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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나무아미타불

정토종의 인광印光(1862~1940)

 

 

인광은 금세기 중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승려로 칭송받는다. 허운이 1894년 55세 무렵, 보타산에서 인광을 만났고 이후 몇 차례 불사를 통해 두 분이 조우했다. 허운이 근대의 선종을 쇄신시켰다면, 인광은 정토종에 새바람을 일으킨 승려이다. 당시 인광의 설법을 들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설법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었다.’고 칭할 만큼 훌륭했다고 전한다.

 

인광은 섬서성 합양(郃陽)출신으로 21세에 서안 종남산 연화동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용서(龍舒)거사(1143~1204)가 쓴 『용서정토문』을 읽은 뒤, 해탈에는 염불만이 최상의 수행법이라 생각하고, 늘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인광은 염불수행하면서 경전공부도 병행하였다. 그 후 보타산 법우사에서 6년간 무문관 수행을 하였으며 주야로 염불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증득하였다. 이후부터 중생교화의 서원을 세우고 모든 사람들에게 정토법문(淨土法門)을 해 주었다. 다음은 인광의 정토법문이다.

 

“첫째, 염불할 때는 정성스러운 마음과 공경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한 집안의 어른에게 인사드릴 때도 예의를 갖추고 공경심을 내는 것이 이치이건만, 하물며 부처님과 보살 명호를 부르면서 경박한 마음을 갖거나 잡된 망념을 품고 입으로만 소리 내어 염불하면 공덕이 있을 수 없다.

 

둘째, 염불할 때는 입으로 정확하게 소리 내야 하고, 귀로는 자신의 염불소리를 정확하게 들으며, 마음으로는 염불을 정확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귀·입, 세 가지가 일체가 될 때, 몸과 마음에 안정을 되찾게 되고 다른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염불할 때는 십념(十念)단위로 염불해야 한다. 이 방법은 염불을 한 번부터 열 번까지 분명하게 염불하고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열 번을 모두 부르고 나면 다시 되풀이 하여 염불한다.”

 

이와 같은 인광의 정토법문에 교화된 사람들은 지극정성으로 염불하며 스님의 덕에 감화를 받았다. 점차 인광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스님을 믿고 염불하는 자가 늘어났다.

 

스님은 또한 정성들여 열심히 염불하면 어떤 병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다. 이는 당신이 예전에 경험했던 바를 예로 든 것이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 유학을 공부하며 불교를 비방하는 글을 쓰다가 실명하였다. 이때 염불왕생 정토법문이 생사를 해탈하는 근본임을 알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여 눈병이 완전하게 치유되었다. 지성으로 염불하면 반드시 불보살님의 가피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의 체험으로 사람들에게 확신시켰다.

 

인광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스스로 상참괴승(常慙愧僧)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알려져 세상에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으로 인광의 겸손함이 담겨있다.

 

인광은 그의 법력과 명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떨어진 헌옷만 입고, 음식도 채소로 된 소식을 하며, 손수 빨래를 해 입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을 제도하면서도 주지직을 맡지 않았고, 인광에게 상좌가 되려는 이들이 찾아와도 자기 권속을 만드는데 마음 쓰지 않았다. 또한 재난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에 처한 사람에게 재물을 베풀었다.

 

인광은 말년에 강소성 오현(吳縣) 영암산(靈岩山)에 정토종 도량을 만들었다. 이 도량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길 사이가 없이 많은 승려와 재가자들이 몰려와 염불수행 하였다. 인광은 남녀노소, 비구·비구니에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평등심으로 자비를 베풀었고,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사람들이 찾아오면 흔쾌히 그들을 맞았다.

 

인광은 80세가 되던 어느 날, 전 대중을 모이게 한 뒤 ‘입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절을 맡을 스님을 추천하라’고 하셨다. 대중은 묘진(妙眞)스님을 추천하여 영암산사를 다시 꾸려갈 준비를 하였다. 인광은 제자들에게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면 반드시 왕생극락하며,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염불수행할 것’을 권한 뒤,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들었다. 인광은 열반 후에도 살아 있는 사람과 다름없이 허리가 조금도 굽어지지 않고 머리도 앞으로 숙여지지 않은 좌선한 모습 그대로였다.

 

대중은 100일장으로 하여 이듬해 부처님 열반재일에 인광의 장례를 하기로 하였다. 100일 동안 조문객으로 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염불을 했는데, 염불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고 한다. 장례식날 상여가 다비장으로 가는 동안 동네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화장이 끝나고, 습골을 하는데 오색찬란한 사리가 1000여 과가 넘었다. 어떤 과는 구슬처럼 둥글고, 어떤 과는 꽃송이같이 생겼으며, 연꽃잎처럼 생긴 것도 있는 등 다양하였다. 유골은 백옥같이 희면서 돌덩이처럼 단단했고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대중이 습골을 한 뒤에도 사람들이 다비장에서 인광의 사리를 얻고자 정성껏 기도하면서 사리를 구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사람들의 인광에 대한 믿음이 부처님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인광은 연종(蓮宗)13세이다. 스님의 사리는 인광이 입적한 강소성 오현 영암산의 사리탑에 안치되어 있고, 유품은 인광대사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인광의 사리탑이나 부도는 여러 곳에 모셔져 있다. 서안 종남산 와불사(臥佛寺)부근에도 인광의 백탑(白塔)부도가 있다. 부도 개구부(開口部)에 20세기 서예가인 우우임(于右任 1879~1964)의 글씨가 있고, 그 부도를 둘러싸고 1975년에 일본의 다나카 수상이 선물한 낙엽송이 작은 숲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강서성 남창에도 사리탑이 있다.

 

* 「중국 근현대 불교의 선지식 허운」 정운지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