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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6. 정통선의 향훈

제3편 대담법어(對談法語) <바람직한 얼굴>

제 3편 대담법어(對談法語)

 


가장 바람직한 얼굴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를 가다보면 인월에서 약4㎞지점 도로변에는 판자에 어설프게 쓰여진 백장암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의 화살표대로 가파른 산을 2㎞쯤 올라가면 국보 10호인 백장암 3층 석탑과 보물 40호인 석등이 안내판도 없이 쓸쓸하게 손님을 맞는다.


탑 전면의 화려한 조각은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공예탑이라는데 보존관리 상태는 허술하기만 하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나무토막을 이어 만든 층계를 오르면 깨끗하게 단장된 암자가 분위기를 무겁게 유도한다.


엄숙한 도량, 말쑥한 10여명의 선객(禪客) 스님들, 이것이 출세간의 풍경인가 하여 감회가 새롭다.


지객(知客) 스님의 안내로 큰스님을 만난 것은 상당 시간이 지난 후였다.


9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앉기만 하고 눕지 않음)하고 3년 동안 묵언수도(黙言修道)한 청화 스님의 청아한 모습은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듯했다.


가장 바람직한 얼굴은 불타(佛陀)의 대자대비한 얼굴이며

그것은 인간 각자의 진정한 자아(自我)의 얼굴이다.


전남 무안 태생인 청화(淸華) 스님(속명:姜虎成)은 젊은 시절엔 고향에서 학교를 설립, 운영했으며 24세에 입산(入山)하여 35년 동안 지리산을 비롯한 두륜산, 월출산 등지의 암자에서 수도했다.



20여 년 전 이곳 백장암에 잠시 주석했고 2년 전부터는 줄곧 이곳에서 정진하고 있다.




바른 얼굴은 무외시(無畏施)


<기자>

철학이 아는 것이라면 종교는 행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실천이 따르지 않는 종교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애기겠죠. 동양인은 대부분 학문하는 목적을 행하는 것에 중점을 둠으로써 서양의 아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유교(儒敎) 경전에도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독실하게 행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의 학문목적을 알맞게 대변해준 것이 라고 봅니다.


오늘은 주제를 '얼굴' 이라 내걸고 '알되 앎을 실행하는 얼굴' 에 대해서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 천태만상의 얼굴을 가진 인간들이 과연 어떤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번뇌와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는 길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저는 무외시(無畏施)의 얼굴 곧, 부처의 얼굴을 들고 싶습니다.


무외시란 중생들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평온한 행복을 안겨주며 자기 생명마저도 아낌없이 베푸는 보시(布施)를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얼굴이 있지만 이러한 무외시(無畏施)가 넘쳐나는 부처의 얼굴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얼굴입니다.


현대 사회는 참으로 각박하고도 복잡한 산업 사회입니다. 고귀한 인간 정신이 거대한 기계 문명에 압도되어 심각하게 소외되고 유린당하는 사례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 상황일수록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본질을 모른다는 것은 불안하기 그지없으며 말씀하신바, 바람직한 바른 얼굴로 살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유구한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성 문제는 꾸준히 탐구되어 왔으나, 불교에서 가장 철저하게 구명(究明)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불교가 갈파하듯이, 인간의 본질은 영원한 생명과 지혜와 자비 등 무한한 가능성을 원만히 갖춘 부처라고 파악할 때, 구겨져 있던 얼굴은 자연히 펴지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얼굴이란 불타(佛陀)의 대자대비한 얼굴이며 또한, 우리 인간 각자의 진정한 자아(自我)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인간성(人間性)의 구조는 십법계설(十法界說)로 풀이

 


<기자>

큰스님께서 주장하신 바람직한 얼굴이란, 무외시(無畏施)가 넘치는 대자대비한 부처의 얼굴이요 곧, 바람직한 얼굴을 이루려면 인간성의 본질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지는군요. 그렇다면, 인간성의 구조는 무엇인지? 인간성의 구조를 앎으로써 바람직한 얼굴의 형성을 위한 원리 같은 것도 발견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불교 교리를 토대로 답변해 주시면 합니다.


<큰스님>

인간성의 구조에 관해서 불교에는 여러 각도의 교설이 있습니다만, 가장 간략하고 보편적인 것은 십법계설(十法界說)입니다.


인간의 현재 마음은 비록 옹졸하고 너절한 번뇌로 들끓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성의 저변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무량무변(無量無邊)한 무한성(無限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법계란, 잔인하고 비뚤어진 마음인 '지옥'에서 부터 점차 승화된 단계로, 배고픔 속에서 괴로움을 받는 귀신의 세계인 '아귀', 그리고 동물의 세계인 '축생', 다투기를 좋아하는 '아수라', 사바세계의 '인간', 안락하기만한 '천상', 부처의 전리를 깨달은 '성문', 인과법칙과 인연법을 터득한 '연각', 중생과 더불어 불심을 깨닫는 '보살, 끝으로 '부처' 등 열 가지 세계를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각각 열 가지 세계 가운데 어떤 한 세계가 위주가 되어 그에 상응한 몸을 받고 살아가고 있으나, 언제나 십법계의 가능성을 모두 마음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행 여하에 따라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최상의 부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일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지옥 같은 악독한 마음, 탐욕만 부리는 아귀 같은 마음, 바보처럼 어리석은 축생 같은 마음 등은 될 수 있는 한 이를 억제하고 정화하고 제거해 가면서 우리 마음속에 공존해 있는 가장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모든 지혜공덕을 원만히 갖춘, 영생하는 마음인 부처를 개발하고 빛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고위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만덕(萬德)을 갖춘 불타의 원만한 얼굴을 가슴마다에 간직하고 애써 닮으려 노력할 때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험난한 모든 문제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광명무량(光明無量)한 안락정토(安樂淨土)가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합니다.




물질(物質)의 본 근원은 신성(神性) 곧 불성(佛性)이다

 


<기자>

지옥의 얼굴에서 부처의 얼굴까지 무수 층의 얼굴이 자기의 한 마음에 내재해 있고 어떤 얼굴이 되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의 수행 여하에 달려있다는 요지의 교훈 말씀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물질만 있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된다는 풍토마저 마련돼 있습니다. 돈을 수호신처럼 위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수입의 많고 적음이 인격의 척도로까지 전락했습니다. 물질문명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 같은 인상도 흔히 받습니다.


물론, 물질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유심사상도 위험하겠죠. 경제를 부정하는 생활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물질우선주의, 배금주의 풍토가 극복될 이념이 나와야 할 텐데요.


<큰스님>

우리 인간의 신체도 물질이요, 의식주가 다 물질이 아닌 것이 없는데 어느 뉘라서 물질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만, 그 소중한 물질의 본질이 다만 물질, 그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이기도 한, 아니 바로 마음뿐인 부처이며, 인간의 제한된 시야에 비치는 물질이란 다만 부처의 현상화(現象化)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철학이 선행될 때 비로소 물질 우선주의에서 오는 불안과 갈등은 해소가 되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진정한 윤리가 확립될 것입니다.


불교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여 일체만유는 오직 식(識)뿐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 양파의 껍질을 벗기다보면 결국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듯 과학자들은 모든 물질을 원자, 소립자(素粒子) 등으로 분석해 나가면서 물질의 근원은 텅 빈 허무라고들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텅 빈 것 같으면서도 신비한 광명이 충만해 있는 영원한 광명의 바다가 무한(無限) 전개돼 있는 것입니다.


신비한 광명이란 곧, 무한한 힘, 무한한 지혜, 무한한 자비 등 무한의 가능성을 지닌 부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부처의 성품에 대해 불교에서는 영생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상(常)이요, 완전무결한 행복이기 때문에 락(樂)이며, 일체의 것에 자유자재하기에 아(我)고, 번뇌가 없이 청정 영롱하기에 정(淨)이라는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도 풀이를 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비단 인간의 본질만이 부처가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만유의 본질 또한 한결같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일체만유는 찬란하고 무량무변한 부처의 바다 위에 이루어진 파도나 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을 달리하여 주인공(主人公), 본래면목(本來面目), 실상(實相), 실존(實存), 도(道), 열반(涅槃), 진여(眞如), 하나님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가장 궁극적이고 제일의적(第一義的)인 표현을 한다면 우주 그대로가 광명찬란한 부처의 일대행상(一大行相)이요, 청정미묘하고 한없이 큰 불가사의한 명주(明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물질의 근원을 바로 이해할 때 유물 극단주의는 물론, 유심 극단주의도 지양될 것입니다.




육도(六度)를 행(行)하는 것이 곧 바른 길로 통해

 


<기자>

정신의 근원과 물질의 근원이 '하나인 부처' 요 부처의 인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군요.

결국, 바람직한 얼굴은 부처의 인격이라는 결론이 나온 셈입니다.


지금까지 개념적으로나마 다루어진 것 같습니다만, 부처의 인격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론을 제시해 주시면 합니다.


<큰스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네 공덕을 원만히 지닌 부처를 이루는 방법으로는 팔정도(八正道), 삼학(三學), 육도(六度) 등이 있으나 육도(六度:6바라밀)만으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육도(六度)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보시에는 물질을 베푸는 재(財)보시와 진리로써 일깨워주는 법(法)보시와 앞서 바른 얼굴에서 설명한 무외(無畏)보시가 있습니다.


다음 지계(持戒)란,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계율의 종류는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등, 기본 5계를 위시하여 8계, 10계, 48계, 250계, 500계 등이 있습니다.


다음은 인욕(忍辱)입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병든 사회일수록 고난은 비례합니다. 그래서 참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생리적으로 또는 환경적, 자연적인 모든 욕됨을 참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진(精進)이란, 끈기 있게 끝까지 노력해 나가는 것입니다.


선정(禪定)이란, 혼탁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행을 말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으나 요는 마음을 불심(佛心)에 집중하여 움직이지 않는 수행입니다.


끝으로 지혜(智慧)란 나의 본질 및 우주의 본바탕을 부처라고 믿는 것을 위시하여, 인과응보의 도리를 믿는 것, 육도(六度)를 실천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등의 바른 견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없이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쫓겨 사는 인간이 이 육도(六度)를 제대로 실천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만 최소한 나와 우주만유의 본질이 부처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그 부처의 무한한 공덕을 매양 생각하며 그 부처의 이름인 '아미타불' 이나 '관세음보살' 이나 '하나님' 등을 지성으로 외우면서 생활한다면 우리의 불안한 번뇌는 점점 사라지고 안온하고 황홀한 행복감 가운데 날로 바른 얼굴인 부처와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조(信條)는 정통불교(正統佛敎)의 중흥(中興)

 


<기자>

끝으로 현하 불교계(佛敎界)의 침체상을 극복하기 위한 큰스님의 구상은 ……


<큰스님>

민족문화의 정수인 불교가 침체 부진한 근원적인 요인은 정통불법의 신행(信行)과 증득(證得)을 등한히 한 데서 오는 필연적인 추세로써 유능한 불교 지도자의 빈곤을 초래하게 되고 교단의 불화와 국민의 불신을 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나의 의견을 피력한다면 곧, 정통불법의 중흥이란 명제아래 그 실천요강으로서 첫째, 다양한 교법(敎法)을 회통(會通)한 통불교(通佛敎)의 선양, 둘째 엄정한 계율(戒律)의 준수, 셋째 염불선(念佛禪)의 제창, 넷째 구해탈(俱解脫)의 증득(證得), 다섯째 위법망구(爲法忘軀, 진리를 위해 몸을 버림)의 전법도생(傳法度生, 진리를 전하고 중생을 구함)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네번째 항의 구해탈(俱解脫)이란 지혜해탈과 선정해탈로서, 지혜해탈은 번뇌를 끊고 참다운 지혜를 얻음을 말하고 선정해탈이란, 멸진정(滅盡定, 백팔번뇌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선정)이라고 하는 깊은 삼매에 들어 번뇌의 종자마저를 모조리 끊고 일체 사리에 통달하여 이른바, 생사(生死)를 해탈하는 성자(聖者)의 자재(自在)로운 지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에 말씀한 정통불법의 실천에 의해서만 비로소 인간의식의 본질인 불성을 계발하여 진정한 의식개혁을 이룩할 수가 있고, 이렇듯 철저하고 원만하게 진리를 깨달은 이가 바로 성자(聖者)요 부처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정진 하여 깨달은 성자의 수가 늘어나고 부처가 되려는 중생의 수가 많아질 때 우리 인류는 비로소 몽매에 그리는 지상극락의 여명(黎明)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본 대담은 청화큰스님께서 실상산(實相山) 백장암(百丈庵)에 주석하실 때 전북신문 문치상(文致相) 문화부장과의 대담임.

1983년 1월 10일 전북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