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禪의 정의定義
禪선(Dhyãna, 持訶那지가나, 禪那선나)
思惟修사유수, 寂慮적려, 棄惡기악, 功德叢林공덕총림, 現法樂住현법락주 또는 三摩地삼마지(Samadhi삼매)라고도 하며, 모두 心一境性심일경성의 이름이다. 또한 禪宗선종의 禪선은 其名기명은 同一동일하나 其기 體체는 涅槃妙心열반묘심이다. 三明六通삼명육통 등 諸功德제공덕이 禪定선정에 依의하여 發得발득되므로 禪定선정은 最學道최학도요 安樂法門안락법문이며 功德叢林공덕총림이라 한다.
선禪은 무엇인가? 우선 뜻을 알아야 보다 더 확신이 서지 않겠습니까? 선禪은 선나禪那(Dhyana)나 같습니다. 풀이하면 사유수思惟修라 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보통 생각이 아니라 정사유正思惟 곧 바른 생각입니다. 바른 생각이란 반야般若의 도리, 제법공諸法空 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또는 다만 공空이 아닌 중도中道의 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가 이른바 정사유요, 정사유 하면서 닦는 공부가 선이란 뜻입니다.
그다음에는 적려寂慮라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하고 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사本分事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는 기악棄惡의 뜻이 있습니다. 상대유한적인 악만 아니라,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엇이 좋다 궂다 하는 분별망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합니다. 달마 스님과 양무제梁武帝가 거량할 때에 양무제는 “절도 많이 짓고 다리도 많이 놓고 많은 스님네 한테 보시도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하니까 달마 스님이 일언지하에 무공덕無功德이라 했습니다. 달마 스님은 선禪의 조사祖師이기 때문에 상대 유한적인 공덕을 말씀하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상대적인 공덕은 또 분명히 있으나 영원적인 진여법성에서 볼 때는 때 묻은 공덕인 것이지 무루공덕無漏功德은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공덕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총림같이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공덕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루지혜를 얻는 것이거니 무한공덕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해 하실까봐서 부언합니다마는 우리가 설사 무주상無住相이 못 된다 하더라도 밥 한 끼 베푸는 것도 꼭 공덕이 됩니다. 저희들은 공부할 때 느낍니다마는 유위공덕有爲功德의 복덕도 많이 지은 사람들은 공부할 때 장애가 적습니다.
그러나 공을 못 세우고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자기 공부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연도 잘못 만나고, 병마가 엄습하고 장애가 많습니다. 따라서 유위공덕도 조도助道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참선수행자들은 마땅히 복잡한 정情에 얽힌 것은 단연코 끊어버려야 하겠지요.
다음에 선정禪定을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 합니다. 이 현법락주라는 것도 우리가 크게 관심을 둘 문제입니다. ‘참선하면 아무런 재미도 없겠지’ 합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처음에 재미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음식도 있으나마나 별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상相이 점차로 가시게 됩니다. 이 상에 얽히고 저 상에 얽히면 굉장히 괴롭고 구속되는 옹색한 구속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인데 우선 나라는 생각이 차근차근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가다가 죽어도 무방하고, 언제 죽어도 무방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삼매三昧가 발득發得되어서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할 때는 부처님께서 초기경전에서 말씀하신 신통부사의한 공덕인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못하니까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보여드릴 수는 없으나 확신은 분명히 합니다. 다만 게을러서 깊은 삼매에까지 못 들어가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꼭 된다는 확신은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은 헛된 말씀은 한 말씀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처님이 말씀한 신통자재神通自在같은 것은 비유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꼭 사실로 되는 것입니다. 가사, 천안통天眼通을 하면 정말로 안목이 밝아서 우주를 다 보는 것입니다. 천이통天耳通을 하면 순수 청정무구한 청정법신에서 오는 본래의 청각聽覺이라는 것은 천지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 것입니다. 영어를 안 배워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가사, 천도재薦度齋를 모실 때에 굉장히 어려운 한문 아닙니까? 천도법문의 대부분이 『화엄경』, 『법화경』, 어록 등 중요한 데서 따온 법문이기에 한자도 어렵지만 뜻이 어렵습니다. 그런 어려운 것을 얼핏 생각하는 천박한 마음으로서는 한문을 전혀 안 배운 영가靈駕들이 어떻게 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지금 컴퓨터를 보십시오. 입력入力만 시켜놓으면 기기묘묘한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 마음 곧, 불심佛心이란 것은 무한의 가능 곧 모두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힘이 갖추어 있습니다. 마음의 능력은 이른바 컴퓨터로 비유한다면 무한공덕이 본래로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인 것입니다. 일체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중요하고 인간성이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좀 배우면 알고 안 배우면 모르는 정도 같으면 우리 인간성의 존엄이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 우리 불교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참선할 때 분별 시비를 항시 못 끊어 버립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비로소 끊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이 딱 되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마음이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매를 성취해야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의 삼명통三明通을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 있습니다. 밝은 것을 능히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보는 천안통이요 또는 숙명통이라, 무시이래의 과거를 다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최면술만 좀 잘해도 몇 생을 거슬러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무량무변의 불지佛智를 통한다고 할 적에는 정말로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모든 번뇌 습기煩惱習氣를 다 떼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기를 못 떼었을 때는 아직 공덕이 못 나옵니다. 이른바 현법락주現法樂住라든가 하는 공덕이 못 나오는 것입니다. 습기를 떼어버려야 비로소 우리 심리와 생리가 정화되어서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경에, 우리 마음에서 욕심의 뿌리만 뽑아버리면 우리 발이 하늘로 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을 비행하다가도 순간만 욕심을 내면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 다 소멸되어 땅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심공덕佛心功德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여불공덕與佛功德이 분호불수分毫不殊라, 부처의 과불공덕果佛功德 즉, 불과를 성취한 공덕이 나와 더불어서 눈곱만큼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참다운 신信입니다. ‘부처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부처 공덕은 부처의 것이지 나한테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신信이 못되는 것입니다.
삼매三昧는 삼마지三摩地 Samadhi와 같은 의미입니다. 앞에 든 것이 모두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우리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러서 즉 본체에 머물러서 분별망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또한 선종禪宗의 선은 그 이름은 동일하나 그 체體는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입니다. 열반묘심은 바로 불심佛心을 말합니다.
선종禪宗이 이루어질 때는 화엄종이나 법화종 등 다른 종파와 대립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화엄이나 법화 등 모든 경론이나 종파를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선하는 분들은 다른 종파와 대립하거나 교敎와 대립한 것도 아닌 것이고, 팔만사천법문 모두를 포괄하고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기 때문에 조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상을 내지 말고 설사, 경을 안 배웠다 하더라도 불심佛心가운데는 모두가 다 함장含藏되어 있으니 ‘우주의 진리 모두를 다 갖춘 공부를 한다.’하는 자부심으로 우리 선객禪客들은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합니다.
또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제 공덕이 선정에 의하여 발득發得되므로 최학도最學道라 곧, 배우는 길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길이란 말이요, 또는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합니다. 참선이란 것은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스러운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았으니까 어렵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처음에 습인習忍이 발득될 때까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쁜 버릇만 떨어지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앉는 것도 그냥 함부로 앉고 자는 것도 함부로 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선수행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자세 가운데서 가부좌같이 좋은 자세가 없습니다. 가사, 이틀이나 사흘이나 누워 있으라고 하면 마음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고 오히려 괴롭습니다만 가부좌가 행습이 되어서 앉아 있으면 며칠도 무방합니다. 왜냐 하면, 가부좌한 정삼각형 모습이 기하학幾何學적인 의미에서도 가장 안정된 모습인 것입니다. 둥그런 것은 아예 안정이 될 수도 없겠고 네모꼴보다도 정삼각형은 아래가 무겁고 넓고 위가 좁아서 제일 안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삼각형을 미타彌陀의 지인智印이라 합니다. 아미타는 제불의 본사本師요 제불의 왕인데, 미타의 묘관찰지妙觀察智의 상징이 정삼각형입니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의 상징적인 표치가 정삼각입니다. 이 모습이 가부좌하고 똑같습니다. 따라서 가부좌할 때는 가장 몸이 안정되고 지혜가 제일 발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공덕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은 모두가 다 경론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가부좌 모양을 취하면 참선하고 있다고 하지만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오직 마음이 본분사, 본체를 안 여의어야 참선입니다. 우리는 선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달마 스님의 어록을 보나, 육조단경을 보나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상을 여의고서 본래면목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하나의 테크닉이나 형식적인 모양으로는 참선 같은 모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진정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참구 하더라도 제일의제第一義諦, 상相을 떠나고 유무공有無空을 떠나버린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체에다 마음을 안주시켜야 참된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냥 의심만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리하게 억지로 의심한다 해가지고서 몸도 안 좋고 그러겠지요.
묵조선黙照禪, 묵조한다 하더라도 제일의제가 전제가 되고, 제일의제를 관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혼침만 와서 꾸벅꾸벅합니다. 우리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반야가 있어야지, 반야 없이 덮어놓고 앉아 있다고 할 때는 혼침만 많이 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마장이 혼침惛沈과 도거掉擧, 혼침과 분별 시비입니다. 어떻게 이 혼침을 이길 것인가? 어떻게 이 분별 시비를 이길 것인가? 그것을 못 이기면 결국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인 삼매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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