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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6. 정통선의 향훈

진아(眞我)를 깨달아야 인간존엄성 회복

 


진아(眞我)를 깨달아야 인간존엄성 회복



1월, 3년 결사(三年結社) 끝내 


불가(佛家)에 전해오는 말 중에 '세심불세이(洗心不洗耳)' 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 왕위를 내주겠다는 말을 들은 선비가 귀가 더러워졌다 하여 냇물에 귀를 씻었다는 고사(故事)를 빗대어 '마음을 씻으면 될 일인데 귀는 왜 씻느냐' 는 뜻의 말이다.


불교는 마음을 닦아 불성(佛性)을 되찾으려는 종교다. 중생도 집착과 편견을 여의고 인생과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기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마음공부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선(禪)이기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선객(禪客)들이 산사(山寺)의 선방(禪房)에서 선정(禪定)에 들고 있다.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 조실(祖室) 강청화(姜淸華) 스님(65세) 역시 이들 도반(道伴)과 같은 뜻을 품고 40여년  동안 산속에 숨어 살아온 산승(山僧)이다.


스님은 지난 1월, 20여명의 도반과 함께 3년 동안 일주문(一柱門) 밖에 나가지 않고 정진한 삼년결사(三年結社)를 끝냈다.


전남 무안군 운남면 연리에서 태어난 청화(淸華) 스님은 24세 때인 1947년 송만암(宋曼庵) 스님의 상좌인 금타(金陀) 스님을 은사로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에서 출가(出家) 득도(得度)했다.


그 후 전국 각지를 돌며 수행에만 전념해 오다가 지금은 3년째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던 고찰(古刹) 태안사(泰安寺,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주석하고 있다.


속인(俗人)과 세간사(世間事)를 이야기 하는 것을 무척이나 꺼리는 스님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하룻밤 절 신세를 져야 했으니 말이다. 새벽녘 절집에서도 외진, 계곡 제일 위쪽 삼간(三間)거소에서 들을 수 있었던 스님의 법문은 계곡 물소리처럼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게 귓전을 때린다.




진아(眞我) 깨달아야 인간존엄성 회복 


<기자> 내일이 불기(佛紀) 2532년 '부처님 오신 날' 입니다. 불자들은 매년 맞는 날이지만 특히 이번 '부처님 오신 날' 을 맞으면서 우리 모두가 되새겨야 할 일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큰스님>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아의 상실(自我喪失)' 입니다. 자아의 본바탕에 대해서 보다 확실한 인식을 가져야 해요. 저는 자아의 본질 즉 참 나(眞我)에 대해서 부처님처럼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분이 없다고 믿고 있어요.


'부처님 오신 날' 을 맞아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자아의 존엄성, 바꾸어 말하면 불성(佛性)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면, 그것을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 혼자만 유아독존(唯我獨尊)이고 일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알아요.


그러나 불성(佛性)이라는 인간성의 본질, 우주의 본질까지 체험한 이들은 누구나 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즉, 가장 위대한 영역에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성의 존엄성이 확립된다는 말이지요. 만약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유아독존(唯我獨尊)이고 여느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면 인간성이 존엄하다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오신 날' 을 기해서 우리는 참다운 자기, 즉 진아(眞我)는 자비로운 것으로 보나, 지혜로운 것으로 보나, 공덕으로 보나 완전무결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성은 존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무소유(無所有) 터득하면 만사(萬事) 홍로점설(紅爐點雪) 


<기자>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산업발전에 따라 놀랄만한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정신적인 빈곤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결과 윤리 도덕의 퇴폐, 인간소외, 빈부의 격차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의 문제 등이 우리나라에 서도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위기(歷史的危機)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를 맞아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지혜롭게 사는 것인지, 스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큰스님> 모든 문제가 파생되는 복잡한 양상이 있겠지만 그것들의 뿌리는 가치관(價値觀)의 혼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따라서 바른 인생관(人生觀), 바른 세계관을 어떻게 확립시킬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역시 인간의 진아(眞我)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자기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저절로 올바른 가치관은 확립될 수 있을 테지요. 어느 분야건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교육 분야에서 참다운 인간상(人間像)이 어떤 것인가만 안다면 그 인간상에 비추어서 바른 교육을 하면 될 것입니다.


소유(所有)문제도 같아요. 불교에서는 중생(衆生)이 내세우는 것은 망아(妄我) 즉, 망령된 나 이고, 본질적인 나 즉, 진아(眞我)가 아니지요. 진아는 무아(無我) -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다운 나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소유관념도 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우리들이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진리에 입각해서 생각한다면 노사문제(勞使問題) 같은 것도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노동자도 무아(無我)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자기의 이권(利權)만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고, 기업가(企業家) 역시 재물이 원래 자기 것이 아니니까 사회로 환원시키게 될테지요.


지엽적인 제도적 개혁도 필요하지만 바른 가치관 확립이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인간성문제 즉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진리만 제대로 인식된다면 모든 문제가 홍로점설(紅爐點雪)로, 뜨거운 숯불에다 눈 한 송이 얹으면 금방 녹는 것처럼 순탄하게 순리적으로 풀려갈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노사문제와 같은 현대적 병폐, 가치관 확립해야 치유(治癒) 


<기자>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른바, 민주주의, 공산주의, 네오마르크시즘, 해방신학(解放神學)등 갖가지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견제하며 세력 확장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경쟁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큰스님>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도주의(人道主義)인 동시에 초월주의(超越主義)지요. 해탈(解脫)이 목적이기 때문에 출세간주의(出世間主義-초월주의)가 될 수밖에 없지만 출세간에만 치우치다보면 자칫 인간적인 현실을 무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도주의(人道主義)가 가미된 초월주의를 지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문제를 보면 민주주의는 소중한 것이지만 관능적(官能的)민주주의는 방종, 퇴폐,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인간의 세속적인 본능에 입각한 개방(開放) 또는 민주(民主)라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을 바른 길로 이끌지 못하는 위험성이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바른 인간성을 가지고 진리에 입각해서 해야만 참된 민주주의가 될 것입니다.


또 공산주의는 물질이나 경계면만의 평등사회를 주장하고 있지만, 경제를 위한 경제만을 주장하면 너무 무미건조하고 인간의 자유(自由)마저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요. 불교에서 보시(布施)도 하고 자비(慈悲)를 베풀어서 사회적인 평등을 도모한다 하더라도, 불교의 평등을 위한 평등이 아니지요.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묶여 있는 동일성(同一性)에 입각한, 다시 말해 동체대비(同體大悲) 사상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이데올로기문제도 불교의 인도주의와 초월주의에서 풀어갈 때 속물주의적인 관능주의도 지양할 수 있고 경제만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의 단점도 해결될 수 있어서, 그 장점만 따른 참다운 민주주의, 참다운 민주화, 참다운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한국불교, 불성(佛性) 체험에 역점(力點), 종파성(宗派性)지양, 원통화(圓通化) 이뤄야 


<기자> 신라나 고려불교는 지금처럼 종파가 여럿으로 갈리지 않은 통불교(通佛敎)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 불교는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앞으로 우리 불교가 서야 할 좌표는 어디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큰스님> 종파성(宗派性)을 지양한 원융(圓融)한 원통불교(圓通佛敎)는 우리불교가 앞으로 마땅히 지향해 가야할 것입니다. 진리 자체가 둘이 아니고 원래 원통무애(圓通無碍)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그처럼 원통무애한 모든 것을 종합지향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통 조사(祖師)라고 하는 분들은 다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신라 때 원효(元曉)대사 의상(義湘)대사, 고려 때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나옹대사(懶翁大師) 태고대사(太古大師), 이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四溟大師) 편양선사(鞭羊禪師) 연담대사(蓮譚大師) 초의선사(草衣禪師) 등 시대를 주름잡은 분들이 모두 다 원통불교(圓通佛敎)를 부르짖었지요.


서산대사는 유, 불, 선(儒佛仙) 삼교(三敎)의 통일을 염원해서 선가귀감(禪家龜鑑) 유가귀감(儒家龜鑑) 도가귀감(道家龜鑑)을 써서 동양종교의 원통(圓通)해석을 시도했고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주장하셨어요.


필연적으로 회통이 안 될 수 없는데 아직 원통불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구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심을 견증(見證) - 체험하고 봤다고 생각하면 응당 원통무애한 데까지도 이르러야 하지요.


재가(在家)불자는 특히 어렵고 출가(出家)불자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앞으로 불성(佛性)의 체험에다 역점을 두어 정진 한다면 원통불교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불성을 체험하려면 철저한 계율이 뒤따라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든 알라신(神)이든 부처님이든 관계없이 진리의 알맹이만을 통합한다면 불교인들이 갈망하는 통불교(通佛敎)뿐만 아니라 타종교와의 벽도 무너뜨려 통종교(通宗敎)로 까지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것이 어려운 작업이고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 하더라도 불교는 마땅히 원통적으로 나가야 합니다회통이 안 되면 불교는 설 땅이 없을 것입니다.


<기자> 불교도 물론 그랬습니다만 과거에 종교는 국가나 사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성 자체가 속화되어 그런 것일까요, 종교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까요?


<큰스님> 두 가지 다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현대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성(聖)프란시스코처럼 불성(佛性)이나 신성(神性)이라는 참다운 영원성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 깊은 영원성에 대한 체험 내용이 빈약해요. 따라서 초인적인 행동도 취할 수 없어요. 불성은 무한공덕(無限功德)을 갖춘 것인데 불성을 체험하지 못하면 그 무한공덕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신통자재(神通自在)가 안돼요.


또, 산업사회의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그걸 만끽하다보니 저절로 수행심도 줄어 버립니다. 결국 종교는 그래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힘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불교가 구세(救世) 역할 


<기자> 현대는 불교가 중흥할 인연이 성숙한 때라는 주장도 불교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큰스님>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현대는 과학만능시대인데, 과학의 근원은 무엇인가,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불교가 아니면 풀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가장 긴요하고 급한 문제인 인간의 본성 문제도 불교가 아니면 풀 수 없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불교가 아니고서는 현대적인 구세(救世)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物質)도 결국 비물질(非物質) 


<기자> 과학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종교와 과학은 배치되는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는데 불교의 신비체험과 과학의 관계는 어떤 것으로 보고 계십니까?


<큰스님> 제 개인적인 체험은 별것 아니지만 불경에서나 도인(道人)들이 밝혀 놓은 것을 보면 자연과학적인 문제들을, 지금 과학술어로 설명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아주 소상히 밝혀 놓고 있어요.


불교에서는 '제법공(諸法空)' 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어떤 물질이든지 그 실상(實相)은 물질 아닌 비물질 곧 공(空)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증명되고 있지요. 중성미자(中性微子)같은 것은 전하(電荷)도 없고 물질적인 흔적도 없이 에너지만 남는다는 것이 물리학의 결론이지요.


현대과학은 제법(諸法)이 공(空)한 자리 즉, 에너지만 남는다는 것을 증명은 했지만 에너지가 되어버리는 실체는 구명 해내지 못했어요. 그 실체까지 밝힌 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 라는 불교의 이론인데, 단공(但空)이 아니라 진공묘유가 바로 실체라고 하고 있어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그것입니다. 과학은 공(空)은 알지만 공(空)의 알맹이는 몰라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修行) 


<기자> 우리나라에서는 재가불자들의 신심(信心)이 기독교 보다 약하다는 평을 받는 것 같습니다. 재가불자들이 생활하면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수행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큰스님> 불교도보다 기독교도의 신앙의 열도가 높다는 것은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불교는 자아의 계발, 진아의 체험을 주로 한다는 데서 우리의 본성인 불성(佛性)에 대한 인격성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지요.


자아(自我)를 구한다 하더라도 아직 체험 못한 불성을 흠모해 갈구하는 형식이 필요해요. 우주 어디에나 있는 부처님을 우리가 인격적으로 수용해서 흠모하는 정신이 아직 미흡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재가신도들이 항상 지켜야 할 수행의 방법은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 입니다. 곧, 마음에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布施), 행동과 언어를 바르게 하는 계율을 지키는 지계(持戒), 마음에 거슬릴 때 강인하게 참고 견디는 인욕(忍辱), 선행(善行)을 끊임없이 닦아나가는 정진(精進), 들뜬 마음을 거두어 근본 마음자리인 청정한 불심(佛心)에 고요히 잠기는 선정(禪定), 우주만유의 실상은 일체 지혜공덕을 원만히 갖춘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여의지 않는 지혜(智慧)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이지요.


<기자> 이 절에 오시자마자 도반(道伴) 20여명과 함께 3년 결사(三年結社)를 발원, 지난 1월에 끝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3년 결사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다가 거의 폐사될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던 태안사의 중흥이나 한국의 선풍진작에도 관계가 있었는지요.


<큰스님> 복합적인 것이지요. 불가(佛家)가 쇠미한 것은 정진이 안 된 탓입니다. 정진을 해야 불성을 건증할 것인데 정진이 부족해요. 내 자신도 그랬지요. 때마침 같은 뜻을 가진 도반들이 운집했던 까닭도 있어요.


일반적인 수행으로는 높은 경지에 들 수 없어요. 그래서 별시수행(別時修行)을 한 것뿐이지요. 선풍(禪風)진작이란 분수에 넘치는 일이예요. 그건 불가(佛家)에 힘이 생기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기자> 특별히 계획하고 계신 일은 없으신지요.


<큰스님> 뭐 꼬집어 말할 만한 것은 없어요. 제 공부가 아직 미흡하기 때문에 신명을 다해서 정진하고 금생에 못 이루면 내생에라도 계속 정진하겠다는 주의지요. 도반들과 더불어 공부해 간다는 생각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 금강선원(金剛禪院)에 주석하실 때 한국경제신문 고광직(高光稙) 문화부장과의 대담임

1988년 5월 22일 부처님 오신 날 한국경제신문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