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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39)

 

 

4. 제경론諸經論의 염불법문念佛法門(3)

 

自性彌陀何處在자성미타하처재 時時念念不須忘시시염념불수망

一朝忽得情塵落일조홀득정진락 倒用橫拈常不離도용횡념상불리

 

- 懶翁大師나옹대사 -

 

나옹懶翁慧勤 스님 어록에 자성미타하처재요, 우리 자성의 미타가 어느 곳에 있는고? 시시염념불수망이니, 시시때때로 잊지 말고서 간절히 생각할지니, 일조홀득정진락이면, 하루아침에 문득 번뇌 망상이 다 떨어지면, 도용횡념상불리 거꾸로 서나 또는 누워 잡으나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번뇌 망상이 미처 안 떨어질 때는 그냥 애쓰고 화두를 들려하고 염불하려 하겠지만 한 번 망념만 떨어져버리면 거꾸로 서나 옆으로 누웠으나 언제 어느 경우에나 조금도 자성경계 본래면목자리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옹화상 염불 게송 가운데 끝에 있는 구절입니다.

 

阿彌陀佛淨妙法身아미타불정묘법신 遍在一切衆生心地편재일체중생심지 故云心佛衆生고운심불중생 是三無差別시삼무차별 亦云心卽佛역운심즉불 佛卽心불즉심 心外無佛심외무불 佛外無心불외무심 如是眞實念佛여시진실염불 十二時中四威儀內십이시중사위의내 以阿彌陀佛名字이아미타불명자 帖在心頭眼前첩재심두안전 心眼佛名심안불명 打成一片타성일편 心心相續심심상속 念念不昧염념불매 久久成功則구구성공즉 忽爾之間홀이지간 心念斷絶심념단절 阿彌陀眞體아미타진체 卓爾現前탁이현전 方信舊來不動名爲佛방신구래부동명위불

 

- 太古大師태고대사 -

 

그다음은 태고 보우太古普愚 선사 게송입니다.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법신이 두루 일체중생의 마음자리에 본래 갖추어 있기 때문에 심불중생心佛衆生이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이나 세 가지가 차별이 본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바로 마음이라.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도다. 이와 같이 진실한 염불을 할 때는 밤낮으로 행주좌와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심두心頭에나 안전眼前에 붙여 두어라.’

 

맨 처음에는 관상적으로나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기가 쉽지 않은 셈 아닙니까? 역시 이름을 부르면 부르기가 쉽고 또 우리가 가장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이름이니까 계속 불러도 별로 싫증이 안 나겠지요. 아미타불 명호를 우리 마음에나 눈앞에 여의지 않고 딱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안불명心眼佛名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고 눈으로 실지로 광명 무량한 세계를 보려고 계속 공부해 나갈 때 마음이나 눈이나 부처의 명호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따로따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공부가 익어지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고 합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지 우리 마음이 타성일편이 되어서 나와 우주가 하나로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그 자리를 애써 놓지 않고 상속적으로 생각 생각에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게 오래오래 공을 이루면 문득 찰나 동안에 우리 범부심이 끊어진다. 그래서 아미타불 진체眞體인 우주에 변만한 진여불성이 활연히 앞에 나투나니 이것이 바로 불생불멸한 생명의 실상인 부처임을 믿을지니라이런 뜻입니다.

 

眞如念佛진여염불 念佛功極염불공극 日日時時일일시시 於一切處어일체처 阿彌陀佛아미타불 淨妙眞體정묘진체 冥現其前명현기전 臨命終時임명종시 迎接九品蓮臺영접구품연대 上品往生상품왕생

念佛要門염불요문普照著보조저

 

또 보조普照知納 국사의 염불요문念佛要門에는 진여염불眞如念佛이라, 진여염불은 앞에서도 든 바와 같이 대상적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바로 미타이고 우주가 바로 부처라는 염불이 진여염불입니다. ‘진여염불의 공이 사무치면 나날이 때때로 어디에나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진체眞體가 불현듯 그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임종할 때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성중聖衆들이 마중하여 구품연대九品蓮臺의 상품상생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하였습니다.

 

극락세계는 깨달은 경계에서 본다면 한 점 티끌도 없고 오염이 없고 만 공덕을 갖춘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 아니겠습니까? 바로 보면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寂光土, 이 세계가 이대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려서 미처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若念佛者약염불자 當知此人是人中당지차인시인중 分陀利華분다리화

觀音勢至관음세지 爲其勝友위기승우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

 

만약 부처를 생각하는 자는 즉,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자는 마땅히 알지니 이런 사람은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분다리화分陀利華(Pundarika), 따라서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그를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다.’

 

관음 대세지도 인간적인 때 묻은 안목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습이 필요하면 언제나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청정하고 정말로 순수할 때는 수시수처隨時隨處에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에 갖추어 있는 본래 자비의 정기精氣, 그 생명 성령聖靈이 관음이요 지혜의 정기 곧 그 생명 성령이 문수요, 또는 대세지 입니다. 염불은 지혜와 자비를 온전히 다 갖추어 있는 부처, 곧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니까 마땅히 관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비록 염불행자가 범부라 하더라도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 것입니다. 관음은 자비를 의미하고 대세지는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일체 보살을 다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염불행자는 일체 천만 보살이 그를 좋은 벗으로 생각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諸佛如來제불여래 是法界身시법계신 遍入一切편입일체 衆生心想中생심상중 是故시고 汝等여등 心想佛時심상불시 是心卽是시심즉시 三十二相八十隨形好삼십이상팔십수형호 是心作佛시심작불 是心是佛시심시불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

 

제불여래는 바로 법계法界가 몸입니다. 법계란 삼천대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불여래는 바로 법계가 몸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두루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사람만이 중생이 아니라, 유정 무정 모두가 다 중생입니다. 사바세계의 두두물물이 다 중생이니까 또는 그런 중생으로 모든 법계가 구성되었으므로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원래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 속에 들어 계신다는 의미는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입니다.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불성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중생한테 들어 계신다는 것은 바로 온전히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개한테 불성이 있다고 할 때도 개의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머리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온전히 전체가 바로 부처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삼십이상 팔십종호라, 이것도 꼭 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의미로 생각하면 무량공덕을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을 한 번 생각하면 바로 그 생각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공덕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달마(達磨 Bodhidharma ?528) 스님께서 중국 광주에 오실 때에 이미 150(또는 130)이 되어서 오셨다고 기록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던히 오랫동안 사셨겠지요. 그리고 9년 면벽 했으니까 몇 년이겠습니까? 지금이나 옛날이나 범부들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도 하고 또 자기 아는 것보다도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굉장히 거부반응을 느낍니다. 그때에도 달마 스님께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문자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겠지마는 문자의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오직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음만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실 마음만 깨달으면 거기에 모두가 다 들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스님들이 아주 시기심을 많이 냈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논장論藏들을 보면 그 당시 가장 훌륭하다는 광통율사光統律師 또는 인도에서 들어오신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aci 508中國에 옴) 그분들이 법집法執하여 시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이야 그랬으리오마는 그 밑에 있는 분들이 독살을 하려고 여섯 번이나 했습니다. 얼마나 박해가 많았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 어른께서 중국에 들어오신 딴 뜻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직 자기 생명을 모조리 바친다 하더라도 중생제도 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분인데, 그런 분을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까지도 독이 안 받는 것입니다. 벌써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통달한 분들은 인연이 다 됐으니까 내가 가야겠다.’해서 가는 것이지 독살하려고 해서 갈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섯 번째까지는 독을 먹고 바위 위에다 대변을 누면 어떻게 독하든지 바위가 다 빠개져 버립니다. 이렇게 독을 다 안 받았지만 여섯 번째는 중국에 와서 내가 할 일은 다 하고 이제 인연이 다 됐다하시고는 독을 그대로 받고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웅이산熊耳山에다 입관을 해서 묻었습니다.

 

그 뒤에 위나라의 송운松雲이란 사람이 사신으로 인도까지 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총령蔥嶺, 지금의 파미르고원을 넘어오는데 그때 수염이 털털하고 늙수그레한 한 스님이 주장자를 어깨에다 척 걸쳤는데 집세기 한 짝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없고 반갑기도 해서 수인사를 하고 물으니까 달마라고 합니다. 송운이 위나라로 돌아와서 말을 들어 보니까 달마 스님이 이미 돌아가셔서 관속에 넣어 매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사신이라는 위신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해서 달마 스님 묘소를 파 내놓고 보니까 관속에 시체는 어디로 간 곳이 없고 집세기 한 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달마 스님은 부활하여서 갔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또 달마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도 원래는 죽음이 없는 것이니까 사실은 다 부활입니다. 그네들이 저승세계를 잘 모르니까 예수의 부활설만 말씀을 했겠지요.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정각淨覺 스님이 저술한 책입니다. 5조 스님의 제자 가운데 십대 제자가 있었는데 혜능慧能대사, 신수神秀대사, 현색玄賾대사, 지선智詵대사 등 십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현색 대사의 제자가 정각 스님입니다. 정각 스님이 저술한 능가사자기가 전에는 미처 발견 안 되었다가 돈황敦煌에서 발굴된 것은 1907 년경입니다. 돈황에서 발굴되어 나온 문서 가운데는 과거에 재래적으로 불교에서 모르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가사, 육조 혜능 스님하고 신수 대사가 마치 경쟁하는 것같이 단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고 그렇게 전수가 되어온 것인데 돈황에서 나온 여러 가지 문서를 본다면 신수 스님도 위대한 도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응당 도인이 되겠지요. 5조 홍인弘忍대사 칠백七百 제자의 상수上首 제자인데 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종전에는 신수는 점수漸修나 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육조 혜능 스님만 돈오돈수니까 위대하다고 칭송해 왔습니다만 돈황문서가 발굴된 다음에는 모두가 공평스럽게 바로잡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4조 도신道信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도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런 문헌이 없었는데 돈황에서 발굴한 능가사자기 가운데 이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 뒤에야 지극히 귀중하다고 훤전喧傳해서 여러 가지로 참고하고 주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4조 도신대사의 법문 말씀입니다.

 

念佛卽是念心염불즉시염심 求心卽是求佛구심즉시구불 所以者何소이자하 識無形식무형 佛無相貌불무상모 若也知此道理약야지차도리 卽是安心즉시안심 常憶念佛상억염불 攀緣不起則반연불기즉 泯然無相민연무상 平等不二평등불이 入此位中입차입중 憶佛心謝억불심사 更不須徵갱불수징 卽看此等즉간차등 卽是如來즉시여래 眞實法性身진실법성신 亦名正法역명정법 亦名佛性역명불성 亦名諸法實相역명제법실상 實際실제 亦名淨土역명정토 亦名菩提역명보리 金剛三昧금강삼매 本覺等본각등 亦名槃界역명반계 般若等반야등 名雖無量명수무량 皆同一體也개동일체야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道信章도신장

 

염불이란 바로 자기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식이란 형체가 없고 부처란 무슨 모양이나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안다면 바로 안심이라

부처나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다고 할 때는 마음이 걸리겠지마는 마음이란 원래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리를 안다고 할 때는 마음이 편안스럽다는 말입니다.

 

가사, 나한테 죄가 많이 있다고 생각할 때도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겠지요. 승찬(僧璨 ?606) 스님이 2조 혜가 스님한테 올 때 풍병에 찌들어서 저한테는 죄가 많아 이렇습니다.’하고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니까 혜가 대사가 죄가 그대 마음의 어디에 있는가?’ 하였습니다. 마음이 원래 없거니 무슨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죄를 어디서 끌어낼 터무니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원래 없고 죄상도 본래 없으나 자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단계에서는 죄를 범해 놓으면 인과를 받습니다. 가사, 우리가 금생에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고 또는 다른 동물을 함부로 하면서, 범부분상에서 이치로만 이란 본래 없지가 않는가?’ 하는 정도로는 과보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자성불自性佛을 본 다음에야 죄상의 상을 여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마음도 원래 자취가 없고 마음이나 부처나 원래 형상이 없다는 도리를 알 때는 벌써 이것이 바로 안심이라는 말입니다.

 

달마 때부터 6조까지 주로 안심법문安心法門으로 모두가 다 마음을 안심케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도 먼저 안심이 되어야 하고 재가 불자님들한테 법문을 할 때도 안심을 시켜야 합니다. 안심을 시켜놓고서 철저히 도덕적인 계율을 지키라고 해야지, 안심도 없이 억지로 지키라고 하면 재미도 없고 또 구속감을 느낍니다.

 

또 다시 도신대사 말씀에 항시 부처를 깊이 사무치게 생각하고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상이 소멸되어 상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 들어간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모든 상을 다 버리게 되는데 새삼스럽게 애쓰고 구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진실한 법성신法性身이요 또한 정법正法이고, 불성佛性, 제법실상諸法實相, 실제實際, 보리菩提, 금강삼매金剛三昧, 본각本覺, 열반계涅槃界, 또는 반야般若라고 한다. 이름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모두가 다 하나의 몸이니라.” 하였습니다.

 

4조 도신 대사 말씀은 권위 있는 말씀인 것이고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에 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我此法要아차법요 依楞伽經의능가경 諸佛心제불심 第一제일 又依우의 文殊說般若經문수설반야경 一行三昧일행삼매 念佛心是佛염불심시불 妄心是凡夫망심시범부 若善男子약선남자 善女人선여인 欲入一行三昧욕입일행삼매 當先聞般若波羅蜜당선문반야바라밀 如說修學여설수학 然後연후 能入一行三昧능입일행삼매 不退不壞불퇴불괴 無碍無相무애무상 善男子선남자 善女人선여인 欲入一行三昧욕입일행삼매 應處空閑응처공한 捨諸亂意사제란의 不取貌불취모 繫心一佛계심일불 專稱名號전칭명호 隨佛方所수불방소 端身正向단신정향 能於一佛능어일불 念念相續염념상속 卽是念中즉시염중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능견과거미래현재제불 何以故하이고 念一佛功德염일불공덕 無量無邊무량무변 亦與無量諸佛功德역여무량제불공덕 無二不思議무이부사의

 

入道安心要方便法門입도안심요방편법문[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

- 道信도신 付法藏부법장 四祖사조 -

 

나의 이러한 법요는 능가경에 제불심諸佛心 제일第一에 의지하고 또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했다.” 저는 육조단경부촉품에 있는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지니라.’ 는 경구를 보고 또 4조가 말씀한 입도안심요방편 법문을 볼 때에 다 비슷한 법문이라서 역시 위대한 분들은 생각이 비슷한 것이 당연한 일이구나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습니다.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이요.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원래 부처인지라 부처를 염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반대로 상을 내는 망념일 때는 범부라는 말입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들어야 한다.”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만 반야가 있으면 불자이고 반야가 없으면 불자가 못 됩니다. 반야가 없으면 결국은 속물입니다. 반야가 있어야 참선이 되는 것이고 반야가 없으면 참선이 못 됩니다. 반야는 무엇인가?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또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지혜입니다.

 

그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배운 연후에야 능히 일행삼매에 들 수가 있다. 그래야 후퇴도 물러남도 없고 또는 파괴함도 없고 거리낌도 없고 또는 상이 없다. 선남자 선여인들이 일행삼매를 정작 공부하려고 할 때는 잡요한 시끄러운 인연이 없는 한가한 곳에서 모든 산란스러운 생각을 다 버리고 상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 매어 두어야 한다.”

 

부처의 경계는 무슨 경계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이 부처의 경계를 잡기가 좀 곤란스럽습니다. 부처란 것은 본래면목 자리가 아닌가이렇게는 알지만 우리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다 맨다고 할 때에는 어떻게 맬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부처란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일체 존재의 생명인 동시에 상이 아니지만 인연이 닿으면 또 현상계에 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즉 유도 아니고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감견感見을 했으면 좋은데, 미처 감득感得을 못한 사람들은 부처에다 마음을 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비어 있는 무량무변한 자리에 무량공덕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이리하여 전칭명호專稱名號.’ 우리가 초심일 때는 역시 뭐라 해도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이름을 자꾸만 외우고 하나만 생각해야 마음이 모아집니다.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은 사람들은 외울 것도 없지만 처음에는 하나로만 외워야 마음이 계속되어 통일이 잘 되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는 잡수雜修, 잡스럽게 할 때에는 마음이 통일이 안 됩니다. 한 부처한테 마음을 내고 오로지 명호를 외우고 또 기왕이면 부처의 상호를 상상하면 좋겠지요. 상호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을 갖춘 상호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러를 때마다 그만치 흐트러진 마음이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신 방소方所에 따라서 단정히 바로 향해서 앉고 한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 생각에 생각이 끊어지지 않을 때에는 즉시 그 생각 가운데 능히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제불을 다 본다. 한 부처의 무량무변한 공덕을 생각하면 바로 무량한 부처님 공덕을 다 감견感見하여 제불공덕과 둘이 아닌 부사의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도신 선사 입도안심요방편법문에 있는 염불찬탄의 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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