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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4)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가언록 한글판 서문(3)

 

염불 수행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합시다. - 청화큰스님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 믿음이라는 것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바른 믿음이 있어야, 우리 공부도 빠르고 성불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믿음은 뭘 믿는 것인가? 밖에 있는 부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부처인 것을 믿어야 참다운 바른 믿음(正信)이 됩니다.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본래로 내 마음이다.’ 라고 믿을 때는, 우리가 설사 무슨 좌절을 당해서 비관에 처해 있고, 나 같은 하찮은 목숨 차라리 끊어버려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라도 자기 목숨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수로 끊습니까? 가장 소중한 능력이 무한히 자기 마음에 원래 갖추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은 무한한 가능성인지라, 우리 믿음과 생각에 따라서는 아까 선세 동자와 같이 일곱 살 먹어서도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도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선지피를 흘리면서 목숨이 으스러진다고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몸에 의지한 우리 마음은 그 때 잠시 고통받는 것뿐이지, 몸뚱이가 으스러지자마자 바로 더 나은 삶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바로 살았으면, 교통사고를 당해서 몸뚱이가 으스러진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 몸뚱이가 생명 활동을 그치자마자 더 좋은 쪽으로 천상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그러기에 소중하고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방법도 부처님 법문에 의지하면,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 2의 석가라는 용수보살이 그런 문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어려운 문은 우리가 경을 배우고 선방에 들어가서 참선을 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받들어 가지고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그러나 쉬운 문은, 경을 외우지 말라 또는 참선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도 소중하나 그러한 어려운 작업을 안 하더라도 가는 문입니다. 팔만장경을 누가 다 볼 수가 있습니까? 또 좌선해서 삼매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오십년 이상 참선을 했지만, 아직도 공부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쉬운 문(易行門)은 별로 어렵지가 않으니, ‘자기 마음이나 모든 우주의 존재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요, 하나의 부처다.’ 그렇게 믿고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공부하기 쉬운 염불입니다. 이것이 쉬운 문인데, 2의 석가 용수보살이 그 체계를 세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다 염불을 제대로 하시고 계시겠지요? 그것이 제일 쉽습니다.

 

내가 부처고 또는 우주 본래의 자리,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이거늘, 부처의 이름을 외우는 것같이 더 쉽고 절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마음에다 우주의 훤히 열린 그런 불을 밝히시길 바랍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우주를 다 비추고 있습니다. 자기가 미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김씨라는 마음도 우주를 비추고 있고, 박씨라는 마음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분의 마음도 모두가 다 끝도 갓()도 없이 조금도 거리낌이나 장애를 받지 않고(無障無礙) 우주를 비춥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성자, 무위진인이 보면 우주는 이 사람 저 사람, 이것 저것의 광명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우주 자체가 바로 무량의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원통하게도 우리 중생들이 무명에 가려서, 우주가 다 하나의 부처이고 하나의 광명이라는 진리를 모르는데, 그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대승경전도 구절마다 모두가 하나의 법문이라 이른바 일원론(一元論)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대상을 보면, 내가 있으면 네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상대로만 보지요. 이런 이원론이나 삼원론이 아니라, 우주는 본래로 일원론이라, 하나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부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우리가 뭐라 이름을 불러야 되겠는데, 가장 절실한 이름이 이른바 관세음보살이나 나무 아미타불, 지장보살, 약사여래 모두가 다 그런 부처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이름 하나만 지었으면 공부하기가 참 쉬울 것인데, 그렇게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령대로 우리 공부에 손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다 맞고 소중하니까, 이것 저것 다 불러야 공부가 더 많지 않겠는가? 이런 것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고 혼란스럽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 좋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생각하니까, 참 하나로 간단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주 모두를 포함하다 보니까,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총 대명사는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지금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 다 그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만, 그래도 기왕이면 총 대명사를 부르는 쪽으로 우리 마음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 것인데, 너무 이름을 많이 불러 놓으면 관념도 헷갈립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생각하시도록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벌써 보살 지위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 자리이고, 보살 지위가 아니더라도 본래로 하나의 생명 자리입니다. 그 보살들 이름은 모두 뿔뿔이 몸뚱이가 따로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나의 덕명(德名), 공덕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도 조금 똑똑하고 자리가 높으면 호가 여러 가지 있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무슨 회장, 무슨 회장 그런 이름이 많이 붙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똑같이 부처님 자리도 만덕을 갖춘 자리라, 그냥 몇 가지 개념으로는 그 덕을 다 표현을 못해요.

 

그래서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 원행 쪽으로는 보현보살, 그렇게 붙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별명은 하나의 공덕명입니다. 그러나 총 대명사, 본질은 바로 아미타불이라, 그래서 경전에서도 나무 본사 아미타불이라고 읽습니다.

 

아까 법회 시작 전에 스님네들도 나무 아미타불을 그렇게 부르셔서, 제 마음도 굉장히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스님네도 정말 참 저렇게 모두가 하나로 생각해서 공덕 이름을 총 대명사로 부르시는구나.’ 라고 저도 참 동조를 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께 앞으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부르지 말라고 제가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모두 똑같은 자리인데, 지장보살을 좀 더 좋아하는 분들이 그렇게 부르면서 거기에 집착해버리면 다른 것은 저만큼 밑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고하상(高下相), 높고 낮은 그런 차별상을 두지 않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선 모두가 다 같다고 생각하고서 총 대명사쪽으로 우리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