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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염불수행

염불수행


염불수행의 의미


염불에서 말하는 념이란 지킴(守)을 뜻한다. 참 성품을 늘 드러나게 하고 끝없이 기르려면 그것을 지켜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염불에서 말하는 불이란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깨달음이란 참 마음을 밝게 비춰서, 늘 깨어 있어 어둡지 않음을 말함이니 한결같은 무념으로 밝고 뚜렷하게 깨닫고 이렇듯 밝고 뚜렷하게 깨달으면 온갖 생각이 끊어진다. 이것을 일러 참 염불이라 한다.

                                    [보조스님의 '염불요문'중에서]


염불이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 내어 부르거나 상호를 관상하거나 공덕을 의념 함으로써 부처를 보고 부처를 이루며 불국토에 왕생하는 수행법입니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으로 가장 더욱 대중적으로 행해지는 수행법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정토불교에서는 염불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수행체계와 방법를 세워 발전시켰으므로 요즘은 염불하면 극락왕생을 떼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정토신앙은 한마디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극락정토는 아미타불이 교주(주불)이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보처 보살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조적인 염불로 합니다.

이러한 정토신앙에 근거한 염불 외에도 독자적인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에 기반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염불이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염불이 불보살의 본원력에 의지하므로 타력신앙이라고 생각되지만 자력이 없는 타력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자력과 타력이 동시에 갖추어지는 수행입니다.

더구나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토에 나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정토에 날 수 없으며 보리심을 발하고 일심으로 염불행을 닦아야 합니다.

정토가 서쪽으로 십만팔천만리 밖에 있다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부처와는 그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실제로는 십선과 팔정도를 닦으면 그 거리는 바로 사라지고 곧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방극락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부처님도 바로 우리 마음의 바탕으로서 우리 마음이 청정해지면 무량한 광명이 이 마음으로부터 밝게 빛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양한 염불법 중에서 칭명염불이 주가 되었는데, 염불의 염이 억념, 작의 등의 의식작용을 의미하듯이 생각이 소리와 결합되어 일념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염불이란 입으론 부처를 부르며 마음으론 본성을 찾는 일,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찾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무슨 이익 있으랴.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 법문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되 분명하고 어지럽지 않도록 해야 하는바, 이처럼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게 염불이다.

                                                         [선가귀감]

염불수행의 역사


염불의 역사는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함경에 보면 삼념, 오념, 육념, 10념 등의 염법이 있습니다. 즉, 염불, 염법, 염승, 염계, 염시, 염천, 염휴식, 염안반, 염신, 염사의 수행법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여래 10호), 나무불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을 생각하는 삼염법, 부처님의 계율과 가장 깨끗하며 선한 공덕이 있는 하늘을 생각하는 오념법, 여기에 보시를 생각하는 것이 더해진 육수념이 있습니다.

그리고 육수념에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념휴식, 출입하는 숨을 세고 장단 등을 아는 념안반, 이 몸은 항상하지 않음을 생각하는 념신, 이 몸은 결국 죽는다는 염사 등을 더하여 십념이 되었습니다.

염불이 지금처럼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은 역시 정토신앙과 관련이 깊습니다.

정토신앙은 부처님의 본원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신앙으로, 정토왕생의 방법으로 염불이 권장되기 때문입니다.

정토신앙은 기원 후 1~2세기에 걸쳐 대승불교 운동과 함께 출가교단은 물론 재가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정토신앙은 인도에서 서역.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마명보살의 기신론,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과 지도론 또한 세친보살의 정토론 등에서도 염불은 부처님의 무량 공덕과 근본서원을 확신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 보살과 감응하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하기 쉬운 이른바, 이왕이수의 행법임을 찬양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혜원, 담란, 지의, 도작, 선도, 자민, 지례, 주굉 등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논의와 주장들이 있었으며 다른 종파와 결합하여 쌍수하는 모습으로 정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정토신앙이 대중 속에 뿌리 내렸습니다.

원효, 자장, 의상스님 등 신라의 대표적인 스님들은 물론이고 많은 학승들에 의해 정토삼부경에 대한 번역과 각종 주석서가 집필되어 정토교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도 대각, 보조, 태고, 나옹스님들에 의해 선종을 위시하여 화엄 법상 천태 밀교 등의 각 종파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종파로는 성립하지 못하였고, 조선시대에 함허, 서산, 사명대사 등이 선과 염불을 융합한 선정일치의 견지에서 염불을 역설하여 지금도 염불은 승속을 막론하고 가장 대중적인 수행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예로 보면 발징화상(發徵和尙)의 만일염불회가 있습니다.

만일염불회의 동참대중은 승려 31인, 신도 1,828인이었습니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일만일 염불정진을 시작, 29년 만인 병인년(786)에 만일이 되었습니다.

그 날 금빛 찬란한 아미타불이 현신하여 염불대중을 차례로 극락으로 인도하였음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염불만일회가 처음 개설된 도량이 바로 금강산 건봉사이며 발징화상에 의하여 창도되었습니다.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를 기점으로 하여 한국의 대 소 사찰에는 염불당이 들어서고 만일회의 염불결사운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현풍 도성암에서는 1624년 성범(成梵)화상의 주도로 일만 팔천일 염불회가 개설되기도 하였으며 근래 염불에 대한 불교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만일염불결사가 새롭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말에서 가마쿠라 시대로 들어오면서 법연이 정토종을 개창하고 그의 제자인 친란은 정토진종을 개창하였습니다.

또한 일편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춤추며 염불하는 법을 가르쳐 종교적인 절정을 맛보게 했으며, 신기(神祇)신앙과 아미타신앙을 융합하여 모든 것이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밖에 없다고 설하는 시종을 열었습니다.

이들 정토교의 교파는 그 후 각각 발달하여 일본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현재 대표적인 정토교는 정토진종과 서산정토종, 시종이 있습니다.


염불 수행의 의의


염이란 마음속으로 하는 것으로,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염이라 하는 것이다.

유교로써 비유하면, 선비가 생각 생각에 공자를 생각하고 기억하면 공자에 거의 가깝게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생각 생각에 오욕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부처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을 그르다 하는구나!

                                                           [죽창수필]


참선하는 사람들이 염불을 경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잠시라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바로 염불이니, 생각이 곧 부처의 생각이요, 말이 곧 부처의 말이며, 행동이 곧 부처의 행동이니

이와 같이 염불하는 자의 모습이 당연히 부처를 닮아갈 것이므로 성불하기 위한 방법인 것입니다.

수행의 문이 여럿이나 궁극적 경지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문으로든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택법하여 여일하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염불은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고 또 쉽게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재가불자에게, 하근기 중생에게, 말세중생에게 특히 권해졌습니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성불에 있습니다. 성불이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다는 말이고,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쳤다는 말이고, 자성을 보아 여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망념을 쉬고, 마음을 비우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아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중생심을 한 번 돌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염불에서는 거두절미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고 합니다. 거창한 이론도 복잡한 절차도 필요치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염불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생심이 조금씩 사그러듭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엔가 염불삼매가 되면 망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성불이 드러납니다.

또한 비록 염불삼매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공덕은 결코 헛되지 않으니,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수행보다 쉽게 할 수 있으면서 공덕이 크고 부작용이 없으니 말세중생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염불수행의 원리


염불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부처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불만의 일이 아니고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염불이 탁월한 점은 이행도입니다. 이행도의 뜻은 앞서도 말했듯이 실행하기 쉽고 증득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염불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고 장애가 사라지며 무생법인을 얻고, 극락왕생하며 성불하는 원리는 모두 불보살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과 우리가 불보살님을 그리는 마음이 만나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대세지 법왕자가 그 동안 오십이(五十二) 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여쭈었다.

"나는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항하사겁 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이름은 무량광이시며, 열 두 부처님이 한 겁 동안에 계속하여 나셨는데, 그 마지막 부처님이 초일월광(超日月光)이시라.

그 부처님이 나에게 염불삼매를 가르치시기를 '마치 한 사람은 전심(專心)으로 생각하거니와, 한 사람은 전심으로 잊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나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간절하면 이생에서 저 생에 또 저 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서로 어긋나지 아니 하느니라.

시방 여래께서 중생 생각하시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하거니와 만일 자식이 도망하여 가면 생각한들 무엇하랴.

자식이 어미 생각하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이 하면 어미와 자식이 세세 생생에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리라.

만일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이 생에서나 혹은 저 생에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올 것이며

부처님과 서로 멀지 아니하여 방편을 쓰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 마치 향기를 쏘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배는 것 같으리니 이것이 향광장엄이니라' 하시더이다.

나는 본래 인행 때에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얻었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인도하여 서방정토로 가게 하나이다.

부처님이 원통을 물으시니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 저것을 가리지 말고 육근을 모두 가져다가 항상 염불하되 깨끗한 생각이 서로 계속되어 삼마제를 얻는 것이 제일이 되겠나이다."

                                                   [능엄경]

아이가 어머니를 잃어 버렸을 때 아이가 스스로 찾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부름으로써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잃어버리면 자식이 찾는 것 보다 더 절실하게 아들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어버이이신 불보살님은 우리를 애타게 찾고 계시니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분을 만나고자 하면 곧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찾고 나면 우리의 근본성품이 곧 아미타부처님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며 한 치의 간격도 없이 중생심이 머물던 바로 그 자리가 법신, 보신, 화신의 체성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는 것이며, 삼세제불이 모두 이 마음부처를 증득한 것이니라.

육도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을 왜 모르는가? 다만 미혹해서 염불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알아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부처를 여읜 것 아니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부처를 잊지 않나니 옷 입고 밥 먹는 것도 부처요, 어느 곳을 가나오나 모두 다 부처일세.

가로도 세로도 모두 부처요, 생각 생각이 또한 부처이며 마음 마음이 다 부처일세. 손을 놓고 활발히 집으로 돌아가서 부처를 보라!

근본성품의 둥근 광명이 본래 공(空)한 체성의 부처님(空佛)이요, 한 번 굴려 한 생각을 요달하면 그 이름이 곧 부처로다.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는 까닭에 무량수불이라 하나니 법신 . 보신 . 화신의 체성은 조금도 부처님과 다를 바 없다네.

다만 욕심과 분노와 질투로 스스로 자기 부처를 상하게 하고, 주색잡기로 천진불(天眞佛)을 그르치며, 너다 나다 시비하여 육근으로 부처를 물리치도다.

아! 한 생각 돌이키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구할 건가?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부처님 법을 듣지 못하리니 정녕코 서로 권할지니,

따로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 말고 은밀히 빛을 돌이켜서 자기 부처에게 귀의할지어다.

                                     [발징화상의 '권념문' 중에서]


                              [자료출처 :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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