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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월인(月印)스님이라고 말씀 들어 보셨습니까?

 

 

* 청화큰스님의 이 소참법문은 2000년 2월 서귀포 한 가정집에서 스님 몇 분과 신도 몇 분을 대상으로 편하게 말씀하신 것을 녹취하여 구어체 그대로입니다. 무주선원카페에 음성법문은 육조단경 소참법문 속에 있고 메뉴 육조단경 소참법문에도 있습니다.

 

한국 현대 승려 중에서 가장 숭배하는 어른입니다. 그이가 구산(九山)스님하고 좋은 도반입니다. 구산스님은 이발사 하다가 월인 스님은 시계수선공 하다가 승려가 된 분이기 때문에 두 분다 한 동갑이고 해서 굉장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도 인연이 닿아서 그 분하고 백장암(白丈庵)에서 한 철을 지냈어요. 그 뒤에 여러 차례같이 지냈고 제가 또 광양 사성암(四聖庵)에 있을 때도 같이 좀 지내고 그랬습니다.

 

애초에 그 양반을 제가 알게 된 것은 젊은 사람들이 한 댓이나 구례 사성암에 왔는데 거기가 굉장히 높아요. 옛날에는 교통도 사납고 그때는 섬진강을 건너서 와야 됐는데 누가 특별한 사람 아니면 오질 않아요. 혼자 지낼 때고 그랬는데 학생들이 한 댓이나 한봉 꿀을 하나 가져왔어요. 그때는 내가 40대 조금 넘었을 때이고 아는 신도도 별로 없는데 여기 까지 무슨 정성으로 누가 보내서 가져왔느냐고 하니까 월인(月印) 스님께서 보냈다고 해서 월인스님을 한 번 만나 뵙지도 못 했는데 그 양반이 나한테 무슨 뜻이 있어 보냈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고맙다고 인사 했는데.... 그러니까

 

당신한테로 대학교 나온 젊은 사람들이 몇이나 오니까 당신은 한문만 공부하고 현대공부를 안 했지만 나는 일본도 갔다 오고 했으니 저한테 보내면 적절하게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던 모양 같아요. 그 학생들 하고 얘기를 나눈 뒤 보내놓고 생각해보니 저 보다도 훨씬 선배이고 한 번도 인사를 못 드렸는데 꿀만 받아먹고 그냥 말수가 없어서 용돈 좀 아껴두던 것을 가지고 그때는 설탕 같은걸 사기가 참 어려웠던 때입니다.

 

아주 귀할 때인데 시내에 나가서 아는 점포에 가서 설탕과 과자를 사서 걸망에 지고서 그 양반이 그때에 함양 토굴에 계실 때에요. 묻고 물어서 올라갔는데 한봉 벌통이 몇 개가 놓여있고 나무 등걸로 앉는 의자를 만들어서 한 스님이 앞만 바라보고 가만 계시는 것이 꼭 신선 같았어요. 어떻게나 천연스럽게 보이던고! 그때 제가 그 양반을 처음 만났지요. 인사를 받으신 후 당신이 공양을 해 주신다고 해서 양식만 주면 제가 하겠습니다 했지만 한사코 당신이 하세요. 근데 반찬은 들깻잎 하나에요 그것도 어떻게 짜게 했는지............(웃음)

 

그놈을 얻어먹고 하룻밤만 쉬어가라 해서 또 어른 말씀 거역하기도 그래서 그러면 그럽시다 하고 하룻밤 묵게 되였어요 그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 하고 앉아서 베길 땐데, 토굴이니까 방이 하 나 뿐이지요. 아, 거기서 같이 자는데 이 양반이 한 밤중에 굉장히 부대껴하세요 어째서 그러시냐니까 “내가 지금 횟병이 있어, 약을 먹어도 안 듣고 꼭 하루에 몇 번씩 신고(辛苦)를 한는데 이것이 내 업(業)이니까 이업을 동무로 삼고 지내야지 할 수가 있냐?”고 그러더니 한 시간쯤 지나니까 진정이 된다고 해서 같이 정진 했는데 그때 추렴이 돼가지고 가끔 더러 지내기도 하고 백장암에서 한 철 지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고 같이 공부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지만 내가 하는 공부방법이 마땅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당신은 화두 일변도라서 마땅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하여튼 몇 십 년 동안 공부하고 온 사람을 자기가 그걸 말으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말으라고 한들 제가 또 말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게 왔다 갔다 친하게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니까 공부방식이야 뭐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것이라고.

 

한 번은 자기 상좌가 있습니다. ◯◯스님이라고 은사스님을 아주 잘 받드는 효 상좌가 있었는데. 그 상좌하고 같이 왔어.

 

“ 청화스님, 나 봐. 내 얼굴 좀 보라”고 해서 “스님 얼굴 대저 참 좋습니다.” 얼굴이 그 전 보다도 아주 푸근하게 생각이 된다 말입니다. 이 양반이 평생 계행을 잘 지켜 참 굉장히 청정한 분이셨습니다.

 

비구니 스님이 뭘 줘도 여자가 줬다 해서 안 받았어요 그럴 정도로 아주 청정한 분이고 청정하게 살았기에 옷이 없어 구산스님께 두루마기도 얻어 입었다고 저한테 말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그 전에는 서릿발 차듯이 쌀쌀하게 보였는데, 평생 동안 토굴에서 지내면서 계행 바르고 평생 화두 하니까 의심하려면 의심하는 작업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한두 번이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의심하고 살았으니까 아무래도 표정도 그런 쪽으로 굳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 양반의 얼굴이 훨썩 푸근해요.

 

그러면서 “내가 지금 달리 그러잖아 달리 내 얼굴이 이와 같이 푸근하게 보이잖아. 다 청화스님 덕택이야” 그래서 “제 덕은 무슨 제 덕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염불을 해” 그 전에 만났을 때는 내가 장좌(長坐) 한다고 제법 공부하는 모양은 갖추니까 나한테 대놓고 그래요. 아이고, “참. 청화스님 화두 했으면 진작 깨달아 버렸을 것인데....” 이런 말도 하신적도 있었어요 그러면 나는 “제가 업장이 무거워서 그럽니다.” 하며 웃고 그랬는데 이젠 당신이 염불 한다고 그래요. 대저 얼굴이 푸근하게........

 

이 양반이 하도 정직하고 원칙적인 분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만나면 하여튼 다른 것 할 것 없이 염불하라고 권합니다. 자기 상좌 ◯◯스님이라고 나한테 오면 항시 수행법에 관해서 꼬치꼬치 질문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아주 힐난하듯이 따지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자기 스님이 그러니까 거기에 안 따라 갈 수가 있습니까?

 

한 4-5년 전에 변산 실상사 개원식 때 그 양반이 월명암(月明庵)에 조실로 계셨네. 내가 왔다고 그러니까 월명암에 케이블카 비슷한 모노레일인가 하는 그것 타고 내려오셔서 만나고. “늙은 말년이니까 청화스님하고 꼭 같이 지내고 싶은데 청화스님은 워낙 아는 사람이 많아 복잡하고 나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같이 지내지도 못해 섭섭하다”고 그래. 그래서 “제 마음은 항시 스님을 모시고 같이 지내는 그런 기분입니다.” 그러고 헤어졌는데, 돌아가셨다고 해서 내가 꼭 참여하려고 마음먹었는데 49제도 참여를 못하고 그렇게 됐네.

 

염불이라는 것이 보통 참선하는 사람들은 저만치 밑으로 생각합니다. 방편공부로써 참다운 참선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깊이 공부한 분들은 그런 서투른 말을 차마 못 할 것 입니다. 비석(飛錫)스님이라고 당나라 때 분입니다. 지금 절에 가면 염불삼매보왕론(念佛三昧寶王論: 3권 내용은 20문(門)을 열어서 염불을 근찬(勤贊))이라고 더러 인쇄해서 붙인 것 보셨습니까? 보왕론(寶王論)을 이 분이 지었어요. 비석스님이란 분이 위대한 분입니다.

 

일념아미타(一念阿彌陀),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외인다고 생각할 때는 즉멸무량죄(卽滅無量罪)라. 곧 무량죄를 멸해버린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현수무비락(現受無比樂)하니, 현생에서는 비할 수 없는 안락을 받는 것이고 후생청정토(後生淸淨土)라. 후생 내생 가서는 청정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그런 뜻이어요. 그러니까 광범위하게 무엇을 보지 않으면 가령 자기가 법화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실 법화경 뜻 자체가 모두를 다 수용한 것인데도 법화경만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고 그렇게 주장 한다 말입니다. 또 화엄경 좋아하는 사람들은 화엄경만 치우치니까 화엄종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또 같은 법화경이라 해도 법화종이 한 종파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법화종도 종파가 여러 종파입니다.

 

그러니까 염불이라는 것이 아까도 말씀 마따나 월인스님 같은 분도 저는 그이가 굉장히 복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그냥 자기가 평생 한 대로 익힌대로 가버리는 셈인데 그때 나한테 염불한다고 한 것이 팔십 거의 다 돼서이고 구십 넘어서 그이가 갔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고 할 때에 역사적으로 고찰을 잘못하면 하나에 치우쳐버린다 말입니다.

 

* 사진은 큰스님께서 부안 실상사개원식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월명암에서 월인노스님께서 내려오시어 만나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