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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6. 정통선의 향훈

[참마음 世界] 오면 사회악(社會惡) 사라져

 [참마음 世界] 오면 사회악(社會惡) 사라져


지금은 사세(寺勢)가 약화되어 송광사(松廣寺)의 그늘에 묻혀 있으나 통일신라시대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던 태안사(泰安寺)의 큰스님 강청화(姜淸華). 66세의 나이답지 않게 목소리에 울림이 있고 조용한 미소 속에서 안광이 무섭게 번쩍인다. 40여 년 동안의 토굴생활과 면벽정진(面壁精進)을 거듭하였고 최근 3년간도 태안사의 일주문 밖에 나가지 않고 참선을 거듭하였던 그는 "지금도 앉아서 수면을 취하느냐"니까 미소로서 답한다. "눕고 싶진 않느냐" 고 물어도 여전히 미소.


1923년 무안군 운남면 연리에서 탄생, 24세 때 송만암(宋曼庵) 스님의 상좌인 금타(金陀)선사의 문하에서 출가했다. '정통선(正統禪)의 향훈 (香薰)' 이라는 법어집(法語集)이 간행된바 있는 그는 계행(戒行)이나 불교이론에 다 같이 투철하며 현실판독에도 예민하다.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1세기 이상의 이 나라의 업보가 맺힌것" 이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그 죄업을 지은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사원이 산속 멀리 있고 스님도 이렇게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것이 불교의 현실 외면 아니냐" 니까 "가까이 있어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고 멀리 있어서 좋은 점 나쁜 점이 있다" 고 응답. 우리 사회의 내일과 인류의 장래에 대해서도 "불성(佛性)을 가진 인간은 능히 무명(無明)을 헤쳐 나갈 것" 이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믿음에 의해서 성립되는 종교가 갖는 건강성일 것이다.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냐" 는 물음에는 "진정한 자아인 부처를 성취하고 고해에 헤매는 이웃을 또한 부처가 되게 하는 보편타당한 길, 그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고 봅니다" 라고 힘주어 말한다.




<기자> 오랜만에 스님을 뵌 감회가 큽니다. 72년 여름에 뵌 것이 마지막 이었으니 18년쯤 되었군요.


<큰스님> 그렇게 오래 됐습니까. 정말 오래됐군요.


<기자> 요즘도 변함없이 선(禪)에 정진하고 계시지요?


<큰스님> 그것이 산승(山僧)의 업이라 놔서요.


<기자> 그 시간표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큰스님> (쑥스러운 표정을 한참 지은 뒤) 새벽 2시 반쯤 일어나 예불하고 두어시간 좌선하고 8시경에 입선(入禪), 10시경에 방선(放禪)합니다. 그리고 점심공양 후 2시경에서 4시까지 좌선, 저녁 예불을 한 뒤 또 좌선합니다.


<기자> 지금도 손수 세탁하고 군불 뗍니까.


<큰스님> 일하는 즐거움이 적지 않거든요. 노동자들이나 농사꾼들처럼 고된 일이라면 못하겠지만 빨래 정도야 놈새 밭에서 일하는 것과 같잖습니까.




무소유(無所有)의 사상은 사욕(私慾) 병폐 치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윤리관(倫理觀) 확립이 시급,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存在)되어야



<기자> 말씀 드리기 거북스럽습니다만 저는 불교에 대해 문외한입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알려고 해도 윤곽이 잡혀지지 않습니다.


<큰스님>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 그럴 겁니다. 사실 불교는 쉬운 겁니다. 밭에 씨앗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것이 바로 선이고 깨우침인 겁니다.


<기자> 저는 그것이 불교의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만....


<큰스님> 그보다 믿음을 가져야지요. 사변적인 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기자> 한국불교가 유신(維新)을 부르짖은 지 어언 70여 년이 됩니다.

그런데도 한국불교는 현대화가 미진한 상태이고 현대적 삶에 의해 불교(또는 그 敎理)가 재해석되지도 않았습니다. 불교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속에서 살고 있으며, 옛날과 같은 용어로 교화와 해탈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불교는 현대 속에서 중세적 논리와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이 점이 반성할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큰스님> 최 선생의 말뜻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될 것은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조선시대 5백 년 동안에 불교가 금기시되어 '산중불교' 가 되었으며, 그 긴 기간에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민중 속에서 이해하고 풀어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둘은 불교가 현대적 성격과 다른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겁니다. 현대는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이든 사회주의 체제이든 물질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와 다른 '마음의 종교' 입니다. 불교가 이 시대에서 현대인에게 쉽사리 가 닿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을 겁니다.


<기자> 제 소견으로는 현실이야말로 모든 사상, 종교, 문학을 낳는 밭이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들은 현실로부터 비롯되고 현실을 뜻 깊게 하며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현실을 망각한 사유형태는 그것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다 할지라도 어머니를 버린 불효와 같습니다.


우리가 죄 짓지 말고 올바르게 살자는 것은 오늘 '이곳에서의 우리 삶의 중요성' 때문이지 전생이나 내세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해탈도 이곳에서의 고통스런 업보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지 극락행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면에서 불교는 현실을 -그것이 물질 중심적 세계라 할지라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큰스님> 아니지요.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의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을로 내려 왔고 불교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役事)하게 된 것이지요.


다만 문제점은 물질 중심적인 이 시대에서 불교가 어떻게 자기 전개를 해나가느냐 하는 것인데, 저는 그것을 물질 중심적이기 때문에 마음의 종교인 불교가 바르게 대응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장무애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자취도 없습니다. 그것은 불성(佛性)과 같고 빛과도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제한된 시야에 비친 물질이란 다만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갈등과 대립, 모순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물질적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이 사회는 나와 남이 대립하고, 좌우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노사가 대립하고, 학생들이 연일 시위하고, 인신매매, 성폭력등의 사회비리가 횡행합니다.


그 갈등과 대립상을 비추어주는 것이 마음이며, 그 갈등 대립상을 해소하여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진정한 윤리관을 확립케 하는 것이 참 마음 즉, 불성입니다.


어느 날 소림석굴에서 바위덩어리처럼 깊은 선정(禪定)에 잠긴 달마 대사에게 신광이라는 젊은 스님이 찾아와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달마 대사께서 "그러면 불편한 그대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내가 편안케 해 주리라" 했습니다. 마음이란 모양이 없는 것, 따라서 편안하게 할 수도 불안하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광은 달마께 마음을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불편한 마음이 무명(無明)임을 거기서 깨달은 것입니다.


<기자> 그렇다면 마음을 거울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갈등과 대립상을 비출 수 있는......


<큰스님>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기자> 방금 인신매매, 성폭력 등을 말씀하셨는데, 사회의 그 같은 추한 면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의 추(醜)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음은 그 추(醜)도 비춰준다고 할 수 있을까요.


<큰스님> 비춰줄 뿐만 아니라 비춤으로써 바로잡아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기자> 스님이 말씀하신 '마음' 의 세상이 오면 경찰이 없어도 될까요.


<큰스님> 되고말고요. 부처님이 없어도 될 겁니다.


<기자> 어린애들을 폭행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그 같은 제반 사회악이 정말 제거될까요.


<큰스님> 밝은 달 같아질 겁니다.


<기자> 아무리 갈등과 대립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라 해도, 그 마음은 그 흔적들을 지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큰스님> 완전한 득도에는 흔적이 없지요.


<기자> 불교에서는 무소유(無所有)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만, 인간이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젖을 빨아먹듯이 생명의 욕구, 소유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 아닙니까.


<큰스님> 생명과 소유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불교에서 보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자유로워집니다. 불교적 정진이나 선행(禪行)은 욕망을 버리고 생명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는 것, 부처에 가까워지려는 것입니다.


<기자> 불교가 기독교와 다른 점의 하나는 탁발승에서 보듯이 검소한 생활인 것 같습니다. 슈마허는 이를 자본주의에 대신하는 경제논리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면에서는 개인에게 부의 불평등은 감수하라는 면으로도 보입니다.


<큰스님> 글쎄요. 그것은......


<기자> 지나치다는 말씀이시죠.


<큰스님> 그런 것 같군요.


<기자> 저는 불교가 세상에 개입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켰으면 해서 그럽니다.


<큰스님> 그러고 있는 셈이지요. 단, 불교는 이 세상만이 아니라 저세상(내세)을 위해서도 그러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세상을 전제 하지 않고 이 세상만을 전제하지 않고 이 세상만을 본다면 올바름의 의미가 엷어짐은 물론, 저 세상으로 갔을 때 최 선생은 손해 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요.


<기자> 내세가 있다고 믿습니까.


<큰스님> 믿지요.


<기자> 보입니까.


<큰스님> 보이지요.


<기자>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발전하고 있다고 봅니까. 날로 아수라장이 돼 가고 있다고 봅니까.


<큰스님> 발전하고 있다고 봅니다.


<기자> 범죄행위들은 날로 극악해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큰스님>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지만, 과학의 발달이라든가 자유의 신장, 복지정책 등은 발전이라고 봐야겠지요. 현대물리학은 물질의 본질을 에너지 광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광명과 일치합니다. 저는 그 광명이며 불성(佛性)인, 그것을 지닌 인간이 인간의 역사가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고 봅니다.


<기자> 가장 존경하신 분은?


<큰스님> 부처님입니다.


<기자> 스님이 믿고 계시기 때문인가요.


<큰스님> 아니지요. 광명이기 때문입니다.




 동리산 태안사에서 최하림(崔夏林) 편집부국장 대담

서기 1989년 6월 30일 전남일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