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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23호 혜운사 예수재법문

                       <제 23 호>

                   20010603-혜운사 예수재법문


   <제불여래법계신諸佛如來法界身>


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보면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이러한 법문이 있습니다. 시방여래라는 것은 과거부처님이나 또는 현재부처님이나 또는 미래부처님이나 모든 부처님은 그 온 세계를, 이 법계라는 것은 온 세계를 말합니다. 온 세계를 몸으로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은 우리 인간과 지금 아주 격단지게 공중에 계신다거나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거나. 그와 같이 우리들하고 격리해서 우리를 떠나서 별도로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그 부처님은 우주자체, 법계를 몸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은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어느 때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우리 신앙대상인, 그 부처님과 나와의 관계, 이런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같이 나이가 꽤 많이 이렇게 된 사람은 그 금생에 우리 불자님들하고 대체로 몇 번이나 만나서 몇 차례나 부처님 법문을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 허무감虛無感을 느끼게 되고 또 무상無常을 더욱 더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요즘에 와서 특히 제가 하는 법문은 그 현상적인, 잡다한 현상적인 그러한 문제를 떠나서 가급적이면 그 본체론적本體論的인 근본도리根本道理가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또 부처와 나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항시 말씀을 하고 싶어서 제가 되풀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 말씀은 주로 그 본체적인. 나라는 생명生命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 자기라는 문제는 어느 종교의 지도자나 다 근원적으로 우리한테 역설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성인도 다 그렇지만 특히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년경-399, 철학의 아버지라 하는 그 소크라테스는 서기 한 470년 전에 나오신 분 아닙니까. 이른바 철학의 아버지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 소크라테스가 제일명제第一命題, 가장 그 귀중한 제일 그 문제의식問題意識이 바로 ‘그대 스스로를 알아라.’ 그대 스스로가 무엇인가.

그 그리스의 델포이Delphoe 신전에다가 써 붙인 그런 귀중한 표어, 이것이 바로 그대 스스로를 알아라, 하는 그런 문제란 말입니다. 내 자신은 무엇인가?

지금 인도에서 살다 가신 그 마하리쉬Ramana Maharshi 1879-1950, 마하리쉬란 분도 위대한 성자로 해서 여러분들이, 여러 사람들이 추앙을 많이 했습니다마는 이 분도 그 문제의식을 그대가 대체로 무엇인가. 이 자기 존재의식을 그와 같이 문제시해서 우리한테 교훈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세상에 태어난다하더라도 우리 인간존재의 그 본래면목자리, 인간은 대체로 무엇인가. 인간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문제는 어느 때 누구한테도 이것은 지워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의 인생문제가 다 그러한 문제를 기점으로 해서 순순히 풀려갑니다마는 자기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없으면 모두가 다 빗나가고 삿되게 옆길로 가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부처님법문은 다양해서 아주 미개한 사람들한테 하신 법문도 있는 것이고, 또는 소승小乘이라. 성문승聲聞乘이라 연각승緣覺乘이라 하는 그런 정도가 이것이 소승인 것인데, 소승차원에는 어떠한 법문을 주로 했는가 하면 일체모두가 그대의 이 몸뚱이나 그대 마음은 이것은 다 공이다,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몸뚱이가 자기 몸이고 우리 마음은 우리가 그때그때 느끼고 분별하고 좋다 궂다 하는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이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내 이름은 김 누구고 또는 박 누구고 하는 그런 것이 자기 스스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은 논리적으로 추궁해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 가짜 이름이나 가짜 모양으로 있는 이것은 사실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공부를 하실 때는 꼭 그 상식적으로 우리 보통 상식으로 아는 범위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을 말으셔야 됩니다. 불교라 하는 것은 상식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초월超越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이 눈으로 보고 느끼고 우리 중생들이 긍정하는 것은 이것은 소박素朴한 실재론實在論이라, 소박한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지 철학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깊이 탐구해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의 상식으로 알 수 없는 그런 자리에 가서 우리의 참다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우주란 것은 바로 부처님을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우주가 이와같이 부처님을 몸으로 하기 때문에 우주의 어느 구석도 부처님의 법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이해서 말씀을 드리면 부처 불자, 성품 성자, 어느 것도 그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이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 존재론적으로 얘기한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우주가 사실은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그냥 인식적으로 우리 대상화시켜서 얘기할 때는 아, 우주가 이것이 그야말로 참 부처님의 저만치 멀리 계시는 부처님의 이것은 하나의 몸이 아닌가, 부처님의 도리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우리가 존재의 모든 실상을 바로 얘기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란 것은 일체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주란 것은 일원적一元的으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실상의 생명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보지를 못하는 것이고 성자는 깨달아서 명백하니 하나의 도리를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자孔子나 또는 노자老子나 또는 예수님이나 그런 성인들도 모두가 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것을 깨달은 분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중생과 성인들 차이가 어디가 있는고 하면 간단명료합니다. 성인들은 우주가 하나의 생명자리, 하나의 생명자리를 명백히 깨달아서 우리한테 가르친 어른들인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그걸 보지를 못하는 것이고. 불교의 어려운 말로 하면 상만 본단 말입니다. 현상만 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이렇게 차별분별로 보는 것은 이것은 중생의 견해입니다.

따라서 차별견해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나와 대립되는 너가 있는 것이고 또는 좋은 것과 대립되는 그런 나쁜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우리 행동이 항시 제한을 받습니다.

가족적으로 한 가정을 형성하는데 있어서도 우리가 바른 철학, 바른 도리를 갖지 못하면 원만한 화합된 가정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당연히 우리 중생이 사는 것은 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들 하실랑가 모르겠지만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본래 있는대로 그대로 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諸行無常아닙니까. 제행이 무상이라. 모든 존재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다르다는 그런 것은 이해를 할 수가 있다하더라도 순간 찰나, 찰나찰나. 찰나라는 것은 가장 짧은 시간보고 찰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일초의 몇 백분지 일도 못되는 그런 짧은 시간에도 우리는 지금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입니다. 차근차근 지금 변화해 간단 말입니다. 

금방 그냥 몇 초 동안에 주름살이 없다가 생기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또 그것이 며칠이나 몇 달이나 그것이 계속이 되면 그때는 그야말로 없던 주름살이 생기는 것이고, 그럴 수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이란 것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우리 세포가 신진대사로 해서 지금 노화가 돼간단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차별로 봐서는 같은 것이 없고 모두가 다 그때그때 무상하니까, 이 변화무쌍해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도 변화해 나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모든 것은 다 그때그때 바꾸어지고 새롭게 태어나고 또는 소멸되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도리만 알아서는 불법을 또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법이 그때그때 변화무상變化無常하기 때문에 사실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고 고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그대로 가만히 변치 않아야 자기라고 고집이 될 것인데, 그냥 지금 다르고 순간순간 또 다음 단계 다르고 또 내일 다르고 모레 다르고, 이와같이 변화무쌍한 그러한 존재를 이것이 내 것이다, 고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라는 존재는 항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또는 죽은 뒤에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밑에서 우리가 고집하는 것이지, 그런 기대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바로 무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고집할 아무런 꺼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아, 불교는 윤회를 말하니까 과거전생에도 금생에 태어난 이와같은 모양 이와같은 마음으로 과거전생에도 우리가 살아있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나.

 또는 내생에도 이와같은 몸으로 해서 다시 태어나서 이 마음도 이대로 가지고 살겠지, 이러한 기대를 갖습니다마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 전생의 몸이나 지금 몸이나 같지가 않습니다. 분명히 윤회는 합니다.

윤회는 하나 우리 생명의 그런 뿌리는 같다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태어났을 때는 금생에 남자가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금생에 죽어서 내생에도 이와같은 몸 이와같은 그런 자기 인간적인 성이 남성 여성이 꼭 그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금생에 부부가 과거전생에서는 또 바뀌어서 금생에 아내가 과거전생에 남편이 되고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그대로 이 몸 가지고 이 마음가지고 과거나 전생으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우리가 지은 바 업장따라서 과거전생에 업을 지었기에 금생에는 그 업에 걸맞게끔 업에 알맞은 우리 몸과 마음을 받는 것이고,

또는 금생에 제아무리 우리가 잘못 산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으로 희망을 품고 마음으로 바로 바른 뜻을, 바른 서원誓願을 우리가 세워가지고서 바르게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또 반드시 바꾸어져서 지금 순간뒤에도 바꾸어질 뿐만 아니라 내생가서는 완전히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훨씬 더 좋은 데 가서 태어나기도 하고 또는 잘못 살면 훨씬 더 나쁜 데로 전락되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금 존재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이란 존재가 제일 낫겠지. 그러나 사실은 사람이란 존재가 제일 나은 존재는 아닙니다. 사람보다도 훨씬 좋은 데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욕계欲界만 하더라도 3계 28천이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합해서 천상등급도 28천이라. 스물여덟등급이나 있단 말입니다. 이와같이 천상만 해도 그러는 것이고,

또는 천상도 초월해서 가장 그 좋은 곳, 가장 좋은 곳은 사무칠 극자, 즐거울 락자, 행복이 사무치게 그 이상이 없는 최상의 행복의 나라가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극락세계極樂世界아니겠습니까.

극락세계는 어떠한 면으로 보나 완벽한 세계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몇 만 생을 헤맨다 하더라도 종당에는 다 극락세계로 태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지금 현실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인생고해人生苦海가 제아무리 험악하다하더라도 우리는 기필코 필연적으로 우리 중생들의 본래성품이 바로 부처님성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맙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면 그마만치 그런 과보로 해서 더 불행이 될 수도 있고 더 행복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차이뿐인 것이지 몇 만생 지낸다하더라도 또는 우주가 파괴가 되어서,

우주란 것도 모양이 이루어지는 그런 성겁成劫이 있는 것이고, 또는 중생이 사는 살 주자 주겁住劫이 있는 것이고, 또는 차근차근 그 폐기한 에너지가 축적이 되어가지고서 파괴가 되는 그런 괴겁壞劫도 있는 것이고, 또는 그래가지고서 순수한 에너지만 남는 순수한 우주의 정기精氣만 남는 그런 물질은 다 비어버리는 그런 공겁空劫도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일관된 도리에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의 우주의 참다운 근원적인 생명은 바로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인데 불성 그 자리는 순수생명純粹生命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러난 모든 가능성으로 해서 다시 말하면 인간이 좋아하고 싫어한 이른바 인력과 척력, 좋아하는 마음은 인력이 되고 싫어하는 마음은 척력이 됩니다. 이런 것이 차근차근 쌓이고 쌓여서 이 우주의 형체가 이루어지고 다 그래가지고서 차근차근 그때는 생물이 살게 되고 그래가지고 다시 또 파괴가 되고, 다시 또 공이 되고 이른바 영겁회귀永劫回歸라,

우주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이요, 생물이 사는 주겁住劫이요, 또는 파괴가 되는 空劫이요, 또는 다 물질이란 것은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 텅텅 비어서 순수한 생명만 남는 순수한 에너지만 남는 공겁空劫이요. 이런 것이 영원히 되풀이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윤회하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되풀이하듯이 우주도 그와 비슷한 도리로 해서 영원히 되풀이됩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라도 우주가 파괴가 되어서 우주가 다 물질은 완전히 파괴가 된다하더라도 우리의 인간의 정신,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그대로 남습니다.

우주의 근본성품도 내내야 그 불성으로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근본 생명이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인격이기 때문에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만 부처님이고 나무아미타불만 부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성, 우리 인간의 본성도 내내야 다 부처란 말입니다. 

아까도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인들이란 것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생명이다, 하는 그런 자리를 깨닫고 아는 분들이 성인인 것이고 우리 중생은 잡다한 것만 분석적으로 이것저것 잡다한 것은 많이 알지만 근본도리인 하나의 생명을 모른단 말입니다. 성인과 우리 범부의 차이는 그런 데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느끼는 그런 문제가운데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 바른 신앙, 바른 신앙은 어떤 것이 바른 신앙인가. 바른 신앙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천지우주가 일원적一元的으로 이원二元 삼원三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원적으로 하나의 도리라,

기독교나 인도의 힌두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힌두교는, 인도의 힌두교도 굉장히 위대한 종교입니다. 지금도 인도교라 그래서 인도에서 수억이 믿고 있지 않습니까. 힌두교도 브라만신, 브라만 신이 결국은 우주의 근원적인 생명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이 세계적으로 한 20억이나 믿고 있는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도 예수님이라 하는 성인이 내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사실은 진리 면에서는 불교나 똑같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같이 구체적으로 설명이 조금 부족한 것이지 본래 진리인 자리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도 예수님의 본 가르침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과 나와 예수와 하나님과 예수와 모든 중생이 다 하나다, 그런 도리란 말입니다.

그런 도리를 사람들이 해석을 잘 못해서 하나님은 하나님 따로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 해서 따로 있고, 일반 중생은 창조를 받아서 그것은 창조를 받은 존재인 것이지 하나님과 절대로 같지가 않다. 이러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사실은 그 신부님들이나 또는 목사님들이 그렇게 옳게 해석한 분도 있지만 또 잘못 해석하는 분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리라는 것은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불교도 부처님과 우리 중생과 다른 자연과 모두가 하나입니다.

기독교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예수와 또는 모든 자연과 결국 하나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성인들 가르침이 아니란 말입니다. 꼭 그 하나의 도리, 하나의 도리를 알면 성인인 것이고, 하나의 도리를 모르고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잡다하게 나누면 그때는 범부중생입니다.

우리 중생의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우리 중생이 우주의 도리 그대로 하나로 생각하면 불행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그 공해公害문제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또는 그 과거에 무슨주의, 무슨 공산주의, 또 무슨주의 모두 그런 주의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 참다운 평화를 위해서, 참다운 평등을 위해서 다 공헌하기 위해서 그런 주의가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제대로 못되고 허물어져버리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런 주의들이 제대로 오랫동안 남아있어 가지고서 인류사회의 그런 행복을 위해서 공헌하지 못하고 그렇게 무너졌던 것인가. 이런 것은 참다웁게 하나의 도리를 몰라서 그럽니다.

저 사람이나 나나 또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또는 정치를 받는 사람이나 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가 다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저절로  평등사회가 되고 저절로 또 모든 그런 분배도 똑같이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데,

우리 중생들이 아, 자기라는 것은 내 몸뚱이가 이것이 내가 아닌가, 따라서 자기를 낳아준 부모만 소중하고 다른 사람 부모야 내가 알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나누어서 보는 그런 마음 때문에 모든 그런 죄악의 씨앗이 거기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도리, 하나의 부처님, 하나의 하느님, 이름만 다르지 똑같단 말입니다.

브라만 신, 또는 부처님, 하느님 또는 마호메트교의 알라, 모두가 다 그때그때 그 나라 민족의 풍속이나 언어에 따라서 달리 표현된 것이지 근본 뜻은 똑같습니다.

이렇게 알으셔야 그래야 현대 이 세계적인 문화정보사회에서 적응된 우리의 그런 이해 방법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도리란 것은 그런 성인들이 말씀을 많이 하고 있고, 또는 철학자도 여러 가지 학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 귀추는 돌아갈 곳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도리는 그렁저렁 알만도 하지만 그러면 하나의 도리를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기 생명과 일치를 시킬 것인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 부처님한테 부처님이 간직하고 있는 또는 원래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공덕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란 것은 그냥 하나의 도리나 논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는 그 모든 성품공덕性品功德이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우리가 한다하더라도 그 부처님은 그냥 단순한 부처님이라는 그런 명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가운데는 또 여러 가지의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아까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외었습니다마는 보리방편문 가운데도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또는 원만보신圓滿報身이라, 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그런 속성,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우주와 더불어 있는 끝도 갓도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그런 자리로 부처님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청정법신입니다. 또 청정법신은 그와 같이 단순히 그것이 끝도 갓도 없는 우주와 더불어 있는 하나의 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자비慈悲나 또는 지혜智慧나 모든 能力이나 만능萬能을 갖추고 있는 그런 자리가 원만보신입니다.

그런 자리를 근거로 해가지고서 이루어지는, 사람이 태어나고 또는 다른 동물이 태어나고 또는 여러 가지 우주의 천차만별의 모든 존재가 이루어지는 그런 자리는 이것은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어렵다고 생각을 마르시고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꼭 우리가 어느 누구나가 다 알아두어야 될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믿는 또 내 생명의 본바탕이 부처라고 하면 아, 부처가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런 정도는 아주 그 난해한 그런 도리는 모르거니와 우선 3가지 4가지 그런 정도는 알아두셔야 그래야 불경을 보시더라도 그때그때 의심없이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남한테 또 자기 신앙을 전수할 때도 알 수 있게 전수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꼭 그 청정법신은 이것은 우리 본래 생명, 우주의 본래생명이 바로 부처님인데 그 부처님의 무량무변한 한도 끝도 없는 우주와 더불어서 끝도 없는 무량무변의 그런 자리가 청정법신이고, 다만 그와같이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광대무변한 그런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 법신가운데 이것저것 다 공덕이나 지혜나 모두가 모든 성품공덕이 들어있는 그런 공덕자리, 지혜공덕자리가 이것이 원만보신이란 말입니다. 보신인 것이고 또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라든가 또 자기라는 존재라든가 그 모든 변화하는 이 일체만유一切萬有의 자리, 이런 자리가 천백억화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 셋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에 포함된, 하나의 그런 부처님한테 포함된, 하나의 하느님한테 포함된. 하나님 부처님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다만 언어상 그 지역상 달리 표현된 것이지 성인들이 말씀한 진리가 절대로 둘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오늘날은 이 지구촌시대 아닙니까. 따라서 다른 종교 다른 지혜 다른 논리 다른 철학도 우리가 다 이해를 해서 모든 진리가 종합적으로 포괄적으로 하나의 진리로 우리가 통일을 시켜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선 자기 마음도 불안스럽고 또는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그 무수한 난관에 봉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우선 이론적으로 막힘없이 훤히 트인 마음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 우주의 존재근원은 무엇인가. 이렇게 알아버리면 참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성자의 말씀들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해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것은 불교말로 말하면 하나의 상이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상이란 말은 가짜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고 느끼고 분별하는 것이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상이란 것은 이것은 하나의 거품이나 같단 말입니다. 안개나 같고 또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금강경金剛經은 여러분들께서도 그 독송을 많이 하시지요. 금강경 가운데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 만약 우리 중생이 그 우리가 보는 좋다 궂다, 또는 나다 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그런 상을 그런 상이 상 아닌 것을. 그런 상들은 모두 허망한 것인데 그런 상이 그런 허상이 그런 망상妄想이 상이 아닌 것을 분명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즉견여래卽見如來라. 바로 부처님을 뵈올 수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명색분명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수학공식같이 그야말로 단순직결單純直結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정확한 진리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허망한. 잘 못 봐서 중생의 번뇌에 가리어서 우리는 허상을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허상을 중생들은 허상이라고 미처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허상이 정말로 없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그 즉시에 우리가 참말로 진정한 도리, 진정한 진리를 본단 말입니다. 진정한 도리가 무엇인가.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부처님께서 저 공중 어디에가 계신다, 아,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나는 여기 있고 대상적으로 부처님은 저만치 계신다, 이런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진리도 아닙니다. 천지우주가 간격도 없이 빈틈도 없이 진리로 충만해 있습니다.  

비록 금생에 나와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박약한 사람도 있겠지요. 또는 정신이상자도 있겠지요. 여러모로 해서 우리의 그 존재가 과거전생의 업따라서 금생에 제한된 몸을 받는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그 자리는 다 똑같습니다.

계발을 좀 못하고 더하고 그 차이뿐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우리가 남을 무시할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한테나. 자기 아들이나 자기 딸이 혹시 과거전생에 우리가 잘못 지어서 병신으로 태어났다고 합시다. 벙어리로 태어나고 또는 귀머거리로 태어나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형식뿐인 것이지 겉만 그런 것이지 그네의 마음은 똑같이 우리 마음 예수마음 공자마음 똑같은 마음입니다.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거니 우리가 누구를 무시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인간의 행복은 이것은 진리와 더불어서 행복이 됩니다. 진리 없이 절대로 행복이 못되는 것입니다. 항시 진리와 행복은 정비례합니다.

진리에 밝으면 우리는 어느 때 언제나 행복스런 것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제 아무리 지위가 높고 제 아무리 돈이 많이 있고 어떠한 그런 물질적인 혜택이 있다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우리가 행복을 보장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어려운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인들 말씀은 간단명료합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이것은 부처님의 몸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도 부처님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깨달아서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같은 눈으로 보고 또는 공자같은 눈으로 보고 노자같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찬란스러운 광명光明의 생명生命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주는 바로 우주자체가 생명인 동시에 하나의 광명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비단 우리 불교인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자들은 다 증명을 합니다.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하면 광량자光量子라, 광량자라. 

우주의 장에너지, 우주의 장場field에너지energy를 구성한 것은 이것은 광량자, 그 광명이 우주를 구성한단 말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이 우주란 것이 모두가 다 그 광량자라 하는 광명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현대물리학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제자가 그걸 모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만 그 물리학자는 광량자, 우주의 기본 되는 그 광명의 근본이 무엇인가, 이것만 모른단 말입니다. 

우주를 구성한 그런 양자, 아주 그 어떻게 이 현대의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도 볼 수가 없는 그런 세밀한 것, 무엇이 무엇인가 모르는 것, 물질이란 것은 저 끝에 가서는 무엇이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빛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이 무엇인가를 현대물리학에서 다는 규명을 못하는 것입니다. 어째 못하는고 하면 그런 단계에서는 증명할래야 증명할 길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무엇이 무엇인가 모르는 바로 그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진여불성은 꼭 외워두십시오. 다른 어려운 것은 못 외워두신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이라, 우주의 근본생명, 나의 근본생명인 동시에 모든 존재의 근본생명자리가 진여불성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무엇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일체가 유심조라.

화엄경은 부처님가르침가운데도 대 집성된 부처님가르침을 다 거기에 집합한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방대한 가르침의 본뜻이 무엇인가, 이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납득이 안가시겠지요. 아, 산도 있고 내도 있고 내 몸뚱이도 있고 다 있는 것인데 어떻게 모두가 마음뿐일 것인가. 우리 중생들이 잘못 봐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겉만 보면 이것저것 따로따로 구분이 있겠지요. 그러나 속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성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본바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기 때문에 다 똑같단 말입니다.

똑같은 자리를 알아야 그래야 우리가 불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부처님 뜻을 바로 새기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해야 우리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이 순탄하게 다 다 풀려갑니다. 아, 너도 부처님, 나도 부처님 아들도 부처님 딸도 부처님. 어느 것도 다 부처라고 생각하고. 또 자연도 부처님 말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에 자연을 훼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물방울 하나,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생활은 저절로 항시 감사한 마음에서 남과 더불어서 걸음걸음 행복스럽게 우리가 살다가 또 죽은 다음에는, 죽은 다음에는 극락세계에 미처 못가면  천상 가는 것이고 천상까지 미처 도달을 못하면 그때는 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진리를 알고 하는 생활이란 것이 그 내일 죽고 모레죽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서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갈 것인가. 컴컴해야 서럽고 그럴 것인데 죽자마자 또는 금생에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임종 때라도 부처님생각하고 마음을 바로 하면 임종때 그 마음가지고 그때는 저승으로 가게 되어놔서 그냥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바쁜 우리 사바세계에서 우리가 잘 못 닦으니까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해서 예수재豫修齋라, 미리서 닦아둬야지 닦아두지않으면 그냥 어언간에 그냥 죽음이 온단 말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모양으로 언제 올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 미리서 닦아서 죽을 때 당황하지 않고서 자신 가지고 당당하니 저승길에 우리가 가고 또는 그와 동시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예수재를 모시면 어떤 누구나가 아무리 못 태어나도 사람으로는 태어납니다.

조금 잘 태어나면 그때는  천상에 태어나고 말입니다. 보다 더 좋은 일 많이 하고 남한테 베풀고 그러면 그때는 극락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오늘 예수재가 이렇게 우리 불자님들, 반가운 불자님들 많이 모이시고 또는 우리 스님네도 많이 모이시고 그래서 아주 성황리에 잘 이루어져서 정말로 하여튼 오늘 이 법회 공덕으로 꼭 금생에도, 오늘 재를 모신 다음에 금생에도 모든 일이 잘 풀리시고. 잘 풀리는 것은 우리 마음이 걸음걸음 부처님하고 가까이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부처님하고 가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이름, 부처님 이름은 부사의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 하고 불러도 아버지가 얼마나 참 그리워집니까. 엄마! 엄마! 불러도 엄마가 얼마나 더욱 더 그리워집니까.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의 근원적인 생명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그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자체에 가서 부사의한. 행복幸福이나 지혜智慧나 자비慈悲나 모두가 다 거기에 깃들어있는 그런 이름입니다.

한번 부르면 한번 부른만치. 그러기에 부처님 이름은 아가타약阿伽陀藥이라. 아가타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만병통치약萬病通治藥이라. 부처님 이름은 만병통치약입니다.

병이나 무엇이나 우리 번뇌나 부처님 이름은 한번 부른만치 우리 업장이 녹아지고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또는 주변도 정화를 시킨단 말입니다.

비단 자기만이 아닌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사실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살면 바로 산만치 우주가 그대로 정화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오늘 예수재豫修齋 더욱 더 부처님한테 우리 신앙을 깊이 하시고 또 끝날 때까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무수히 많이 하시고 돌아가실 때에도 아주 혼잡할 것입니다마는 그 부처님이름 그대로 차에서도 운전하시면서도 외시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아주 부디부디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10603-무안혜운사예수재-청화대종사설법

*20010603-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20050801-DVD작업-본정 김영동

*20070503-워드작업--지혜림 이주미

*20070504-정리-본정 김영동

*본 글은 동영상 자막 작업용으로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법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