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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마음바꾸기(3)

어디서건 복된 길로 이끄는 수행의 기회를 보면

언제나 거기에 힘을 쏟아라


  무엇이든 우리가 하는 행동은 지혜의 저울로 달아보아 그 결과가 이로운 것일지 아닐지를 분간해야 한다. 어떤 행위가 만약 자신과 남들에게 그저 혼란과 불만만을 낳을 것 같으면 결코 하지 말라. 충동적으로 성급하게 행동하면 그 행위의 결과를 생각해보는 것을 잊는다. 나이든 사람들은 우리는 흔히 보수적이라고 보는데, 그들은 행동하기 전에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여러 가지 결과를 지그시 생각해 보고 나서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슬기롭게 활용하기만 한다면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근본적인 지혜를 갖고 태어났다. 우리가 그것을 활용하기를 게을리 한다면 바로 이 귀한 태어남에서 이루어야 할 목적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저 이 삶에서의 쾌락만을 위해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짐승들 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인간의 잠재력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맹세하거나 어떤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보리행경菩提行經』에서 샨티데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급히 맹세하지 말라. 먼저 그대가 그 맹세를 지킬 수 있는지를 잘 생각하라. 그리고는 어기지 않도록 그것을 잘 지키라. 그대의 맹세를 굳건히 지켜나가라”                      


무엇이든 하기 시작했으면 바로 그것을 먼저 이루어라.

모든 일을 이게 잘 해내라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리라.


  이 세계에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고 그 모두를 배우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그러므로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손 댈 것이 아니라 뭔가 이미 시작한 것을 끝내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의 취향에 가장 알맞은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남김없이 맛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함에 있어 우리가 그야말로 취미로 이것저것을 조금씩 해보는 사람처럼 여러 화신(化神)들을 따라 다녀보고 또 여러 파의 명상법도 해보고 한다면 그 중의 어느 것도 결코 성취할 수가 없다. 또한 여러 가지 종교들, 힌두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등을 조금씩 건드려보고 다닌다면 남는 것은 그저 혼란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며 또 단번에 생사윤회를 샅샅히 꿰뚫어 아는 큰 스승이 될 수는 없으니 하나씩 철저히 배워나가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어떤 학생은 여러 가지 외국어를 배워 보려 하지만 그러다 보면 그 중의 한 가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마는 수가 흔히 있다. 만약 한 가지 언어만을 잘 배우려 한다면 그 언어에 따르는 문화의 종교등 많은 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를 철저히 배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두 끝이 다 뾰족한 바늘로 바느질을 하는 것과 같으니 결코 진보가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하면 주의가 분산되고 집중되지 않는다. 티벳의 어떤 스님이 승원에 와서 처음에는 잠시 명상을 하다가 떠나더니 얼마 뒤에 다시 돌아와서 또 다른 것을 공부하곤 했는데 결국 그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가령 두 사람의 석공이 각기 벽을 쌓아 나가는데 한 사람은 꾸준히 하나하나 쌓아나가고 한 사람은 마음이 내키면 쌓다가는 말고 한다면 그렇게 이따금씩 부지런을 떨어보는 석공은 결코 맡은 벽을 완성시키지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꾸준한 석공 같이 우리의 정신의 집을 쉬지 않고 차근차근 지어놓아야 한다. 어떤 일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그저 몇 주나 몇 달 동안 명상을 하면 또는 1년쯤 수행하면 깨달음이나 영원한 기쁨이 얻어지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직관적 파악은 몇 해씩 수행을 하고서야 이루어진다. 보리심을 일깨워내기를 시작했다면 실제로 우리는 이 삶 전체를 그리고 미래의 삶 등까지도 모두 바쳐 수행하리라는 뜻을 세워야 한다. 시야를 이 한 삶의 한정된 범위 너머로 확대하여 훨씬 큰 테두리 안에 있는 사물을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힘쓰는 만큼 통찰을 키워나갈 수 있다. 우리가 보리심을 완전히 개발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 마음은 이타(利他)적인 마음이고 모든 것에 미치는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보다는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나쁜 것 좋아하기에서 언제나 떨어져 있으라


  우리는 그릇된 행동에서 나오는 쾌락을 물리쳐야 한다. 감정의 출동을 따라 하는 행동에서 나오는 즐거움은 곧 고통으로 결과 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 이 스스로의 어둠의 바람에 나부끼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완전히 뒤집힌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마땅히 우리는 능숙한 행위와 명상에서 나오는 영원한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언제든지 우쭐거리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런 교만을 눌러버리라.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라.


  자만심 또는 자부심은 가장 나쁜 감정의 움직임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보리심을 가꾸는 것으로 하여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면 누구나 우리를 경멸할 것이다. 오만하고 우쭐대면 누구도 사귀려하지 않으리라. 교만에 대한 대응조치로서 덧없음과 죽음을 명상하여야 한다.

  꾸준하고 안정된 삶의 경험을 갖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밀물과 썰물처럼 감정이 끊임없이 굽이친다. 어떤 때는 무엇인가를 성취한 듯 하여 자랑스럽다가는 또 자신의 더러움과 버릇이 기승을 부려 스스로 낙담한다. 그런 모든 감정들이 다 상대적인 설레임이니 실망하는 것은 우쭐거림에 이어져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것만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 큰 강물처럼 큰 변동 없이 흐르는 삶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게 성취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흥분해서도 안되며 또한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해서도 안된다. 만약 자기연민을 느낄 때는 모든 자질을 갖춘 귀한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된 자신의 행운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


비겁한 마음이 일면 마음의 장엄함을 찬양하라


  우리는 보살의 용기를 가꾸고 열렬한 노력을 수행에 쏟아 넣을 수 있도록 마음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용맹스럽게 수행에 임하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명상에 지치게 된다. 방울방울의 물로 큰 동이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가꾸어지는 것으로 해탈에 이르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미혹은 하나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니 마음을 올바른 길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미혹에서 완전히 풀려날 수가 있는 것이다.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는 이 가능성이 바로 마음의 그것의 장엄한 성품이다.


무엇이든 마음을 끌거나 뒤집는 것들이 나타나면 그것들의 비어있음을 명상하라. 그것들을 환영이고 그림자라고 보라.


  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것에 대한 강한 집착 또는 혐오가 일때는 그것을 마치 우리가 꿈이나 헛개비 또는 그림자를 볼 때처럼 여기는 것이 특히 효과적이다. 꿈은 생생히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환영이나 환각처럼 아무런 실체가 없다. 무엇이든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게 하는 것은 이렇게 환영으로 보아 넘겨야 한다.


비위를 건드리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메아리로 보라


  언제든지 비위에 맞지 않는 사나운 말을 들을 때는 우리는 그것이 자기 자신이 전에 했던 소리의 메아리라고 여겨야 한다. 불쾌한 소리는 우리 자신의 불쾌한 말의 메아리요, 찬양해주는 좋은 소리는 우리가 했던 좋은 소리의 메아리인 것이다.


몸에 해를 입으면 그것은 제 과거의 행위라고 여겨라


  일이 잘못되는 것과 몸에 상처나 해를 입는 것은 모두 자신이 과거에 한 미숙한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은 슬기로운 수행이다. 우리는 자기가 과거에 나쁜 행위를 저질렀음을 생각해야 하며 현재의 어려움이 바로 거기에서 나왔음을 보아야 한다. 재빨리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갈등은 끝나버린다. 온전치 못한 행위를 쌓아 나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결과 된다. 부정적인 행위와 문제를 끌어 모으는데는 곡괭이와 삽을 들고 열심히 팔 필요가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 어두운 생각만 잡아내면 되는 것이다. 문제가 밖에서 온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안을 살피고 찾는다면 영우한 행복의 상태에 닿을 수 있으려니와, 혼란과 갈등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다면 절대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들짐승의 시체처럼, 거리를 벗어나, 홀로 한적하게 지내라.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모든 노력을 자기를 관찰하며 마음을 길들이고 가라앉히는 데 쏟아야 하기 때문에 한적하게 홀로 사는 것이 좋다. 밖의 환경이 복잡할수록 마음속도 어수선하며, 밖의 환경이 복잡할수록 마음속도 어수선하며, 밖이 고요할수록 마음도 고요해진다. 그러므로 어수선하며, 밖이 고요할수록 마음도 고요해진다. 그러므로 아띠샤는 우리가 들짐승의 시체처럼 몸을 숨길 것을 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대개 주인의 집에서 죽지 않고 외딴 곳으로 가서 홀로 죽는다. 그처럼 우리는 집중적으로 명상하기 위해 외딴 곳에 은거해야 한다. 그러는데는 열렬한 노력 외에도 힘과 용기가 요구된다. 밀라레빠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친척들이 내가 잘 산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나의 적들이 내가 고생한다는 것을 모르며, 또 내가 누구도 슬퍼하는 사람 없이 외로이 죽는다면, 요기로서의 나의 소원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것은 진지한 명상 수행을 위해 가장 좋은 환경과 조건을 말한 것이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누구나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로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스승들이 어떻게 수행을 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는 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은 보다 큰 용기를 불러 일으켜줄 것이요, 또 아마도 몇몇 사람은 정말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하여 자기 자신과 남들을 궁극적으로 이롭게 하려고 나서기도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이어라, 스스로를 감추어라, 그리고 집착 없이 살아라 


  수행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들어갈 때는 과거의 큰 스승들이 명상하던 곳으로 가서 홀로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 장소가 주는 축복이 우리의 수행을 크게 도와주는 것이다. 예컨대, 불교의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고장인 붓다가야는 모든 붓다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고 앞으로도 그럴 곳이라고 한다. 그런 장소의 힘은 참으로 강해서 세속적인 사람마저도 그곳에 가면 영적인 느낌이 커져 사원을 순례하고 명상을 하려는 생각이 나게 된다. 그런 곳을 찾아보는 것은 우리의 뜻을 거듭 거듭 다져준다.


항상 뜻이 든든히 자리잡히게 하고, 게으름이나 지겨움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그 허물을 낱낱이 스스로에게 돌려 가슴에서 자책을 느껴라


뜻을 든든히 자리 잡히게 하라는 말은 언제나 우리가 하는 행위의 동기를 되새겨 확인하고 완전히 깨달은 이와 하나 된다는 목표를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까담 전통의 가장 비밀스런 열 가지 보배』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언제나 어떤 행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순수한 동기에 대한 금강석과 같이 굳은 확신과 의지를 일구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수행할 때는 우리의 명상하려는 뜻을 어떤 것도 꺾지 못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명상을 방해하는 게으름이나 지겨움 또는 설레임 같은 마음의 움직임이 일 때는 우리가 수행에 뛰어든 동기를 되새기면 재빨리 마음을 되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까담파의 게셰 방궁얄(B'ang g'ung gyal)은 게으름이 일 때마다 스스로 자신에게 타이르기를 「만약 네가 조심하지 않으면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폭로하여 네게 망신을 주겠다」고 했다. 우리도 이것을 본받아 마음 속의 스승을 따라 허물을 스스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단련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요히 상냥하게 말하라


  우리는 행동에 있어 서성거리고 허둥대서는 안되며 고요하고 차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가령 누가 길을 물으면 잘 알아듣지도 못하게 퉁명스런 몸짓으로 거칠게 대답하고 마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처럼 오만한 태도여서는 안된다. 교만하고 우쭐대는 것은 그릇된 지각만을 더욱 키울 뿐이다.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반감을 결정적으로 불러일으킨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제 길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도와주면 된다는 것을 알 때 조차도 오히려 반대의 말을 하여 악의를 사기도 하는 것이다.


사납고 찌푸린 표정을 짓지 말고 언제나 밝게 웃으라.

 

어떤 일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심술궂은 할망구처럼 찌푸린 얼굴이 되지 말고 그 일이 무엇이든지 밝게 웃으며 명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도움말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하다. 언제나 미소 띈 얼굴로 있으면 손님들이 끌려온다. 항상 찌푸린 얼굴로 사나운 표정이면 누구도 거래를 하려들지 않는다. 그런데 까담의 게셰 랑리 ․ 땅파 같은 이는 언제나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있어 ‘어두운 얼굴’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사람이었다. 한번은 제자 하나가 그에게 사람들이 잘못 알고 나쁘게 말하니 좀 웃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 돌고 도는 삶과 죽음 속에서는 나는 웃을 여유가 없다. 이 비참한 상태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자꾸 심각해진단 말이다”


잇달아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될 때는 아낌없이 기꺼이 주도록 하라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때는 우리는 자기가 가진 물건을 아껴서는 안된다. 언제나 후하고 너그럼게 대하여 「이것은 내것」이라는 강한 집착의 생각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모든 시기심을 떨쳐 버려라


  부러움 또는 시기는 행복에 대한 매우 큰 장애이다. 남들을 시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일에 성공했을 때 그것을 부러워하는 데서 생겨나는 분노나 원한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으며 다만 자기 자신에게 부질없는 불행을 가져올 뿐이다. 부러운 생각을 퇴치해 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기뻐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켜주려면 모든 시비를 피하고 항상 인내심을 가져라


  우리가 스스로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따지거나 강하게 반대하여 그들의 마음에 갈등이 일게 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어떤나라가 정치적으로 더 강력한가, 또는 더 진보했나, 하는 따위의 화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것은 정말 무의미 하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생각을 아주 완강히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견해의 차이는 절대로 해소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이런 종류의 토론에 말려들었을 때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동의해 주는 것이 최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가장 기쁘게 해주니까 말이다. 남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고 논쟁을 하면 그것은 부질없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그를 몇 시간씩 흥분해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말을 지그시 견디어낼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인내의 힘 없이는 다르마의 수행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아첨꾼이나 변덕장이가 되지 말고 항상 꾸준할 수 있으라


  누가 앞에 있을 때는 그에게 기분좋게 해주고 그가 없을 때는 당장 얼굴이 달라지는 두 얼굴의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안에서는 싫어하면서 밖으로는 좋아하는 척 하는 위선자가 되지 말라.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당장 친구가 되었다면 오래도록 친구로 있어야 한다. 누구나가 다 갖고 있는 결점이 있다고 친구를 갈아 치우고 한달쯤 뒤에는 남들 앞에서 그를 깎아내리는 따위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없고 마음의 확신이나 안정이 부족함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이다.


남들을 깔보지 말고 언제나 행동거지에서 공손하라.


  자기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또는 종족이 다른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공손히 대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하고만 사귄다. 만약 그들이 어쩌다 그런 지위나 재산을 잃었을 때는 언제 친구였더냐고 무시해 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야멸차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자기 자랑을 하며 자기처럼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잘못이다. 이 말은 우리가 돈이 많은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은 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나 모두에게 공손하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들에게 도움말을 줄 때에는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익을 생각해주라.


  충고나 가르침을 주어 남들을 도우려 할 때는 동정심과 자비심에서 그렇게 해야 하며, 결코 돈이나 명예나 존경을 얻기 위해 또는 빗나간 자만심에서 자기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해서는 안된다. 제자들에 대해 사랑과 자비를 느끼는 스승은 훨씬 잘 가르칠 수가 있는 법이다. 이런 성품  이는 의심을 골짜기를 메우지 못한다.


어떤 마음의 원리도 깔보지 말고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라


  우리는 자기 능력에 가장 잘 맞는 마음공부의 체계를 따라야하며 다른 전통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각기 다른 성질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전통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따르는 체계와는 전통을 따른다고 남을 그가 택한 길에서 실망하게 하며 비판하고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다른 종교 체계를 비웃고 헐뜯는다면 그것은 다르마를 저버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교를 차별하는 것은 성인들을 죽이고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종교의 기념물들을 파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


삼세(三世) 동안에 모아진 덕은 무엇이든지 모두 더없이 큰 깨달음에 바쳐라. 모든 중생들을 위해 복을 나누어 주어라.


  우리가 하는 능숙한 행위들을 우리 자신과 또한 모든 중생들의 성불(成佛)을 위해 바치는 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그것들을 보관해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능숙한 행위의 덕을 이 최고의 목표에 바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비롯되는 복이 그저 세속적인 이익으로 끝나버리거나 아니면 노여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아깝게 파괴되어 버리고 말 수도 있다.


항상 일곱 갈래의 기원과 길을 가려는 뜨거운 소원을 올려라.


  우리는 매일 일곱 갈래의 기원이라 불리는 예비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은 제단에 물그릇 일곱 개를 올리는 것으로 상징된다. 마음을 지닌 모든 존재는 안으로 부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감정의 갈등과 어리석음이라는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일곱 갈래의 기원 속에 담긴 방법으로 그것을 드러나게 할 수가 있다.


  일곱 갈래의 첫 번째는 몸을 내던져 절하기인데, 이것은 보통‘세 가지 가장 귀한 보배’속으로 피난해 들어가는 일과 이어진다. 절을 함에 있어서는 마음이 그 육체적 동작이나 회수(回數)를 헤아리기에 머물게 하지 말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 동기에 마음이 모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을 하는 데는 무릎과 손과 이마를 땅에 대는 반절을 하거나 온몸을 완전히 던져 펴는 온 절을 한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면서 이것은 바로 세상의 미혹과 비참에서 재빨리 몸을 뺌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절하기는 자만심을 꺾는 가장 강한 무기이니 이것은 바로 굴복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아띠샤는 이 수행을 크게 강조했다. 모든 특별한 예비수행 가운데서도 이것은 장애를 씻고 복을 쌓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행이다. 우리들 자신의 스승이 가르쳐주신 바에 따라 ‘참회의 수트라’같은 글이나 말을 절을 하면서 욀 수도 있다.


  둘 째 갈래는 공양 올리기 이다. 이것은 인색함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이다. 때에 따라 특정의 공양을 바칠 수도 있으나 대개는 깨끗한 물, 꽃 촛불, 향, 과자, 과일, 향수 등 무엇이든 아름답고 깨끗한 것을 올린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덟 가지 세속적 감정에 걸림이 없이 고른 것이어야 한다.

  셋째는 참회이니 이것은 세 가지 괴로움의 근원 곧 노여움과 애착과 어리석음을 무찌르는 힘이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저질러온 그릇된 행위들에 대한 강한 후회를 느끼고 마치 독을 마신 것처럼 느낀다. 그리고는 독을 마셔본 사람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듯 미숙한 행위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야 한다. 다음에는 진지하게 의지처를 향하여 보리심을 일깨워내야 한다. 우리가 온전치 못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오직 우리의 의지처인 귀한 세 가지 보배에 대해서이거나 다른 중생들에 대해서이니, 의지처로 진지하게 향하는 것과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그 허물을 씻어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절을 하거나 바즈라사트바(金剛薩埵)의 명상을 함으로써 미숙한 행위를 저지르려는 본능을 말한다.


  기뻐하기가 네 번째 갈래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착한 행위를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질투를 무찌르는 힘이다. 진정으로 기뻐하면 다음 생에 아주 좋은 얼굴을 타고나게 된다고 한다. 성자들과 깨달은 이들의 얼굴이 아주 보기 좋은 까닭이 이것이니, 그들은 과거에 다른 사람의 착한 행동을 보면 아주 기뻐하여 마지 않았고 항상 자비를 내뿜었던 것이다.


  다섯째 갈래는 깨달은 이들에게 법(法)의 바퀴를 돌리기를 계속하며 가르침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기이다. 이것은 우리의 앎을 부추겨 주니, 우리가 참모습의 깨달음이 부족한 어리석을 무찌를 마음의 칼을 마련하는 것은 다르마(法)를 들음으로써인 것이다. 마치 등잔에 불을 켜려면 성냥이 필요한 듯이 안에 들어있는 지혜에 불길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 정신적인 스승들의 이끎이 필요하다. 이런 실천들이 그릇된 견해를 고집하고 자기가 아는 것만을 내세우는 미숙한 행위를 막아주는 것이다.


  여섯째는 깨달은 이들에게 오래 살며 돌아가시지 말라고 부탁하기이다.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따위의 마음의 스승들에 대한 미숙한 행위를 없애주며 또한 우리 자신의 삶을 길이를 늘려주는 결과가 된다. 그러기에 이 수행은 ‘불멸의 감로’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자신이 얻은 복을 자기 자신의 불지(佛地)에 이르고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이 괴로움에서 풀려나도록 바치는 일이다.

  이 모두를 마친 뒤에 우리는 또한 길을 따르려는 소원의 기원을 드려야 한다. 다음 삶에는 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로 환생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다음 삶에는 ‘가르침의 왕’ 곧 온 나라의 일들을 항상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비추어 판단하는 지도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원과 같다.


이렇게 행한다면 복과 지혜가 모두 쌓여지리라


  여기서 ‘쌓임’이란 우리의 수행을 뒷받침해주는 밝은 힘의 뭉침을 말한다. 너그럽게 베풀어주는 실천을 통해 물질적인 ‘복(福)’의 쌓임은 깨달은 이의 완전한 루파까야(rupakaya, 色身) 곧 모양의 몸을 얻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지혜’의 쌓임은 모든 것들의 ‘비어있음’을 아는 것으로 이뤄지며, 깨달은 이의 완전한 통찰 곧 다르마까야(dharmakaya,法身)를 얻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두 가지 어둠이 뿌리 뽑혀, 사람의 모습을 얻은 목적을 달성하고, 비길데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 이루어지리라.


  우리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길은 참모습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막는 두 가지 어둠을 밝힘으로써이다. 두 가지 어둠이란 감정의 괴로움이라는 어둠과 모든 것의 지식을 가리는 어둠이다. 앞의 것은 윤회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며 뒤의 것은 불성(佛性)의 전지를 막는다. 우리는 수행에서 착실히 진보했을 때에만 그것들을 실제로 지우기 시작할 수 있다.


  두 가지 어둠 중에서 보다 거친 힘인 감정적 괴로움을 줄이지 않는다면 설령 물질적으로 풍족할 수 있는 모든 외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이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꿈꾸어 온 달 세계 여행을 실현시켰지만 진정한 보편적 행복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삶을 참으로 뜻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안’에서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이 삶 동안의 단 하나의 감정적 괴로움도 지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어머니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해 태어난 것에 불과하면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짐승과 다른 바가 없다.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자신들이 끊임없이 갖가지 감정의 흔들림을 겪고 있으며 그 흔들림이 흔히 심리적 갈등을 낳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도(道)를 따르기에 열심이면서도 이런 장애를 줄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수행은 기본적으로 천박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룻만에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양파와 같으며 나날이 계속되는 꾸준한 수행이 그 미망의 껍질을 한 겹씩 벗겨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느 날 우리는 그 물질 아닌 알맹이에 도달하여 우리의 참모습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이 완전한 깨달음은 어느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티벳의 한 명상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려야 하며,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젓가슴에 매달리듯 자기 자신을 스승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헌신이나 복종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의 수행은 직관적 통찰을 가꾸는 것은 전혀 자기 자신의 노력과 지혜에 따른     다는 것을 아는 위에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다르마의 수행이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들 모두들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함으로써 가르침의 핵심을 자신의 일상생활 속으로 소화 흡수함을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가르침을 많이 받고 잘 안다 해도 모두가 무의미해 진다 왜냐하면 가르침의 말들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보석, 윤리의 보석,

너그러움의 보석, 들음의 보석,

사유의 보석, 부끄러움의 보석,

지혜의 보석,

이것들은 일곱 가지 가장 귀한 보석이다.

이 일곱 가지 보석은 결코 닳지 않는다.

이것을 사람 아닌 것들에게 말하지 말라


  우리는 밖으로는 여러 가지 장신구를 한꺼번에 다 달고 다닐 수 없으나, 안으로는 이 일곱가지 거룩한 보석을 모두 달아 마음을 장식할 수 있다. 먼저 믿음의 보석이니, 우리의 의지처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든든한 믿음이다. 다음이 우리를 안팎으로 올바른 행실을 따르게 하는 윤리적 규범의 보석이다.


  다음의 너그러움의 보석인데,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인색한 사람이 될 것이고, 설령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마음은 가난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돈을 움켜쥐고 집착하다보면 우리는 그것을 착한 일에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니 그렇게 애써 감추어 두어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 너그러움의 보석을 지닌다면 그때는 비록 주머니에는 한 푼 밖에 없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남에게 나누어 주려 할 것이다. 너그러움이 없으면 재산이 절대로 늘지 않는다. 마음이 너그러우면 베풀어줄수록 더 많이 돌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너무 과하게 주면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러면 부질없는 어려움만 겪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용을 지켜야 하며 부질없이 돈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들음의 보석 곧 듣고 아는 마음으로 다르마를 듣고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수행의 방법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우리는 이런 보석을 간직하기 위해 상자를 장만할 필요도 없고 이것을 실어 나를 말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설령 감옥에 갇힌다 해도 이 들음의 보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혀 걱정 없이 편안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을 명상하는 데에 보람이 있게 활용할 수 있다. 반면에, 세속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유의 보석 곧 깊이 헤아리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며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렇지 않는 우리의 행위는 절대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이 말은 또한 남들의 비판에 대해 우리는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부끄러움의 보석 곧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바꾸어 말하면 정직하고 고결한 성품은 우리를 그릇된 행위에서 지켜주니, 정직하고 고결한 성품은 우리를 그릇된 행위에서 지켜주니, 남들이 자신의 이기성(利己性)을 보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는 남들 앞에서는 부끄러워 나쁜 행실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는 멋대로 하려고 든다. 그러나 ‘세 가지 가장 높은 보배’ 앞에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미숙한 행위를 삼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미숙한 행위를 삼갈 수가 잇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과거의 미숙한 행위를 깨닫고 뉘우치게 되어 더는 온전치 못한 행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보석 곧 지혜로운 의식으로 우리는 이로운 행동과 감정적 동요를 분별할 수 있다. 현재의 행동은 과거의 행동이 낳은 결과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감정의 충동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은 사물을 보는 순수한 눈을 흐리게 하나니 이것이 괴로움의 직접적 원인인 것이다. 지혜로써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피하게 된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보리심을 벗으로 삼고 위의 일곱 보석들을 우리의 재산으로 지닌다면 우리는 훌륭하게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레충빠가 스승 밀라레빠에게 티벳의 수도인 라사로 갈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을 때 스승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국 그가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레충빠가 떠나자 밀라레빠는 슬퍼했다. 사람이 슬퍼하는 까닭을 묻자 그는 말하기를 「달 같은 제자는 가버렸고 나는 뒤에 남은 한 마리 개와 같다」고 했다. 다시 사람들이 떠난 제자에게 어떤 재산과 동반자를 딸려 보냈느냐고 묻자 밀라레빠는 이렇게 대답햇다.


      “나는 그에게 일곱 가지 보석을 주어 보냈고 또 보리심이라        는 동반자를 딸려 보냈다. 그의 안전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이 일곱 가지 보석들은 결코 깨지지 않으니 그 가치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마음의 원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마음의 원리를 모르는 자란 행복은 다만 물질에서만 얻어진다고 우기는 사람들과 이렇게 귀한 도움말을 슬기롭게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카르마에 묶여있는 정령이나 유령 따위, 사람 아닌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살펴라. 홀로 있을 때는 마음을 살펴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부질없는 말로 그들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까담파의 한 스승은 말했다.

 

       “우리는 아주 옳은 것처럼 제 생각대로 판단하고 비판한다. 나는 내 입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입에 자물쇠를 채웠으면 좋겠다”


  홀로 있을 대는 마음을 살펴야 한다. 마음이 한곬로 집중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나 그런 집증력을 이루기 전이라도 흩어지는 마음을 든든한 집중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끊임없이 뒤로 끌어 오도록 해야 한다. 흔히 듣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상인이 열심히 명상을 하곤 하는데 그는 명상을 하면서 자기가 하는 장사를 잘 생각하여 고용인들에게 무엇을 일러줄 것인지를 생각해낸다. 그러나 그는 명상을 마치고 일어나면 그렇게 생각해 냈던 것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인은 또 그것을 생각해내려고 명상으로 돌아가곤 한다는 이야기이다. 명상을 하는 동안에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은 쉽게 버릇이 될 수 있으며 그러면 이른바 ‘명상’을 한다고 보내는 시간에 어떤 허깨비의 즐거움을 맛보는데 재미를 붙이게 된다. 우리는 그런 부질없는 마음의 방황을 피해야만 한다.


  이 책에 간추려져 있는 가르침들은 단지 다르마의 수행자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누구든 그저 훌륭한 삶을 살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삶이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건 않건 만약 우리가 과거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행동한다면 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이로움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들을 다정하게 대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수행을 지속하는 일에서는 황소같이 완강해야만 한다. 이런 티벳의 속담이 있다.


      “고삐를 코에서 머리로 둘러매라”

  코에 고삐를 꿴 짐승이 그 고삐를 잡은 사람이 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삐의 줄을 짐승 자신의 머리에 둘러놓으면 그 짐승은 온순해지고 상냥해지며 원하는 대로 돌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윤리적 규범이라는 고삐를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둘러맨다면 뭔가 외부적인 도덕의 굴레에 매일 필요가 없다. 규범이 안에서 나온다면 밖에서 이끌어주는 힘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르마의 수행은 그저 하나의 ‘의식(儀式)’으로서, 또는 의무로써 마지못해, 또는 유행을 따라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불교를 따르는 것은 불교가 갈수록 명성이 높아져서이거나 불교를 믿는 것이 하나의 ‘추세’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불교의 이로움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수행을 하든지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도와준다면 그것은 할 만 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이것으로 ‘보살의 보석염주’에 대한 풀이를 마치노라.



*마음 바꾸기 책은 20년 전에 불일출판사(가방 하르제야지음 박영철 옮김)에서 나온 책입니다.

정가는 500원에 불과하지만 지혜는 가름하기 힘듬니다

요즘에는 구할 수 없어 이현주 애기보살님(초등6년)의 원력으로 인터넷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정독하신다면 삶에 많은 이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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