 근기와 형편에 따라 수행의 방편(方便)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안도 좋고 염불도 좋습니다. 다만 일반인들에게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기반을 둔 염불이 가장 쉬운 방편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은 그것 자체가 신통한 깨달음의 방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큰스님은 ‘어떠한 행법이던지 본체를 여의지 않으면 누구나 불성을 깨닫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을 강조한다.


“우리가 ‘천수다라니’를 외우든 ‘이뭐꼬’의 문자 화두를 들든, 아니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든, 그 구경 목적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가 뭡니까.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자성(自性)입니다. 선(禪)이란 우리의 그 ‘마음’을 중도실상(中道實相)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란하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입니다. 우리가 선을 닦아 삼명육통이 되면 과거나 현재, 미래를 알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신통력을 모아 최상의 영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불타의 경지(境地)입니다.”


당신의 깨달음을 고구정녕 일러주시는 중생회향의 길은 태안사로 부터 시작하여  미국 금강선원으로 곡성 성륜사로 제주도 자성원 서울 광륜사로  이어졌다.

열반 드시는 2003년 7월 이였다 큰스님께서는 극도로 탈진하시어 병원에 모셨을 적에 의사들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며 놀라워했는데 일산화탄소 수치가 130정도 나왔는데 의학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 수치면 뇌사상태와 다름이 없는데 정신은 평상시와 똑같으니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열반에 드셨다


 아,  중생을 위하여 온 몸을 태워 가시면서 살다 가신 분입니다.

큰스님을 기리는 말, 허다한 말이 필요 하겠는가. 

 

" 저희 큰스님은 참 진실한 수행자 였습니다 "

 

 

    

 

* 무주당 청화 큰스님

  無住堂 淸華 大禪師


1948년 25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대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셔서 이후 50여 년 동안 사성암, 백송사, 백장암, 상견성암, 상원암, 남미륵암, 칠장사 등에서 수행 정진하셨다. 1985년 전남곡성 태안사에서 3년 결사를 시작으로 회상을 이뤄 대중교화의 인연을 지으시고 1995년까지 태안사를 중창불사하여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을 재건하셨다. 미주포교를 위해 카멜 삼보사, 팜스프링스 금강선원 등을 건립하여 3년 결사를 성만하시고 조계종 원로의원, 성륜사 조실을 지내셨다 2002년 5월 서울 도봉산 광륜사를 개원하시고 2003년 세납81세 법납 56세에 열반에 드셨다.


저서로 스승이신 금타金陀화상의 유고를 정리하여 편저한『금강심론金剛心論』이 있으며 역서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약사경藥師經』『육조단경六祖壇經(돈황본-역)』법어집으로는 『정통선正統禪의 향훈香薰』『원통불법圓通佛法의 요체要諦』등이 있다.


큰스님 연표


1923년 11월 6일  (음) 전남 무안군 운남면 연리 태어나시다

                    (父 姜大奉, 母 朴良女)

1948년 (25세)    만 25세, 전남 장성 백양사 운문암(雲門庵),

                 금타(金陀)화상을 은사로 출가,

1952년 (29세/5)  고향에서 청운중학원(靑雲中學院)설립 (현 망운중학교)

                 * 당시의 청운중학원을 나온 상당수의 학생들이 서울 광주 등 고등교육

                   기관으로 진학 각 분야에 인정받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1953년 (30세/6)  무안에 혜운사(惠雲寺) 창건 * 5칸집 인법당으로 건축하였다

1959년 (36세/12)  해남 두륜산 양도암(養道庵)에서 도륜스님과 함께 정진

                 해남 대흥사 진불암(眞佛庵)에 가시다

1962년 (39세/15)  오산 사성암(四聖庵)에서 용맹정진 하시다.

1963년 (40세/16)  광주 추강사(秋江寺)정진하시다 현 조선대부속고등학교

1964년 (41세/17)  지리산 백장암(白丈庵)과 벽송사(碧松寺)에서 안거

                 * 벽송사 위에 있는 두지터에서 초막 짓고 용맹정진

1966년 (43세/19)  태안사(泰安寺) 주지로 3년 취임.

                 봉서암(鳳棲庵) 건물을 옮기여 대웅전 복원

                 한 철씩 다른 곳에서 안거 나시다

1967년 (44세/20)  오산 사성암(四聖庵)에서 용맹정진

                 남해 호구산용문사 염불선원 용맹정진

1968년 (45세/21)  남해 보리암 부소대에서 용맹정진

                 * 억울한 누명을 쓰고 광주교도소에서 3개월 보내시다

                   그러나 억울함을 끝까지 해명하지 않으시다.

1969년 (46세/22)   경남진주 두방사(杜芳寺)에서 정진하시다

1970년 (47세/23)   5월 전남 장흥 릉엄사(楞嚴寺) 창건하시다

1971년 (48세/24)   동안거 진불암 2월, 부산 동래구 송정동 혜광사(惠光寺)에서 안거

1972년 (49세/25)   전남 강진 무위사에서 안거

1973년 (50세/26)   4월 서울 불광동 별장에서 무주암(無住庵)이라 이름짓고 안거

1974년 (51세/27)   전남 해남 진불암에서 동안거

1975년 (52세/28)   6월 전남 구례 사성암 안거  광주  추강사에서 동안거

1976년 (53세/29)   전남 해남 대흥사 상원암 하안거

1978년 (55세/31)   전남 해남 도갑사 상견성암 (3년 묵언 정진)

                  * 1979년 「금강심론」 발간 *1980년 「정토삼부경」 발간

1981년 (58세/34)   백장암 뒤 사자암에서 한철 나시면서 「약사경」 번역하시다

1982년 (59세/35)   1월 전남 남원 백장암(산내면)

1983년 (60세/36)   해남대흥사 남미륵암

1984년 (61세/37)  가을 경기도 안성 칠장사(七長寺)에서 사부대중에게 소참법문

                 * 법문을 정리하여 1989년 「정통선의 향훈」책으로 발간

1985년 (62세/38) 태안사로 오셔서 안거, 가을 20여명의 스님들과 함께 3년 묵언결사

                 * 1986년 포교유인물 금륜(金輪) 창간

1988년 (65세/41) 3년 결사회향

1989년 (66세/42) 전북 내장산 벽련선원에서 대중15분과 함께 동안거

1990년 (67세/43) 3월 서울 정중선원(淨衆禪院) 개원. 옥과 성륜사(聖輪寺) 창건.

                 혜운사 중창

1993년 (70세/46)  태안사 금강선원에서 스님들만 상대로 3월18-3월23(5박6일)주야로

                 특별법회 * 법문을 정리하여 1995년 「원통불법요체발행」

1993년 (70세/46)  1월 완도 범혜사(梵惠寺) 창건

1995년 (72세/48)  미국 카멜 삼보사에서 1월20일-1월22일(2박3일) 사부대중에게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 개최

                 7월 1일, L.A,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3년 결사 묵언 정진

1998년 (75세/51)  4월 3년 결사 묵언 정진회향

                 귀국 동안거 하동 칠불사(七佛寺) 아자방에서 동안거

1999년 (76세/52)  10월 미국금강선원에서 배나무 4백여 주 손수 옮겨 심다가 탈진 귀국

200년  (77세/53)  제주서귀포 토굴에서 동안거 * 육조단경소참 법문

2001년 (78세/54)  제주도 자성원(自性苑) 개원

2002년 (79세/55)  5월 5일 서울 도봉산 광륜사(光輪寺) 개원

                 * 대중 포교지 광륜(光輪)창간

                 * 가을 강원도 횡성에서 「육조단경」 번역

                 * 2003년5월 「육조단경」 발간

2003년 (80세/56)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옥과 성륜사(聖輪寺)에서 열반



* 큰스님의 연표는 여러분의 증언과 “성자의 삶”책에 근거해서 작성 했습니다 혹시 오류가    있다면 연락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