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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13 집 1.청화 큰스님께서 미국에 오신 뜻은?

마음의 고향 제 13 집


*서기1994년2월20일 미국 삼보사에서 미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시인 강 옥구불자와의 대담임


-. 청화 큰스님께서 미국에 오신 뜻은? [1]


문 : 큰스님, 이렇게 인터뷰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마(菩提達磨 ; BodhiDharma ? - 528)스님께서 동쪽으로 오신 큰 뜻이 있는데, 큰스님께서 이렇게 미국으로 오신 의의는 무엇인지요?


큰스님 : 예, 제가 온 것은 거창하게 달마 스님께서 오신 것에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달마 스님께서는 공부가 다 성취된 뒤에 동토지방을 제도할 원력으로 오셨고 저는 미숙한 채로 미국 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아직도 제대로 정착을 못했다는 판단이 서고, 미국의 각국 불교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도 안 되어 있는 것도 같아서 융합적인 차원에서 누군가가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이도 많고 능력도 부족하나마 미국에서 한국불교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해 가면서, 각 종파간의 여러 가지 집착 때문에 분열되고 갈등되어 있는 관계를 해소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그런 뜻으로 온 셈입니다. 또한 미국은 선진국으로서 세계의 석학들이 많이 모이고 문화교류가 활발한 곳이기 때문에 불교의 진면목을 세계에 알리는데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 : 그러면 갈등을 해소하고 분열을 화합하는 가르침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큰스님 : 예, 그냥 무턱대고 무원칙으로 분열을 지양시킬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원리가 앞서야 되겠지요. 그런 면에서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그런 분열을 지양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곧 반야의 지혜라는 것은 모든 개별적인 차별, 분별을 초월하여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파악하는 실상(實相)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은 모두가 실체가 아닙니다. 자기 몸뚱이라든지 자기 관념이라든지 대상물 모두가 실제가 아닙니다.

불교 말로 하면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에는 인간이라든가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데, 오온은 본래로 실존이 아니요 가상(假相)인 것이고 허망상인 것이기 때문에 공(空)인 것입니다. 오온개공을 또 제법 공(諸法空)이라 합니다. 일체 만유가 다 제법인데, 제법이 본래로 다 공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물리학적으로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바로 즉 공(卽空)이라는 말입니다.

색즉공(空)이라 할 때 색은 바로 물질인데, 물질이 바로 공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내 몸뚱이도 이렇게 있다고 집착하고 있는 이대로 공이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생이 인식하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요. 잘못 보는 것으로서 실재가 아닌 것이고 진리는 반야바라밀인 중도실상(中道實相)입니다.

중도실상은 원융한 생명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도실상의 생명관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대화도 하고 행동해야 분열 갈등을 지양하고 모든 일을 진리의 조명 아래서 올바르게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오온개공으로 모든 것이 비었다면

거기에서는 어떠한 수행법을 따라야 하나요?


큰스님 : 불교 수행법은 다 오온개공을 근본으로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허망 상을 부정하고 소멸시키는 수행법입니다.

가사, 염불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를 염하는 것으로서

부처 자체가 바로 중도실상의 생명의 본체이기 때문에거기에다 마음을 붙이고 생각 생각에 그 자리를 여의지 않을 때에우리 나쁜 버릇은 점차로 없어지는 것이고 분별 시비하는 허망한 마음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중도실상, 생명의 실상에다 마음을 두기 위해 화두가 있는 것입니다.

'무자(無字)'화두나 '이뭣고' 화두나 모두 다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문제시 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 마음을 여의지 않기 위해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주문을 외우고 경을 보는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법 모두가 현상적인 허망 상을 여의고 또한 망상인 가명(假名)을 여의는 것입니다. 이른바 명상(名相) 즉, 이름과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허망한 상을 떠나고 가명을 떠나면 벌써 그 자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의 지혜가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 하는 수행법인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나 간경이나

모두가 오온개공을 깨닫는 방편입니다.

오온개공이 되면 다만 공이 아니라 그 공의 실체가 진공묘유(眞空妙有)인 중도실상의 생명의 본체가 나타나게 됩니다.


문 : 보통 미국에서 선(禪)이라 하면 일본의 선, 주로 임제선이나 조동종의 선을 의미하는데, 큰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염불이나 선이 차이가 없다는 것을 뜻하시는지요.


큰스님 : 조동종의 선이나 임제종의 선이나 다 훌륭한 선이지요.

그런데 그것만 선이고 다른 것은 선이 아니라고 하면 불교를 너무나 협소하게 해석하는 법집(法執)이 됩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면 선은 바로 불심(佛心)을 의미하고 불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가령 화두공안(公案)을 참구한다 하더라도 불심을 여의지 않아야 선이 되는 것이지 상대적인 문제를 의심한다던가 참구한다고 할 때는 마음이 분열되어 참다운 선이 못됩니다.

또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默照禪)에서도 잠자코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중도실상의 생명경계를 분명히 관조해야지 그저 묵묵히 고목처럼 무념무상으로 가만히 있다고만 할 때는 오히려 망상이 나오기 쉽고 무기(無記)에 떨어지기도 하여 진정한 참선이 못되는 것이지요.

또한 염불을 하더라도 염불의 본뜻이 부처를 생각하고 일체가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기에 극락세계에만 부처님이 계신다던가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떠나서 마음밖에 부처를 대상적으로 설정하고 구할 때는 염불선이 못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자성, 내 마음의 본체가 바로 부처님이고 우주 만유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는 바로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참다운 진언(眞言)의 경계, 참다운 우주만유의 본질자리는 부처인 것이고 내 마음과 더불어 둘이 아니라고 분명히 생각하면서 그 자리를 여의지 않으면 주문을 외운다 하더라도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화두를 참구하든, 묵조선에서 묵조하든, 염불하든, 주문을 외우든, 또는 경을 읽든 다른 종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을 공부하든지 간에 우리 마음이 본질적인 생명의 실상자리, 생명의 본질자리를 안 떠나면 다 선이 된다고 해야 이른바 법집(法執)이 아닌 참다운 선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 :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그런 자리를 바로 보면 염불을 하던 경을 읽든 모두 다 선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큰스님 :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국한시키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나 다른 사람 마음이나 다른 동물 마음이나 우주의 일체 유정무정 모든 존재, 일체 만법의 본 성품이 부처라고 생각해야 참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 가운데는 일체 모두가 다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안 떠난다.'할 때 잘 모르는 분들은 단순히 '우리 마음인 인간성만 부처인 것이고 다른 것은 부처가 아니지 않은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선에서 마음을 말할 때는 우리 인간의 마음인 동시에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일체 존재 모든 것의 근본 성품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성품자리만 여의지 않으면 모두가 참선 아님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문 : 그러면 중도실상의 자리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와 모든 중생과의 차이가 없다는 자리를 의미합니까?


큰스님 : 예 그렇습니다.

그 자리는 어디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다 포함된 셈이지요. 우리 중생이 보듯이 허망무상한 상만 있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텅 비어서 없다는 것도 아닌 것이고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모두를 다 초월한 자리며 모든 성자들이 체험하는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일체 가상을 떠나서 인생과 우주의 본래 생명의 실상자리가 이른바 중도실상자리입니다.


문 : 그러면, 참선에서는 중도실상 자리를 보는 것이 중요하니까 초보자가 선을 공부하고 싶을 때 중도실상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겠군요.


큰스님 : 예, 그렇습니다.

초심자가 처음에 중도실상을 관조한다 하기는 좀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이해는 할 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리 중생이 아직은 번뇌에 가리어서 중도실상의 생명의 자리를 체험은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무수한 성자가 증명했고 성인들이 말씀한 공변된 자리니까 이해는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초심으로 공부할 때도 반드시 먼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중생들에게도 이해를 하도록 까지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바른 이해를 하고 닦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바른 수행이 됩니다.

이른바 정견(正見)이 없는 공부는 부질없는 분별을 하여 마음이 헷갈리게 되니 참다운 수행이 되지 못합니다.

바른 이해, 곧 '우리가 아직은 번뇌에 가리어 체험은 못했다 하더라도 일체 모두가 바로 보면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어떠한 존재나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한 것이고 성자가 보는 실상자리만이 참다운 것이다.' 이렇게 먼저 이해한 다음에는 염불을 하던 화두를 들던 우리 마음이 그러한 실상경계에 지향하게 되어 필경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 하더라도 바른 도리, 중도실상의 자리를 이해를 못하고 할 때는 부처님을 마음 밖에서 대상적으로 구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해를 해버리면 아직은 자기가 바로 증명은 못했다 하더라도 '아, 부처님은 바로 우주 자체구나, 우주의 생명이구나,' 이렇게 나가니까 단박에 체험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경계를 지향해서 공부가 차근차근 익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문을 외우든 다른 방법으로 공부를 하든지 간에 바른 이해를 하고서 중도실상의 생명자리를 지향해서 나가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근기와 용맹정진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점차로 공부가 익어져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체(本體)와 계합(契合)하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청화 큰스님께서 미국에 오신 뜻은? [2]


문 : 미국에 있는 우리 재가 불자들, 그리고 보통 모든 사람들이 중도실상 자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큰스님 : 중도실상 자리를 아직 체험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리고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도저히 자기 분상에서 납득이 안 되니까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업장이 가벼운 사람은 납득이 빠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붇다나 도인들은 가장 정직하고 총명하고 바로 깨달은 분인데 그분들이 옳다고 했으니 그대로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전폭적으로, 이른바 수희찬탄(隨喜讚嘆)하는 마음으로 바로 수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희찬탄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까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됩니다.

자기가 미처 체험을 하지 못했어도 무수한 성자가 증명한 것이고 우주의 모든 진리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 성현들이 역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편달해 가면서 일반 사람들도 거기에 나아가도록 해야지요. 그리고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나 그 사람 근기에 맞추어서 생각 생각에 다른 생각을 않고서 지속적으로 공부하도록 까지 가르쳐야 됩니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하루 하면 하루 한 만치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중도실상의 경계가 점차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초심자에게 있어서 6바라밀 수행은 어떠할까요.


큰스님 : 예. 누구에게나 6바라밀 수행이라던가 3학도의 수행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근기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요. 또 6바라밀 수행을 한다고 할 때도 먼저 중도실상 도리를 이해를 하고 닦아야 6바라밀이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6바라밀이라는 것은 보살의 수행이기 때문에 지혜와 더불어서 닦아야 보살행이 됩니다.

가사, 우리가 남한테 물질을 베푼다 하더라도 주는 내가 있고 받는 저 사람이 있고 주는 물건이 있고 그런 대상적인 차별을 한다던가 또 물질이 많다든지 적다든지 아깝다든지 그런 생각을 내면 보살의 보시는 못되는 것입니다. 보살의 보시는 상을 떠나야 되는데 상을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른 이해라는 것은 반야바라밀 곧 반야의 지혜로 일체 존재가 다 본래로 공이란 도리를 아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도 본래 공이요, 너라는 것도 공이요, 내가 남에게 베푸는 물질도 공이요, 모두가 공이라는 제법 공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베풀고 계행도 지키고 해야 참다운 보시요 참다운 계율이며 6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달마스님께서 양무제를 꾸중하신 것은 바로 양무제가 그러한 바른 지혜가 없이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일까요?



큰스님 : 그렇게 봐야지요.

양무제(梁武帝)가 느꼈다면 절을 많이 짓고 불사도 많이 한 그런 공덕을 자랑삼아 얘기할 수 없겠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상을 떠나는 무주상(無住相) 수행입니다.


문 : 큰스님, 상을 떠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큰스님 : 상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가상이라든가 허망한 관념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분별 망상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인 것이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반야의 지혜로써 생각할 적에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잠시간 인연 따라 나라는 모양이 있고, 너라는 모양이 나오고, 내 재산이 있고, 내 집이 있는 것이지 본래 제법 공 도리에서 본다면 나라는 것도 없고 내 소유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의 지혜인 무아, 무소유의 자기를 분명히 느끼는 가르침,

다시 바꾸어 말하면 가상이나 가명을 떠난 그 자리에 입각해야 6바라밀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양무제를 꾸짖은 것도 역시 양무제가 상에 집착을 하였기에 상을 최파(摧破)하는 의미에서, 본래로 제법이 무상하고 공한 참다운 진여의 자리에서 그렇게 질타를 하셨겠지요.


문 : 달마스님께서 펼치신 법문이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고 하던데요.

큰스님께서 펼치시는 법문도 안심법문인지요?


큰스님 : 그렇습니다. 안심법문입니다.

상을 못 떠나면 안심이 못되니까요. 상을 못 떠나면 자기 몸에 대해 항시 불안스럽고 자기 지위에 대해서 불안하고 내가 언제 죽는가 하는데 대해서 불안하고 그런 사람들은 안심이 못되니까요. 안심법문이 되려면 역시 반야바라밀이 전제가 되어야 안심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혜가(慧可 487 - 593)스님께서 달마대사에게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라고 하니까 달마대사가 '아 그래,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와 봐라!'하셨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이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욕심 있는 마음이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본래 조금도 상이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괜히 상을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안심이 되려면 없는 것을 없다고 보는,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에 입각해야 안심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수행에서 반야바라밀이 되어야 대승이 됩니다. 반야바라밀이 못되면 소승에 불과합니다. 누구한테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내 것은 내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는 소승입니다.


문 : 그러니까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는 기본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씀이지요?


큰스님 : 그렇습니다.

일반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그저 남에게 베풀면 대승인 것이고 자기만 생각하면 소승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에서 생각하면 엄연히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가 깃들어 있으면 대승인 것이고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소승인 것이고 범부인 것입니다. 결국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세속을 미처 못 벗어난 이른바 속물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문 : 반야심경 독해(讀解)에서 반야의 인(因)이 되고 반야의 과(果)가 된다는 것이 바로 반야에 의한 연기(緣起)라고 볼 수 있을까요?


큰스님 : 법계연기나 반야연기는 같은 뜻입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반야고 법계가 바로 반야의 지혜인 것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반야의 지혜 곧 법계 또는 불성이 인연 따라서 현상으로 나온 것입니다.

무명이라는 것도 우리 중생이 잘 못 보아서 무명인 것이지 본래로 무명이 바로 반야인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러면 그것은 현상적인 상만 보니까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의 본바탕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부처라는 말입니다.

부처가 잠시간 저와 같이 나쁜 짓을 하는 모습으로 나에게 비쳐 온 것이지 본바탕은 바로 부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모두가 다 반야에서 온 것이고 반야의 가상인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것을 잘못 보고서 겉만 보니까, 좋다 나쁘다 하는 것입니다.


문 : 한국불교, 중국불교, 일본불교를 비교해 볼 때 한국불교의 특징이 바로 안심법문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큰스님 : 어느 불교나 안심법문을 따라야 합니다.

안심법문을 못 따르면 상을 못 떠나니까 안심법문이 못되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참다운 실상의 지혜가 되어야 참다운 불법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참선도 못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법문도 있어요. '부달성공(不達性空)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모든 성품이 비어 있다는 것에 이르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두가 가상, 가명이니까 우리가 공부할 때는 가상과 가명을 부정을 해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대 긍정이 됩니다.

대 긍정이라는 것은 모두가 부처라는 중도실상입니다.


문 :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만 원효스님이나 경허스님 같은 분들은 계(戒)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것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리고 지금 미국에서 여러 수행자들이 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은데요, 큰스님께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큰스님 :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시 도덕성이라는 것은 가정으로 보나, 사회로 보나, 인류사회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종교는 어떤 종교에서나 철저한 도덕성은 철두철미한 당위요 의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간적인 도덕은 삼강오륜을 지켜라, 부모한테 효성해라, 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것이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불교도 근본적인 윤리는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불성은 나와 남이 차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 그런 이기심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라고 생각할 때는 자기를 위해서 남을 희생도 시키고 핍박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자기와 남이 본래로 하나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사람을 해롭게도 할 수도 없고, 원수 간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사, 누가 누구를 살해했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현상적인 겉만 죽인 것이지, 본래 생명은 모두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를 살해했다 하더라도 본바탕에서 보면 생사가 본래 없고 자타가 없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될 것인가?

인연 따라서 그런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을 원수라고 해서 다시 보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령, 음식을 먹을 때도 제 몸뚱이가 중요하고 맛에 취하니까

부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도 먹는 것이지, 맛도 허망하고 제 몸뚱이도 허망하고 색도 허망하고 소리도 허망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때는 당위적으로 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가 미처 미숙할 때는 본 성품을 못 깨달으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고기가 있고, 맛이 있고 또 좋은 술이 있고 그런 상을 미처 못 떠나므로 그런 것에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스님께서 무애행을 취했다 하는 것도, 그 분이 요석공주와 관계할 때는 미처 철저한 도인이 못 되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자가 되면 벌써 이성을 떠납니다. 그 때는 범할래야 범할 수도, 범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성자가 함부로 색을 범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자가 미처 온전히 못된 때라면 그것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됐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으리라고 생각이 되고, 그 뒤에 일반 중생을 제도할 적에 여러 무애행을 했다는 것은 원효대사가 음식을 중생과 더불어 먹는다든지 이런 일, 저런 일 무애행은 중생들 교화하는 편의에 따라서 그렇게 했겠지요.

도인인지라 원효대사의 눈으로 볼 때 고기도 고기로 안 보이는 것이고, 내가 지금 먹어야 할 것인가 안 먹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구미가 당기고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제도에 필요할 때에는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계율 중 큰 것은 범할 수가 없으나 사소한 것은 범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경허스님 같은 분도 많은 사람들이 도인이라고 숭앙하기도 하고 경허어록을 보면서 빈축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탈이라고 할 때에는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이 있습니다. 지혜해탈은 지혜로 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이고, 선정해탈은 오랫동안 선정에 들어 습기를 없애서 중생의 생리까지 정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해탈만 되어서는 신통은 못나오는 것이고 또 습기가 미처 못 녹아서, 과거전생의 업장 따라서 어느 경계에 부딪히면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처 습기는 다 못 녹였다 하더라도 법을 바로 해석했다고 하면 자제할 수가 있으니까 함부로 범할 수는 없겠지요.

자제를 못한다면 그것은 딱한 일이지요. 지혜해탈만 했다 하더라도 법은 막힘이 없어 남녀도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고 모두가 원래 허망 무상한 것이라고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자제할 수가 있겠지요.

자제를 못하면 그 때는 수행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선정해탈을 했다면 벌써 생리가 정화되어서 그렇게 할래야 할 수가 없으니까 전적으로 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구분이 필요합니다.

옛 스님들께서도 가사, 지혜해탈은 하였는데 선정해탈은 못해서 미처 습기를 다 못 녹여서 그렇게 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수행자들이 해탈을 못한 분상에서 무애행이라고 함부로 하면서 일반 중생들의 빈축을 산다면 안 되겠지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하지요.


-. 청화 큰스님께서 미국에 오신 뜻은? [3]


문 : 스승을 구하는 일이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큰스님 : 예,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문 : 그러면 배우는 사람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스승을 구해야 합니까?


큰스님 : 바른 정견(正見)이 있는가, 없는가, 다시 말하면 반야바라밀을 분명히 느끼고 명상(名相) 즉, 가명과 가상을 떠났는지 못 떠났는지, 그 사람 말 몇 마디를 들어보면 짐작이 되겠지요.

달마스님도 양무제 말 몇 마디 듣고서 '저 사람은 아직 상을 못 떠났구나.' 하고서 그렇게 질타를 했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에 걸려있고 자기 수행법에 걸려있고, 자기 문중에 걸려있고, 자기 종파에 걸려있는 그런 사람들은 미처 아직은 명상을 못 떠난 셈 아닙니까. 아무리 사회에서 숭앙한다 하더라도 아직 상에 걸려 있으면 바른 정견이 없는 것이니까,

그 사람이 바른 정견이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는 그 사람 행동이 욕망을 떠났는가, 못 떠났는가를 보면 됩니다.

깨달은 사람 같으면 이른바 식욕, 음욕, 수면욕 같은 욕계 번뇌를 응당 떠나야 하겠지요.

욕계 번뇌를 못 떠났으면 그것은 삼계 가운데 욕계도 미처 못 떠났으니까 성자라고 볼 수 없는 문제이고 또 남의 스승이라고 자타가 공경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스승이라고 할 때에는 바른 정견, 곧 반야의 지혜, 바른 지혜와 더불어 행으로 해서 욕계번뇌를 떠나야 합니다. 삼독심을 온전히는 못 떠났다 하더라도 욕심이 있는가 없는가, 진심이 얼마만큼 닦여졌는가, 하는 것이 기준으로 되어야겠지요.


문 : 그러면 그러한 스승을 찾지 못했을 때에는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큰스님 : 그렇습니다.

열반경에서도 '그대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며, 법을 스승으로 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듯이 우리가 오직 부처님 법을 스승으로 공부하면 됩니다.

부처님 법이 없으면 가늠할 수가 없으나 부처님 법은 있으니까, 부처님 법에 의지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가늠해 본다면 오류를 범하지 않고, 깊이 생각해보면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하고 짐작이 되니까요.

우리 마음은 본래가 무량무변한 지혜 공덕을 갖춘 부처님입니다.


문 : 종파간의 갈등과 더불어 종교 간의 갈등이 많은데요, 어떻게 그들이 서로 이해하고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요?


큰스님 : 각기 서로 다른 종파나 종교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반야심경이나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중요한 불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불교사상의 핵심을 알 수 있겠지요. 그와 아울러 불교인도 기독교의 성전인 바이블도 공부하고 이슬람의 코란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부하되 명상(名相)을 떠난, 곧 망상과 가상을 떠난 그 자리에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두어야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바이블을 본다 하더라도 자기 소견으로 자기가 배운 것만 가지고 본다면 문자에 걸리고 이것저것 걸려버리는데 그렇지 않고서 명상(名相)을 떠나서 '이름이라는 것은 다 가짜인 것이고, 그때그때 몇 천 년 동안에 왜곡되기도 하고, 보태거나 깎기도 했을 것인데 과연 예수의 본뜻이 무엇이겠는가, 마호메트의 본뜻이 무엇인가'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설사 표현이 좀 어색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사실은 불경에도 방편이 많이 있습니다. 같은 경 가운데도 방편과 진실이 아울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방편과 진실을 가리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 기준이 반야의 등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반야의 등불이라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피차가 불경도 공부하고 다른 경전도 공부함으로서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불교가 있고 기독교가 있기에 비로소 진리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본래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영생불멸한 우주의 도리입니다.


문 : 그러면 예수님이나 마호메트를 보살로써 여기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큰스님 :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역시 그분들이 자기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만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가지고 출발했고, 또 오랜 세월동안 무수한 사람들을 그런대로 구제를 했으니 마땅히 보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기본적으로 불교의 진리에서 본다면 모두가 본래로 다 부처 아닙니까. 잘나도 부처요 못나도 부처요, 또 강도질을 해도 현상적인 가상으로 봐서는 구분된다 하더라도 본 성품에서 보면 부처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숭앙하고 또한 한 생애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도덕적인 봉사 행을 다한 분들을 마땅히 보살의 후신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문 : 큰스님께서는 어려서 기독교를 믿으셨다고 하던데요.


큰스님 : 저는 기독교를 깊이 연구해서 믿은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바이블을 정성껏 보기도 하고 제방에서 기도도 하고 스스로 명상도 했습니다.

톨스토이와 같이 순수한 진리성으로 기독교를 믿는 쪽으로 지낸 분들의 책이 좋아서 읽기도 하는 그런 미숙한 정도였습니다.


문 : 그러면 큰스님께서 출가하신 인연은 어떠한 인연이셨는지요.


큰스님 :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 철학서적을 이것저것 약간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보면서 물론 불교서적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입문서도 보고 법화경도 보고 승려가 되기 전에 나름대로 불교의 윤곽은 잡았었습니다. 그런 후에 제 집안의 6촌 동생이 절에 있으면서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아 그러느냐고 하고서 바로 따라 나섰습니다.

절에 가서 수양도 좀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워낙 위대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미련 없이 다 뿌리치고 출가해 버렸지요.


문 : 스승이신 금타스님의 어떤 점이 위대하시다고 보셨습니까?


큰스님 : 그 어른에게서는 어떤 점에서 보던지 자기 개인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고 진리의 불덩이 같이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른의 법문에서 제가 기독교나 현대과학에 있어서 막혔던 문제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다 풀리니까요.

오랫동안의 회의가 풀리니까 젊은 사람으로서는 환희용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수행론이 철저해서, 이런 방법을 취하면 꼭 성불 할 수 있다 하는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되니 다른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 : 그러면 그 수행론 중에 장좌불와(長坐不臥)나 일종식 같은 것이 있습니까?

 

큰스님 : 그런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수행론에도 장좌불와나 일종식같은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수행론은 중도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절대로 무리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 근기 따라서 수행하도록 되어 있으나, 기본적인 출가수행자의 계율이 가사, 출가수행자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이라 하여 오후에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잠도 아침에 한번 일어나면 밤에 취침할 때까지 눕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좌불와 하라는 강요는 않습니다. 장좌불와는 개별적으로 과거에 하신 분들 따라서 자기가 용맹심을 내서 하는 것입니다.

다만 오후불식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고 잠도 병자가 아닌 한에는 한번 일어나면 취침시간이 아닌 한 앉아서 공부할 것이지 자리에 눕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 : 큰스님께서는 40여 년간을 일종식 하시고 장좌불와 하셨습니까?


큰스님 : 저는 그렇게 철저한 셈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하여튼 원칙을 그렇게 세웠습니다.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면 그렇게 편해요.

그리고 토굴생활을 하다 보니까 혼자 여러 끼니 해 먹기도 귀찮스럽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 몸이 굉장히 가볍다는 것이고 또 피 순환이 왕성하니까 병균이 못 범하겠지요. 사실은 삼세 부처님은 하루 한 끼니예요.

그러나 승가생활에서 아침에 배고플 때는 죽을 먹어도 무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일종식이지요. 저도 역시 원칙은 지켰으나 어디에 초청되면 애써 대접하는데 안 먹으면 미안스러우니까 더러 먹기도 했습니다.

또 잠도 젊어서는 어거지로 상을 내서 앉아서 버티었으나 지금은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이제는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몸뚱이도 분명 내 마음이 머물고 있는 집이라서 너무 무리하면 그만치 장애가 될 것이고 해서 지금은 될수록 안 눕는 쪽으로 원칙은 세워놓고 고집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피로하면 눕기도 하는 편이기 때문에 장좌불와 한다고 했고

토굴생활도 아마 그래저래 근 삼십년은 했으니까 수행자로는 꽤 많이 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 그러면 토굴생활 하시는 동안 쭉 묵언 하셨습니까?


큰스님 : 거의 다 묵언이었지요.

토굴생활이라는 것이 혼자이니까 저절로 묵언이 되지요. 그러나 한 4년 동안 오로지 묵언 지키고 안 나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1년 만에 나오기도 하고 반년 만에 나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래서 오로지 묵언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마는 거의 묵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묵언도 저같이 많이 한 사람은 드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고, 또한 토굴이라고 해서 흙을 파놓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움막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을 토굴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철저히 검소하게 생활했었습니다.


문 : 그러면 토굴에서는 어떻게 식사를 하셨습니까?


큰스님 : 그러니까 제가 먹는 것은 낮에 한 때인데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는 밥을 해서 먹기도 하고 반찬은 깨와 소금을 볶아 섞은 것이나 김가루를 간장으로 버무린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산중생활에 김치 같은 것을 누가 갖다 주어도 오래 놔두면 그냥 시어버리고

며칠 먹으면 없어져 버리니까 못 먹는 때가 보통이었지요.


문 : 그렇게 사십년을 사셨어요?


큰스님 : 단무지 같은 것도 누가 가끔 갖다 주기도 하고 또 조금씩 얻어다 먹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사실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보리 미숫가루만 먹고 삼개월간 지내기도 했어요. 그것도 결제 들어갈 때 짐도 무겁고 하니까 마을에서 서너 되나 미숫가루를 해주면 그것으로 한철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삼십대라서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먹어야 배도 차고 먹은 것 같이 되요. 그렇게 하루에 한 컵씩 먹고 삼개월동안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둥굴레 가루만 먹고 삼개월동안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생쌀을 물에 불렸다가 한 숟갈씩 먹기도 하고, 하여튼 제 토굴생활이라는 것은 표현하자면 비참한 생활이었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내 몸뚱이를 너무나 학대하지 않는가 하여 몸에 대해 가엾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마는 역시 저에게는 유익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문 : 그러면 그런 수행방법을 큰스님께서는 권장하십니까?


큰스님 : 권장은 않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다분히 유익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에 힘을 얻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사, 이렇게 앉아 있으면 조금도 몸에 부담이 없고, 마음이 절로 고요해지고, 가만히 있으면 있는 만큼 더 맑아지고 그런 때는 별로 에너지 소모가 안 되니까 건강에 별로 지장이 없겠지요.

그래야 되지 혼침도 미처 참지 못하고 망상만 피우고 그럴 때는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지장이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철두철미하게 다 바르게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저같이 토굴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문 : 그 때 큰스님께서 수행하실 때 염불선을 하셨습니까?


큰스님 : 그렇습니다.

저는 금타 화상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에 선방에도 몇 철 다녀봤지마는 너무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달리 스승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내 공부 내가 혼자 할 것이지 누구를 찾아가서 또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토굴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사십대에는 모범적인 선방을 만들어 사람을 길러도 보려고 토굴에서 나와 보았지만 그것이 잘 안됩니다.

안 되는 것은 제 역량이 부족도 하고 인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였겠지요.

그래서 다시 토굴로 들어가고 또 나와 보고 그러다가 육십 넘어서 온전히 나왔지요. 이제 가까스로 십 이삼년밖에 안됩니다.

 

-. 청화 큰스님께서 미국에 오신 뜻은? [4]


문 : 큰스님께서 미국에 이루고 싶으신 모범적인 선원에 대한 말씀도 해주십시오.


큰스님 : 저는 부처님 당시의 정통선을 미국에 뿌리 내리고 싶어요. 정통선이란 화두선에도 안 치우치고 묵조선에도 안 치우치고 염불선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본래 불심자리, 중도실상의 불성자리만 안 떠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식으로 선을 밝히고 싶어요. 그래서 그렇게 한다면 크리스천이나 이슬람도 자기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이 진정으로 공변된 진리만 된다면 누구나 다 마땅히, 누구나 다 모두 성불이 되겠지요.

그리고 생활규범만은 부처님 당시의 청규대로 하고 싶습니다. 일반대중들은 제가 하는 대로 따르라고 그렇게 무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학교도 다녀야 되고 현대 학문도 배워야 되고 운전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저처럼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같이 하루에 한 끼 먹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오후불식만은 꼭 지켜야겠는데 그 분들이 따라오겠는가 안 따라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 : 오후불식을 재가불자들에게도 권장하십니까?


큰스님 : 재가불자들은 6재일이 있습니다.

6재일동안은 출가한 사람과 똑같이 하루에 일종을 합니다. 재가불자도 한 달 가운데 여섯 날을 출가한 셈치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칙은 재가불자도 청규를 다 지켜야 하는 것인데 가정이 있어서 그렇게 안 되니까 한 달에 6일이라도 지키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래서 6재일이 나왔는데 그 날만은 내외간에도 같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고기도 안 먹고 허튼말도 않고 하루 한 끼만 먹고 오로지 부처님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하면 주님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화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이렇게 서로 교류가 됩니다.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는 주일이 6재일이 되겠지요.

저는 미국에서 하는 경우에도, 좀 무리가 되고 배고프면 우유라도 좀 마시더라도 오후불식만은 꼭 하는 것이 우리 출가수행자가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리랑카 절들은 지금도 오후불식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 한 끼니만 먹게 되면 분위기가 굉장히 긴장됩니다. 그런데 하루 세끼 꼬박 먹으려면 성가시기도 하고, 사람 위장이 많이 먹어 놓으면 몸도 무겁고 게을러지고 비대해지기 쉽고 합니다.

그러니까 적게 먹으면 먹는 양에 비해서 흡수를 많이 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피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많이 먹으면 배설을 많이 하니까 흡수하는 비율은 적어집니다. 그리고 또 최초의 인간은 음식을 안 먹었습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였으니 광명은 불생불멸의 생명이기 때문에 먹을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 경전에 보면 최초의 인간은 식식(識食)이라, 마음으로 음식을 삼았다는 뜻입니다.

환희 하는 행복을 음식으로 하고,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음식으로 하고, 법을 음식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에 대해서 환희심으로 충만하다면 그 때는 안 먹어도 마음이 충만하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막히고 남 미워할 때는 필요 없이 자꾸 먹어지고 하지 않습니까.

 

문 : 재가 불자들에게는 참선하는 시간이 몇 시간이 가장 좋을까요?


큰스님 : 출가불자는 사분정근이라 해서 표준시간이 새벽 두 시간,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밤 두 시간 합이 여덟 시간입니다. 조금 정진을 더 한다면 열 시간도 하고 열두 시간도 합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는 그렇게 하기가 곤란스럽겠지요. 태안사(泰安寺) 선방에서 참선하는 시간은 여덟 시간 표준입니다.

새벽 두 시간,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밤 두 시간 말입니다. 태안사에서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이십 여 명씩의 재가불자들이 꼭 참선을 합니다.

출가불자 선방은 위에 있고 재가불자 선방은 밑에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서도 저희 계획대로 되면 올 겨울쯤에는 재가불자, 출가불자가 다 같이 정진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 여름에는 가급적이면 법당을 지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법당을 선방으로 써야 하거든요. 그러면 사십 명 정도는 충분히 앉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 법당이 따로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문 : 용맹정진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십시오.


큰스님 : 보통은 겨울에 부처님 성도재일을 계기로 해서 한 7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고 성도재일에 해제를 합니다. 여름에는 그때그때 상황 따라 대중끼리 상의해서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용맹정진을 잘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어서 안하는데도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안자고 안 눕고 배긴다는 것이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해보면 되는데 습관을 바꾸려면 대단히 어렵겠지요.

그리고 근본 정통선을 익혀야만 참다운 선정의 힘도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도력도 나오는 것입니다.

정통선으로 해서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까지 못나간다면 우리 자성이 갖추고 있는 무량 공덕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우리 자성 가운데는 삼명육통(三明六通)등 무량공덕이 갖춰져 있는 것인데, 삼매(三昧 : Samadhi)로써 습기를 녹여야 무량공덕이 나올 것인데 습기를 못 녹이고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혜해탈만 해서 아는 것은 제법 알지만 선정해탈로 삼매에 못 들면 습기를 못 녹이니까

자기 버릇을 못 떼어서 원래 갖추어 있는 무량공덕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결국 부사의한 신통 공덕을 무시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불교가 다시 옛날 도인들처럼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서 자기 스스로 불을 내어 자기 몸을 태우는 정도의 도력이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현대 물질사회에 젖은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이고, 제도하기도 쉽기 때문에 사선정, 사공정, 멸진정인 근본 선을 한사코 닦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육성 같은 아함경을 보면 여러 군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이 해 놓은 번역도 보면 아함경 풀이하는데 있어서 그런 대목은 역설을 잘 안했어요. 삼매에 관해서 지금 현대인들은 참 인색합니다.

학자 분들은 거의 삼매에 대해서 아예 관심을 안 두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문 : 그런 것은 자신들이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큰스님 : 대개 교리로서 한 체계를 세워놓으면 그것으로서 다 한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란 결국 기도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고 업장이 녹아서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바른 깨달음, 바른 계시를 받으려면 꼭 그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단강 하반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했다는 것도 그 때에 깊은 삼매에 들었겠지요. 또 마호메트가 힐라산 동굴에서 3년 동안 지낸 것도 깊은 삼매에 들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떤 누구나가 꼭 성자가 되려면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인데, 과정이 없이 성자가 되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기고 폐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문 : 큰스님, 저희 같은 사람도 가능할까요?


큰스님 : 달마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겉에 형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성품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지요. 누구나가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고, 위대한 공덕이 있는 성자와 내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불법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닦고 안 닦고, 또는 얼마만큼 닦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선근이 깊지 못하면 자꾸만 후퇴합니다.

닦다가도 조금만 피로하면 '편히 살 것인데 괜스레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른 스님들은 편하게 승려 생활을 잘하는데 무슨 필요로 그렇게 까다롭고 옹색하게 하느냐고 해요. 딴은 그 말도 아예 삼매정진을 무시한다면 옳은 말이 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문 : 그리고 법문에 무문관(無門關)이라 할 때,

문이 없는 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인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큰스님 : 그것이 오류는 아니지요.

내나야 제법이 공이니까 문이 없는 문이라 할 수 있고 구체화 시키면 명상(名相)을 떠난, 제법이 공인 도리를 깨닫는 관문이라고 생각해야 무문관이 되겠지요. 그래서 제법공의 관문을 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 : 그리고 또 금타스님께서는 반야심경을 번역하실 때 본래 낳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보통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번역하는데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큰스님 : 금타스님께서는 본체에서 철저히 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되셨겠지요. 현상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본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언제나 변치 않는 불성뿐이니까 말입니다. 본체에 보다 철저하게 보았다는 것이 되겠지요.


문 : 제가 그 차이를 보고 의문이 있었습니다.


큰스님 : 그런 것이 금타스님의 특이한 부분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공이 철저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하면 모호한 말입니다.


문 : 그렇지요. 그러면 낳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큰스님 :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호합니다.

현상계는 실존에서 보면 있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고,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에서 보더라도 마땅히 본래로 공이라는 것 아닙니까. 제가 가끔 인용합니다만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기독교 신도인데 참다운 실존은 하나님 앞에서만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뒤집어서 불교식으로 생각해보면 깨달은 분상에서 보아야 참다운 실존을 체험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 외는 모두가 참다운 실존이 못되고요. 그래서 현상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키에르케고르 말에 의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나 너나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철인들은, 특히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본체를 불로 보았습니다.

곧 하나의 광명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 청화 큰스님께서 미국에 오신 뜻은? [5]


문 : 13세기 수피의 위대한 스승 위군아랍이라는 분도 우주의 본질을 광명으로 보았거든요.


큰스님 : 그렇습니다.

최근 라즈니쉬같은 분도 훌륭한 천재이기 때문에 모든 본질을 광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스스로 광명을 온전히 체험을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서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광명이 어떻게 해서 지, 수, 화, 풍, 사대(四大)로 나왔는가 하는 그런 것은 금타 화상께서 비로소 밝혔습니다. 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수화풍 사대라는 것이 내나야 현대말로 하면 각 원소나 원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것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하는 것을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저술로 자세히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를 극미라고 하는데 극미의 합성인 금진(金塵)이 좌편으로 돌면 인력(引力)인 자기(磁氣)가 발생해서 양성자가 되고, 순수에너지인 금진이 우편으로 선회하면 그것이 척력(斥力)이 되어서 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금진이 음양에 따라서 양성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또 그것들의 결합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를 밝힌 것은 금타 화상의 불세출의 공이라고 생각됩니다. 순수 에너지로부터 물질이 어떻게 나왔는가. 물질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까.

아인슈타인도 통일장의 원리를 알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모르고 죽었습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성자가 아닌 범부는 물질이 아닌 순수에너지를 체험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 자체를 중도실상의 생명으로 체험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녹여서 성자가 되어야만 중도실상의 생명을 체험할 것인데,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과학자는 되어도 성인은 아니니까 번뇌에 가리어서 통일장이 무엇인가 분명히 있기는 있다고 자기가 유추는 했어도 확실히 체험은 못하고 말았지요.

금타 스님께서 쓰신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보면 그런 대목이 있어요. 중생의 육안은 번뇌에 때 묻은 오염된 육안이기 때문에 우리가 금진의 세계를 알려고 할 때는 중생의 욕계번뇌를 없애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천안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욕계번뇌의 뿌리를 뽑으면 천안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부터도 천안통이 못나온다는 것은 아직은 욕계번뇌를 미처 뿌리까지는 못 뽑았다는 것이 되겠지요.


문 : 큰스님께서 겸손의 말씀이 아니신지요?


큰스님 : 아닙니다. 역시 저도 번뇌의 뿌리가 뽑히려면 천리만리지요. 평생 동안 노력해야지요.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발이 하늘로 뜬다는 말씀이 경론에 있습니다.


문 : 정말로 발이 하늘로 뜰까요?


큰스님 : 예. 전혀 무게를 못 느낀다는 것이지요.

사실로 무게가 있지도 않는 것인데 나라는 관념, 번뇌 때문에 상(相)을 내고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라, 관념이라는 것이 모든 걸 창조합니다. 남을 미워하면 우리 몸에서 '아드레날린'이란 독스러운 호르몬을 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흐뭇하면 '엔돌핀' 호르몬을 내고...


문 : 보통 표현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서 날을 것 같다는 표현도 있지요.


큰스님 : 그렇습니다.

순수하게 사랑하면 그만치 우리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부리면 그만치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세포가 오염이 됩니다. 모든 집착을 다 여의면 본래가 공인지라 무게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도인들은 세속인들이 교만심을 내면 공중에서 십팔신변(十八神變)이라, 열여덟 가지로 신통을 하지요.

요즘 사람들은 이런 말을 옛날 신화처럼 여겨요. 그러나 현대 물리학적으로 충분히 변증할 수가 있습니다. 원래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제로를 천만번 곱하고 더해도 제로는 제로이듯이 원래 무게가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대류권 내에서 번뇌에 가려 무게를 느끼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염불을 해도 광명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에 광명을 안 놓치고 명호를 외워야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되고 지관일치(止觀一致)가 됩니다.

성자의 말은 모두에 통달합니다. 지관일치라든가 정혜쌍수라는 의미를 화두만 열심히 의심하면 정혜쌍수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정혜쌍수가 못됩니다. 이치에 맞게 해야지요. 진리를 관조하는 지혜와 지속적인 선정이 함께 나아가야 정혜쌍수가 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옛날에 벽돌로 거울을 어떻게 만드냐는 고사가 있었지요. 그것이 바로 선수후오(先修後悟)를 비유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 사실은 그렇게도 볼 수가 있지요.

선오후수를 경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비유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뜻도 포함해서 얘기하지만 결국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일관되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말입니다. 길을 갈 때는 먼저 길목을 알아야 되겠지요. 실천에 앞서서 이론이 있어야지 이론 없이 실천만 있으면 맹종이 되는 것이고 빗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꼭 이론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석존께서 밝혀 놓으시고 무수한 성자가 탄탄대로를 닦아 놓으신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길목도 연구하지 않고서 동서를 헤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심법문이라는 것은 편안하게 되어 있는 길, 환한 길을 가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상대적인 의심을 해서는 마음만 피곤할 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꿈같다고 했으면 분명히 꿈같다고 보려하고 그림자를 그림자로 여겨서 집착을 뿌리치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뿐하고 공부가 잘 풀리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인정하고 공부하는 것과 이 몸뚱이 본래로 비었다고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문 : 큰스님, 그럼 무엇보다도 반야심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겠네요.


큰스님 : 예. 반야심경 공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대승이라고 하셨습니다. 반야가 있어야 불법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듯이 반야를 떠나는 것은 마치 물밖에 난 고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 용이 구름이 있어야 하늘로 올라가듯이 우리 수행자가 결국 반야를 얻지 못하면 소승이요 속물인 것입니다.

반야 없이 하는 일은 실다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선이나 기도나 화두나 다 그렇습니다. 일체만유가 연기법으로서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으로부터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니까, 잠시간 나온 것은 고유한 것이 없고 서로 상관적인 것이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유한 내가 없고 네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인 것입니다. 억지로 부처님께서 욕심내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본래 법 자체가 공이요, 무아요, 무소유라는 말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행해야 보살행이 되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바라밀이라는 것은 바로 보살행입니다. 계행을 지키든 보시를 하던 참선을 하던 기도를 모시든 반야바라밀의 조명이 있어야 비로소 참다운 창조적인 생명의 비약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 : 큰스님, 오늘 오랜 시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