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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84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84

 

일체 존재는 하나에서 와서 다시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포함돼 있는 그 만능의 공덕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사바세계, 모든 그런 세계가 이루어지고 또 인연이 다하면 다시 모두가 다 진여불성자리에, 하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진여불성에서 와서 다시 진여불성으로 갑니다. 진여불성은 바로 생명이니까 인격이니까 그때는 부처님이지요. 부처님이나 진여불성이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바꾸어서 말하면 모두는 부처님한테 와서 도로 부처님으로 돌아가고 부처님의 참다운 성품이 바로 우리 마음이듯이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참선과 보통 공부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보통 공부는 교학적으로 단계 단계 올라가는 공부 아닙니까. 참선은 그냥 직통으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고 깨달아 증명하는 공부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만 있는 사람은 자기 마음은 부처고 못된 것 생각하고 못된 짓 하는 사람 마음은 부처가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못된 짓을 하나 좋은 일을 하나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은 부처입니다. 다만 그 사람 스스로 부처의 자리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서 가장 최상의 공덕이 무엇인가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도리를 아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지금 내가 별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숨어있는 공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나 공자나 노자나 그런 성자와 똑같이 한없는 그런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우리 인간에 있어서 최상의 공덕입니다.

 

나는 조금만 잘못해도 몸도 아프고 재수도 없고 그러는데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잘못 살아서 성자의 가르침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못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도 집안에 어려운 일이 많이 계시겠지요. 아들이나 딸도 말을 안 듣고 사업도 부진하고 내외간도 어떤 때는 화목하지 못하고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인간이 잘못 살아서 그와같이 모든 불여의하고 부정적인 사태가 벌어집니다.

 

정말로 석가모니같이 살고 예수님같이 살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불여의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란 늘 한계상황을 마주하고 삽니다. 생로병사라, 한 번 났으니까 당연히 그때는 죽어야 되고 더러는 늙어야 되고 아파야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또한 만나면 결국은 또 헤어지고 만단 말입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과의 차이를 간단명료하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행은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 행위라든가 도는 자연계의 모든 이른바 신진대사하는 그런 행위라든가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무상하단 말입니다. 무상이란 것은 이것은 시간적으로 그때그때 항상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정밀한 내용을 잘 모르니까 겉으로 봐서 어제와 오늘과 또는 내일과 모레의 내가 다르지 않지 않겠는가, 어릴 때의 나와 똑같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몇십억 되는 그런 세포도 역시 하루 동안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바뀌어집니다. 그런 사실을 현대물리학이 증명해 낸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어릴 때와 지금과는 몸 세포구조가 완전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때그때 변화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변화한 것을 잘 볼 수가 없으니까 항시 지금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가 다 있어야 된다는 기대 때문에 마음으로 괴로워합니다. 한 번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언젠가 죽어야 되겠지요. 몸뚱이란 것은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 것인데 그렇게 체념해버리면 좋은데 오래 살려고 또 발버둥치고 별의별 약을 찾아먹으며 불로장생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자기 부모님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한테 효순하는 것은 좋은데 그런 비싼 보약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 몸뚱이란 것은 하나의 몸뚱이만의 기관이 아닙니다. 몸뚱이만의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반영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란 것은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적인 모든 폐해나 모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유물주의라, 모든 존재는 물질뿐이다, 물질이 주인이다, 이런 데서 온단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가는 그 무상한 존재인 것인데 우리 중생이 무상한 존재를 항상 있는 것이라고 고집한 데서 우리의 여러 가지 고민이 생기고 이른바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 역시 모두가 다 물질이 사실로 있다고 보는 거기에서 옵니다. 노인들이 보약을 많이 자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 생각을 하면 틀림없이 그때는 우리 마음이 우리 몸에 영향을 줍니다.

 

기독교 바이블의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그대들이 겨자씨 한 알만큼의 신심이라도 있으면 지금 저기 있는 뽕나무 한테 뿌리채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이러면 틀림없이 심어집니다.”

 

우리 마음의 힘이란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의 힘을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 것이지 마음의 힘은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삼명육통이라, 별 신통도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자기 몸을 우주에 가득 채울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자기 몸을 천개 만개 화신으로 나툴 수도 있습니다. 또는 공중에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고 하여튼 그 못할 것이 없이 다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어떻게 내 몸이 공중으로 날아갈 것인가.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서 조사스님들, 부처님 법을 받으신 위대한 조사들은 대체로 보면 열반에 드실 때에(물론 그때도 중생의 교화를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랬습니다마는) 공중으로 솟아 올라갑니다. 공중으로 솟아 올라가서 십팔변(十八變)이라, 그 부사의한 십팔신변을 해요.

 

그다음에 돌아가실 시간이 되면 그때는 자기 가슴에서 불을 냅니다. 자기 가슴에서 불을 내는 삼매를 화광삼매라, 불 화()자 빛 광(), 화광삼매(火光三昧)라고 그래요. 자기 가슴에서 불을 내서 자기 몸을 태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금관에 넣어서 역사들이 기름을 붓고 해서 관을 태우려고 했지만 관이 도저히 불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관 안에서 화광삼매에 들어서 스스로 가슴에서 불을 내서 관을 태웠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힘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이란 고려 때 청공화상이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받으신 선사님이 석옥청공화상이지요. 석옥청공화상도 돌아가실 때 한탄을 했어요. , 내가 화광삼매에 들어가서 불을 내서 내 스스로 몸뚱이를 태웠으면 되는 것을 그 하찮은 몸뚱이를 태우려고 그냥 나뭇더미가 있고 또 무엇이고 있고, 금방 결국은 참 나뭇더미 위에서 내 몸뚱이를 태워버리면 아무 것도 없어질 것인데그래서 석옥화상이 한탄하는 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대문이 있어요.

 

고아야무삼매화(顧我也無三昧火), 내가 나를 돌아보니 삼매의 불이 없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금 죽어지면 틀림없이 그런 한탄을 할수 밖에는 없습니다. 깊은 삼매의 공부를 많이 했으면 틀림없이 하여튼 조사스님들 모양으로 스스로 가슴에 불을 내 화광삼매에 들어서 몸을 태울 것인데 아 참선한다고 조금 했지만 그렇게 깊은 삼매에 못드니까 자기 몸을 태울 만한 불이 안나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불교라는 것은 거짓된 나(假我), 망령된 나(妄我)를 떠나서 참다운 나(眞我), 큰 나(大我)를 찾는 공부 길입니다. 내가 우주요 우주가 나라는 조금도 한계를 갖지 않는 이른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런 자기 생명자체가 바로 대아진아입니다. 그러면 대아진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철저한 계율이 필요합니다. 더러는 우리가 깨달음이란 것은 재주가 있고 그때그때 그냥 훌륭한 스승을 만나 돈오를 하면 될 것 아닌가하는 식으로 속단을 합니다. 물론 이치는 불교 말로 하면 해오(解悟), 해석할 해()자 깨달을 오(), 이치로 해서는 단박에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이즉돈오(理卽頓悟), 이치는 알 수가 있지만 우리 스스로 과거 전생부터 지어 내려온 습관성, 우리 지금 의식 가운데는 과거 전생이나 금생에나 여러 가지 나쁜 습관성이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습기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은 단박에 녹아질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선방 들어가서 그때그때 공부도 하시고 명상도 하시고 그렇게 하시는 것도 그냥 모두가 단박에 되어버리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치로는 그럴 것 같지만 사실은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그런 무량공덕이 우리한테는 지금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치만 알 뿐이지, 어째서 없는가 하면 그 습기, 습관성이 안녹아 있단 말입니다. 습관성은 그때그때 화두도 참구하고 엽불도 하고 명상도 하고 또는 경도 보고 또는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이런 선근 공덕이 쌓여져야 그래야 차근차근 습기가 녹아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공부를 애쓰고 하는 것은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꼭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됩니다. 계행을 지켜야 깊은 삼매에 들어갑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갑니다. 먹을 것 다 먹고 세속에서 하는 그런 향락스런 짓을 다 하고서 명상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들 말씀도 인계생정(因戒生定)이라, 계율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선정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선정에 들어가야 우리 습관성이 녹아납니다. 그 사람의 근기라든가 여러 가지 상황 따라서 선정도 오래오래 들어 있어야 녹아나는 분도 있고 또는 선정을 별로 얼마 안해도 업장이 습기가 녹아나는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불교 말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생사를 초월한 그런 영원적인, 진여불성을 온전히 우리가 증득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