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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22호 성륜사 정기법회

               <제 22 호>

      20010701 - 성륜사 정기법회

    

 <귀의일체삼신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    


금 낭독을 해드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그 내용을 좀 잘 모르신 분들은 의아심을 품을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리방편문이라는 방편이라는 그 말이 거기에 따라 있듯이 어느 것도 말로 표현된 것이라든가 글로 나타나있는 것은 바로 진리眞理는 못됩니다. 진리에 들어가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이것이 바로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말을 떠나고 생각을 떠나고 문자를 떠난 것이기 때문에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리방편문도 역시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바로 그 자리가 진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보리방편문이 유익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 이것은 어느 개인이 그냥 그렁저렁한 그러한 체계를 세워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것은 6조혜능六祖慧能스님 법문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상계無相戒법문이란 법문이 있습니다. 무상계 법문이라,

무상계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는 그런 무상이 아니라, 없을 무자, 서로 상자, 무상無相인데, 이것은 그 상을 떠나버린, 우리 중생계衆生界라든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경계는 모두가 상이 있지 않습니까.

헌데 그런 상을 떠나버린 그 본체本體, 근본적인 생명자체가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없을 무자, 살 주자 무주無住라든가, 없을 무자 서로 상자 무상無相이라든가, 이런 것은 사실 같은 뜻으로 다 쓰는 것입니다.

헌데 그 6조스님께서 하신 그런 계율戒律이 무상계 법문이 있는데 계는 계율이란 경계할 계자입니다. 그래서 무상계라는 것은 무엇무엇을 지켜라,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그런 그 하나의 제한된 계율이 아니라 그 모든 계율의 근본계체根本戒體, 계율의 한 정신精神을 말한단 말입니다.



모든 그런 계율이란 것은 내내야 도덕적道德的인 하나의 규범規範이 되겠지요. 헌데 그 참다운 그 도덕적인 규범인 모든 계율의 본체란 것은 사실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말로 표현된 것이 아닌 것이고 하나의 이것은 바로 생명자체生命自體를 의미한단 말입니다.

우주宇宙의 그 본래적인 생명자체生命自體를 의미함과 동시에 바로 우리 인간성人間性의 본래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이것이 즉 말하자면 무상계無相戒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6조 혜능스님께서 그 그때그때마다 무상계를 말씀하셨는데, 특히 보통은 정월달에 한번씩 꼭 대중들한테 무상계 법문을 설하도록 그렇게 준례準例가 되었는데 그 보리방편문은 무상계 법문을 설할 때 맨 처음에 하신 법문입니다.

맨 처음에 귀의삼신불歸依三身佛이라, 삼신불에 귀의한다는 그런 법문인데 그러면 삼신불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아까 보리방편문을 들으셔서 대체로 알으시겠습니다만 삼신불이란 것은 이것은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또는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 또는 천백억화신불千百億化身佛 그래서 삼신불 아닙니까.

헌데 삼신불이 어디가 있는고 하면 삼신불은 바로 우리 자성自性에 있습니다.

그 가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공부를 하실 때는 몇 가지 그 중요한 개념槪念은 꼭 기억을 해 두셔야 됩니다. 그래야 인제 다른데서 나와도 그냥 납득이 빨리 되시겠지요.

그래서 그 자성이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자성自性이라.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이 자성이 참 중요한 그런 개념이기 때문에 제주도濟州道에다 절을 하나 지금 만들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역시 자성원自性苑이란 이름을 거기다 붙였어요. 자성원이라. 동산 원자를 붙여서, 녹야원鹿野苑이라는 원자가 동산 원자입니다.

그래서 자성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그렇게 한 절 이름을 붙일 정도로 중요한 것이고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란 그 의미가 아주 심심미묘甚深微妙합니다.

자성을 바로 조금 더 부연시켜서 말씀을 하면 이것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자성청정심이라. 그 우리 인간의 본래 모습. 인간의 그 본래 본 모습도 역시 자성인 것이고, 또한 동시에 우주만유의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성품性品도 역시 자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성自性이나 또는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그 육조단경六祖壇經이란 것은 6조 혜능스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참선법문參禪法門을 주로 한 것이고 또는 참선의 교과서같은 그러한 경전經典입니다만 육조단경에 제가 헤아려보니까 자성이란 말씀이 100군데가 넘습니다. 조그마한 하나의 경전가운데서 똑같은 말이 동어 반복같지만 하여튼 100군데가 넘을 정도로 언급을 했다는 것은 얼마만치 자성이란 의미가 중요한가를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헌데 그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삼신불에 귀의한다는 그것이 그 삼신불이 어디가 있는가. 이것은 바로 자성가운데가 있단 말입니다. 자성가운데가.

그러면 자성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방금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성은 이것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또는 우주의 그 본바탕이기 때문에 사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디에나. 어디에나 없는 곳이 없습니다.

어디에나 없는 곳이 없다고 하면 천지우주가 바로 자성뿐이라는 그런 말이 성립되지 않겠습니까. 천지우주가 바로 자성뿐입니다. 불성佛性이나 자성自性이나 도나 진리眞理나 열반涅槃이나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즉 그래서 이 자성이란 뜻이 그와같이 심오해놔서 그냥 자성이다 불성이다 이래버리면 아, 그것이 너무나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성이란 것은 그러면 어떤 속성이 있는 것인가. 자성 속에 어떤 것이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삼신불三身佛이란 말입니다.

자성 가운데는 자성의 그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한 생명자체의 자리 그런 자리이름이 이른바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이고,

또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펼쳐있는 그런 자리지만 그냥 그런 자리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또 한도 끝도 없이 무량무변의 공덕功德이 있단 말입니다. 자비慈悲라든가 지혜智慧라든가 또는 능력能力이라든가 모든 그런 것을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이 이른바 이것이 원만보신圓滿報身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화신化身은 무엇인가. 화신은 그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한 그 법신과 또는 그 가운데 갖추고 있는 모든 자비 지혜 행복이라든가 그런 자리가 그때그때 또 인연因緣 따라서 모양을 나툰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 삼신불이란 것은 청정법신 또는 원만보신 천백억화신. 이 삼신불이란 것은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자성의 하나의 그것이 내용의 성품인데 따라서 이 자성은 특수한 어느 부위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성자체가 바로 우주자체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한테나 법신이 들어있고 또 보신이 들어있고 화신이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렇게 확실히 알아버리고서 다시 의심이 없으면 좋은데 우리 중생들은 여러 가지 것을 많이 알고 배우고 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정보의 과다시대란 말입니다. 하도 그 복잡한 정보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우리가 여과를 시켜서 정말로 정화를 시켜서 참다운 도리 참다운 정보를 우리가 확실히 해버려야 바른 신앙이 될 것인데 우리가 그 잡다한 가운데서 제대로 그 우리 스스로 여과를 못시키고 정화를 못시키면 우리가 신념이 확립이 안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법문이란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의심疑心없이 완전히 진리의 본체를 믿어서, 완전히 믿고 들어가야 그래야 참다운 삼매三昧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이것이 뭣일까 저것이 뭣일까 의심하다 보면 결국은 마음이 통일이 안된단 말입니다. 통일이 안되면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삼매에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부처님법의 대요는 계율戒律과 또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와 이것이 삼학도三學道 아닙니까. 우리 도덕적으로 우리 행위를 바르게 하는 계율을 지키고 또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을 항시 통일을 시켜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심衆生心이란 것이 금생에 잡다한 것을 많이 압니다. 많이 알기는 알지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잡다한 것을 많이 알기 때문에 그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통일이 안됩니다. 우리 마음이 통일이 안되면 불교말로 삼매三昧에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이치로는 제법 안다하더라도 삼매에 들어서 그것이 온전히 거기에서 번뇌煩惱가 녹아져야할 것인데 삼매에 못 들면 알기는 많이 안다하더라도 그것이 참다운 증명證明을 못합니다. 이른바 체험體驗을 못한단 말입니다.

체험을 못하면 참선을 한다해도 이른바 구두선口頭禪이라, 아, 말로는 이말 저말 별 말을 다 하겠지만 사실은 자기 행동은 바르게 옮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자성 불성까지 우리 마음이 온전히 정화가 되어서 하나가 돼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와 우리 마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런 것은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우리가 확실히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마음공덕을 스스로 증명을 못하니까 그런단 말입니다. 사실 이 마음과 이 부처는 조금도 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 화엄경華嚴經에도 유심게唯心偈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유심게라. 유심게는 오직 유자, 마음  심자.

 우리 불교는 유물론唯物論이 아니지 않습니까. 유물론은 모두가 우주의 본체라든가 일체존재가 물질뿐이라는 그런 하나의 철학적인 형이하학形而下學이 이것이 유물론인데 불교는 유물론이 아닙니다.

유물론이 아니라 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화엄경 말씀마따나 불교는 이른바 철학적으로 말하면 유심론唯心論이란 말입니다. 일체가 모두가 다 결국은 마음뿐이라는 그러한 도리입니다.

즉 따라서 화엄경에서 유심게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유심게라. 유심게라는 게송은 무엇인고 하면 심불중생 시무차별心佛衆生 是三無差別이라. 심불중생. 마음 심자 심하고 또는 부처 불자 불하고 그러고 중생衆生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나 중생이나 부처 이것이 원래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이 불교를 믿는다해도 부처는 저 높은 데가 있고 부처는 아득하니 그야말로 참다운 진리고, 우리는 일반 중생이니까 이만치 밑에가 있다, 이렇게 우리가 이른바 고하심高下心을 낸단 말입니다. 고하심이란 것은 높고 낮고 하는 그런 차이를 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불교의 근본 뜻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심불중생 시삼무차별이라, 그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 이것이 세가지가 절대로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법을 얘기할 때라도 우리가 국민학생國民學生이라든가 아직은 미숙한 사람한테는 불법의 그런 심오한 도리를 한번에 다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먼저 쉬운 것부터 얘기를 하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어린애 마음이나 또는 어른마음이나 대학교수마음이나 또는 국민학교 학생마음이나 말입니다. 마음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분별시비分別是非를 좀 더 많이 알고 적게 안다는 그 차이뿐인 것이지 원래 마음성품에서는 똑같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바 자성자리 불성자리에서는 똑같아버립니다.

비단 같은 사람일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動物이나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개 마음이사 저것은 뭐 진화가 더디니까 훨씬 저 밑에가 있겠지. 그러나 개 마음도 역시 우리 마음하고 근본자리에서는 똑같아버립니다. 이런 도리가 잘 이해가 안되시겠지요.

우리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는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가사 박가 마음이나 김가 마음이나 또는 부처님마음이나 말입니다.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모양이 없는 것은 이것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모양이 있어야 크다 작다 높다 낮다 할 것인데 다 같이 모양이 없어놔서 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양이 없는 것은 어디 작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 불교란 것은 마음을 우리가 믿고 마음을 깨닫는 것이 사실은 불교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그런 요설변재饒舌辯才가 아주 능란하고 또는 불교체계佛敎體系를 많이 안다하더라도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마음과 부처는 이것은 똑같은 것이고 동시에 마음과 부처가 없는 곳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란 것은 결국은 다 부처뿐이고 마음뿐이다, 이렇게 우리가 결론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뿐이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불교를 배우실 때 부처님법은 인연법因緣法이다 연기법緣起法이라, 이렇게 배우시지 않습니까. 과연 참 그렇습니다. 불교법은 인연법이란 말입니다. 인연법인 것인데 인연법도 그 차원의 차이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지어서 그야말로 참 안락을 맛보고, 또 나쁜 짓을 하면 그때는 나쁜 짓의 과보果報로 해서 그때는 고생의 고통스런 결과가 다 있겠지요. 그래서 그 선을 짓고 또는 악을 짓고 해서 우리가 과보를 맛보는 것은 이것은 보통차원, 보통 낮은 차원에서 하는 것이고,

 불교의 그 대승적大乘的인 연기법은 무엇인고 하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우주란 것은 진여, 진여란 것은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까. 참 진자, 같을 여자. 그래서 우주를  원리라는 뜻으로 진리를 말할 때는 그때는 진여眞如란 말을 씁니다. 그리고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 그런단 말입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은 이것은 내 인간의 내 마음의 본래성품인 동시에 또는 우주 모든 존재의 본래성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이런 연기법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말씀한 이른바 진여연기眞如緣起란 말입니다. 진여연기라.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는 보통 용이나 작용作用이나 그런 것만 공부해서는 아, 불교에 대해서 항시 의심만 생기고 별로 얻음이 없습니다. 이른바 체가 없는 그런 법문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꼭 우리가 부처님공부는 그 본체론적인 본체 그 근본적인 체를 우리가 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한테 얘기하든지 간에 설사 잡다한 이런 말 저런 말 상대유한적인 그런 얘기를 많이 해도 끝에 가서는 본체로 해서 매짐이를 딱 해줘야 그래야 불교를 배운 그런 가치가 있는 셈이지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불교가 모두가 인연법은 인연법인데 보통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식은 보통 수준에서도 말할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불교의 참다운 대승법大乘法에서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하나의 진리 밑에서 하나의 그런 생명 밑에서 이루어져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 인도印度의 유마維摩거사, 유마거사는 부처님 가르침을 통달해가지고서 부처님 제자들도 아, 자기가 꾸짖기도 하고 말입니다. 또 지도도하고 그런 분입니다. 그럴 정도로 하여튼 부처님하고 나란히 그야말로 부처님 진리를 그렇게 빛내주기 위해서 도우신 분인데,

 유마거사 법문가운데서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들 입자 아니 불자, 두 이자 그리고 법 법자, 문 문자. 둘이 아니라는 법문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그 의도가 무엇인가. 이른바 불출세일대사인연佛出世一大事因緣이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금생에 나오신 그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께서 보신 진리를 우리 중생모두가 다 깨닫게시리 하기 위해서 나오셨단 말입니다.

그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한테 꼭 하시고 싶은 마지막 법문이 무엇인가. 이것은 방금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그 둘이 아니고서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란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고 염불念佛을 하고 여러 가지 공부하는 방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이 많이 있어서 그래서 일반 중생이 미혹하고 차원이 낮을 때는 그래저래 모두 쉬운 정도로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 것인가. 우리 마음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런 자리에 올라가서는 꼭 우리 마음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둘이 아닌 자리, 둘이 아닌 자리는 무엇인가. 천지우주가 부처님 아닌 것은 어디에도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할 때에 이것은 우리가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단 말입니다. 사실이.

우리가 본래로 부처라, 또는 본래로 공이라. 이런 말씀들을 쓰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래로 공이다, 이런 말을 쓰면 좀 어리둥절해지지요. 그러나 사실은 본래로 다 공이란 말입니다. 본래로.

어째서 본래로 공일 것인가. 부처님 법문은 절대로 이유가 없이 말씀한 법문은 없습니다. 다 철저한 합리적인 논리주의論理主義입니다. 다만 논리에 그치지 않고서 우리가 체험까지 다 하도록 돼 있지만 아무튼 모두가 다 공이다, 이런 것도 그냥 덮어놓고 공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째서 공일 것인가. 그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인연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법문가운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행무상이라. 모든 것은 그치지 않고서 지금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어떤 것도 그대로 가만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어떤 것도 가만히 있는 것이 없이 변화해서 마지않는다, 이렇게 말할 때는 그것은 사실은 존재라 할 수가 없다는 말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어느 공간에도 어느 시간대에도 그것이 있지가 않으니까 그때는 없는 것 아닙니까. 있다는 것은 시간 공간적으로 존재해야 그래야 있다고 할 것인데 엄밀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제행무상이라. 모든 것이 그때그때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사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 중생들이 인생고人生苦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그 고정불변한 것이 있지도 않은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선 우리 고통은 또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 젊어서 그 예쁘고 그 아름답고 하는 그런 몸이 항시 있으면 좋은데 이것이 또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금방금방 결국은 변화무쌍합니다.

어느 것도 제 아무리 훌륭한 그런 집이라든가, 우리가 또 무슨 집을 지을 때는 자기가 평생 살고 또 자기 자손도 거기서 영구히 영화를 누리고 행복을 그렇게 맛보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집을 짓지 않습니까. 그러나 또 불이익을 되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집이 불나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다.

상당히 참 공부도 많이 하고 또 지위도 높은 분인데 그이가 한 60쯤 나이가 돼갑니다. 현존인물이라 제가 이름을 들어서는 실례가 되니까 이름은 안들겠습니다마는 그이가 우연히 그냥 암에 척 걸려버렸단 말입니다. 배우기도 무던히 배우고 하여튼 그 최고지성이라 할 수 있는 분이고 재산도 또 넉넉하고. 그런 분인데 암에 딱 걸려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이 특수한 그 양반뿐이 아니란 말입니다. 유사한 일이 우리 인간이 살 때는 꼭 한 두번씩은 누구나가 겪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전생부터서 업장業障이 가벼운 분들은 덜 겪고 그러겠습니다만 어떻든간에 그 제행무상이라, 모두가 다 무상하단 말입니다.

무상한 것이니까 결국은 그야말로 참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무상無常 무아無我란 것이 그냥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그저 집착을 하지말고 욕심을 내지 말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실은 가볍게 말씀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진리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나라고 우리가 고집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은 우리 몸이란 것은 우리 세포가 그때그때 신진대사해서 마지 않습니까. 어제 우리 몸 구성한 세포와 오늘 세포가 지금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우리 중생들은 시각이 짧아서 그 여실如實하게 사실대로 못 본단 말입니다.

여실이란 것은 같을 여자, 실다울 실자, 사실대로 보는 것이 여실인데 우리 중생들은 여실하게 못 봅니다. 보통 확률로 보고 아, 우리가 비슷하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비슷하게 생각하다가 무슨 고생이 오면 그때는 거기에 딱 막혀가지고서 당황하고 어떻게 할 줄을 몰라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내 몸뚱이 이것은 어차피 내 업장 따라서 잠시간 지금 받아서 이것이 당연히 변화가 될 것이고, 더러는 갖다가 교통사고 만나서 죽기도 할 것이고. 그런 여러 가지 변화가 누구나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거기에 곁들여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 비록 그 우리 몸뚱이에 대해서 그 중요한 그런 변화가 있어서 늙어지고 또는 병들고 갑자기 우리가 어디가 몸이 아파서 죽고 그런 것을 당한다하더라도 우리가 당황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생명자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불생이불멸不生而不滅이라. 우리 생명자체는 원래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인연따라서 우리가 그 업에 따라서 금생에 태어난 몸뚱이는, 그때는 아, 낳음이 있으니까 그때는 죽고 생사가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본래생명자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생이 불멸이라.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일반 중생과 성자와 차이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일반중생은 죽고 사는 그런 차원밖에는 모릅니다. 죽지 않는 생명자체는 우리 중생은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자체하고 하나가 딱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야 언제 죽든 가든 말든 그때는 별로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다만 사는 동안에 최선만 다할 것이지,

우리가 금생에 태어난 목적이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별시비하고 우리가 잘 못 본 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그런 그 집착이나 고집을 떠나서 참다운 진리, 영원히 변치 않는 참다운 우리 부처님 자리, 그 불성자리, 진여불성자리 그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 생명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들고 염불을 하고 다 그렇습니다. 어떤 공부나 모두다 그 자리,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깨닫는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참선을 한다하더라도 그런 본래면목자리를 외면해 가지고서 그냥 덮어놓고서 의심만 한다든가 또는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염불하면 극락간다더라, 이렇게 한다든가, 이렇게 해도 그런 의의가 다소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뜻은 거기에 없단 말입니다.

꼭 우리가 그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래면목자리인 진여불성 자리, 진여불성을 우리가 분명히 분명히 참구하고 그걸 흠모 추구하고 우리가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아까 육조단경의 제가 삼신불三身佛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육조단경의 6조스님께서 하신 그 말씀은 그냥 이론적으로 논리체계로 해서 아, 뭐 우리 자성가운데 청정법신이 있다 또는 원만보신이 있다 또는 천백억화신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하라. 이런 식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 마음이 바로  청정법신이 그대로 지금 그 생명이 그대로 여러분들 마음에 지금 생동하고 있고, 또는 여러분들 마음에 그 지혜나 자비나 그런 능력이나 그 원만덕상인 그러한 법성이 역시 그대로 거기에 다 들어있고,

따라서 여러분들이 바로 느끼고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여러분들이 하는 행동도 모두가 다 그런 그 덕상德相과 계상戒相에 어긋남이 없이 모두 바른 행동이 안될 수가 없다는 그런 걸로 해서 참다웁게 귀의하라고 말씀한 것이지, 귀의란 것은 돌아갈 귀자, 의지할 의자, 거기에다가 우리 마음을 간절히 딱 붙여놓고서 다른 생각을 마르란 것이 귀의 아닙니까.

우리가 6조 혜능스님께서는 참선하는 그런 큰 스님이고 참선하는 도인이니까 귀의나 그런 것은 없이 다만 이치만 믿고서 무 무 무 무자無字 화두만 들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삼신불에 그대들 마음, 그대들 마음이 바로 자성인데 자성삼신불自性三身佛이라, 자성이 갖추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에 귀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은 그 단순히 지성知性과 의지意志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또 감성感性이 있단 말입니다. 감성이.

마치 우리가 예술도 있고 철학도 있고 과학도 있고 그렇게 하듯이 우리 인간의 마음은 역시 의지도 있고 또 지혜도 있고 또 감성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도 그래요. 우리 심리적으로, 우리 마음이 지혜도 있고 또는 의지도 있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간절히 간절히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그런 마음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의 그 근본성품자리인 그 부처님 자리 그 진여불성자리를 빨리 계합契合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위대한 분들은 우리한테 이렇게 법을 가르친다하더라도 하나의 그 치우쳐서 집착을 털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지혜에도 집착을 않고 또는 의지에도 집착을 않고 또는 감성에도 집착을 않고서 우리 마음이 항시 자유스러운 상태가 되어야 이른바 지성이라든가 또는 그야말로 의지라든가 또는 감성이 오로지 우리 마음이 갖추고 있는대로 오로지 그때는 발휘가 된단 말입니다.

헌데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특히 시간도 별로 없고 또 한 체계를 아주 정밀한 체계를 세우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역시 그 감성에 호소하는 감성적인 그런 데다 우리 신앙의 목적을 두고서 공부를 하시는 것이 나을성 싶어서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그래서 그 불교는 자력문自力門과 타력문他力門이라. 자력문은 그때는 나한테 원래 내가 원래 부처니까 내가 닦아나가면 아,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러겠지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자기 힘만 온전히 믿고 우리가 맹진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힘이란 것이 이것이 금생에 우리가 나와있는 여러 가지 그런 여건으로 해서 자꾸 우리가 참 장애를 받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인간자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그런 것 때문에 우리 인생의 또 고초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그 위에 이것이 상대적으로 같이 관계성이 있어놔서 금생에 산다는 것은 과거전생부터서 살아온 이것이 하나의 결과기 때문에 과거전생에 우리가 또 잘못 사귄 사람들은 금생에 나와서 보복으로 해서 우리를 또 그때그때 짓궂게 굴기도 하고 그러겠지요.

그러니까 하여튼 모두가 다 무수생 동안에 우리 중생들이 생을 거쳐와나서 그런 가운데서 지은 인연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더러는 과거세에 베풀기도 많이 하고 우리가 도와주고 해서 금생에 또 그런 사람 만나면 또 생각지 않은 도움을 받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장애라든가 방해가 또 많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마따나 자력적인, 자기 힘만 가지고서 밀고 나가는, 시간도 많고 또 우리 출가한 수행자같이 선방에서 그냥 오로지 몇 달 공부도 하고 몇 년도 하고 그런 분들은 모르겠지만 한 가정을 구성해서 가정을 구성해놓으면 또 당연히 그때는 가족적으로 자기가 자기에 따르는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그런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력적인 수행만 가지고서는 이것이 감당하기가 곤란스럽습니다.

 따라서 그 타력적他力的이라, 그 우주에 있는 그 본래적인 진여불성자리,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란 것은 우리가 지금 다 모르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자체가 부처님의 그런 생명으로 해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지금 알고 보는 것이 너무나 한정되기 때문에, 이 가운데도 하여튼 부처님의 청정광명淸淨光明으로 해서 광명이 찬란히 빛나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지금 못느낀단 말입니다.

어떤 누구나가 다 그 사람에 따르는 광명이 다 빛나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후광後光이 다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 모신 부처님만 후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후광이 있는 것은. 그건 어째 그런고 하면 우리 중생이나 모든 존재가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다 순수에너지로 돼있단 말입니다.

순수에너지는 무엇인가. 순수한 우주에너지는 바로 그때는 그것이 하나의 빛입니다. 빛이란 말입니다.

물리학자는 다 그걸 인증을 합니다. 전자電子고 양자陽子고 중성자中性子고 모두가 다 그 근원적인 힘은 다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란 것은 그 에너지의 빛으로 해서 언제나 지금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보고 못보고 할 뿐인 것이고 물리학자는 실험으로 해서 다 그때는 증명이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우주의 그 순수한 생명이 바로 빛이기 때문에 성인들은 그때는 항시 그 빛과 더불어서 빛하고 같이 지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업으로 보기 때문에 아, 그 과거전생에 좀 잘 만난 사람은 금생에 얼핏 한번 만나도 그냥 다시 보고 싶고 그러겠지요. 허나 과거전생에 잘 못만난 사람도 금생에 만나놓으면 그때는 아, 보자마자 그냥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은 업으로 본단 말입니다. 업으로. 자기가 지은 업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업을 녹이고서 순수한 마음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사람 저사람 그때는 다 모두가 하나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빛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이른바 부처가 보면 다 부처로 보이고 개가 보면 개로 보인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타력문他力門 공부란 것은. 타력은 남한테 전부 의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자체가 진리로 충만돼 있기 때문에 우주자체가 부처님 법으로 충만돼 있기 때문에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주자체가 바로 그때는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불성.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 불성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물리학자는 에너지뿐이란 소식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의 그 근본자리가 무엇인가, 이런 때는 그 에너지의 근본자리가 바로 그때는 빛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들은 그 번뇌煩惱에 가리워서 그 빛을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번뇌만 녹아지면 그때는 차근차근 빛을 다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쩌다가 한번씩 봤다가 나중에는 차근차근 더 자주 봤다가 드디어는 빛하고  완전히 하나가 딱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란 것은 단두대斷頭臺, 줄을 죄여서 자기 목을 자르는 단두대가 있지 않습니까. 단두대 위에서도 우리 중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가 있다는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단두대가 설사 내 목을 베어간다하더라도 내 생명을 베어간 것이 아닙니다. 금생의 업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이 몸뚱이 좀 그렇게 없어지는 것이지, 몸뚱이 이것은 본래 내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하나의 물질 아닙니까. 물질인데 자기 몸뚱이를 위시해서 이 물질이란 것은 어느 것도 어느 개인소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중요한 그런 법문가운데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가 있지 않습니까. 무아 무소유라. 나도 없고 또 내 소유도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본바탕을 못 보고서. 우리 중생은 업으로 보기 때문에 이 몸뚱이 이것은 내 것이고 내 아내는 내 아내고 내 남편은 내 남편이고 내 식구는 내 식구고. 내가 지금 벌어서  이루어놓은 내 재산은 다 내것이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보통 중생아닙니까.

그러나 부처님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불교란 것이 근원자리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자리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안목으로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잠시간 그 인연따라서 잠시간 내가 쉬었다 가는 것이지.

저는 가끔 얘기를 합니다마는 우리 그 한국인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면 우리 한국인들이 집착이 제일 심한 것 같아요.

집도 미국같은데서 보면 이른바 모빌하우스라, 모빌하우스란 것은 이렇게 집을 만들어서 팝니다. 팔아서 바퀴만 붙여놓으면 여기 살다가 또 저리 옮겨갈 때는 거기서 살고 모두 그쪽으로 옮겨가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런 집이 별로 비싸지가 않아요. 부자들도 그런 집을 사가지고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모두 그렇게 좋은 데로 갔다가 또 추운데로 갔다가 따순 데로 갔다가 그러는 셈인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집을 지어놓으면 하여튼 꼭 거기서. 아까 말씀마따나 자기 대에도 거기서 살고 자기 후대도 거기서 살고 말입니다. 영원히 꼭 그것은 자기 것이고 말입니다. 

그 우리 인간이 하나의 참 나그네길인 것인데 잠시간 살다가 그것이 가는 것인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억지로 할라고 하니까 돈도 억지로 벌어야 되고 억지로 벌라고 생각하면 또 부정부패가 또 따르고 그러겠지요.

그 소유란 것이, 아까 말씀드린바 소유관념所有觀念이란 그것이 굉장히 참 치사스러운 것입니다. 어떻게 따져보나 생각하고 생각하고 아무리 깊이 생각해봐도 내 몸뚱이가 이것이 내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 참다운 내 것 같음사 영원히 내 것이 되어야 되겠지요. 몇 십년동안 그 한정된 시간 우리가 머물러 살다가 가는 것이 우리 몸뚱이 아닙니까.

몸뚱이가 갈 때는 간단 말을 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물질관념物質觀念은 꼭 우리가 이겨야 극복해야 됩니다.

부처님 법이란 것이 본래로 내가 없는 것이지 부처님께서 일반 중생들이 욕심이 많으니까 무아 무소유라, 무아 무소유생활을 해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 나도 없고 내 소유도 본래 이것을 논리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그 논리적으로 생각을 잘 못하니까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지금은 다행히 그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아주 정밀화되어가지고서 과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땐 결국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나 열반적정涅槃寂靜이나 모두가  철두철미徹頭徹尾한 논리적論理的인 체계體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도 역시 자력, 자기힘만 가지고서 아, 내가 지금 무슨 공부를 하니까 이걸로해서 내가 꼭 성불이 되겠다, 이렇게 의지를 갖는 것은 좋은데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우주는 항시 우주의 힘이 지금 부처님의 힘이 넘치고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힘이란 말이나 부처님 힘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란 것은 이것은 무생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님의 생명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우주생명이 이 우주에는 끝도 갓도 없이 넘쳐있기 때문에 그냥 무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목적의식目的意識이 뚜렷이 있습니다.

무슨 목적인가. 모든 중생을 다 그 본래 성품자리, 우주의 본래성품이 바로 불성인데 모든 존재를 다 똑같이 불성자리에 돌아오도록 하는 거란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란 것은 우리 불교의 그 4겁설四劫說이라, 우주가 이루어지고 또 중생이 살고 또 우주가 파괴가 되고 또 드디어는 공으로 돌아가고 또 다시 이루어지고.

모두 그런 것이 불교의 사겁설 아닙니까마는 그와 같이 항시 우리 이 우주란 것은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도 모두 부처님 품안으로 갔다가 다시 거기에서 또 중생계가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가 다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경에도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니까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본래부처인데 부처가 안될 수가 있습니까.

다만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서 노력을 우리가 온전히 한다고 생각할 때는 빨리 될 것이고 노력을 안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주가 파괴할 때까지는 우리가 윤회輪廻를 해야지요. 천상으로 갔다가 또는 지옥으로 갔다가.

그런 한 천상이나 지옥같은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유한 것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지금 중생계 인간계도 항시 그대로 머물러있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참 변화무쌍한 것인데 우리 인간계가 변화무쌍하듯이 지옥계나 천상계도 역시 변화무쌍합니다. 변화무쌍한 대로는 분명히 지금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업을 잘 지으면 그때는 틀림없이 천당갈 수가 있는 것이고 업을 못 짓고 그야말로 탐욕많은 중생은 아귀가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여러 가지 우리 중생들의 생활상황에 따라서 그런 차별이 있다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본래로, 바로 진여불성이 이것이 우리 생명의 본 고향자리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다 모든 중생을 그런 불성자리로 이끌어야 된다는 불성자리로 다가서게 하는 그런 힘이 원래 있단 말입니다. 

물리적으로 말하면 그런 힘이 인력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 힘이 즉 말하자면 부처님의 이것이 본원本願입니다.

우리가 그 사홍서원四弘誓願 할 때 모든 중생이 다 성불이 되고, 모든 중생이 다 무량의 그런 부처님 법문을 배우고, 그런 서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서원은 이것은 우리 개인의 참다운 서원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서원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목적의 서원, 이것이 이른바 사홍서원입니다.

따라서 그런 서원이 원래 우주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절로 그런 서원을 지금 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기운을. 그래서 타력기운은 없는 것을 우리가 끄집어 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주에는 모든 중생을 다 성불로 이끌어가는 그런 기운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기운에 우리가 편승을 좀 해야되겠지요. 그런 편승하는 기운이 이른바 타력공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한다든가 또는 우리가 화두를 참구해서 의심을 한다든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원래 우주에 있는 그런 기운에 편승해서 우리가 부처가 지금 되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고 빠른 것은 우리가 얼마만치 정진精進하는가에 매여있지 않겠습니까.

헌데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방법가운데서 보통 4가지 방법을 말해 있어요. 우리 공부하는 방법을.

한가지 방법은 어떤 것인고 하면 상좌삼매常坐三昧라. 삼매라.

삼매란 것은 아까도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오로지 진리로 통일시키는 것이 삼매입니다. 인도의 말로는 삼마지三摩地란 것인데, 우리 마음을 아무렇게나 통일이 아니라 참다운 도리로 통일시키는 것이 삼매인데, 한 가지는 상좌삼매라, 항상 상자 앉을 좌 말입니다. 항시 앉아서 하는 그런 삼매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로 우리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한다든가 우리가 선방에서 한다든가 그런 법은 상좌삼매에 해당합니다.

또 한 가지는 상행삼매常行三昧라. 항상 상자, 행할 행자, 항시 갔다왔다 갔다왔다하면서 삼매에 드는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다보면 또 혼침이 많은 사람은 앉아서 그냥 꾸벅꾸벅 졸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아, 어느 구간을 딱 정해가지고서 가사 탑을 돈다든가 또는 집을 돈다든가 또는 어느 무슨 나무밑을 우리가 산책한다든가 그렇게 갔다왔다하면서 하는 공부가 상행삼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라. 아니 비자, 행할 행자, 아니 비자 앉을 좌자. 그러니까 반쯤 정도는 앉기도 하고 또는 서기도 하고 그와같이 그때그때 우리가 교차해서 즉 말하자면 편리하게 자기 능력따라서 우리가 한단 말입니다.

또는 한가지는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라. 그 우리가 하는 그런 공부하는 방식가운데서 앉는 것과 서는 것을 그때는 반반씩 한단 말입니다. 반틈 정도는 그냥 우리 앉아서 하고 또는 반틈은 갔다왔다 하고 말입니다.

이와같이 4가지 방식을 보통은 우리 공부하는 방법으로 말씀을 하고 있어요. 한번 다시 말씀드립니다. 상좌삼매라. 항상 앉아서 하는 보통 선방에서 하듯이 앉아서 하는 그런 법이 상좌삼매고, 또 한가지는 상행삼매라, 우리가 걸음으로 해서 혼침많은 사람들은 상행삼매를 또 많이 합니다. 상행삼매도 좋고. 또 반좌반행이라, 어떻게 붙이나 하여튼 반정도는 앉고 반정도는 서고. 적당히 이와같이 두가지 방법을 절충해가면서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비행비좌라. 앉지도 않고 서지도 않고. 그때는 아무런 그때는 결재라든가 한계가 없이 그때그때 편의따라서 가사 5분동안 좀 걸음걸었다가 또 다시  한 20분동안 앉아서 한다든가 이런식으로 하는 공부가 이것이 비행비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공부할 때는 자기 건강이라든가 또는 자기 취향이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혼침이 많다든가 적다든가 그런 것을 헤아려서 적당히 조절해서 하시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아까 타력염불他力念佛에 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만 역시 자력과 이 타력문제는 굉장히 그 중요하게 이것이 이루어진 그러한 하나의 수행법이기 때문에 관심을 많이 두고 우리가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야 됩니다.

역시 자기힘이란 것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자기란 것이 원래 불교에서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기힘이라해도 내내야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우주의 힘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일체존재가 본래로 부처아님이 없이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참 어느때든지 무슨 부처란 것이 꼭 사람마음한테만 아, 불심佛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결국은 불심뿐이란 말입니다. 이 공간도 모두가 다 불심으로 충만돼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불심뿐입니다.

어디에나 에너지가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이 공간속에나 모두가 그야말로 지금 산소나 수소나 모두 원소가 지금 꽉 차있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우주에는 결국은 이 불심이라 하는 순수생명이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우주에 충만해있는 그 진리의 당체인 진리의 그 기본적인 생명자리를 의식을 해야돼요. 의식을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아버리면 그때는 의식할 것도 없이 진리하고 하나가 되었으니까 그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의 광명속에서 우리가 소요하겠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자리를 그 생명의 본체하고 빨리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그래야 윤회를 벗어나고 성불이 되니까 말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의식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염불이라든가 여러 가지 그런 그 부처님께서라든가 위대한 성자가 우리한테 그런 방편을 제시를 많이 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모두 그런 염불念佛도 역시 아무렇게나 그냥 그렇게 제시가 된 것이 아니라 영원적인 그 불성자리, 불성자리의 공덕을 우리한테 제시했단 말입니다.

그런 이름도 우리 사람들이 그냥 김아무개다 뭣이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이것은 아무렇게란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 본체와 이 관계성에서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 하면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하나의 그런 명호名號밑에서 얼마만치 우리 중생이 많이 정화가 될 것인가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생명이 거기에 묻어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김아무개 박아무개 그 이름들은 우리 중생들이 적당히 짓지 않습니까. 허나 부처님 명호, 부처님 이름보고 명호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 명호는 그렇지 않고서 그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이름에 거기에 묻어있단 말입니다.   

즉 따라서 그런 부처님의 공덕을 우리가 꼭 의식해야 됩니다. 끝도 가도 없이 전개되어 있는 생명의 바다자리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염불을 왼다하더라도 아, 관세음보살이 어디가 모양이 이렇게 한분이 아주 거룩하게 보인다는 그와같이 관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생명이 우주에 충만해있다. 불교란 것은 오직 그 우주적인 하나의 생명이니까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인 것이지 둘이나 셋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봐서 나는 나요 너는 너요 그러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것은 꼭 자기 스스로 아, 뭐 무슨 성자가 되어가지고 자기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 되고 한다는 그것이 아닙니다. 천지우주와 자기와 결국 하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야 깨달은 것입니다. 원래 하나니까 말입니다. 원래 하나인 것을 우리 중생은 나로 보고 너로 보고 우리가 구분해 본단 말입니다. 아무리 미운사람도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국은 자기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지장보살을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더러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을 하는 사람한테 대해서도 자기가 지장보살을 해서 조금 더 힘 얻은 사람들은 관세음보살 그만두고 지장보살을 하라, 이런단 말입니다. 굉장히 이것은 그야말로 참 옹색한 그런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든지간에 지장보살을 왼다하더라도 지장보살로 해서 우주를 다 통투하니 조금도 막힘이 없는 그런 생명으로 봐야 그래야 지장보살을 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의 중생의 그런 그릇 따라서 부처님 방편이, 즉 말하자면 여러 가지로 있는 가운데서도 이른바 총대명사總代名詞, 총대명사의 명호는 내내야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같은 사람 생각으로 해서는 기왕이면 총대명사 아미타불로 해서 그렇게 다 했으면 될 것인데, 이래저래 복잡한 이름을 그렇게 각기 고집을 부리고 한다는 것은 조금 그때는 자기 스스로도 그마만치 명호자체가 그것이 제한되기 때문에 이름도 역시, 이름이 중요한 것은 이름대로 해서 또 의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 좁은 범위에서의 개념적인 이름과 보다 더 광범위한 그런 이름과는 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헌데 그런 여러 가지 이름가운데서 이른바 그 총대명사는 역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경보면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무생청정보주명호라. 무생이란 것은 없을 무자, 날 생자 말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결국은 청정보주淸淨寶珠라. 보배 보자, 구슬 주자. 생멸을 떠난 아주 그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청정보배같은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아미타불阿彌陀佛 이름이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경에.

그래서 그 아미타불로, 아미타불로 통일하면 그와같이 이름자체가 아주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한테 우리 공부에도 보다 더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여러분들 취향대로 하시되 하여튼 가급적이면 가장 그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그런 이름을 하나 취해서 그렇게 하시면 좋겠고,

또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다른 식의 그런 공부를 한다하더라도 모두가 다 근본자리를 안 떠나고 한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느 화두를 의심 하나 모두가 다 불성자리를 우리가 찾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공부나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근본자리를 떠나서 그냥 우리 생각이 덮어놓고 의심한다든가 덮어놓고 염불만 한다든가 그래서는 우리 공부에 큰 도움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공부를 하든지간에 우리의 본래면목자리, 우주의 근본자리를 우리가 안떠나는 그런 자세에서 우리가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가령 주문呪文을 외도 주문을 외는 그 주문 자체가 역시 우주의 그 본래 에너지 자리를 말씀했습니다. 마치 명호가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다른 그 묵조黙照하는 잠자코 우리가 명상에 잠기는 그런 법도 역시 그 아주 그 묵시적黙示的인 것은 하기는 하지만 역시 우주의 생명자리를 바로 의미해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화두話頭나 어느 염불念佛이나 어느 주문呪文이나 또는 불경佛經을 외는 것이나 모두가 다 그 하나의 자리에 대한 그런 간절한 참구심參究心과 그런 그리움으로 해서 충만한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하셔야 그래야 우리 공부가 보다 더 속달이 될 것이고,

 또 공부하는 방법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앉아서 하나 서서 하나 또는 반반 섞어서 하나 그것은 그때그때 상황따라서 능률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날씨가 또 궂을는지도 모르니까 여러분들 가실 때에 아주 운전도 조심하시고 조심조심 가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33*20010701-성륜사 정기법회-청화대종사설법

*20010701-삼영불교음반 학무 유락재 촬영

*20010701-정안 이성도 촬영

*20040805-DVD작업 본정 김영동   

*20070501-워드작업 지혜림 이주미

*20070503-정리 본정 김영동

*본 글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법문입니다.*

*20070701-영상자막온료:본정 김영동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자료>



◎ 唯心偈(유심게) : 舊(구) 華嚴經(화엄경) 第十一(제11) 夜摩天宮(야마천궁) 菩薩說偈品(보살설게품)에 如來林菩薩(여래림보살)이 說(설)한 偈頌(게송)을 指(지)한다. 曰(왈)“心如工畵師(심여공화사) 造(畵)種種五陰(조(화)종종오음) 一切世間中(일체세간중) 無法而不造(무법이부조) 如心佛亦爾(여심불역이) 如佛衆生然(여불중생연) 心佛及衆生(심불급중생) 是三無差別(시삼무차별)” 華嚴宗(화엄종)에 있어서 唯心緣起(유심연기)의 至極(지극)을 顯(현)한 것이다. 心(심)은 總(총), 佛及衆生(불급중생)은 別(별)로서 心(심)이 一切萬有(일체만유)를 總該(총해)하기 때문에 迷(미)하면 衆生(중생)이 되고 悟則(오즉) 佛(불)이 된다. 心外(심외)에 衆生(중생)이 없고 心外(심외)에 佛(불)이 無(무)하다 함. 天台(천태)에서는 此(차) 偈(게)로써 三法妙(삼법묘)를 立(입)함. 山外(산외)의 解(해)는 心(심)은 能造(능조)의 理(이)로서 佛及衆生(불급중생)은 所造(소조)의 理(이)로서 華嚴宗(화엄종)과 如(여)하고 山家(산가)의 釋(석)은 心佛衆生(심불중생)의 三法各事(삼법각사) 理(이)를 具(구)하여 能造所造(능조소조)가 되어 互具互融(호구호융)한 實相(실상)의 意(의)를 顯(현)한 偈(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