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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나무아미타불

계진, 구행스님

* 계진戒塵(1878~1948)

 

 

계진은 호북성(湖北省) 한천(漢川)출생으로 19세에 출가하였다. 출가 이래로 두타행을 하며 수행에 전념했다. 24세의 계진이 종남산 토굴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62세의 허운도 덕청(德淸)에서 허운(虛雲)으로 개명하고 서안 종남산 사자암에서 수행하였다. 허운은 당시 사람들에게 깨달은 도승으로 알려져 더 이상 종남산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종남산을 몰래 떠나는데, 계진이 허운을 따라 나섰다. 계진과 허운은 이렇게 인연이 되었다.

 

계진은 허운이 운남성 계족산에 처음 암자를 지으려고 할 때나 계족산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도 함께 하였다. 또한 허운과 계진이 길을 나섰다가 배를 타야 하는데, 배를 타려는 순간 배가 앞으로 밀려나가 스님이 물에 빠질 때도 계진은 스승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등 몇 년간 힘든 여정을 스승 허운과 함께 보냈다.

 

계족산 축성사 불사를 시작하기 전, 계진은 폐관[무문관]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불사를 도와 달라는 스승의 권고에 축성사 불사를 함께 도왔다. 허운이 다른 곳에 법문을 하러 가거나 불사금을 구하러 가면, 계진은 축성사를 지켰다.

 

1913년 36세의 계진은 축성사를 떠나 항주(杭州) 화엄대학에 들어가 『화엄경』을 공부해 마치고, 평생 아미타불을 염하며 정토를 수행하였다.

 

1948년 71세의 계진은 곤명 공죽사(笻竹寺)에서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전날, 시자가 저녁에 죽을 들고 들어갔더니. 계진이 말했다.

“내가 수십여 년 간 계율을 지켜 오후 불식을 했는데, 어찌 노년에 계를 범하겠는가.”

계진은 죽을 먹지 않았고, 잠시 후 열반에 들었다. 또 허운에게는 ‘제대로 스님의 뜻에 따르지 못해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입적하고, 스님의 모습은 살아생전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스님을 화장하고, 100여 과의 사리를 수습해 해회탑에 모셨다. 계진은 허운이 계족산 축성사를 불사하고 중생제도를 하기 이전부터 만난 제자였고, 허운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함께 했던 제자이자 도반이었다.

 

저술과 그림에 『화엄7처9회도(華嚴七處九繪圖)』, 『연사명훈(蓮社明訓)』, 『정종요어(淨宗要語)』등이 있다.

 

* 구행具行(~1924)

 

1907년 스님께서 계족산 축성사 불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이다. 축성사에 구행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구행은 어려서 고아로 자랐고, 계족산 아래 마을에서 머슴 일을 하다가 20대 초반, 축성사로 허운을 찾아왔다. 구행은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겠다고 하여 그를 식구로 받아들였다. 1년쯤 지나 마을에 살던 부인과 조카, 자식 8명이 찾아왔다. 이 가족들은 지주의 횡포로 집을 잃어 어쩔 수 없이 구행을 찾아온 것이다. 대중 스님들은 아녀자를 절에 머물게 할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허운은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구행은 가족과 함께 절에 머물러도 가족을 만나지 않았으며, 묵묵히 일만 하였다.

 

어느 날 구행이 허운에게 염불을 가르쳐 달라고 하여 허운은 그에게 오로지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을 염하라고 하였다. 구행은 노동을 하며 지극정성으로 염불했다. 이 무렵, 허운이 축성사에 대장경을 모시면서 수계식을 함께 거행했는데 구행이 출가하기를 원해 삭발을 해 주었고, 이때 가족 모두가 출가하였다. 허운은 그에게 구행(具行)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구행은 일자무식이었지만 염불공덕으로 인해 글을 깨치게 되었고, 『조만과송(朝晩課誦)』과 「관세음보살보문품」등을 열심히 공부하여 몇 년 만에 전부 외웠다.

 

종일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밤에는 부처님과 경전 앞에 예배하고, 잠을 줄여 가며 수행하였다. 대중에 머물면서도 누군가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외부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늘 남을 위하여 옷을 기워 주었으며, 바늘 한 땀마다 ‘나무관세음보살’을 염하여 한 바늘도 헛되이 지나지 않았다.

 

그는 점점 귀가 먹으면서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승려가 된 지 5년 되던 무렵, 허운은 그에게 4대 불교 도량에 참배도 하고, 명산과 도량을 다녀오라고 하였다. 구행은 처음에는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스승의 권고가 있어 행각을 떠났다. 그 후 5년쯤 지나 1920년 허운이 화정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구행이 그곳으로 찾아왔다. 구행은 다시 화정사에서도 이전에 축성사에서 하던 것처럼 잡일을 하며 염불에 열중했다.

 

어떤 어려운 일도 앞장서서 자신이 하였는데, 몸을 사리지 않는 그의 보살 정신에 대중이 모두 좋아했다. 예전처럼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금강경』·『약사경』·『정토경』을 외우며 경전 글귀에 경의를 표했다. 허운은 대중에게 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록 아미타불 한 마디만 외울지라도 열심히 정진하면, 도를 이루는데 충분하다. 만약 자신의 총명함만 믿고 마음속의 염불이 한결같지 않다면 만 권의 경전을 외울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행이 저렇게 빨리 깨달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그러던 어느 날, 구행은 허운에게 좌화(坐化)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구행은 목숨을 마치려 할 때쯤 의복과 세간의 몇 가지를 돈으로 바꾸어 대중공양하였다.

 

4월에 때때로 유채(油菜)씨를 거두기도 했는데, 그는 짚 몇 단을 가지고 화정사 말사인 승인사 공양간 뒤편에서 스스로 불을 붙여 화거(化去)하였다. 곧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지만 그는 이미 왕생해 버린 뒤였다. 구행은 가부좌한 채로 움직이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가사를 걸치고, 왼손에는 경쇠를, 오른손에는 목어를 잡고 있었다. 스님이 가서 살펴보니, 구행의 손에 있는 목어는 손잡이가 재로 변해 있었고, 경쇠의 손잡이도 불에 탔으나 구행의 몸과 가사만은 그대로 있었다.

 

허운은 제자의 모습에 무릎을 꿇어 합장하고 예배하였다. 허운이 절을 마치자 구행의 시신에서 향기가 뿜어 나와 마치 난향과 같았다고 전한다. 다음날 구행의 법력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구행의 소신공양 이야기는 곤명일보에 기사화되었다.

 

 

* 「중국 근현대 불교의 선지식 허운」 정운지음에서

 

* 중국의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깨달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람을 세우고 불법을 수호하며 제자를 기르고 120세까지 사바세계에 머무시다가 가신 허운스님(1840~1959) 당신은 화두를 하였으나 제자들은 근기와 인연에 맞게 수행법을 제시하여 당신의 제자 가운데서 염불 수행하여 각(覺)을 이루신 분들이 계십니다. 진정한 선지식은 법집에 매여 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