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호>
20010429-부안 실상사 미륵전 점안법회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로 가지가지의 많은 곤란도 있고 또 고생이 따릅니다. 비록 이 실상사實相寺가 제대로 옛날 모습으로 복원은 못했다하더라도 이 미륵전彌勒殿을 지었다는 것만 해도 굉장히 축복祝福된 일이고 또는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주지스님도 고생을 하셨고 다행히 또 본산 주지스님이 아주 훌륭한 분이 오셔서 그 후원도 크셨고 또 같이 동참해서 이룩한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장하셨습니다. 충심으로 찬탄과 치하의 합장을 드립니다.
부처님 법法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법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어렵게 생각들 하십니다마는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宇宙의 법法입니다. 우주의 도리道理입니다. 어느 것도 부처님 법 밖에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그 부처님 법을 어렵게 생각하고 또 부처님법을 그대로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시고 그 부처님법을 닦아야되겠다 그런 마음만 먹으면 부처님법은 제일 쉬운 법입니다.
부처님법이 어디에가 있고 어디에가 없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가운데도 부처님 법은 온전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말로 하면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이런 어려운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본래성불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애쓰고 난행고행難行苦行해서 닦아서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본래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스스로가 이미 부처가 돼있단 말입니다.
그 화엄경華嚴經의 야마천궁품夜摩天宮品이란 그런 품品이 있어요. 그런데 이 분단이 있는 것인데 거기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마음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또는 중생이나. 그 중생가운데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動物이나 또는 생물生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이나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또는 그런 두두물물頭頭物物까지 다 들어가는 모든 존재가 본래로 부처아님이 없다,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창조創造하는 창조주創造主가 따로 있고 또 창조를 받는 그러한 피창조가 따로 있고, 또 하나님 따로 있고 중생따로 있고 그러한 가르침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 가르침은 그 어디에도 차별분별差別分別하는 그러한 가르침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이라, 그 차별이 없는 정말로 평화스럽고 정말로 화해스럽고 모든 그런 복락福樂이 다 들어있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공중에 나는 날짐승을 본다하더라도 그 어리석고 미련한 날짐승은 그 바람을 타지를 못합니다. 이른바 역풍逆風을 탑니다. 바람은 동으로 부는데 그 반대로만 날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려움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들은 그 부처님가르침이 바로 우주의 도리인데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하면 참 쉬울 것을 그렇지 못하고서 우주의 도리 그 반대로 행동할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 어떠한 것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고 어떠한 것이 도리에 안 따를 것인가.
우주의 도리에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법이 평등무차별의 그런 법이기 때문에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도 사실은 바른 도리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와 남은 본래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나我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도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그러한 나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지금 대상적對相的으로 보이는 모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그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실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사실은 가상假相만 보고 있습니다. 가상만 우리가 느끼고 보고 또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집착執着해서 고생苦生을 스스로 받고 있단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있는 법문입니다마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눈으로 보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법은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물거품같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사실로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지금 어떻습니까. 몸도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모양이 있는데 그 모양이 항시 그대로 있으면 모르거니와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늙어지고 또는 아파 죽고 하는 것은 조금 더 변화가 크니까 그냥 짐작이 되겠지만 사실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또 순간순간 우리 세포는 그때그때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그 변화가 되는 것을,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는 10년 후에나 똑같은 자기다. 이와같이 고집固執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허망虛妄한 생각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느낀단 말입니다.
부처님법 가운데서 이른바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맨 처음에 부처님께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뒤에 녹야원鹿野苑에서 하신 법문法門이 맨 처음에 법의 바퀴를 굴리신 법문이 이른바 초전법문입니다.
초전법문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 아실 분들은 잘 알으시겠지만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사제법문은 이것은 짤막한 네 가지 차원의 그런 법문에 우주의 진리를 거기에 다 담아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생고人生苦는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 우리가 느끼는 중생이기 때문에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나고 죽고 늙고 병드는 한계상황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인생아닙니까. 또 그 외에도 인생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이것저것 구하기는 무척 많이 구하는데 우리가 얻는 것은 구하는 몇 십분지의 일도 못 얻는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은 어느 누구나가 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러한 수명壽命을 다 바랍니다. 영원히 죽지 않아야 되겠다, 또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춰야되겠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다 완벽하니 다 알아야 되겠다, 그 제한적인 인간존재이면서 구하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한도 끝도 없는 그 자리를 다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수명도 한계가 있고 능력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그 한도 끝도 없는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는 문제아닙니까. 그러기에 그때는 자동적으로 인생고가 안 따를 수가 없습니다.
헌데 그러한 것은 우리 인간이 잘못 봐서 그러는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초전법문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정견正見이라.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인생관人生觀 바른 가치관價値觀 바른 우주관宇宙觀이란 말입니다.
바른 가치, 바른 견해가 없으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우리 인생고가 따를 수밖에는 없지만 바른 견해,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바른 가치관 바른 인생관은 바로 우주의 도리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그 순리順理대로 가는 생활이기 때문에 조금도 무리도 없고 또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그 만공덕萬功德을 다 얻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자후자명결정설獅子吼者名決定說이라. 사자후라는 것은 사자의 그 포효하는 울음소리가 사자후 아니겠습니까. 그 사자란 놈이 그 포효하는 것은 조금도 거짓이 없이 자기 직성대로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법문도 역시 조금도 무리도 없고 우주의 진리 그대로 아주 권위있는 그런 말씀만 하신단 말입니다. 이른바 결정적決定的인 말씀만 부처님은 하십니다. 그러기에 부처님법문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후자결정설이라. 사자후가 아주 결정적으로 진리를 그대로 말씀한 법문이 무엇인고 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을 부처님성품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이는 것은 중생의 그 업業에 가리어서 모든. 아까 실상사주지스님 선운사주지스님 그 말씀마따나 우리 중생들은 실상을 보지를 못합니다. 허망상이나 그런 가상假相만 보고 실상實相이라고 우긴단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온 법문이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여래는 부처님아닙니까. 여래상주라. 항상 상常자, 머무를 주住자, 부처님은 항시 머물러 계신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2500년전에 계시다가 지금은 안계시고 또는 미래에 안계실 것이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계십니다. 또 부처님은 여기만 계시고 저기만 계시고 또 그렇지도 않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무처소無處所라. 어느 곳이나 부처님은 항시 계시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나 계시거든, 이 법당내에도 부처님은 충만해 계시는 것이고 법당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가운데도 부처님은 그대로 온전히 충만해 계십니다. 우리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 몰아서 얘기하면 아, 그러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님뿐이 아닌가. 사실 그렇습니다. 꼭 그렇습니다. 천지우주는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바로 보지를 못해서 나요 너요 또는 사랑하요 또는 미워하요 하는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우리 중생들이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바로 다 부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그 무시겁래無始劫來로, 우리 중생이 자기라는 존재가 금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전생 전생을 소급해 올라가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면서 무수한 그런 생을 거듭해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중생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고를 도저히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그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는 생사의 고해를 벗어날 길이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이라야 비로소 우주의 도리를 그대로 말씀하신 부처님 가르침이라야 비로소 그 본래 고향자리로 가는 본래 참다운 자기로 돌아가는 그런 가르침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안 계신 데가 없고 또는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우리의 본래의 자리, 본래 생명자리, 참다운 자기자리,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라. 큰 대大자, 나 아我자 대아大我라. 그런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리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과거숙세부터서 버릇을 많이 붙어놔서 버릇이 많이 따닥따닥 붙어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본래의 자리를 모른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른 견해, 바른 견해란 것은 그 소승적小乘的으로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깨달으면 바로 인정하면 바른 견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대승적大乘的으로 말하면 대승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그 우주의 진리그대로 조금도 흠절이 없이 바로 말하는 것이 대승적으로 말하는 것이 됩니다.
대승적으로 말하면 아까 제가 여러 차례 거듭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우주가 바로 부처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信仰도 역시 그렇게 신앙을 해야 그래야 참다운 정신正信이 됩니다. 바를 정正자 믿을 신信자 참다운 바른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 대승신앙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생각이 지금 되시지 않지 않습니까. 아, 아무리 그렇게 말씀들... 모두 큰스님들이 다 하시고 또 불경佛經을 보면 그렇게 돼 있지만 나는 나고 너는 너고 그와같이 다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궂은 것은 궂은 것이고,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이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 꿈소식 입니다. 바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허망상虛妄相인 것입니다.
가장 아끼는 자기 몸뚱이도 이것도 상주불멸常住不滅이 아닌, 항시 그대로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과거로부터서 미래까지 어느 때나 우리 몸뚱이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을 우리 중생은 변화무쌍한 것을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저는 가끔 더러 우리 중생들이 그런 고정관념固定觀念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잘 모르는 물리학物理學도 인용을 합니다마는 사실은 물리학자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이 일반 여느 사람들이 보듯이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우리 눈에는 지금 이 탁자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이 되겠지요. 물리학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탁자를 구성한 것은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모두 각 원소가 지금 결합되어서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비단 이것뿐만 아니라 이 탁자뿐만 아니라 그 돌멩이나 또는 산천초목山川草木이나 모두가 다 물리학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 과정過程에 있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일체존재가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그 업에 가리운, 업보業報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아, 저것은 좋다 궂다, 붉다 누르다 모두 그러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은 역시 부처님을 우리가 믿으니까 부처님께서 하시는 그 정견正見, 바른 견해를 우리 견해로 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견해로 한다하더라도 이론적으로 해서는 이치로 해서는 아, 그렇거니.....이렇게 생각도 하지만 실지로는 그렇게 안보인단 말입니다. 미운 것은 분명히 밉고. 자기한테 좀 좋게 하면 분명히 좋고 그러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지금 무엇인고 하면 그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듯이 다 부처님같이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보인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오늘 또 가실 길도 바쁘시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처님같이 온전히 다 볼 것인가.
이렇게 하는 공부가 참선參禪 염불念佛입니다.
이치로는 좀 알 듯 말 듯 하지만 실지로는 우리가 체험을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으로 안보인단 말입니다. 안보이면 인생고는 떠나기가 어렵습니다.
인생고는 떠나기가 어려워도 그 이치를 항시 마음에 두고서 우리가 사실로 보이도록까지 노력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염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들도 지금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바로 느끼지는 못한다하더라도 아, 천지우주가 바로 보면 깨달은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님같이 황홀찬란恍惚燦爛하게 그렇게 빛나게 보이지 않을 것인가,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서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해야 바른 공부가 됩니다.
그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는... 6조혜능六祖慧能스님은 참선의 그야말로 아버지같은 그런 분입니다. 달마스님을 참선의 할아버지라고 하면 6조 혜능스님은 참선의 아버지같은 그런 분인데, 그 분으로 인해서 나온 그런 경전이 다시말하면 참선의 교과서같은 것이 육조단경이어요.
육조단경에 보면 그 불성佛性 자성自性,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또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같은 뜻인데 불성佛性 자성自性이란 말씀이 100군데가 넘어요.
우리 중생은 가상만 보는 것이고 불성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도 역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하고 똑같은 뜻입니다.
헌데 그 별로 크지도 않은 조그마한 경전經典 속에서 그 자성自性 불성佛性이란 말씀을 100번 남어 하셨어요.
얼마만치 그러한 본래의 자리를 우리한테 역설하시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셨을까.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감사하게 우리가 받아들입니다마는 아무튼 우리 중생들은 우리의 본래성품이 바로 불성이고 자성인데 그 자리를 잊어버리고 산단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 참여하신 그런 보람으로 꼭 불성 자성을 아주 그야말로 명심해서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자성 불성,
이것이 우리 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본성입니다. 이 자리를 떠나면 그때는 중생이란 말입니다. 그 자성 불성을 안 떠나고서 항시 그 자성, 우리 본래성품인 불성하고 같이 더불어 있으면 그때는 성인이고 부처란 말입니다.
또 금강경金剛經에 있는 법문아닙니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상들이 있으면 이것은 중생인 것이고 그런 상이 없으면 성인이고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상相만 보고 삽니다. 좋은상 궂은상 그런 상만 보고 삽니다. 상을 떠나서 상을 초월해버리면 그때는 이른바 성인이고 부처란 말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우리 한평생 별로 긴 것도 아닌데, 허망한 사실로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이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못떠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인생고의 그것이 원인이란 말입니다.
가정이나 또는 사회나 또는 일반 국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실상을 보고 참다운 도리를 보고 도리대로 따라버리면 참 쉬운 것인데, 나도 편하고 남도 편하고 다 편한 것인데 사람들이 허망한 것, 있지도 않은 것을 그 어거지로 자기 업으로 봐서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 따라서 산단 말입니다.
참선하고 염불을 하면 아, 그런 것은 굉장히 어려운 생활이 아닌가.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느끼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마는 참선을 잘 하면 몸도 가볍고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고 말입니다.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참선을 가리켜서 불교전문적인 말로 해서 현법락주라.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나타날 현現자, 법 법法자, 즐거울 락樂자, 머물 주住자. 그 영원한 행복이 거기에 이루어지는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잘먹고 잘입고 가족끼리 화목하게 살고 그것보고 다 그것을, 그것이 가장 좋은 행복으로 알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중생들의 세속적인 행복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은 그때그때 찰나찰나 순간순간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락法樂이라. 법 법法자, 즐거울 락樂자 법락法樂이라. 참선하고 염불하고 거기에서 얻는 그런 행복은 법락입니다. 법락 이것은 이울어짐이 없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것이 증장되고 더욱 더 빛나고. 불멸의 행복을 우리한테 보장을 하는 것입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불자님가운데서 염불念佛을 그 많이 하셔서 염불을 함으로 해서 득력得力을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체험을 하셨겠지만 염불도 오랫동안 해서 마음이 정화가 되고 그렇게 되면 바람불면 바람이 따라서 염불해주고, 또 시냇물이 흘러가면 시냇물이 따라서 염불해주고 그러는 것입니다. 바람안불고 시냇물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고요한 그런 적막한 가운데도 역시 그 신묘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법 법法자, 즐거울 락樂자, 법락法樂이 우리 몸 전체를 감싸 돈단 말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참 쉬운 것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그 부처님 말씀, 부처님말씀은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말씀입니다. 성자의 말씀은 다 그렇습니다. 예수나 공자나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석가모니부처님말씀이 가장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여기까지 이렇게 먼데서 오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 모양인데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 보살님들이나 우리 거사님들이나 우리 불자님들 아니고서는 우리 불교가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문제아닙니까.
우리 불자님들이 그때그때 그 원근을 불문하고서 내왕 하시면서 도와주시고 또 기도祈禱를 모셔주시고 하는, 그런 여러 가지 그런 마음의 정성과 또는 물질적인 그런 시주施主와 이런 것들이 모아서 우리 불교가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그렇게 말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다른 가르침도 역시 다 훌륭한 가르침이나 지금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다른 가르침을 보면 기독교나 또는 유대교나 또는 이슬람교나 그런 가르침들은 대체로 그 평등무차별의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원융하게 원만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그런 가르침은 못된단 말입니다. 꼭 이것과 저것과 분별을 합니다.
하나님과 또는 일반 중생과도 절대로 본래가 다르지 않는 것인데, 또는 예수님의 본뜻은 절대로 다르지 않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후래인들이 잘못 듣고 잘못 새겨서 그렇게 진리에 어긋나게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꼭 자기들이 믿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의 참다운 대승가르침은 모두가 다 부처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으나 또는 유대교를 믿으나 이슬람교를 믿으나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공자님이나 또는 예수님이나 또는 마호메트나 다 그런 성인들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현행의 그런 종교가운데서 그 자기들 종교만 옳고 다른 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들의 그런 교조 가르침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경각을 시키는 것이 우리 불자님들이 하실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한다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참다운 진리인 것이고 또 참다운 진리에 따라서 우리가 행동하고 또는 사고하고 말을 하고 그렇게 해야만이 비로소 우리가 화해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세상이 참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세상아닙니까. 더구나 그 정보가 이와같이 서로 얽히고 설키고 정보의 홍수시대란 말입니다.
문화의 시대란 것은 앞으로 더욱 더 복잡합니다. 이런 시대에는 전부를 다 포섭해서 모든 정보를 정화를 시키는 그런 것이 그 지도인물이라든가 또는 우리 일반생활인이나 누구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부처님가르침에 따르는 것은 가장 행복스런 생활입니다. 절대로 우리한테 손해가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지키는 그런 면으로 보든지 또는 가정의 그런 화목으로 보든지 또는 다른 사람들하고의 그런 좋은 관계로 보든지 어떤 면으로 보나 가장 좋은 최상의 그런 길이 부처님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 지금까지 부처님가르침을 잘 받들어오셔서 이와같이 모두 불사도 동참도 해주시고 앞으로도 또 하실 것이고 해서 그런 점에 있어서는 대단히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마는 그렇게 하시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른 정견, 바른 견해를 앞세워서 해야 그래야 불사도 잘 되고 여러분들 하시는 일도 보다 더 잘 풀리게 되시는 것입니다.
염불念佛 참선參禪이란 것은 이것은 꼭 우리 불자님들이 그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해서는 우리한테 큰 도움이 안됩니다.
염불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생각에서 생각이 더욱 더 깊어지고 우리 생각이 우리 마음의 뿌리가 바로 부처인데 우리 생각은 지금 이 범부중생의 마음인지라 마음이 엷단 말입니다. 마음이 깊지를 못합니다.
우리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깊이가 있는 것이고 우주를 다 감싸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그 깊은 마음을, 깊은 마음 그 본래의 마음을 다 우리가 깨닫고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항시 마음으로 집중하고 우리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으고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아는 것 가지고서 그냥 내가 다 알았다, 그래버리면 그걸로 해서는 힘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우리가 아는 것이 참다운 힘이 되고 또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체험해서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참선 염불을 공부해야 한단 말입니다.
참선參禪 염불念佛을 하는 것은 그 전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른 정견正見,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정견이 꼭 필요합니다.
바른 정견은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 모든 존재가 본래로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러한 견해가 이것이 바른 정견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불교의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입니다. 불교를 모두 다 몰아서 한 말로 말하면 대총상법문인데 그 내용이 어느 것이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어느 것이나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되어야 이른바 부처님의 대승적인 정견이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 불심佛心가운데는 만능萬能의 자리니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심은 우리 마음은 바로 만능의 자리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 나는 배운 것도 얼마 안되고 나는 업장業障이 무거우니까 내 마음은 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십시오. 지금 잘나나 못나나 많이 배우고 안배우고 상관이 없이 우리 마음가운데는 행복幸福도 원만하고 지혜智慧도 원만하고 자비慈悲도 원만하고 모두가 다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꼭 믿으시고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바른 소원所願, 바른 소원을 한다고 생각할 때 또는 바른 소원을 하고 우리 행동이, 또 계행戒行이 바르고 말입니다.
도덕적道德的으로 그렇게 바른 행동을 하고, 우리 마음을 모으면 그때는 꼭 성취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성취하고 싶어서 소원하는 것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을 해치지 않고서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소원을 품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천지신명天地神明도 돕고 부처님도 우리를 가피加被하시고 그러겠지요.
그런 정당한 소원을 품고서 그 다음문제는 우리 행위가 발라야 됩니다. 음식도 함부로 먹고 말도 함부로 하고 그러면 우리 또 소원이 성취가 못됩니다. 방해꾼이 많이 생긴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당한 소원, 그런 소원을 품으면 우리는 가장 정당한 소원은 우리가 성불成佛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은 아직은 세속에 계시니까 성불한다는 그런 대전제는 있다하더라도 또 사소한 개인적인 그런 소원이 많겠지요.
그런 소원을 가졌더라도 꼭 우리 행동이 도덕적으로 발라야 합니다. 내외분도 절조가 아주 정말로 참 절조가 굳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이고 음식도 함부로 자셔서는 안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이고 또는 음식이나 우리 건강도 둘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자실 때도 그 맑게 자셔야 됩니다. 가급적이면 고기 좀 덜 자시고 말입니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은 우리한테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불자님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불교를 믿지 않습니까. 불교는 자비慈悲를 주로 합니다. 자비를. 자비를 주로 할 때에 닭이나 소나 또는 돼지나 그런 것도 역시 하나의 생명 아닙니까. 그 누가 죽였든지간에 우리가 먹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간접적인 살생殺生이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소원이 없이 그렁저렁 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의 소원을 꼭 이뤄야되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꼭 부처님말씀을 따라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모든 생명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그 말씀인데, 불살생계不殺生戒가 제일 처음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고기를 가급적이면 전혀 안먹으면 더욱 좋고 그렇게는 하기 어렵더라도 적게 자시고 될 수록 맑게 자셔야 그래야 몸에도 좋고 소원도 이루어지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돈 많이 들여서 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저같은 사람도 지금 80이 가까워져가지만 제가 젊어서 함부로 먹었으면 지금 오늘 이 자리에 올라오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맑게 먹는다고 지켜왔으니까 지금 이렇게 여러분들한테 횡설수설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정말로 부처님 가르침은 제일 돈도 적게 들고 말입니다. 제일 쉽습니다. 그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소원도 이루어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부처님은 바로 우리 생명인 것이고 우리 마음에 가서 석가모니같은 그런 마음, 예수같은 그런 마음이 다 들어있습니다.
절대로 우리 개인적인 마음을 소홀히 생각말으십시오. 자기마음이 바로 알고 보면 바로 부처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가 마음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지 마음없이 부처가 되겠습니까. 만능의 자리... 만능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비나 행복이나 지혜나 만공덕이 우리한테는 다 들어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공덕功德을 자아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도덕적으로 우리 생활이 맑아야 한단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내외분 절대로 절조를 지키시고 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함부로 말 않고 또 동시에 가장 중요한 그 바른 정견, 일체존재가 아들이나 딸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다 바로 보면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부처로 안보이면 아직은 우리 공부가 부족한 셈입니다.
그렇게 안보이면 항시 참회懺悔하시고서 정말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참선參禪 염불念佛 조석으로 우리가 생활한다하더라도 6시간 자나, 7시간 자나, 또는 10시간 자나 사실은 별 차이가 없어요.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마음이란 것은 그 만능의 자리기 때문에 마음만 잘 먹어버리면 사실은 한 시간 자도 그때는 무방하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해보시면 압니다. 꼭 무슨 지금 현대 생리학 따라서 7시간 자고 몇시간 자고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음이 바로 만능의 자리다, 마음이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만공덕萬功德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참선 염불, 가급적이면 조석朝夕으로 아침에 하다못하면 30분이라도 그렇게 하시고. 참선과 염불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불심佛心을 떠나지 않으면 다 바른 참선이고 참다운 염불이란 말입니다.
소리를 내도 좋고 또는 안내도 무방한 것입니다. 꼭 소리를 내야만 좋은 것도 아닌 것이고. 부처님 법문은 소리내는 쪽으로나 안내는 쪽으로나 다 상관없어요.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고향자리, 그 자리를 떠날 것인가, 안 떠날 것인가. 거기에가서 중요한 하나의 핵심核心이 있단 말입니다.
오늘 그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성자리, 자성자리를 잘 기억해두십시오. 자성이 바로 불성, 불성佛性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입니다. 근본성품자리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상만 보고 사는데, 상은 그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자성自性 불성佛性만 이것이 참다운 생명의 본바탕이고 눈에 보이는 몸뚱이나 재산이나 또는 명예나 그런 것은 모두가 이것은 그야말로 참 하나의 꿈夢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셔서 금생에 소중한 인생을 손해없이 행복스럽게 살으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
*20010429-부안 실상사법문-청화대종사설법
*20010429- 촬영
*200501204-DVD작업 본정 김영동
*20070504-원드작업-지혜림 이주미
*20070507-정리 본정 김영동
*본글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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