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이
큰 자비에 귀의 합니다.
모든 정신적인 스승들에게 귀의합니다.
믿음의 신령(神靈)들에게 귀의합니다.
아띠샤가 지은 이 작은 책에는 ‘마음 바꾸기’에 관한 111행의 도움말이 담겨 있는데, 먼저 ‘큰 자비에의 귀의(歸依)’로 시작되어 있으니, 완전히 깨달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근원이 바로 큰 자비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정신적인 스승들에의 귀의를 말했는데, 이는 바로 마음의 계발과 경험 모두가 도(道)의 스승들에 대한 헌신과 믿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이 마음의 수행을 성취시켜 주는 기초이다. 나로빠(Naropa)와 그의 스승 틸로빠(Tilopa) 두 사람 다 영적인 이끎을 받지 않고서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끝으로 ‘믿음의 신령들’에의 귀의를 말했는데, 믿음의 신령들이란 깨달은 마음의 어떤 면들을 특히 뚜렷히 나타내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그런 면들을 스스로 체득하고자 할 때는 그런 높은 존재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상적인 보리심’을 일구기 위해 명상할 때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를 믿고 의지해야 하며, ‘비어있음’을 명상할 때는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의심을 끊고 오직 수행을 성취하기에 힘쓰라
명상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것에 대해 먼저 철저히 배움으로써 명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의심을 없애야 한다. 만약 스승이 단순히 「비어있음에 대해 명상하라」고만 하고 우리는 그 말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배우지 않는다면 실제로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어있음’을 명상함으로써 무엇이 부정(否定)되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텅 빈 방 같은 것을 생각해보는 따위로 명상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고자 하는 명상의 대상에 대해 공부를 하여 정확한 지적 이해를 가져야만 한다. 그 이해 위에서 마침내 지적인 사유의 차원을 초월할 수 있게 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하게 된다. 나아가 이 구절은 우리가 마음을 흩어지게 해서는 안되며 어떤 마음의 방황도 없이 외곬로 명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확실한 것이어야 하고 그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 스스로 택한 길이 틀림없다는 확신 아래 든든한 집중상태에서 명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 위에 엎질러진 물은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끌고 다닐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사람 저 사람의 서로 다른 견해에 따라 쉽게 흔들리는 명상이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확실한 정신적인 가르침과 불확실한 결과를 가릴 줄 알아야 하며, 의심의 여지없이 무엇이 옳은 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듣고 배워 아는 힘과 깊이 사유하고 분석하는 힘을 활용한다면 모든 애매모호한 것들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명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먹을 것을 잔뜩 쌓아두고도 먹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 좋은 먹을 것들이 썩어 버리거나 쥐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그 사람은 맛도 모르고 채 죽어버리게 될 것이다. 제 ․ 촌까빠 (Je Tzong-K'a pa)는 말하기를 「가르침을 듣고 이론적 지식을 얻는 목적은 바로 그렇게 명상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각기 다른 능력의 정도에 따라 힘껏 가르침을 듣고 공부해야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거푸집으로 부어내듯이 다 똑같이 깨닫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유의하여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치 박물관의 안내자처럼 전시된 물건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물건들이 그 자신에게 아무런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이 될 뿐이다. 수행을 함에 있어서는 덮어놓고 남의 본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살펴보아 거기에 맞게 명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돌아오는 것은 좌절 뿐이다.
졸음, 멍청함, 게으름을 떨치고 항상 뜨거운 노력을 쏟아라
우리는 명상을 방해하는 게으름, 마음의 방황, 멍청하고 흐릿한 마음의 상태를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개를 곧추 세우고 명상을 시작해도 오래지 않아 고개가 가슴으로 수그러들면서 잠들어 버릴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의 약점을 찌르려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과감히 뛰어드는 용기를 불러일으키라고 부추겨 주려는 것이다. 또한 그런 모든 장해에 대비한다 해도 끝내 보람있는 명상이 되려면 강한 인내와 부지런함이 있어야 한다.
제 ․ 촌까빠가 말했듯이 「강한 인내의 갑옷으로 몸을 지키고 그 인내의 힘이 차오르는 달처럼 자꾸 커지도록」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챤드라키르티(Chandrakirti)가 말한 것처럼「깊고 얕은 모든 목표가 모두 강한 인내에서 온다. 인내만 있으면 무엇이든 성취된다.」
돌이켜 보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보아, 항상 모든 감각의 문을 지키라.
우리는 몸과 말과 뜻의 대문에 ‘반성’ 과 ‘깨어있는 마음’과 ‘주의 깊음’이라는 보초를 세워놓고, 몸과 말과 뜻이 그 세 대문을 거쳐나가 온전치 못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안에 들어있는 깨달음이라는 보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 세 문을 안과 밖에서 잠궈 놓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깊게 돌이켜보고 기억하는 기능[smurti] 은 마치 쇠갈퀴와 같다. 마음이 온전치 못한 곳으로 방황 할 때는 이 쇠갈퀴가 그 떠도는 마음을 나꿔채서 온전한 자리로 다시 끌어온다.
밤낮으로 세 번 거듭거듭 마음의 흐름을 살펴라
자기가 하는 행위가 자신의 미래의 삶에 이로운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순각적인 쾌락을 위한 것이지를 가리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마음이 흘러가는 모습을 살피고 분석해 보아야 한다.
제 허물은 드러내 말하고 남의 잘못은 들추지 말라.
제 결점을 숨겨 마음 속에 매어두는 것은 죄와 불안을 커지게 할 뿐이다. 그것은 남들 앞에 노출시켜 버리는 편이 훨씬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결점들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보리심을 일깨워내는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자칫하면 오해를 받거나 잘못 전해 질 수가 있으니 분별과 조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의 허물을 살피는 태도여서는 결코 안된다. 남의 허물은 보고 제 잘못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거울이 밖의 것은 잘 비춰 보이지만 거울 자체는 절대로 비춰 보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비판하는 날들의 허물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허물이 그들에게 내비춰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또 그것들을 우리가 눈여겨 보지도 않을 것이다.
나아가, 남들에게서 무엇이든 허물이나 결점이 보일 때는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우리의 통상적인 착각에서 비롯되는 지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남의 허물은 실은 그 사람이 과거에 한 행위, 감정적 괴로움, 그리고 그 상태를 보는 우리의 지각방식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로 독자적이고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결점의 소유자란 아무데도 없다. 이런 방식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끝까지 파헤치고 분석하여 그런 인식이 ‘비어있음’을 되새기는 기회로 이용할 수가 있다.
제 장점은 감추고 장점은 들추어내라
제가 가진 지식이나 업적은 자랑할 아무런 필요도 없다.
제 ․ 촌까빠는 말하기를「그대 자신이 얻은 것과 꿰뚫어 본 것은 마땅히 항아리 속에서 타고 있는 등잔의 심지 같아야 한다. 그 빛은 안을 비추기는 하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높아진 지각력이나 투시(透視)같은 초능력(超能力)을 절대 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런 힘을 써 보이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아띠샤의 가장 가까운 티벳의 제자 드롬똔빠는 말하기를「그대가 만약 자기 자신의 허물은 보고 남들의 허물은 결코 들추기 않는다면, 비록 그대가 그것 밖에는 아무런 정점이 없다 해도 그대는 아주 슬기로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을 들추기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큰 다르마의 수행이다. 드롬똔빠와 그 밖의 깨달은 사람들은 다 굉장한 능력을 얻었지만 모두가 아주 겸손하기만 했다. 아띠샤 또한「나의 자비심은 내게 보리심을 가르쳐 주신 스승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어있음’ 에 대한 나의 깨달음은 그것을 내게 가르쳐주신 스승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나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한번은 드롬똔빠가 그 자신의 내력을 말해 줄 것과 도(道)에 들어서는 가르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드롬똔바는 겸손하게 거절했다. 스승인 아띠샤의 명을 받고서야 그는 마지못해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의 만달라 속에 또 하나의 만달라가 있고 그 속에 또 하나의 만달라가 있기를 열 여 섯개나 겹쳐지는 만달라로 되어있는 가장 복잡한 수행인 ‘까담의 열 여섯 알맹이(Sixteen Essences of Kadam)'였다. 이와 같은 겸손함으로 우리는 자신이 이룩한 것과 장점을 숨겨야 하며 반면 남들의 훌륭한 점은 들춰내어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칭찬해주는 것이 그들을 교만해지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남의 결점을 들추는 것은 실제로 제 허물을 숨겨보려는 부질없는 기도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저 남을 비판하는 말 뿐이라면 상대방은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것은 다만 나쁜 인상을 남길 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남들은 자기처럼 되게 하려는 적을 꺾어놓고 만다. 우리가 남들을 나쁘게 말하는 그대로 그들은 우리를 나쁘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법칙이다. 자신의 행동 그와 비슷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소득과 명예를 물리치고 또한 항상 명성에 대한 욕망을 물리쳐라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남들이 존경을 받고, 이름이 안고, 개인적인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모두 버리기만 한다면 우리가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될 것이다.
아무리 몇 백 권의 책을 공부한대 해도 그것이 그저 지적 만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반대로, 단지 몇 마디의 심적이 가르침을 순수한 동기에서 소화 흡수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몇 년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값진 보람을 안겨줄 것이다.
적게 바라고 적은 것에 만족하며 친절한 행위로써 갚아 주어라
다르마를 수행하든지 안하든지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만 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쓸데없는 것 들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무엇을 못하는 실망이라는 두 괴로움을 우리는 떨쳐버려야 한다. 작은 욕망에는 만족이 뒤따른다. 이 두 가지 성품이 없으면 경쟁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나가르쥬나는 그의 ‘단정한 편지(Friendly Letter)’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언제나 만족해 있다면
그때는 설령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도둑맞는다 해도
스스로를 가장 큰 부자로 여기리라.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그대는 그 돈의 노예일 뿐이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굴 속에서 쐐기풀을 먹고 살았던 밀라레빠 처럼은 결코 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쐐기풀로 간을 하고
또 양념으로 쐐기풀을 쓰네”
부처님 당시에 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는 외국에 장사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주려고 굉장히 귀하고 값진 물건을 가지고 왔다. 그는 귀국하자 그것을 임금님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상인은 설명하기를, 임금님은 물질적으로 최고의 부자이지만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다. 엄청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옷을 두 겹 세 겹으로 껴입을 수도 없고, 하루에 열 번씩 밥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임금이든지 거지든지 배고픔과 목마름을 만족시킬 만큼 밖에는 먹지 못하며, 몸을 보호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옷이 필요할 뿐이다.
나아가 아띠샤는, 항상 남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친절을 기억해야 하고 또 그들이 필요로 할 때는 우리는 그 친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일러준다. 남의 친절과 호의를 받고도 나중에 그가 필요로 할 때는 그를 무시하는 것은 목석(木石)같은 사람이다. 부처님은 어떤 경(經)에서 말씀 하셨다 -
“지각 있는 사람으로서 남들의 도움을 받아 부자가 되고는 도와준 사람들이 가난해 졌을 때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짐승보다 못하다. 개들도 제게 먹이를 준 사람을 고맙게 안다”
사랑과 자비를 명상하고 보리심이 자리 잡히게 하라
남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친절을 갚아주고자 소원함과 아울러 우리는 그들을 위해 순수한 사랑을 명상해야 한다. 사랑이 넘치는 가슴을 가꾸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남들의 정을 고마워 할 줄 모르면서 남들에게서 친절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정은 주어야 받아지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을 명상하고 남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는 것이 물질적 만족을 주는 것보다 낫다고 나가르쥬나는 강조했다. 그것은 더 오래가는 기쁨을 주는 것이다.
부처님은 설법에서 여러 번 말씀하시기를, 한 순간의 순수한 사랑의 마음일지라도 그것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주기보다 낫다고 하셨다. 이 말은 물질에 너그럽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순수한 사랑이 낳는 결과가 물건을 주는 것보다 강력하다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이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강한 소원이다.
자비를 명상하는 것 역시 부처님이 크게 강조하신 바이니, 자비는 곧 다르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손잡이만 쥐면 그릇 전체가 들어올려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비 곧 모든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꾸고 그것으로 다른 모든 다르마의 수행들의 핵심을 다 파악한 것이 된다.
우리가 보리심을 든든히 자리잡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이다. 이것이 계속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정화(淨化)가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아띠샤가 우리에게 보리심이 든든히 자리잡게 하기를 촉구하는 까닭은 우리가 남들을 위해 자비를 명상한다 해도 사람들이 우리를 악의로 대할 때는 자칫하면 낙담하고 주저앉게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사는 내가 어떻게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웃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애타적인 열망을 지속할 수가 있겠는가?」하는 생각도 날 것이다. 그러나 낙담과 좌절은 다만 보리심을 약화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이 아무리 잔혹한 말이나 행위를 가해 오더라도 거기에 자신이 흔들리게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사리불[Sariputra]은 마하야나의 길을 택하고 나선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보리심을 거의 일깨워내고 키운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보리심이 막 자리 잡혀가는 무렵에 어떤 사람 - 사실상 그는 악의를 부리는 자 곧 마라(mara惡魔)였다 - 이 와서 오른 팔을 잘라서 바치라고 요구했다. 사리불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오른 팔을 잘라 왼손으로 그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인도의 관습으로는 물건을 왼손으로 남에게 주는 것은 아주 옳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 사람은 받기를 거부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그대는 그대의 오른 팔을 그대의 오른 손으로 내게 주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 꼴을 당한 사리불은 「이처럼 악한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공부하고 보디찌다(bodhicitta,菩提心)을 가꿀 수 있겠는가」하고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보다 낮은 히나야나(Hinayana,小乘)의 길로 되돌아가 자기 자신만이 돌고 도는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는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순수한 보리심을 일구기를 힘쓰는 동안에는 항상 그런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상한다면 그들이 결코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가 우리에게 좋게 대해주려니 하고 천진난만한 기대를 갖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다만 실망 뿐이다.
인도의 위대한 논리학자인 디그나가(Dignaga,陳那)는 한때 논리에 관한 책을 쓰려고 동굴에서 명상을 했었다. 그때 그는 책의 첫 장을 써놓고 잠시 동굴에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동굴을 비운 동안에 그의 적 하나가 와서 써놓은 것을 모두 지워버렸다. 이런 일이 두 번 되풀이 되고 난 세 번째에 디그나가는 따로 「그런 짓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대가 나를 이기고 싶으면 와서 정정당당히 토론을 하자」고 적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적이 와서 토론을 했고 적이 패했다. 그러자 적은 노하여 저주와 더불어 마술의 힘으로 입에서 불을 뿜어내어 동굴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태워버렸다. 디그나가는 낙담하여 「이렇게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있다니 별 수 없구나. 이제 나는 이 글 쓰는 돌 판(石板)을 하늘로 높이 던져 버리겠다. 만약 이것이 다시 땅에 떨어진다면 나는 다시는 남들을 위해 일하기를 포기 하련다」고 말하면서 글 쓰는 돌판을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런데 그 돌 판은 땅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올려다보니 문수보살이 하늘에서 그것을 쥐고 있었다. 문수보살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 정신의 아들아, 그대는 참으로 큰 잘못을 저 지를 뻔 했구나」이렇게 격려를 받고 그는 다시 보리심을 일깨 웠고 『프라마나삼우짜야,集量論頌』(Pramanasamuccya) 곧‘올바른 논리의 요약’을 지어냈다. 사리불과 디그나가 같은 위대한 사람들도 그런 어려움을 당했으니 우리 역시 그런 장애가 있으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역경은 우리의 용기와 마음의 힘과 다르마에 대한 믿음의 깊이를 가늠해 보는 시험이다. 좋은 분위기, 좋은 환경에서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은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참된 시험은 역경에서도 우리가 수행을 한결같이 해나갈 수 있느냐를 보는 것이다.
열 가지 온전치 못한 행위(行爲)를 피하고 항상 믿음이 든든해지게 하라
우리는 윤리적인 규범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무너지게 하지 말며 우리의 몸과 말과 뜻을 통해 행동의 정직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열 가지 온전치 못한 행위란 죽이기, 훔치기, 간음, 거짓말, 이간질, 비방하기, 실없는 말하기, 남의 것 탐내기, 남을 해치기 그리고 불성(佛性)과 인과의 법칙을 믿지 않는 따위의 그릇된 견해를 품는 것이다.
순수한 윤리적 규범을 지키는 일은 과거와 미래의 삶들과 마음의 연속을 긍정하는 데에 따라 이루어진다. 왜야하면 불교의 근 본적 교리는 온전한 행위가 행복하고 이로운 환생으로 결과 되고 온전치 않은 행위의 결과는 불행한 환생으로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리의 실천 전체는 현재의 행동에서 미래의 결과가 나온다는 인과 율의 이해에 그 바탕이 있다.
진정한 다르마 수행의 징표는 방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염불은 하는 따위의 밖으로 그러나는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령정식으로 명상을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괴연 주의깊게 똑똑히 인과의 법칙을 지키느냐에 있다. 나아가 아띠샤는 믿음이 든든해지게 하라고 충고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믿음은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바탕에서 나온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은 그것이 얼마나 어김없는지를 스스로 경험할 때 저절로 나온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확실한 깨달음의 모태인 것이다.
노여움과 교만을 정복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라
노여움과 교만은 모든 마음의 움직임 가운데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노여움은 가장 강한 집착보다도 더 나쁘다. 집착은 온전치 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그리 심한 괴로움은 주지 않는다. 그러나 노여움은 곧바로 남들과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해를 미친다. 노여움과 교만은 보리심과 힘을 상당히 약화시킨다. 자만심이 강한 사람은 스스로를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상상하며 따라서 남의 도움말을 결코 듣지 않는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으니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제대로 새겨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산의 아주 똑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항상 제 위치만 지킨다. 마치 높은 고원(高原)은 여름이 되어도 가장 늦게 풀이 돋아 푸르러지듯이, 교만한 사람은 무엇을 참으로 아는 것도 맨 나중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최소한 노여움과 교만을 스스로 다스려 모든 행동에서 겸손해 진다면 그는 가는 곳마다 누구에게서나 환영받고 행복해 질 것이다.
그릇된 생계를 피하고 참된 다르마의 삶을 살라
훔치거나 빼앗는 것으로 생계(生計)를 세우고, 또는 무엇이든 남을 속이는 일로, 생계를 세워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단지 남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먹는 일조차 깨달음에는 방해가 된다. 그릇된 생계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아첨하기요, 둘째는 그가 전에도 무엇을 주었으니 이번에도 주어야 한다고 누구를 몰아붙이기요, 셋째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잘못한 허물이 있다고 꾸며대어 그 보상으로 물건을 내놓게 하기요, 넷째는 뇌물을 주기 그리고 다섯째는 속이기이다.
훔친 물건으로 살아가는 것은 특히 옳지 않은 생활 수단이다. 그렇게 사는 것은 남의 정당한 소유물을 부당하게 자기가 소모하는 것이기에 그대로 남들을 해치는 짓이다. 만약 누가 훔친 물건을 우리에게 주려할 때는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거절해야만 한다. 가난하여 다른 방도가 전혀 없더라도 훔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빌어먹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훔치기의 결과는 더욱 심한 가난일 뿐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수 밖에 없다면 무엇이든 남이 주는 것을 고맙게 받도록 하라.
인도의 큰 스승 가운데 하나인 루이빠(Luipa)는 몹시 가난하여 갠지스 강가로 먹을 것을 얻으러 갔다. 거기서 그는 어부가 버리고 간 물고기 내장을 보고 「이것은 아무도 임자가 없으니 내가 먹기에 가장 좋은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그 는 그렇게 목숨을 이어가면서 탄트라의 수행을 하여 당대에 크게 깨달았던 것이다.
모든 세속의 소유물을 버리고 보다 귀한 보석으로 장식하라
아띠샤는 말 그대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소유물은 첫째로는 얻기에 힘들고 또 일단 얻으면 지키기가 어려워 그것을 잃을 위험이 따르고 지키려다 보면 목숨까지 걸게 되는 그런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떨쳐야 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때문에 인색함이 생기게 해서는 안되며, 또한 그것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생기게 해서도 안된다. 종교적인 물건에 인색한 것은 온당치 않으니, 그것을 우리의 재산의 일부로 여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의 피난처를 상징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섬기기 때문에 복을 준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없어질까 걱정하지 않게 된다. 참된 종교적 물건은 그 금전적 가치를 따질 것이 아니라 값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을 꾸며주는 물질적 장식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며 반대로 안에 있는 보다 귀한 사랑의 보석은 지켜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장식해 주는 이 안의 보석은 지켜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장식해 주는 이 안의 보석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 끝에 설명되어 있다.
모든 경박함을 버리고 한적하게 홀로 있으라
이 말은 광신적으로 열광하고 동굴에서 완전히 동 떨어져 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릇처럼 거듭 경박한 활동에 시간을 낭비하거나 쓸데없는 모임에 어울려 재미를 찾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심심풀이는 그저 우리의 수행을 약화시킬 뿐이다. 라사(Lhasa, 티벳의 서울)의 어떤 라마는 티벳의 변방에서 설법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그대들끼리 너무 자주 만나지 말라. 그저 이따금 한 번 씩만 만나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이곳에 온 목적을 어기게 된다. 정말 서로가 꼭 만나야 하고 언제나 어울려 즐겨야 한다면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이 도움말은 진지하게 다르마를 공부하고 수행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남들과 이따금 만나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렇게 하는 것은 마음을 흩어놓는다. 언제든지 두 사람 이상이 만나게 되면 자연히 실없는 잡담을 하게 되고 노여움이나 집착을 불러일으킬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한 위대한 명상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입문자로서 나는 이 산속의 생활이 즐길 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들과 동물들이 내게로 찾아와 주며 나는 노여움이나 집착 그 밖의 어떤 미혹의 바탕이 되는 생각도하지 않는 가운데 그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실없는 지껄임을 버리고 언제나 입을 다스려라
실없는 잡담과 불필요한 이야기는 결국 시간의 낭비가 된다. 그런 심심풀이는 과연 마음이 누그러지고 즐겁기도 하여 흔히 새벽까지 이야기에 팔리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새벽에 명상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코를 골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달라이 ․ 라마를 지도했던 트리장 ․ 린포쩨(Tri-jang Rinpoche)는 말하기를,
"그대의 마음이 착한 행위를 하기에 맞지 않는 상태에 있을 때는 누군가와 잡담을 나누지 말고 차라리 잠을 자라. 그러면 그대는 많은 덕을 쌓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부덕(不德)을 쌓지는 않으리라.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는 것은 친구와 잡담을 나누는 것보다 훨씬 심신을 풀어준다“
고 하였다.
닝마(Nyingma)파의 위대한 명상가인 펠트랄․ 린포쩨 (Peltral Rirnpoche)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은거할 준비가 되었으니 이야기하기를 완전히 멈춘다. 남들에게서 허물을 찾는데 내 마음을 쓰기를 그치고 대신 나는 안을 보기에 시간을 쏟는다. 삶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끝없이 이야기하는 데 쓰기에는 너무 짧다."
스승을 만나면 존경으로 봉사하라
스승을 만나면 항상 우러러 섬기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보살펴 드려야 한다.
가르침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과 길을 가기 시작한 사람에 대하여 그를 스승으로 아는 마음을 가꾸어라
우리는 다르마의 뜻을 꿰뚫어 본 사람과 수행을 하기 시작한 사람 양쪽을 다 우리의 스승으로 여겨야 한다. 수행이 우리보다 앞선 사람이든 또는 갓 시작한 사람이든 다르마를 따르는 일에서 무엇이라도 이룩한 것을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길에서 빗나가게 하는 벗을 버리고 덕이 있는 마음의 벗들에게 의지하라
어떤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도망쳐 나온 코끼리를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 그 대를 현혹시키는 친구를 무서워하라. 그는 그대의 몸과 마음을 망쳐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릇된 길로 이끄는 친구는 겉으로는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수행을 망쳐놓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기운을 흩어 놓을 수 있으니 그런 우정을 키워서는 안된다. 까담파의 게셰 포따와는 말했다.
“그릇된 친구는 머리에 뿔이 나 있지도 않고 이상한 옷을 입고 있지도 않지만 그대를 생사윤회의 속으로 더 깊이 빠뜨린다.”
이런 의미에서 심지어는 어머니 아버지까지도 때로는 그릇된 길로 이끄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나쁜 영향을 피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런 그릇된 친구들과 줄곳 어울린다면 마치 늘 석탄을 만지는 탄광의 광부는 얼굴과 손이 시커멓듯이 어둠에 물들고 말것이다. 만약 우리가 행동이 바른 사람들과 어울린다면 그것은 마치 벽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과 같아서 그들의 깨끗한 덕에 쌓이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 발전은 대부분 친구의 영향으로 좌우된다. 친구가 나쁜 본을 보여 준다면 아직 든든히 자리 잡히지 않은 우리는 그 영향을 받아 마음이 흐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어두운 친구들을 피해야 한다. 우리가 수행을 쌓아 든든한 자리 잡혀 힘이 생겼을 때에만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이롭게 해줄 수도 있고 또한 우리도 그들을 이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닝마파의 라마는 말했다.
“그대가 너그러운 사람과 함께 산다면 그대도 너그러워진다. 점잖고 행동이 바른 사람과 함께 살면 그대도 그렇게 된다. 그러나 그대가 온전치 못한 사람과 어울린다면 그대는 방종해지고 수행을 모두 망쳐 버릴 것이다 ”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있을 때는 자기가 왜 그렇게 있는 지를 잊지 말고 자기 자신을 더 나아가게 하려는 욕망과 수행이 아주 철저한 보디사트바(菩薩) 들은 누구에게나 좋은 벗이며 나쁜 친구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깨달음의 힘으로 선(善)과 악(惡)의 분별을 초월해 있지만 그들의 행위는 저절로 선(善)이 되는 것이다.
혹시 어떤 친구가 몹시 마음에 걸리고 짜증스럽다 해도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
남의 허물로 보이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의 반영이기 일쑤이다.
노여움과 슬프의 마음을 버리고
어디를 가든 즐거워 하라.
화를 내고 남을 공격하면 행복은 언제나 비껴가고 만다. 행복과 만족은 삶 자체와 나날의 상황을 대하는 우리 태도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다. 노여움을 품고 사나우면 아무리 돈이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그것을 즐기지 조차 못하지만 마음이 평화로우면 소박한 음식과 초라한 거처에서도 만족하게 된다. 심한 집착과 범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은 항상 괴롭다. 우리가 꾸는 꿈조차 부담이 된다. 참으로 다르마를 수행하는 사람은 한 꽃에만 끌리는 법 없이 이꽃 저 꽃으로 날아다니는 벌과 같아야 한다. 마음을 닦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괴팍스럽고 까다로운 것과는 달리 치우침이 없어야한다. 어떤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든가 사치스런 것을 선택하는 행위는 그저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더욱 조장할 뿐이며 전혀 불필요한 짓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그때그때 자신이 놓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장소에 너무 오래 있으면 친구와 적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리하여 그 환경에 친근감을 느껴 집착하게 된다. 제 ․ 촌까빠는 ‘떠돌이’라고 불리웠으니, 그가 어느 곳에 있다고 소문이 나고 사람들이 물건을 바치려고 찾아오기만 하면 당장 그 곳을 떠나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그렇게 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는 한 고장에 눌러 있으면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고, 설법을 하고, 사원을 세우고, 그밖의 훌륭한 일들을 해나갔던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애착에서 벗어나 있으라
만약 어떤 물건에 심한 애착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주어버리거나 팔아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버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집착을 줄이는 것이다. 열심히 명상하려는 사람들은 거친 감각적 자극들을 멀리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거처는 소박하고 시원해야 하며 복잡하고 사치스러워서는 안된다. 이런 까닭에 깊은 명상을 위해서는 동굴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동굴은 인위적 노력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며 따라서 명상수행자는 바위나 흙을 대하여 생기는 집착이 안락한 방보다 적어진다.
티벳의 위대한 명상의 스승은 똑메 ․ 장뽀(T'og-me Zang po)-'모든 붓다의 아들들의 서른 일곱 가지 수행'을 지은 사람이다-는 20대 후반에 동굴로 들어가 새와 짐승들을 벗 삼아 60까지 거기서 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명상을 하러 동굴로 간 것이 아주 이로왔다. 위를 쳐다봐도 누구도 높은 사람이나 친척은 없고, 아래를 봐도 하인이 없다. 나는 아무런 세속의 유혹이나 힘겨운 일 없이 내 마음만을 데리고 홀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마땅히 자신의 마음을 활용하여 뭔가 건설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그저 한결같이 이것저것 분별하는 일들에 마음을 흩어 놓기만 한다면 결코 참모습을 꿰뚫어 보지는 못할 것이다.
집착은 결코 좋은 환생을 가져다 주지 않으며
그것은 해탈의 생명을 죽인다.
아띠샤는 집착을 버릴 것을 아주 강조한다. 왜냐하면 집착은 이 삶에서의 행복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환생, 윤희로부터의 해탈, 또는 마음의 자유를 이룩할 기회마저 뭉개 버리기 떄문이다. 감각적인 탐욕과 열정의 집착에 맞서는 힘으로서 우리는 굳센 윤리성을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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