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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청화대종사 행장·연보

행  사  일  정



        10 : 30 ~ 11 : 30        개회식

                                  인사말씀

                                  축  사

                                  격려사


                  제1부          사   회 - 진철문(동국대)

        11 : 30 ~ 12 : 00       제1발표 : 대 주(상좌)

                          ‘청화대종사 행장· 연보’   

        

       12 : 00 ~ 13 : 00       점   심


                  제2부          사   회 - ○○○

        13 : 00 ~ 13 : 30       제2발표 : 최병헌(서울대)

                           ‘청화대종사의 역사적 조명’

        13 : 30 ~ 14 : 00       논   평 : 박건주(전남대)


        14 : 00 ~ 14 : 30       제3발표 : 월암스님(벽송사)

                           ‘청화대종사의 사상적 조명’

        14 : 30 ~ 15 : 00       논   평 : 조준호(동국대)

        15 : 00 ~ 15 : 10       휴   식


                  제3부         사   회 - ○○○


        15 : 10 ~ 16 : 10       질의 및 종합토론

                                 토론자 : ○○○


        16 : 10 ~               감사인사  



청화대종사 행장·연보



상좌 대주 분향 근서

上佐 旲宙 焚香 謹書





차례


1. 들어가는 말

2. 행장(行狀)

3. 연보(年譜)

4. 결어(結語)




1. 들어가는 말


   불교가 전해 온지 이천오백여년을 두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만유(一切萬有)의 근본성품은 차별이 없는 불성자체(佛性自體)이며, 우리의 영원(永遠)한 본향(本鄕)이기도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성취함에 있습니다.


  이러한 불교 본연의 지도원리(指導原理)는 역대조사(歷代祖師)들에 의해 시공(時空)을 넘어 인류문화(人類文化)에 해탈열반의 행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청화대종사의 모습은 맑은 햇살과 투명한 바람을 닮아서 법명 그대로 맑아서 빛나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미소가 그랬고, 어떠한 자리나 지위에도 걸리지 않는 삶이 그랬고, 청정계율과 한 치의 망념 없이 순일한 정진과 모든 사람을 대할 때의 하심(下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행자의 거울이셨습니다.


  청화대종사의 출현은 세계평화와 부처님 정법(正法)을 통종교(通宗敎)로 승화(昇華)하는 말법시대(末法時代)의 큰 희망이요, 금타존사(金陀尊師)의 법통(法統)을 잇는 수희대경(隨喜大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화사상연구회’에서는 2003년(불기 2547) 9월 27일 전남 곡성 성륜사(聖輪寺)에서 “정통불법의 재천명”이라는 주제로 시작한 이래 2007년까지 3차례에 걸쳐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그 동안 2년에 한 번씩 실시해왔는데, 금년에는 “청화사상의 포괄적 조명”이라는 주제로 이와 같이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대종사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뒤에 생전의 행장에 대한 자료정리의 중요성을 느끼고 여기저기에 기록된 행적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옛과 오늘이 있다지만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종사는 가셨지만 그 분의 법신(法身)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2. 행장(行狀)


  1) 탄생 및 유년시절


  대종사께서는 1923년(불기 2467) 계해(癸亥) 음 1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연리 697번지에서 탄생하셨다.


  본향은 진주(晉州)이며, 부친 강대봉씨(姜大奉氏)와 모친 밀양박씨 박양녀(朴良女)의 차남으로 속명은 호성(虎成)이다.


  대종사의 집안 살림은 농토가 많아 부유하셨고, 효성이 지극하셨으며, 글과 글씨, 그림 솜씨가 뛰어나셨고, 아코디언·피리·풍금·달리기 유도 등 예체능에 뛰어난 자질이 있으셨다.


  또한 시험성적은 거의 수석을 차지하셨고, 성격은 극히 인정 많고 후덕하며, 지혜로워 따르는 사람이 많아 자연히 주위 사람들의 구심점(求心點)이 되셨다.


  대종사께서는 일제 강점기(强占期)에 고향에서 망운소학교(望雲小學校)를 마치셨다.


  1937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지인(知人)의 권유로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팔이, 분뇨수거 등 피나는 고학(苦學)으로 동경대성중학(東京大成中學)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무안 일로농업실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 무안 망운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42년, 부모님의 뜻에 의해 성삼녀(成三女) 청신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인해 강제로 징병되어 일본군 해군훈련소가 있던 진해에서 4~5개월의 가혹한 훈련도중 8.15해방을 맞아 징병에서 벗어났다.


  대종사께서는 해방 후 교육활동에 관심을 두어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敎)에 편입하시고 졸업과 동시에 준비된 교육자의 자리에서 활발한 교사생활을 시작하셨다.


  대종사께서는 매우 의욕적으로 철학·문학·예술·역사 그리고 자연과학을 두루 포함하는 학문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시작(詩作) 중에 ‘작가의 갈 길’을 이렇게 적어 놓으셨다.


“작가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각이 정립된다면, 실제 면에서 보다 많이 작가를 괴롭히는 형식과 기술의 문제도 자연히 정립되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형태란 주제를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이상, 어떤 작가의 말대로 제2의 선택(형식의 결정)이 제1의 선택(주제의 결정)을 앞설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출가(出家)


  대종사의 출가인연은 친형이신 범룡(凡龍, 1943년)께서 당시 2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하게 되었고, 해방 후 좌우익(左右翼)의 이념대립(理念對立)으로 인한 인간적 고뇌를 느끼시던 차에 육촌 동생의 소개로 백양사운문암(白羊寺雲門庵)에 머물게 된 것이 계기가 되셨다.


  운문암에서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출가시(出家詩), 부설거사(浮雪居士)의 사부시(四浮詩)와 금타존사(金陀尊師)의 수능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를 열람하시고서 속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오직 진리탐구를 위한 발보리심(發菩提心)을 하게 되었다.


  1947년(불기 2491) 정해(丁亥) 음력 1월 16일(25세)에 ‘사상의 거처’를 찾아 출가하신 후에 발보리심(發菩提心)하여 송만암대종사(宋曼庵大宗師)의 상좌(上佐)인 금타존사를 은법사(恩法師)로, 법련당(法蓮堂) 정수선사(定修禪師)를 계사(戒師)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시니 법호는 무주(無住)요, 법명은 청화(淸華)이다.

  

   운문암 생활은 순수하게 참선을 위주하여 불공도 사절하고 식생활은 아침 죽공양, 점심 때 공양하고는 철저한 오후불식(午後不食)이었고, 일체 경비는 대중 전원이 탁발(托鉢)로 충당하였으며,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원칙으로 하였다.


  3) 망운중학교(望雲中學校) 설립


  1950년 여름, 대종사께서는 금강경(金剛經)을 영어로 번역하고자 광주에 나왔을 때 6·25사변을 만났다. 그리하여 갑자기 밀어닥친 난리 때문에 백양사 운문암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고향 향리(鄕里)를 찾았다. 그러나 인민군이 진입한 이후, 고향도 예외 없이 동족상잔의 유혈사태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1952년, 대종사께서는 무안군 운남면 연리에 사재(私財)를 털어 청운고등공민학교(靑雲高等公民學校, 현재 望雲中學校)를 설립하시어 후진양성을 위해 잠시 헌신하셨다.



  4) 선사상(禪思想)

 

  석가모니불로부터 전해 내려온 불조(佛祖)의 혜맥(慧脈)은 인도에서 전전상속(展轉相續)하여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렀다.


  금타존사(金陀尊師)께서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磨)에서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이르는 순선시대(純禪時代)의 선법(禪法)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입각한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염불선(念佛禪)으로 중흥(中興)하셨고 대종사께서 이를 계승(繼承)하셨다. 


  대종사께서는 출가 당시 화두선(話頭禪) 일색(一色)의 한국(韓國) 선풍토(禪風土) 시절에 금타존사께서 전수하신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첩경법문(捷徑法門)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과 수증론(修證論)인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와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성상(性相)을 관조(觀照)한 수능엄삼매도결(首楞嚴三昧圖訣)을 수행의 요체(要諦)로 삼아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행법(修行法)인 염불선(念佛禪)을 선택하셨다.


  또한 제종교(諸宗敎)의 교리와 동서의 제철학사상(諸哲學思想) 뿐만 아니라 현대물리학 이론까지도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일원상(一圓相)인 불성(佛性)으로 조명(照明)하여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실상(實相)으로 설파하셨다.


  특히 금타존사께서 찬(撰)하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순선시대(純禪時代)의 선법(禪法)을 계승한 것으로, 육조단경(六祖壇經)의 귀의자성(歸依自性) 삼신일불(三身一佛)에 입각한 심즉시불(心卽是佛)의 자성(自性)을 참구(究)하는 자성선(自性禪)이자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여실(如實)히 밝힌 최상승선(最上乘禪)의 행법(行法)이며,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성취하는 염불선(念佛禪)의 행법임을 교시(敎示)하셨다.


  대종사께서는 세계평화와 유심정토건설(唯心淨土建設)을 위해서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분파적 제사상(諸思想)과 이념을 원융회통(圓融會通)하여 종파와 교파를 초월하여야 가능하다고 역설하셨다.


  5) 만행(萬行)


  1953년, 대종사께서는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대박산에 혜운사(慧雲寺)를 창건하셨다.


  1959년, 해남군 현산면 조성리에 있는 두륜산(頭輪山) 양도암(養道庵)에서 6개월간 주석하신 후 진불암(眞佛庵)으로 옮기셨다.


  대종사께서는 진불암에서 4,5년 동안 지내시면서 대흥사에 주석하셨던 박영희 스님을 통해 초의선사(艸衣禪師) 문집을 열람하였다.


  대종사께서는 비구 대처 간의 싸움을 뒤로 하고 만행(萬行)을 자주 다니셨는데, 이 무렵에 다음과 같은 선시(禪詩)를 애송하셨다.


   미고삼계성(迷故三界城)    미혹한 까닭에 삼계가 성(城)이나

   오고시방공(悟故十方空)    깨달으니 시방이 공하네

   본래무동서(本來無東西)    본래 동서가 없나니

   하처유남북(何處有南北)    어느 곳에 남북이 있으리오


  1963년, 추강(秋江) 조응현 거사께서 대종사의 여법(如法)한 수행가풍(修行家風)에 감복(感服)하여 별장을 보시 하였는데, 이를 추강사(秋江寺)라 이름하여 주석하셨다.


  훗날 추강사는 조선대학교 학교 시설지구에 편입됨으로써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만 무등산 약사사(藥師寺)로 옮겨져 현존하고 있다.


   1964년, 대종사께서는 지리산으로 가서 백장암(百丈庵) 선원(禪院)에서 1안거를 성만(盛滿)한 다음, 다시 백장암 별도의 토굴에서 1안거를 성만하시고는 벽송사(碧松寺)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산정(山頂) 옛 암자자리인 두지터로 옮기셨다.


  1966년, 대종사께서는 화엄사 주지스님의 요청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주지를 맡으셨다.


  당시 태안사는 폐허와도 같았지만, 고려시대에는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는데 몽골군의 침입과 6·25 전쟁 등으로 대부분의 당우(堂宇)가 파괴돼버린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계곡 건너편에 있던 봉서암(鳳棲庵) 법당을 옮겨다 대웅전 불사를 해놓으시고는 새로운 토굴을 찾아 나섰다.


  1967년, 대종사께서는 동안거 결제를 위해 구례 사성암(四聖庵)으로 가서 암주보살에게 방세를 주어 아랫마을로 보내고 수좌(首座) 한 사람과 더불어 삼동(三冬) 한 철을 철저하게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하셨다.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남기셨다.


    폭설오산두(暴雪鰲山頭)    폭설이 오산 머리에 내리고

    회룡섬진류(回龍蟾津流)    용처럼 구비 돌아 섬진강이 흐르네

    천고유자명(天鼓幽自鳴)    하늘 북 그윽하게 스스로 울리니

    허명조심월(虛明照心月)    텅 빈 밝음은 마음 달을 비추네


  1968년, 대종사께서는 새로운 수행처를 찾아 경남 남해에 있는 호구산 용문사 염불선원·백련암·부소대(扶蘇台)로 향하셨다.


  1968년 겨울, 가까운 권속(眷屬)이 폐사찰의 목불상(木佛像)을 옮겨온 사건으로 인하여 누명을 쓰고 광주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영어생활(囹圄生活)을 하셨다.


  영어생활(囹圄生活)을 할 때 “비록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출가한 몸으로 수감자(收監者)의 신세가 되었다는 자책감에 하루 24시간을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하길 1주일 쯤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께서 실제로 감옥의 천정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친견하는 현전가피(現前加被)를 입으시고 곧 바로 풀려났다”고 한다.


  1969년, 경남 진주 월아산(月牙山) 기슭에 위치한 두방사(杜芳寺) 경내 뒤 정상 부근에다 토굴을 지어 겨울을 나셨다.


  1970년, 대종사께서는 전남 장흥군 부산면 심천리에 능엄사(楞嚴寺, 현 金仙寺)를 창건하셨다.


  1971년, 대종사께서는 부산 해운대 옆 혜광사(惠光寺)에서 정진하셨다.


  1972년, 전남 강진군 무위사(無爲寺)에서 하안거를 나셨다.


  1973년 4월, 대종사께서는 서울 서대문구 불광동에 있는 지인(知人)의 별장을 무주암(無住庵)이라 이름 짓고 안거하셨고, 9월에는 경기도 광명시 도덕산(道德山) 성도사(聖道寺)에서 안거 하시면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번역에 몰두하셨다.


  1974년 10월, 해남 두륜산 진불암(眞佛庵)에서 동안거 결제를 하셨다.


  1975년 6월, 구례 오산에 있는 사성암(四聖庵)에서 정토삼부경 번역불사를 계속하셨고, 9월 광주 무등산 추강사(秋江寺)에서 동안거(冬安居)를 나셨다.


  1976년 여름, 해남 두륜산 상원암(上院庵)에서 하안거를 나셨고, 11월 두륜산 양도암(養道庵)에서 동안거를 나셨다.


  1978년, 해남 두륜산 상원암(上院庵)에서 하안거 중에 금강심론(金剛心論)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번역을 마치시고, 영암 월출산 도갑사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삼년결사(三年結社)로 안거하셨다.


  1979년 5월, 금타존사의 불후의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금강심론(金剛心論)을 엮어 펴내셨다.


  1980년 5월 21일(음력 4월 8일), 대종사께서 부처님 오신 날 월출산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정토삼부경 머리말에 ‘산승(山僧)의 비원(悲願)’을 담으셨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가 다 고뇌와 빈곤이 없는 안락하고 풍요한 행복을 간구하고, 생노병사가 없는 영생(永生)의 이상향을 그리는 사무친 향수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화 현상은 비록 깊고 옅은 차이는 있을 지라도, 다 한결같이 인생고(人生苦)의 구제와 진정한 자유를 그 구경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다만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의 고액(苦厄)을 구제함에는 먼저 인간의 본질 곧, 참다운 자아(自我)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종교·철학 가운데서, 인간의 근본 바탕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밝히고, 영원한 안락의 경계에 인도하는 가르침이 불교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님의 거룩한 서원(誓願)과 부사의한 공덕으로 장엄된 이상향(理想鄕) 곧,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너무도 생생하고 인상적으로 밝히신 경전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인데, 이는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생활은 현대인의 불안의식과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데도 다시없는 청량제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잃어버린 진아(眞我)의 회복과 분열된 조국의 광복(光復)과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복지를 위한 가장 근원적인 최상의 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산승(山僧)이 미흡함을 무릅쓰고 정토삼부경을 번역하는 간절한 비원(悲願)이 있습니다.”


  1981년, 백장암(百丈庵) 금강대(金剛臺)에서 하안거 중에 약사경(藥師經) 번역을 마치셨다.


  1982년, 해남 두륜산 남미륵암(南彌勒庵)에서 수선안거를 하셨다.


  1983년 겨울, 해남 두륜산 대흥사 남미륵암에서 수선안거 하셨다.


  1984년 겨울, 경기도 안성군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에서 동안거(冬安居) 용맹정진 기간 중에 소참법문(小參法門)을 설하시어 ‘참선의 바른 길’을 일러주시고자 선의 종류, 방법, 자세에서부터 선정의 십종공덕, 염불십종이익, 계율, 유식(唯識), 해탈, 열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부분을 친필 노트로 정리하시어 사부대중을 지도하셨다.


  1985년 봄,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금강선원(金剛禪院)의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동안거부터 삼년결사(三年結社) 묵언정진에 들어가셨다.


  1986년 5월, 금륜(金輪) 창간호가 나왔다.


  같은 해 하안거(夏安居)부터 재가불자 선원인 정중선원(淨衆禪院)에서 20여명의 불자들이 수선안거를 시작하였다.


  12월 10일 대종사께서는 광주 금륜회관(金輪會館) 개관 법회에 축하법어를 보내셨다.


  1987년 5월 6일, 대종사께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불교신문과 회견하셨다.


  1988년 3월 3일(음력 1월 15일), 태안사에서 삼년결사(三年結社) 회향 및 동안거 해제를 봉행하였고, 5월 22일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한국경제신문과 회견을 가졌다.


  1989년 6월 30일 전남일보 최하림(시인, 당시 편집국장)거사와 회견을 가졌고, 4월 1일 법어집 정통선의 향훈이 간행되었으며, 10월에는 성륜사를 창건할 터를 다지기 시작하였고, 내장산 벽련선원(碧蓮禪院) 도감(都監) 몽산(夢山)스님의 권청(勸請)을 받아들여 열다섯 분의 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나셨다.


  1990년 2월 9일, 대종사께서는 해제를 앞두고 해동불교신문의 최유심 주간과 회견을 가졌고, 3월 1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정중선원(주지 태호스님)을 개원하셨으며, 5월에는 대중불교(대원정사 발행)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대중 불교의 빛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대종사를 특별히 소개하였다. 9월 성륜사 대웅전이 완공되어 첫 법회를 가졌고, 11월 20일에 혜운사가 중창되었다.


  1991년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설 명절을 보내시고, 3월 불교방송 초청법회에 참석하시어 설법하셨다.


  1992년 2월, 대종사께서 화엄사 선원 동안거 해제 법문을 하셨고, 3월, 태안사 금강선원에서 제방의 수좌스님들의 청법으로 7일간 원통불법(圓通佛法)의 요체에 대하여 특별법회를 가지셨다.


  5월 5일 중앙일보와 기자회견, 5월 11일 법보신문 논설위원 정병조 교수와 회견이 있었다.


  9월 9일에는 성륜사 대웅전·지장전·선원·요사채·정운당·일주문을 갖춘 대한불교조계종 설령산 성륜사가 위용을 드러내게 되었다.


  9월 20일에 미주(美洲) 순회법회차 출국하여 10월 25일 뉴욕 미주현대불교 창간 기념법회에 참석하시고 뉴욕 원각사(圓覺寺)에서 국제 보살 수계법회를 봉행하셨고, 11월 8일부터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에서 청화, 정조, 금산, 정귀, 정훈, 도륜, 정현, 광전스님 등과 동안거(冬安居) 결제를 하셨다.


  1993년 2월 5일 미주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 동안거 해제를 하셨고, 20일에는 샌프란시스코 보림사에서 보살계 수계대법회를 개최하셨다.


  3월 21일(음2월 29일)에 완도 범혜사 선원 상량식을 가지셨고, 5월 28일에는 한겨레, 광주일보, 광주매일 등의 일간지와 기자회견을 가지셨고, 11월 6일 대종사 법어집 원통불법의 요체가 출판되었다.


  1994년 4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미국 IBS대학에서 법문을 하셨다. 8월 월간 불광 ‘창간 20주년 기획 대담’으로 이남덕(전 이화여대 교수) 불자와 회견하셨다.


  1995년 1월, 미국 삼보사에서 동안거결제 중 사부대중을 위해 3일간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를 가졌다.


  5월 9일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에서 법문하셨다.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 '팜스프링 금강선원(Palm Springs Diamond Zen Center)'에서 정만, 대천, 광전, 선정스님과 함께 삼년결사(三年結社)에 들어가셨다.


  1998년 4월 5일, 대종사께서는 미국 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삼년결사 회향식을 가지시고 4월 9일 귀국하셨다.


  9월 13일에 부산 KBS홀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에 관한 법문을 하셨다. 11월 서울 성북동 길상사(吉祥寺)에서 법문을 하셨고, 12월 3일(음력 10월 15일)에는 지리산 칠불사에서 동안거를 결제하셨다.


  1999년 4월 5일 제주 불사리탑사에서 허응보우(虛應普雨) 대사 및 환성지안(喚醒志安) 대사의 천도재를 모셨다.


  2000년, 남원 실상사(實相寺)에서 대종사를 조실(祖室)로 추대하였고, 6월 6일에 청계산 정토사에서 만일염불결사대회 초대증명법사로 입재식 법어를 하셨으며, 10월 15일에 성륜사에서 벽산당 금타대화상 탑비제막식을 봉행하셨다.

 

  11월에 제주 표선 토굴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번역을 시작하셨다.


  2001년 2월, 대종사께서 해인사 천도재(遷度齋)에 초청을 받아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하셨고, 5월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 자성원(自性苑)을 개원하셨으며, 5월에는 성륜사에서 열린 국제철학대회에 참석하시어 법문을 하셨다. 10월에 성륜사 사천왕 조성 회향점안법회를 가졌다.


  6) 임종(臨終)


 2002년 3월, 대종사어록집인 진리의 길이 간행되었고, 5월 서울 도봉산 광륜사(光輪寺)를 개원하였다. 11월 강원도 횡성 진여원(眞如苑)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번역을 계속하셨다. 12월 9일(음력 11월 6일) 몇몇 제자에게 친히 사세게(辭世偈)를 적어 주셨다.


    辭世偈        임종에 즈음하여 적은 게송


    此世他世間    이 세상과 저 세상에

    去來不相關    오고 감은 상관치 않으나

    蒙恩大千界    은혜 입음은 대천세계만큼 큰데

    報恩恨細澗    은혜 갚음은 작은 시내 같기에 한이 되네


  2003년 1월, 대종사께서 육조단경역주(譯註)를 마무리하시고 6월에 간행되었다.


  6월 15일 서울 도봉산 광륜사의 보살계 수계식에 참석하시어 ‘마지막 법문’을 하셨다. 9월 27일~28일에 ‘정통불법의 재천명’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있었다.


   2003년 11월 12일(음력 10월 19일) 오후 10시 30분경,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도일(성륜사 주지)스님을 비롯한 상좌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적(圓寂)하시니 세수(歲壽) 81세요, 법랍(法臘) 56세셨다.


  7) 정진(精進)하셨던 도량(道場)


  대종사께서는 도처에서 근수정진(勤修精進)하실 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수행청규(修行淸規)로 삼으셨다.


        근고청중(謹告淸衆)    삼가 청정대중에게 알림


        생사사대(生死事大)    생사의 일이 가장 큰 일인데

        무상신속(無常迅速)    덧없는 세월은 속히 지나가니

        촌음가석(寸陰可惜)    짧은 시간이라도 아깝게 여겨

        신물방일(愼勿放逸)    삼가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


  대종사께서는 혜운사(慧雲寺)를 창건한 이래 50여 성상(星霜)을 제방선원(諸方禪院)과 토굴에서 일종식(一種食)·장좌불와(長坐不臥)·묵언(黙言) 등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마음으로 고행(苦行)하심은 가히 본분납자(本分衲子)의 귀감(龜鑑)이요, 계행청정(戒行淸淨)하심은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라 아니할 수 없다.


  일생을 청정한 계행과 철저한 두타행으로 수행정진해 오신 대종사께서는 원적(圓寂)하실 때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으로, 곡성 성륜사와 서울 도봉산 광륜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제접편달(提接鞭撻)하여 주셨다.


  대종사와 인연 있는 정진도량(精進道場)은 다음과 같다.


백양사 운문암(雲門庵), 무안 혜운사(慧雲寺), 해남 두륜산 양도암(養道庵), 진불암(眞佛庵), 광주 무등산 추강사(秋江寺), 보성 천봉산 천봉사(天鳳寺), 남원 실상사 백장암(百丈庵), 구례 화엄사 탑전(塔殿), 곡성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구례 사성암(四聖庵), 지리산 벽송사 지엄사적지(智嚴寺跡址), 남해 보리암 부소대(扶蘇台), 남해 호구산 용문사(龍門寺), 진주 두방사(杜芳寺), 두륜산 대흥사 상원암(上元庵), 장흥 능엄사(楞嚴寺, 현 金仙寺), 합천 해인사(海印寺), 부산 삼덕사(三德寺), 부산 혜광사(惠光寺), 강진 무위사(無爲寺), 배향산 무주암(無住庵), 광명 성도사(聖道寺), 월출산 도갑사 상견성암(上見性庵), 백장암 금강대(金剛臺), 해남 대흥사 남미륵암(南彌勒庵), 안성 칠현산 칠장사(七長寺), 내장사 벽련선원(碧蓮禪院), 지리산 칠불사(七佛寺), 미국 카멜 삼보사(三寶寺), 팜스프링 금강선원(金剛禪院), 곡성 성륜사(聖輪寺), 제주 성산 자성원(自性苑), 서울 도봉산 광륜사(光輪寺), 횡성 진여원(眞如苑) 등.


  8) 불사(佛事)


  대종사께서는 후학들의 정법수행(正法修行)과 중생교화(衆生敎化)를 위하여 선불장(選佛場)인 무안 혜운사(慧雲寺)를 시작으로 곡성 성륜사(聖輪寺)․완도 범혜사(梵惠寺)․미국 금강선원(金剛禪院)․제주 자성원(自性苑)․진안 영불사(永佛寺)․서울 광륜사(光輪寺) 등을 창건하시고, 성륜재단법인(聖輪財團法人)을 설립하셨다.


  미국 삼보사(三寶寺)와 곡성 태안사(泰安寺)를 중창(重創)하시어 삼년결사(三年結社)와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을 제접편달(提接鞭撻)하시고 국내외 다수의 전법도량(傳法道場)을 건립하셨다.


  9) 저서(著書) 및 역서(譯書)


  대종사께서는 금타존사의 유고(遺稿)를 모아 금강심론(金剛心論)으로 합편(合編)하시고, 정통선의 향훈과 원통불법의 요체 등 법어집(法語集)을 저술하셨다.


  또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약사경(藥師經)육조단경(六祖壇經) 등의 역주(譯註)하셨다.



3. 연보(年譜)

  1923년(불기 2467) 계해(癸亥) 음 1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연리 697번지에서 탄생


  일제 강점기(强占期)에 고향에서 망운소학교(望雲小學校)를 졸업


 1937년(15세)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대성중학(東京大成中學)을 졸업


  귀국 후 무안 일로농업실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 무안 망운             소학교에서 교사생활 시작


  1942년, 부모님의 뜻에 의해 성삼녀(成三女) 청신녀와 결혼


  1945년, 진해(鎭海)에서 훈련도중 8.15해방(解放)을 맞이함


  광주사범학교에 편입하시고 졸업과 동시 교사생활 시작


  1947년(불기 2491) 정해(丁亥) 음력 1월 16일, ‘사상의 거처’를            찾아 출가하신 후에 발심(發心)하여 금타존사를 은법사            (恩法師)로, 법련당(法蓮堂) 정수선사(定修禪師)를 계사             (戒師)로 수계득도(受戒得度)

 

 1950년, 금강경(金剛經)을 영어로 번역하고자 광주에 나왔다가 6·25            를 만남


  1952년, 무안군 운남면 연리에 청운고등공민학교(靑雲高等公民學            校, 現 望雲中學校) 설립


  1953년,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대박산에 혜운사(慧雲寺) 창건


  1959년, 해남 두륜산(頭輪山) 양도암(養道庵)에서 6개월간 주석


  1959년, 진불암에서 초의선사(艸衣禪師) 문집을 열람


  1963년, 조응현 거사께서 보시한 별장을 추강사(秋江寺)로 개명


  1964년, 지리산 백장암(百丈庵) 선원(禪院)에서 1안거를 성만(盛滿)

          백장암 별도의 토굴에서 1안거 성만

          벽송사(碧松寺) 옛 암자인 두지터로 옮김


  1966년,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대웅전 불사 


  1967년, 구례 사성암(四聖庵) 동안거 성만(盛滿)


  1968년, 경남 남해 호구산 용문사 염불선원·백련암·부소대(扶蘇            台)로 향함


 1968년 겨울, 누명을 쓰고 광주교도소 3개월 영어생활(囹圄生活)


  1969년, 경남 진주 월아산 두방사(杜芳寺) 경내 뒤 토굴생활


  1970년, 전남 장흥 능엄사(楞嚴寺, 현 金仙寺) 창건


  1971년, 부산 해운대 혜광사(惠光寺) 정진


  1972년, 전남 강진군 무위사(無爲寺) 하안거 성만


  1973년 4월,  서울 불광동 별장을 무주암(無住庵) 개명

          9월 광명시 성도사(聖道寺)에서 정토삼부경 번역


  1974년 10월, 해남 두륜산 진불암(眞佛庵)에서 동안거 결제

  

  1975년 6월, 구례 사성암(四聖庵)에서 정토삼부경 번역

          9월 광주 무등산 추강사(秋江寺)에서 동안거


  1976년 여름, 해남 두륜산 상원암(上院庵)에서 하안거

         11월 두륜산 양도암(養道庵)에서 동안거


  1978년, 상원암 하안거 중 금강심론 번역, 정토삼부경 간행

          영암 월출산 도갑사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삼년결사


  1979년 5월, 금타존사의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금강심론 간행


  1980년 5월 월출산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정토삼부경 번역


  1981년, 백장암(百丈庵) 금강대(金剛臺)에서 약사경 번역


  1982년, 해남 두륜산 남미륵암(南彌勒庵)에서 안거


  1983년 겨울, 해남 두륜산 남미륵암에서 안거


  1984년 겨울, 경기도 안성군 칠현산 칠장사(七長寺)에서 동안거


  1985년 봄, 곡성 태안사 금강선원(金剛禪院)의 조실로 주석

         동안거부터 삼년결사(三年結社)로 묵언정진


  1986년 5월, 금륜(金輪) 창간호 출판

         하안거(夏安居)부터 정중선원(淨衆禪院) 개원

         12월 10일 광주 금륜회관(金輪會館) 개관 법회 축하법어


  1987년 5월 6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불교신문과 회견


  1988년 3월 3일, 태안사에서 삼년결사 회향

          5월 22일에는 한국경제신문과 회견


  1989년 6월 30일 전남일보 최하림 거사와 회견

          4월 1일 법어집 정통선의 향훈이 간행

         10월에는 성륜사를 창건할 터를 다짐

         내장산 벽련선원(碧蓮禪院) 동안거


  1990년 2월 9일, 해동불교신문의 최유심 주간과 회견

          3월 1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정중선원 개원

          9월 성륜사 대웅전 완공

          11월 20일 혜운사 중창


  1991년 3월, 불교방송 초청법회 설법


  1992년 2월, 화엄사 선원 동안거 해제 법문

          3월 태안사에서 7일간 ‘원통불법의 요체’ 특별법회

          5월 중앙일보, 법보신문과 회견

          9월 9일 대한불교조계종 설령산 성륜사 도량이 갖춰짐

          9월 20일에 미주(美洲) 순회법회차 출국

          10월 25일 뉴욕 미주현대불교 창간 기념법회 참석

          뉴욕 원각사(圓覺寺)에서 국제 보살 수계법회를 봉행

         11월 8일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에서 동안거 결제


  1993년 2월 5일 미주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 동안거 해제   

         20일에는 샌프란시스코 보림사에서 보살계 수계대법회

         3월 21일, 완도 범혜사 선원 상량식

         5월 28일에는 한겨레, 광주일보, 광주매일 등과 기자회견

         11월 6일 법어집 원통불법의 요체가 출판


  1994년 4월, 미국 IBS대학에서 법문

         8월 월간 불광포교지 기획으로 이남덕 불자와 회견


  1995년 1월, 미국 삼보사에서 ‘순선안심탁마법회’ 봉행

         5월 9일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 법문

         6월 1일 미국 ‘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삼년결사 입재


  1998년 4월 5일, 미국 팜스프링 금강선원 삼년결사 회향

         9월 13일에 부산 KBS홀에서 법문

         11월 서울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법문

         12월 3일 지리산 칠불사에서 동안거를 결제


  1999년 3월, 서울 심우선원(尋牛禪苑) 법문


  2000년, 남원 실상사(實相寺)에서 대종사를 조실(祖室)로 추대

         6월 6일에 청계산 정토사 만일염불결사대회 입재식 법문

         10월 15일에 성륜사 벽산당 금타대화상 탑비제막식

         11월에 제주 표선 토굴에서 육조단경 번역 시작


  2001년 2월, 해인사 천도재에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5월 제주도 성산에 자성원(自性苑) 개원

          5월에는 성륜사에서 열린 국제철학대회에서 법문

         10월에 성륜사 사천왕 조성 회향점안법회


  2002년 3월, 대종사어록집인진리의 길 간행

           5월 서울 도봉산 광륜사(光輪寺) 개원

          11월 강원도 횡성 진여원에서 육조단경 번역

          12월 9일 사세게(辭世偈)를 내놓음


  2003년 1월, 육조단경 역주(譯註)를 마무리 후 간행

          6월 15일 서울 도봉산 광륜사 ‘마지막 법문’

          9월 27일~28일에 ‘정통불법의 재천명’ 학술세미나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성륜사 조선당에서 원적(圓寂)


  2007년(불기 2551) 10월 13일 성륜사 청화대종사 탑비 조성



4. 결어(結語)

 

  큰스님의 행장(行狀)과 연보(年譜)를 준비하다보니, 큰스님께서 출가하신 후 50여년 동안 오로지 수행과 교화에만 헌신해 오신 모습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자로서 단 한 번만이라도 인연이 있었던 분이라면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들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귀감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큰스님의 법체는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후학들에게 남겨주신 정통불법(正統佛法)의 향훈(香薰)은 온 누리에 두루합니다.


  그 동안 큰스님과 인연이 있어서 큰스님의 흔적을 남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큰스님의 행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성자의 삶이라는 책을 엮어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한 저에게 우리 시대의 큰 스승으로 오시어 맑은 햇살처럼 빛나는 소중한 분으로 살다 가신 은사스님의 행장(行狀)을 준비할 수 있는 인연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생전에 못다 한 시봉(侍奉)과 보은(報恩)을 큰스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맑고 밝은 수행자의 모습을 본받아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배우고 실천하여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회향할 것을 다짐합니다.



2009년(불기 2553) 9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