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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12 집 2.만법귀일(萬法歸一)

마음의 고향 제 12 집


* 불기2537년(서기1993년)10월3일 동리산 태안사 조실 청화(淸華) 대선사께서 태안사 대웅전 상량식에서 설법하신 법어입니다.



-. 만법귀일(萬法歸一) [1]


오늘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태안사 대웅전 상량식(上梁式)을 봉행하게 된 것을 사부대중과 더불어서 경축해서 마지않습니다.

영웅 가운데 영웅이고 성인 가운데 성인이 부처님이십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한 편 대웅(大雄)이라고 합니다.

성자 가운데 가장 높은 으뜸가는 성자가 바로 영웅이고 부처님입니다.

《우주 전체는 하나의 인연생》

그러한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상량식을 올렸습니다.

오늘 상량식을 올리기까지 그냥 그렁저렁 어느 몇 분들이 공을 세워서 올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라, 어느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무수한 헤아릴 수 없는 인연들이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집니다.

특히 대웅전 같은 이 우주 가운데 최상의 전당을 이룩할 때는 특별히 시주한 분도 계십니다만 그 외에 사부대중 또는 사회에서 여러 가지로 사회의 중요한 국가 일을 보시는 그런 분들 이러한 인연들이 다 모여서 대웅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태안사 대웅전은 특별히 독판시주 하신 이 중근 거사님, 이 분은 원래 장로이신데 그 조금도 상이 없이, 기독교라든가 불교라든가 그런 벽이 없이, 성자의 길, 또는 일반 사회봉사, 그런 길 같으면 자기가 시주하시겠다는 그런 공견 된 뜻으로 해서 독판 시주를 하신 분입니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분이 저 위에 선방도 건립을 하시고 또 그 위에 있는 명적암도 이 분이 시주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 대웅전까지도 그 이가 애초에 말을 내서 시작한 것이 다행히 국비 2억 5천만 원을 보조를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여러분들의 정성어린 그러한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이 분들의 공도 크지만 또 기와 한 장 또는 기둥 하나 이러한 것을 시주한 우리 사부대중이나 설사 인연이 못 닿아서 시주를 못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태안사에서 이와 같은 법당을 건립하게 된 것은 이것은 태안사에 다니신 우리 불자님들, 태안사가 불자님들이 오시지 않고서 그냥 황량한 분위기가 되면 누가 태안사에 법당을 지으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다만 한 번이라도 태안사에 오신 우리 불자님들 또는 불자님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연 있는 그런 분들의 힘과 정성이 모이고 모여서 오늘 상량식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인연법입니다. 인연법이라는 것은 어느 특수한 인연으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또는 여기 앞에 있는 이 꽃이 피고 이런 것도 모두가 다 무수한 헤아릴 수 없는 우주 전체의 인연이 쌓이고 모여서 꽃이 피고 하나의 인생이 태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가르침 즉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과의 차이는 다른 가르침은 무슨 그런 결과가 있으면 결과를 이룩한 그 몇 가지 원인으로 된다.

이렇게 단순논법으로 말합니다만 부처님 가르침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인간 생명이나 또는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존재를 위해서 우주 만유의 모두가 직접으로 간접으로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존재나 이른바 관계성이라 불교 말씀으로 하면 인연법인데, 인연이라, 인연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존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라 하더라도 자기 개별적으로 우연히 태어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부모님의 막중한 그런 은혜 또는 사회의 은혜 또는 우주 법계의 모두의 은혜가 다 거기에 깃들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봄이나 여름은 분방하고 덮고 바쁘기 때문에 그냥 자기반성을 못하고 자기 스스로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지내 왔지만 이 향수의 계절 가을에 와서는 조금 돌아다 봐야 합니다.

나는 대체로 어떻게 태어났는가? 내 인간 존재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가르침도 훌륭한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 특히 내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명확한 해답이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닙니다. 한 번 우리가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가 무엇인가?

자기 생명이 무엇인가를 모를 때는 그때는 우리 마음이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대체로 어디일 것인가? 또는 내 부모 형제간과 나와는 어떤 관계인가?

내가 미워하는 사람과 나는 누구고, 이런 저런 문제를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생은 항시 불안스럽고 불행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해답을 내리지 못하는 다른 종교, 다른 철학, 다른 과학 이런저런 것으로 해서는 사실 우리 인생이 참다운 행복을 보장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지금 현대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사회 또는 이 세계의 이러한 상황입니다.

무슨 주의, 무슨 사상, 별의 별스러운 그러한 사상과 주의를 많이 가지고서

우리 인간들은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우리 인생이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 공헌을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가사 공산주의도 1917년 10월 혁명 그때부터서 70년 동안이나 그 주의 밑에서 가지가지의 그런 제도를 세우고 또는 혁명을 하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인가? 그 사람들도 자본주의 모순을 지양을 시키고 또는 모순을 없애서 보다 더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그런 다짐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짐으로 자기 형제간도, 자기 친구도 사상이 다르면 가치 없이 무자비하게 숙청했단 말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결과가 소비에트 붕괴라, 지금은 소비에트라는 나라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네들도 배울 대로 배우고 총명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고 학벌도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학자도 많을 것입니다만 그러한 사상과 주의 이른바 이데올로기적인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 인생의 행복은 절대로 얻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국가의 요로에 많이 계시고 또 대통령도 계시고 하는 그런 기독교, 기독교도 훌륭한 그런 종교입니다. 훌륭한 종교이고 인류문화를 위해서 도덕적으로 공헌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어떤 존재인가? 또는 물질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이런 것에 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밝은 해답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다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런 도리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그런 도리는 하나님은 저기가 저 따로 있고, 하나님은 저만큼 계시고 나는 여기 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나와는 별도란 말입니다.

또는 나와 자기 부모와도 별도입니다. 인연 따라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된 것이지 나는 나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좋은 사람과 궂은 사람도 다 마찬가지로 다 별도로 구분해 보는 것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자기와 남을 구분하고 또는 신앙 대상인 신앙의 목적인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 구분하고 자연과 인간과 구분하고 이른바 이와 같이 이분법적인 이런 걸로 해서는 우리 인생의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나와 남이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 행복을 위해서는 어느 때도 남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이렇게 잔인하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자연 따로, 인간 따로, 자연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지 않겠는가?

인간의 복리를 위해서는 파괴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이 이분법적인 서구사상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가 믿고 있다고 그래서 아전인수 격으로 찬탄해서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토인비같은 그런 위대한 사학자나 또는 아인슈타인같은 그런 물리학자나 이 분들도 앞으로는 꼭 이 세계화시대 세계가 한 집이 되고 우주가 한 집이 되는 이런 시대에서는 모두를 하나로 통일하는 모든 진리가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하는 그런 가르침이 돼야 참다운 철학이 되고 참다운 종교가 된다. 이와 같이 갈파했습니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교, 도교, 유교, 모두가 다 같이 교섭하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힘을 합쳐야 하는 것입니다.

합치지 못하면 필요 없이 소모전을 하고 우리 인류의 불행만 초래합니다.

그런데 다른 가르침으로 해서는 도저히 하나로 합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따로, 남 따로, 자연 다로, 인간 따로, 또는 우리가 신앙하면 신앙 대상은 별도로 저 어디가 있고 우리 인간은 이만큼 밑에가 있고 이렇게 나누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사상으로 해서는 절대로 하나의 진리로 모두를 다 포괄적으로 통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융합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이라. 연기법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불교 철학의 핵심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또는 다른 종교도 또는 희랍 철학도 로마 철학도 동양 철학도 모두가 다 들어 있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이것은 이 우주라 하는 것은 모두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우주라 하는 것이 하나의 순수한 생명인 것인데 그 생명이 인연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된다.


-. 만법귀일(萬法歸一) [2]


《인생과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

우리 사람도 우주의 순수한 생명 그런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하늘에 있는 별이나 태양이나 또는 이 자연계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기본적인 골격이 기본적인 근본장이 부처님의 이 연기법에가 있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이지만 그 분은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주의 근본 실체가 무엇인가? 우주의 근본 통일장(統一場)이 무엇인가?

이런 것은 자기가 연구를 했지만 미처 몰랐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이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인생과 우주의 근본이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대체로 아시는 진여불성이라, 바로 진리인 동시에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성품자리, 불성, 또는 바꿔서 말하면 법성, 이것은 진리고 또 바꿔서 말하면 우주의 풍만한 생명의 광명입니다.

이런 것을 성자는 마음이 맑아서 마음에 번뇌가 없어서 분명히 투철하게 다 깨달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는 위대한 과학자라 하더라도 번뇌가 있기 때문에 번뇌가 있으면 이것은 성자가 아닙니다.

번뇌가 있는 범부 중생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위대한 연구는 많이 했다 하더라도 공간적인 그런 범주 내의 것은 알겠지만 공간을 떠나면 공간을 초월하는 근본적인 것은 모릅니다.

예수나 석가나 공자나 마호메트나 그런 분들은 모두가 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 성품의 자리, 불교 말로 하면 부처님이고 기독교 말로 하면 하나님의 되겠지요. 그런 자리를 다 충분히 깨달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 당시의 소박한 말로 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현대 지성인들로 해서는 그 성에 못 찹니다.

또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명확한 가르침을 못 내놓았습니다.

깨달아서 위대한 성자가 됐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이 완벽한 깨달음이 못됐기 때문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 성품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분명히 말씀을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 분들의 가르침은 불교의 연기법이나 인연법 같은 그러한 투철한 우주의 진리를 다 포괄시킨 그런 가르침을 못 내놓았습니다.

일체 존재가 하나인 생명자리, 하나의 부처님 자리, 하나의 하나님 자리, 그 자리로 부터서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천차만별로 이루어진 현상 그대로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인 것입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 파도가 이루어지면 높은 파도나 또는 낮은 파도나 모두가 다 같은 물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은 이유로 해서 천지 우주라는 것은 우주의 순수한 생명자리 우주의 순수한 생명자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 자리인데 또는 현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순수 에너지인데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천차만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상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똑같은 데서 왔기 때문에 현상적인 차이 이것은 잠시간 허망한 것이고, 모두가 다 한 결같이 부처님이고 하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한테서 하나님한테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기 때문에

현상 이것도 역시 그러한 부처님, 하나님 성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성자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과 우주의 근본 성품을 깨달은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미운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결같이 부처님이고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알아야 그래야 참다운 도덕이 서고 참다운 사회의 평화가 섭니다. 가사 우리가 민주주의를 한다 하더라도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고 저 사람과 나는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기심이나 집단이기심을 안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저 사람이나 나나 다 똑같이 부처님의 성품에서 왔기 때문에 사람이 되고 김가가 되고 박가가 됐다 하더라도 본바탕은 같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을 위해서 구박도 못하는 것이고 또는 자기만 잘 살려고 그 사람 못사는 그러한 꼴도 볼 수가 없습니다.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도 가사 지금 자연 훼손을 말라 또는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라 이렇게 하지만, 아! 자연은 이것은 자연이고 자연은 대상적으로 자연이고 나는 주관적인 나가 아닌가,

주관적인 우리 인간을 위해서는 마음대로 이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아무리 부르짖고 자연 훼손을 말라고 그래도 그때그때 자기 편리를 위해서는 훼손을 하고 마음대로 오염을 시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물과 나도 본래로 같은 생명이다. 흙과 나도 같은 생명이다. 사실은 같은 생명입니다. 성자는 어떤 것을 보나 다 부처님의 성품으로 보고 하나님 성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이 증명합니다.

가사 전자나 양성자나 이런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고유한 전자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고유의 양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주의 순수에너지, 우주의 순수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러한 것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하는 것이지 본래로 고유한 변치 않는 전자가 있고 양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잠시간 마이너스, 플러스의 그런 전하만 띠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천지 우주라 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도 알 수 없는 생명의 장으로부터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낸 것이 나요, 자연계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도 순수한 생명으로부터 인연 따라서 이루어졌다.

이른바 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연기법, 인연법하고 같은 도리입니다.

《불교철학은 동일철학》

따라서 불교사상적은 연기법, 인연 따라서 모두가 존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하나의 생명이라. 이른바 동일을 철학이라. 우리 불자님들 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서구철학과 불교철학의 기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서구 철학은 이것은 이분법적인 그러한 분열적인 철학이기 때문에 이 철학적으로 간다고 생각할 때에는 가사 사회 정화를 시킨다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자칫하면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불교철학을 동일철학(同一哲學)이라, 나나, 너나,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설사 과거에 부정을 좀 했다 하더라도 부정 그것은 인연 따라서 어쩌다가 겉으로 부정한 것이지 인간성 자체는 다 부처님이다.

따라서 참회하고 반성하면 다 부처가 된다. 이렇게 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비리를 사정을 하고 또는 벌을 주고 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인격을 파산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서구적인 사상 법에서는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사탄은 사탄이고 악마는 악마고 성자는 성자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성자나 악마나, 악마 이것은 겉에 뿐인 것이지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런 철학 이런 사상 밑에서 종교가 이루어지고 정치가 이루어지고 경제가 이루어지고 해야 그래야 참다운 평화와 자유를 구가하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존엄성이 성립이 됩니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이 창조했다. 피조물이다.

혹은 반대로 우리 인간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인간의 존엄성이 정확히 성립이 못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와 석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우리 인간성의 존엄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일체 생명을 하나로 보는 동일철학(同一哲學)이라, 이른바 동일률(同一律)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외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상과 특히 서구사상은 분열주의(分裂主義)인 것이고 자타 구분을 하는 것이고, 불교는 그렇지 않고서 오직 하나로 보는 그런 동일 사상인 것입니다.

부처님 사상 가운데는 무한의 자비와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지금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겉만 그런 것이지 사람 마음 이것은 무한대의 자비, 지혜, 한량없는 공덕, 끝도 갓도 없는 능력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불교인이 되고, 이렇게 생각해야 진리에 걸맞은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가정도 어려우시고 여러 가지로 고난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헤치고 나갈 때도 그냥 방편적으로 복을 빌지 마시고서 근원적으로 수행하셔야 합니다.

참다운 인생과 우주의 근본 성품자리인 바로 불성이고 신성자리인 그 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고 바로 우주의 본 성품인 그 자리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비나 지혜나 공덕이나 행복이나 일체가 다 갖추어 있습니다.

밖에서 안 구한다 하더라도 설사 우리가 인연 따라서 돈을 잘 못 벌고 구차해서 하루에 한 끼만 자신다 하더라도 석가모니 같으신 분들은 하루 한 끼만 자셨습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들은 그랬다 하더라도 조금도 불행이 없단 말입니다. 제일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지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배부르면 나는 못 먹어도 그때는 배부르단 말입니다.


-. 만법귀일(萬法歸一) [3]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다른 사람이 잘 되면 동시에 나도 역시 잘 된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런 사상 밑에서 정치가 서고 경제가 서고 이렇게 해야 참다운 민주, 참다운 평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냥 밖에서 제도만 가지고 잘하려고 하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 의식이 전환이 돼서 나밖에 모르는 그런 의식을 고쳐야 합니다.

기독교나 또는 불교나 유교나 그런 가르침은 모두가 다 하늘의 본성에 따르는, 우주의 본성에 따르는 법입니다. 그런 본성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중생이 다 더불어서 하나의 생명입니다.

이렇게 알으시고서 부처님을 믿으시는 것이 우선 집안에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은 그런 것보다 더 깊고 넓고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근본만 믿으면 그것은 철학적으로는 좋을런가 모르겠지만 우리 인간이 보통 빌고 있는 복에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세간적인 복도 근본을 믿고 복을 빌어야지 근본을 모르고서 그냥 현상적인 문제가지고 복이 오라 해도 복이 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잘살고 못살고, 잘되고 못되는 것은 우리가 다 지어서 받는 것인데 자기 병과 업장이 녹아 나야지 업장이 녹아 나지 않고서 그냥 복이 올 수가 없습니다.

업장이 녹아 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성이 바꾸어져야 합니다. 인간성이 바꿔져서 이기적인 자기가 정말로 공견 된 생명 자체인 자리로 전환이 돼야 합니다.

오늘 상량식은 대단히 의의가 깊은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의 그런 동참으로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회장님이 독판 시주는 했으나 또 관가에서 그 고생고생 하시고 많이 도와주시고, 또 우리 불자님들이 정성껏 태안사를 도와주시고 또 시주도 하시고 이런 공덕이 쌓이고 모여서 대웅전 불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설사 기왓장 하나였다 하더라도 정성이 사무치면 이것은 높은 것이고 설사 많은 시주금을 냈다 하더라도 정성이 없이 하면 그때는 그것은 별로 공덕이 없습니다.

따라서 다 같이 동참을 해서 우리 법당이 이루어집니다. 법당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냥 장엄스런 집을 짓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의 철학, 불교의 종교 이것이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도리, 우리 마음에는 석가모니같이, 예수같이 자비도 지혜도 사랑도 다 갖추어 있습니다.

그런 도리를 알아서 자기 스스로가 석가모니같이, 예수같이, 공자같이 이렇게 되는 것이 법당을 짓는 목적입니다.

앞으로 법당이 준공되면 자주 오셔서 같이 공부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셔서 가장 위대한 행복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위대한 행복은 진리와 더불어서 있습니다. 진리로 한 걸음 나아가면 우리 행복도 한 걸음 나아갑니다. 참다운 행복은 꼭 그러는 것입니다.

가상적인 행복, 고식적인 행복은 모르거니와 참다운 행복은 꼭 진리와 정비례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 앞으로는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꼭 시대가 그런 추세에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자의 가르침도 아닌 것이고 결국 종교는 우리 인류를 위해서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다 벽을 허물어트리고 꼭 본래 하나인 진리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본래가 다 갖추고 있는 공덕입니다. 하나의 진리로 많은 성자들이 밝혀 놓은 것을 우리 중생들이 잘 모르고서 구분하고 분할시킨 것입니다.

마땅히 이 동일률, 동일철학을 믿으시고서, 부처님은 바로 그러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하나의 도리인 동시에 생명의 빛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즉시 우리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따라서 판단도 흐리고 자기 불행도 그냥 초래가 되는 것입니다. 남한테 자비를 베풀고 말도 바르게 하고, 또는 남의 험담도 않고, 욕심도 덜 부리고 이렇게 할 때는 우리 마음도 맑아지고 따라서 우리의 몸은 마음의 반영인지라 우리 몸도 훨씬 더 좋아집니다.

우리 병도 보통은 나쁜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서 병이 됩니다. 마음과 몸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가짐 정말로 우리 마음을 바로 가지면 마음도 평안하고 우리 몸도 편하고 또 그것이 동시에 우리 사회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축복된 태안사 대웅전 상량식의 날을 기해서 우리 불자님들께서 꼭 진리를 듬뿍 마음에 담아 가셔서 우리 마음을 흐리게 하고 우리 몸을 어둡게 하는 그런 진리에 배반된 것은 절대로 마시고서 지금 돌아가시면서 부터서라도 꼭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으로 해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