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청화 큰스님 서적/6. 정통선의 향훈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실천이 부처의 뜻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실천이 부처의 뜻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향훈(香薰)의 큰스님'. 불교에 문외한이라는 시인 최하림(崔夏林)씨는 그렇게 고백 했다. 그런 표현이 잡향(雜香) 속의 대중에게는 사문(沙門)이 '일세의 선장(禪匠)' 으로 받드는 청화 큰 스님(70)을 보다 친근하게 다가서게 할지도 모른다.

40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


먼발치에서 큰스님을 뵌 일이 있는 불자(佛子)들은 머뭇거리는 표정과 함께 '한국의 밀라레파' 라고 설명했다. 머뭇거림 속에는 "비교란 물론, 부질없는 것이지요" 하는 외람스럽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철저한 계행(戒行)으로 이름 높은 티베트불교의 밀라레파와, 단 한 번도 바닥에 몸을 뉘어본적이 없다는 '40년 장좌불와(長坐不臥)' 의 청화 스님 고명(高名) 등은 그 자체만으로 흐트러진 세간 범부(凡夫)들을 화들짝 정신이 들게 한다.


무엇보다도 청화 스님은 염불선(念佛禪)으로 이름이 높다.


조계종(曹溪宗) 청화(淸華) 큰스님이 말하는 불탄(佛誕)의미

중생(衆生)의 「올바른 삶」 이끌기 위해 현신(現身)

새정부 개혁(改革)과정 타인(他人)심판 신중히



여기에는 쉽게 믿어지지 않을 얘기 한토막이 있다. 염불과 선을 회통한 선풍(禪風)으로 중국 초기 선종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줬던 신라출신 무상(無相684~762)대사와 청화 스님 사이의 1천3백년을 뛰어넘는 인연을 말한다. 청화 스님은 전남 곡성의 태안사에 주석하시며 정중당(淨衆堂)을 세웠다. 정중당은 무상(無相)대사가 일으켰던 정중종(淨衆宗)과 이름이 같다. 물론 국제학계가 무상(無相)대사를 규명해내기 전의 일이다. 청화 스님도 "인연에 따른 것" 이라고만 말했다. 그 인연으로 청화스님은 최근 자료집 '정중(淨衆)무상 대사' 출간을 뒤에서 돕기도 했다. 불기(佛紀) 2537년 부처님 오신 날(28일)을 맞아 청화 큰스님을 전남 곡성의 성륜사(聖輪寺)에서 만났다. 요즘은 설령산(雪靈山) 자락의 성륜사에도 자주 계신다는 것이 사문들의 얘기다.





<기자> 스님에 관한 크고 작은 일들은 인근 광주(光州)를 비롯해 서울에서 회자되고 음미되고 있습니다. 우선 40년 장좌불와(長坐不臥)의 계행부터가 궁금합니다.


<큰스님> 40년이니, 몇 년이니 하고 제가 꼽아봅니까, 주위에서 헤아려보고 그렇게들 말하는 거지요. 젊었을 때, 내 힘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고 시험해 봤는데, 70이 된 지금은 앉고 싶으면 앉고 눕고 싶으면 눕고…. 그러나 원칙은 변함이 없고 평생 그렇게 할 겁니다.


<기자> 스님의 철저한 계행(戒行)은 그렇게 못하는 미망 속의 우리들을 막막한 절망으로 밀어 넣습니다. 시봉하는 제자들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큰스님> 아니지요. 몸에 익으면 그쪽이 훨씬 편합니다. 반야의 도리가 가르치는 무아(無我)와 무소유의 삶이란 것도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기자> 오는 28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스님의 옥음(玉音)으로 다시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부처님이 오신 참뜻은 무명(無明)에 의한 미혹된 삶을 버리고 정견(正見)에 입각한 바른 삶을 깨우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삶이란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삶인데, 이를 제대로 인식하면 뜨거운 숯불 위에서 눈송이가 녹듯 모든 일이 풀립니다.


불법(佛法)은 불변(不變)진리



<기자> 그러한 부처님의 교법(敎法)이 구르고 굴러 사악한 견해를 무너뜨린다는 금륜(金輪)이 구른지도 2천5백여 년인데 세상은 여전히 혼돈스럽습니다.


<큰스님> 금륜(金輪)은 진리 그 자체인데, 그것은 본디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채로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무명(無明)에 가렸기 때문에 누에가 자기 몸을 감듯 자승자박하는 셈이지요.


<기자> 무명(無明)에 철저히 가려서일까요. 아니면 불교의 사회적 처방이 약해서일까요. 스님의 좋은 말씀이 너무 아득하게 들린다면 왜 그럴까요.


<큰스님> 물맛이 문자나 논리만으로 설명이 될까요. 물이란, 입으로 들이마실 때 비로소 알아집니다. 현대문명이란 것도 격랑을 만나 사람이 파도 한 자락을 움켜쥐려고 집착하는 상황입니다.


<기자> 이 기회에 염불과 염불선에 대해 쉽게 말씀해 주시지요.


<큰스님> 부처님경(經) 가운데 2백부 이상에서 '염불'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디 자성(自性)이면서도 우주의 본체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거기에 귀의한다는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것만으로 업장이 녹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고 외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기자> 염불선은 어떤겁니까.


<큰스님> 저는 효봉(曉峰) 스님이 하신 공안선(公案禪)이나, 의지력을 중시하는 묵조선(黙照禪)을 모두 긍정합니다. 또 본질만 떠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염불선은 '내 마음이 부처고, 천지우주 역시 부처다' 하는 생각을 마치 어미닭이 계란을 품듯 하면서 참선하고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知), 정(情), 의(意) 모두를 갖춘 염불선은 결코 근기(根機) 낮은 중생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 청빈(淸貧)해야,

불교계 종파싸움 '내 법문만이 옳다' 집착서 비롯



<기자> 종단이나 범종교계에 대해 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바로 이 대목에서 무상(無相) 대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무상 대사는 문파(門派)와 종파(宗派)를 초월했으며 불문(佛門)과 종교일반의 고질인 '내 법문(法門)만이 옳다'는 법집(法執)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진리란 우주를 포함하는 것이어서 모두를 수용해야 합니다.


원만하게 깨닫지 못한 아류(亞流)의 무리들이 진리 아닌 종파에 매 달립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통(通) 불교, 통(通) 종교론자입니다.


제가 선배의 한분으로 존경해온 무상대사는 또한 철저한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실천했듯이 모든 종교인들이 거러지(거지)가 돼야함을 깨우고 있습니다.


<기자> 그동안 극도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다가 이제는 세간에 많이 알려졌는데…. 사문들은 한국 선풍(禪風)의 진작을 내다보기도 하고, 스님의 높은 법력(法力)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큰스님> 다 인연이지요. 선풍(禪風)진작이라니 분수에 넘치는 얘기이지만, 비상한 정진에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기자> 이른바 새 정부의 개혁(改革) 드라이브로 세상이 달아올랐습니다.


<큰스님>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은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두가 공범(共犯)이라는 자세가 중요한 거 아닙니까, 또 광주(光州)문제 역시 당사자가 들으면 섭섭해 하실지 몰라도 역시 용서와 화해가 올바른 길입니다.



1993년 5월 22일 문화일보 게재

조우석(趙祐奭) 기자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