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86
[보살계 1.]
방금 낭송한 「보리방편문」 역시 그냥 방편적인 그런 법문이 아닙니다. 「보리방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 무엇인가, 내 존재의 근본실상은 무엇인가, 또는 우주와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그러한 관계를 아주 간명직절하게 표현한 법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그렁저렁 형식적으로 믿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의 우리 불자님들은 집안에서나 절에서 정진하시다가 오늘 보살계를 받게 되셔서 무척 장한 일을 이루셨기에 축복하는 마음 한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즉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참사람이 무엇인가, 그런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도덕적인 가르침 또는 철학적인 모든 문제가 사실은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우리 인간의 참 마음을 밝히고자 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아전인수격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 내 마음의 본성, 또는 우주의 본래 참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 가르침같이 진리 그대로 우주의 사실 그대로를 말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공자님 가르침 또는 예수님 가르침, 노자의 가르침도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공자님은 춘추전국시대라는 몇 백년을 두고 싸움판이 되어 있는 전란속에서 우선 도덕적인 데다 역점을 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참다운 성품자리, 또는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어떻게 윤회하는가,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소홀히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유태 지방에서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유태교의 박해 밑에서 우리 인생 문제의 그런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낱낱이 말씀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만 삼 년 동안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다가 빨리 가신 분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비해서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그 모든 문제에 있어서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현대 물리학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제를 다 밝히고 있지는 않지 않습니까? 나라는 존재, 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대상적인 것은 어떠한 것인가, 또는 물질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현대 물리학도 그 정밀한 체계를 자랑하지마는 우리 눈에 보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로 모든 문제의 본질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는 어떤 것인가, 또는 이 현상적인 대자연계는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를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실은 우리가 금쪽같이 아끼는 우리 몸뚱이도 실존적인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욕심을 내어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고 하는 물질이란 대상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면 사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것은 사실은 여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같고 뜬구름같은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실히 밝힌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입니다. 우리가 그때그때 고민하고 또는 서로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것도 우리 중생에서 상식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로 있다고 생각한 데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고 자기 재산도 자기 지위도 대상적인 모든 그런 금이나 은이나 금강석이나 그런 것도 모두가 허망한 것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못 보고서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받으시는 보살계는 한번 받았으니까 다시 안 받는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때그때 자주자주 받으셔야 됩니다.
우리 중생이 지은 업장도 많고 따라서 그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우리가 두고두고 성불하기까지 지켜야 될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를 다시 확실히 하기 위해서도 보살계는 그때그때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네는 한 달에 두 번씩, 보름마다 대중과 함께 그때그때 서로 차서에 따라서 어느 선배가 계율을 읽어주면 다른 대중들은 참회하고 받아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두 번씩이나 그와 같이 보살계 계문을 읽어서 우리가 우리 마음을 성불의 길로 나가도록 이끌어야 됩니다.
재가불자님들은 철저하게 육재일을 지켜서, 육재일 날마다 여덟 가지 계를 지켜야 됩니다. 신라 때나 고려 때나 이조때도 불교를 믿는 분들은 팔관계(八關戒), 여덟 가지 계행을 지켰습니다. 계율이란 것은 우리 인간존재가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존재는 과거세의 업장따라서 금생에 태어났기 때문에 참다운 사람이 아직은 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이나 우리 실상은 본래로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도 지금 마음이야 어떻게 됐든지 간에 우리의 본래 마음은 불성입니다. 그 부처님의 성품은 내 인간성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불성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를 다른 이름으로 하며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계(佛性戒)라, 우리가 실제로 다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될 그런 계율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는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이 있고 불여의(不如意)한 불행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가 다 자업자득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도덕이 바로 계율인데 윤리도덕을 바로 지키질 않았습니다. 아내가 지키지 않았든가 남편이 지키지 않았든가 또는 우리 조상들이 지키지 않았든가…. 모두가 다 우리가 인간된 도리를 지키지 않았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우리 개인적인 성불을 위해서나 우리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나 또는 사회의 평안을 위해서나 어떤 면으로나 꼭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를 마음 심(心)자 땅 지(地)자, 심지계(心地戒)라, 우리의 참다운 마음 바탕은 바로 부처 아닙니까? 따라서 부처의 도리, 부처의 도리에 걸맞는 우리 인간의 윤리행위가 바로 불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성이라 하는 것은 그냥 이론적으로 저 만치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래 생명이 부처기 때문에 우리 생명 자체도 광명으로 충만해 있고 또는 천지우주도 바로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감득도 못하고 눈으로 보지도 못할 뿐인 것이지 그러한 생명의 빛은 우주에 언제나 어느 때나 조금도 간단(間斷)없이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우주의 생명입니다.
내 생명과 우주의 생명은 둘이 아닌 것이고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간에 늦고 빠른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꼭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나같은 사람은 능력도 부족하고 또는 내가 별로 마음도 그리 선량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가 안되어야 되겠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게으름부리고 게으름부리지 않고, 지키고 안지키고 그런 차이에 따라서 조금 더디 되고 빠를 뿐인 것이지 어느 누구나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됩니다.
성불의 길에는 여러 가지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 행위를 진여불성에, 우주의 도리에 맞게 계율을 먼저 지켜야 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고요히 가라앉지도 않고 또는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참다운 지혜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같이 범부심을 미처 못떠난 것은 우리가 참다운 지혜를 몰라서 그럽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 무명이란 것은 무지(無知)나 똑같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나는 무지하지 않다, 이렇게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주의 진리를 모르면 모두 다 무지 무명에 휩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 무지가 아닌 진리일 것인가?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수행을 많이 해야 되겠지마는 수행을 않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간단한 것은 외셔야 됩니다. 무명이 아닌 것은 천지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라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무엇을 많이 알고 복잡한 교리를 통달한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실존이다, 하나의 생명이다는 진리를 모르면 그때는 아직은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주 자체를 하나의 진리로 봐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혜가 짧아서 하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이래저래 이 것과 저 것과 나와 너를 항시 구분해서 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도 나와 너를 구분해서 볼 때는 우선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남하고의 화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나 또는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나 또는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나 꼭 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인데 진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생명자리를 여실히 아는 것은 성자인 것이고 마음이 짧아서 천차만별로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인 것입니다.
이른바 부처님의 청정안목(淸淨眼目)이라. 부처 불(佛)자 눈 안(眼)자, 불안(佛眼)인데 부처의 눈으로 봐야만이 바로 보이는 것이고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 설사 공부를 많이 하셨더라도 모든 문제를 하나의 진리로, 모든 존재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지 못하면 아직은 공부가 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하나의 자리, 하나의 진리에서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두가 다 우리가 안보인다 하더라도 하나의 진리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되고 그 다음은 그런 진리 밑에서 우리말을 바르게 하고 우리 행동을 바르게 하고 우리 생각을 바르게 해서 불교 말로 하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진리에 맞추어서 행하는 것이 계율의 참다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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