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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291

291. 보리방편문 설법(4)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따라서 우리가 수행修行하는 방법도 부처님 당시는 벌써 2500년 세월이 흘러갔기 때문에 그때 인도印度 지방은, 지금도 문맹文盲이 많습니다만 그 당시는 굉장히 무식쟁이 판국이 되었겠지요. 노예 계급도 있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고도한 법문法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법공諸法空이라, 또는 일체만유一切萬有는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라 이렇게 말해도 알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분명히 자기 몸뚱이는 좋게 보아서 먹거리를 좋아하고 중생들이 의식주衣食住 떠나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무식한 때라서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초기 법문은 쉽습니다.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런 중생 차원에서 될수록 나쁜 짓 하지 말고 좋은 일하고, 즉 낮은 차원의 윤리倫理만을 주로 말씀을 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수행법도 부정관不淨觀이라,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은 눈물, 콧물, 오줌, 침 모두가 더러운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미인美人이라 하더라도 껍질을 벗겨 놓으면 미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껍질을 둘렀으니 예쁘게 보이는 것이지 껍질을 벗겨 놓으면 내내야 살덩어리고 선지피만 흐르고 하겠지요. 하기 때문에 적나라赤裸裸하니 보면 인간의 몸뚱이 이것은 더러운 것뿐이다. 이렇게 관하는 것이 이른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어째서 부정관을 시켰는가 하면은 사람들이 너무나 자기 몸뚱이만 생각해서 죄악을 범하므로 무식한때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부정관이란 우리 몸속에서 눈물, 콧물, 오줌, 똥, 피, 고름 생각할수록 더러운 것뿐이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또 죽어지면 자기 식구들도 보기 싫어하고 결국 썩어서 가는 것이고 또 불로 태우면 재만 남는 것이고 이 몸뚱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염된 것뿐입니다.

어머니 태胎 안에서는 뱃속의 더러운 속에서 지냈고, 또 지니고 나왔고, 아무튼 씨앗부터 죽은 뒤까지 사뭇 더러운 것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중에는 이 몸뚱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구나! 이것 때문에 내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해서 부정관 공부가 익어지고 차츰차츰 마음이 깊이 들어가면 욕심慾心이 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 쪽으로 접근되면 된 만큼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희미해지면 그만큼 법을 더 아는 것입니다. 가사 법문도 꽝꽝하니 막혀 가지고 모르다가도 스승한테 안 배워도 가슴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눈이 시원하면 그때는 퍼뜩퍼뜩 지혜가 나옵니다. 어제는 대학도 나오고 공부도 많이 한 30대 성년 한 분 왔어요. 그런데 그 분 말이 조리가 딱 섭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선신善神, 하나의 신장神將이 지피어 있단 말입니다. 접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의식은 선신보다는 차원이 조금 더 밑이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모르는 것을 선신은 다 아는 것이고, 귀신 중에는 사람보다 훨씬 미련한 귀신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은 몸이 없어 놓아서, 사람은 몸에 집착이 있고, 또 몸에 가려서 잘 모르는데, 몸만 없으면 훨씬 더 아는 것입니다. 가사 미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태 같은 것도 사실 귀신들은 본다 말입니다. 확실히는 못 보아도 어렴풋이는 귀신은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이 없어서 시공에 대한 제한을 안 받는 것입니다.

 

우주宇宙라는 것은 그와 같이 신비神秘에 차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다 근본 성품은 불성이기 때문에 이런 몸뚱아리의 장애障碍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그렇게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는 탐심貪心이 많은 사람에게는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을, 또 진심瞋心이 많아서 조금만 기분 사나우면 핏대를 올리고 남을 증오憎惡하고 그런 사람들은 자비관慈悲觀을 시켰습니다. 자비관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단 말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을 항상 생각합니다. 친근한 사람들은 생각하다 보면 그때는 좋아하는 마음이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박혀서 점점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진심이 많은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부터서 생각해서 자비심을 더욱더 확장을 시킵니다. 이치를 모르고 미련한 사람들은 인연관因緣觀이라, 중생들은 보통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보고 따집니다. 무슨 사태가 일어나면 그 결과만 보고 그렇게 선악善惡을 판단하고 남을 경계하고 심판을 합니다. 그러나 원인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즉 인과因果를 가려서 생각하는 것이 이제 그렇게 하다보면 차근차근 마음이 트여 갑니다.

 

내내야 부처님 법은 인과를 따지는 것입니다. 인과를 따져 가다가 가장 시초의 원인이 무엇인가. 이른바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 제일 원인이 바로 불성입니다. 인과를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고, 물질도 분석하고 분석하고, 알갱이를 나누고 나누다 보면 결국 모두 텅 비어 버리는데 텅 빈 에너지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이 되어버립니다. 사람 몸도 마찬가지고 우리 생각, 의식도 집중하면 할수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 제9암마라식 이렇게 깊어져서 결국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보나, 하나의 티끌로 보나 하나의 물로 보나 무얼로 보나 결국은 모두가 다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원자의 근본 뿌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분석해 들어가면 끄트머리 가서는 불성이 다 되어버립니다. 그와 같이 인과因果를 가리는 것이 인연관因緣觀인데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무명無明이 무엇인가. 무명은 문자 그대로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어둡단 말입니다.

 

밝게 훤히 보면, 불성광명佛性光明은 훤히 천지를 다 비추는 것입니다. 천지를 무장무애無障無礙로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꼭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도 공부의 조도에 따라서 크고 작곤 합니다. 공부가 차근차근 깊어지면 정말로 지금은 안보이지만 불성광명은 내 인간성의 본 광명은 우주를 훤히 비춘다. 이와 같이 확신이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공부가 잘 돼 가면 또 맑을 때는 그냥 저 쪽도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른바 천안통天眼通이라, 분명히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해서 볼 수 있습니다.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천문학天文學은 천안통을 통해야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천안통을 했으므로 지구地球의 내면, 화성火星의 내면, 수성水星의 내면, 또 각 성수星宿의 질량, 열량을 전부 다 수치로 나타낼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합니다. 우리는 인간성의 소중함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마음인데, 우리가 애쓰고 지어서 점점 멀리 한단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멀리 하는가, 이놈의 몸뚱이 때문에 멀리합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이 몸뚱이가 하도 싫으니까 자기 스스로 칼로 찔러서 죽기도 하고, 나중에 부처님께서 그래서는 안 된다 하니까 자살은 금했습니다만 사실은 자기 몸뚱이 더러운 것을 생각하면 짜증이 납니다. 그 양심(良心)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생각하면 당장에 죽고 싶은 생각이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본바탕은 부처이므로 한 생각 바꾸면 그야말로 무한한 세계가, 천안통도 하고 천지우주를 다 삼킬 수 있는 그런 지혜智慧가 누구한테나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그 쪽에 우리 비전vision을 두면 비로소 인간이 살맛이 있겠지요.

이와 같이 부처님 초기에는 눈으로 보이는 경계에서 수행修行 방법方法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염불念佛도 부처님을 찾고자 해서 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똥 마른 막대기라는 화두話頭를 들고서도 마음을 통일統一시킬 수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마음을 집중集中 못시킬 까닭이 없겠지요. 가장 하기가 쉽지요. 이 세상의 개념槪念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이름이 부처님 명호名號입니다.

 

어느 공부 열심히 하시는 불자님 말씀이 제가 들었습니다만 그 이는 아직 나이도 젊은 분인데 이런 말을 했어요. ‘제 평생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불러도 너무나 짧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한 평생 아무것도 안하고 나무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만 해도 너무나 짧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주 젊은 사람이 참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수행법修行法이 많이 있습니다만 방편설方便說은 직통으로 바로 불성을 말씀 못하고 현상적인 문제에 의지해서 불성 쪽으로 가는 방법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편을 떠난 진실설眞實說은 수승한 근기根機가 있고 이론도 있고 교양도 있고 또 본체本體를 이야기해도 알아먹을 만한 정도가 되면 그때는 본 체성을 즉 불성을 바로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불교 말로 교외별전敎外別傳,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敎 밖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마음 딱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가 학식이 있고 그대가 몸도 있고 그대가 여러 가지 이론 체계도 많이 있지만 바로 그대 마음이 부처다.

 

이와 같이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그대가 지금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그렇게 분별하는 그 마음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곧 직直자, 가리킬 지指자, 사람 인人자, 마음 심心자. 그 사람 마음 딱 집어서 그냥 그대로 이 마음 바로 부처다! 그런 법문이 가장 고등高等 법문法門이지요.

 

수행법으로 너절하게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 체계가 많이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가 우리 중생들이 마음이 중요한 줄을 모르고서 항시 겉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이제 모두가 허깨비요, 꿈이요, 공이요 해가다가 중생 근기가 익어지면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요’라고 합니다. 천지우주가 지금 나와 있는 그대로 풀도 있고 산도 있고, 누렇고 푸르고 한다 하더라도 누렇고 푸른 그것이 중생이 보아서 누렇고 푸른 것이지 그것도 역시 바로 보면 불성, 즉 부처입니다.

 

이른바 당체여시當體如是라! 산이면 산, 물이면 물, 또 티끌이면 티끌 그 당체전지라. 당체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다만 중생은 잘 못 보지만 성자는 당체 그대로 부처로 봅니다. 이렇게 하는 법문이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지관론과 보리방편문

그래서 여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여실히 조금도 군더더기 없이 하신 법문입니다. 연원淵源은 제 2의 석가釋迦라 하는 용수보살龍樹菩薩께서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삼매三昧 가운데 즉 선정禪定 가운데 - 깊은 선정에 들면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보는 것입니다. - 그런 가운데 과거의 용수龍樹 성자聖者로부터 이렇게 감응感應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라디오나 텔레비전 의 전파들을 생각해 보시면 짐작이 가십니다만 가사 10만 년 전에 누군가가 말을 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정밀한 컴퓨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우리가 다 포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물리학도 그렇게 말을 합니다. 따라서 도인들이 삼매에 들면 몇 천 년 전의, 미래의 일도 충분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저 같은 사람은 아직 천리만리라서 어림도 없지요,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부처님은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믿어야 진실한 불교 신앙인信仰人입니다. 원래는 우리 인간성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금타대화상 그 어른께서 삼매중 선정 가운데서 용수보살로부터 현대 지성적인 시대에 알맞은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라고 해서 전수 받으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할 수가 없겠지요. 저도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확실히는 모르지요. 다만 믿고 확신을 할 뿐입니다. 부처님의 수행 체계를 가장 잘 세우신 분이, 부처님 교리를 종합적으로 가장 잘 세우신 분이 중국의 천태지의天台智顗 스님입니다. 천태지의 스님은 마하지관摩訶止觀이라는 20권의 책을 냈습니다. 마하摩訶란 말은 인도말로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지관止觀은 그칠 지止자, 볼 관觀자. 마음공부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아주 번쇄하고 난해합니다.

 

그러나 참선공부는 인류 문화사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가장 고도한 수행법을 단 몇 시간 동안에 윤곽을 잡으려고 하면 사실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들어 두셨다 나중에 생각해 보시면 감感이 잡히실 것입니다. 이 마하지관摩訶止觀은 위대한 지관법으로 그칠 지止자, 산란한 마음을 딱 그치어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말이고, 볼 관觀자, 이것은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비추어 보는가? 우리 본성本性, 무명에 가리여 지금은 바로 못 보나 부처님 말씀에 따라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하며 또 불성 가운데는 물질적인 질료는 아무것도 없고 시간성時間性, 공간성空間性을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그리고 일체 존재의 모든 가능성可能性을 갖춘 하나의 광명光明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했으니 우리 중생이야 염두도 못 내지만 부처님 말씀 따라서 확신해서 비춰 봅니다.

 

현대는 물리학적인 지식을 동원시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갑니다. 항시 학교에서 배운 물리학적인 지식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확실히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을 할 때도 굉장히 필요합니다. 저는 원래 수학을 많이 못해서 철학 서적을 보면 막혀서 이따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확실히 물리학적인 소양은 지금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굉장히 필요합니다. 현대는 이론과 실험 과학의 체계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금 과학시대는 물리학을 모르면 아주 불편한 셈이지요.

 

지금 물리학도 일체 물질을 파괴하면 에너지라는 광명光明만이 남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른바 립자粒子의 파동설波動說, 입자설粒子說 말입니다. 전자電子는 무엇인가? 극소화시키면 광량자光量子, 즉 광입자光粒子 아닙니까. 전자라는 아주 미세한 알맹이를 극소화 시키면 결국은 하나의 광자光子입니다. 하나의 광명체光明體입니다. 우주에는 지금 이러한 광자가 충만해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볼 때도 말입니다.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하면 저 저변에는 파동, 빛입니다. 지금 우주 공간에는 빈틈도 없이 광자로 충만해 있습니다. 광입자로 말입니다. 저 성층권 밖 무한한 우주 공간에도 일체의 장 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생각할 때 정말로 부처님께서 우주가 불성뿐이다. 부처님뿐이다. 하신 말씀도 물리학으로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거짓말이 아니구나! 이렇게 지금 현대인들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근원적인 것은 하나의 생명生命의 성역聖域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마하지관은 우리 산란스러운 마음, 좋다 궂다 하는 마음, 모두 그런 것들이 허망한 것들이므로 허망한 것을 우리가 부정 안 해 버리면 참다운 것이 그때는 못나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경전 가운데서 양적으로 가장 비중이 많은 것이 공사상空思想, 제법공諸法空입니다. 이른바 금강경金剛經 도리를 22년간이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도 허망하고, 꿈이요, 허깨비요. 몇 번 들으면 듣기가 싫겠지만 중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 당시에 무슨 원소 이론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이 몸뚱이는 이와 같이 고유하게 그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한 순간도 일초의 몇 만 분지 일초도 이 몸뚱이는 그대로 있지가 않지만 그것을 모르고 고유하게 있다고 보는 때라 놔서 좀처럼 중생들이 몸은 허깨비 같다 꿈같다 해도 못 알아먹는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우리 중생들이 보고 있는 현상계現象界가 허망虛妄하고 메아리고 그림자고 한다는 것을 22년간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육조단경六組檀經에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했습니다. 천지 우주가 물질로 꽉 차 있는데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물리학을 좀 하신 분들은 그냥 생각이 되십니다. 물질은 에너지의 파동뿐인 것이지 물질이 아닌 질료가 없는, 다시 말하면 공간성도 없는 에너지의 진동, 즉 파동이 그렇게 물질로 보이는 것입니다.

 

어젠가도 말씀 했습니다만 우리가 횃불을 이렇게 빙빙 돌리면 불 동그라미가 생깁니다. 그러나 불 동그라미가 실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각의 잔상殘像에 의한 착각錯覺 때문에 그와 같이 불 동그라미가 있어 보인단 말입니다. 세포들이 합해져서 모여 있으니까 이와 같이 사람 몸뚱이로 보이는 것이지, 세포도 역시 보다 미세한 것들에 의한 불 동그라미 같은 모양만, 파동만 있는 것이지 실재로 공간성이 없단 말입니다.

 

가장 미세한 원자를 생각해 놓고 보십시오. 원자도 원자핵을 중심으로 주위에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어떠한 존재나 모두가 다 원자로 안 된 것이 없는데 우리가 분석해 놓고 보면 원자 그것이 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전자가 몇 개나 도는가에 따라서 산소, 수소, 질소요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원자핵을 전자 하나가 돌면 그것이 수소水素입니다. 그런데 그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와의 사이는 텅 비어 있습니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가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 태양과 지구 사이는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과 지구 사이의 빈 공간의 비율보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빈 공간의 비율이 더 큽니다. 태양과 지구와도 이렇게 텅텅 비어 있는데 모든 물질의 근원이 되어 있는 원자 자체의 속이 텅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또 다른 원자와 다른 원자 사이도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런 비어 있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 몸도 구성하고 물질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을 가리켜서 공취空聚라! 빌 공空자, 모를 취聚자입니다. 하여튼 부처님 말씀은 그야말로 한없이 감사합니다. 공취라! 텅 빈 하나의 공 무더기란 말입니다.

 

텅 빈 공이 모여서 우리 세포가 되었습니다. 근본 원자가 비었거니, 앞서 말씀드린 원자핵은 무엇인가? 핵도 내내야 에너지가 진동해서 돌고 있는 파동에 불과합니다. 전자 역시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물질화物質化 되서 물질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뿌리에서 보면 에너지뿐입니다. 근본 본질에서 볼 때는 중생衆生이 되고 무엇이 되고 했다 하더라도 본바탕에서 보면 모두가 부처뿐입니다.

 

이렇게 텅 빈 것인데 그 몸뚱아리가 텅 빈 줄을 모르니까 그와 같이 22년 동안이나 부처님께서 반야般若 공사상을 설하셨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다고 하는, 상相은 결국 현상現象 아닙니까. 잘낫다 못낫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개도 소도 있고 그런 것이 상인데, 상이 없다는 것을 쳐부수기 위해서, 상이 없으면 불佛이요 도道요 성자聖者요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상이 있으면 범부凡夫고 중생衆生입니다. 그렇게 구분은 간단명료합니다. 상이 없으면 성자고 부처요. 상이 있으면 범부요 중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조觀照할 때는, 비춰 보는 것은 무엇을 비추어 보는가 하면, 초기에는 사람들이 아직 미숙한 때라 태양도 보라하고, 서산西山에 뉘엿뉘엿 지는 황혼도 보라하고, 이렇게 아주 영롱한 물도 보라하고, 영롱한 물을 자주 보면 혼탁한 마음이 그 인연 따라서 맑아 옵니다.

 

서산에 넘어가는 석양 그 장엄스러운 태양을 자주 보면 마음이 텅 비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것에 인연을 짓게 해서 그걸로 해서 우리 마음을 관조해서 통일 시키는 법을 처음에는 썼습니다. 초기 불경에도 그러한 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면 법당에 있는 거룩하신 부처님을 애쓰고 본단 말입니다. 마리아Maria 상像을 보고, 부처님 상을 보고 그러면 우리 마음이 그만큼 모아집니다.

 

이렇게 형상形象으로 보고 관조하는 법이 있기도 했지만 형상은 허망한 것이고 참다운 실상實相은 모양이 없다. 가장 고도한 형상은 모양이 없는 순수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순수한 생명을 이제 인정할 정도가 되면 그때는 이관理觀이라, 마음의 원리를 보게 만듭니다. 천지 우주는 불성뿐입니다.

 

앞서 마하지관摩訶止觀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지止고, 마음을 어떤 경계에다 놓고 비추어 보는 것은 관觀입니다.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마하지관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때는 에누리가 없이 불성 그 자리에 마음을 딱 붙여 버립니다. 그것이 천태지의 선사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모아서 한 체계로 묶어서 제일 지혜가 수승한 사람한테 제시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어려워서 잘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하지관 수행법하고 이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수행법하고는 비슷비슷합니다. 그 관계를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보는 견해로는 보리방편문이 훨씬 더 우수한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마하지관은 마음을 공空, 가假, 중中 그렇게 봅니다. 공은 우리가 보는 모든 인식認識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인식은 실존을 못 봅니다. 물 자체를 못 봅니다. 못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물 자체가 아니고 결국 모두가 사실이 아닌 가假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비었다는 것이 공이고, 모두가 가假라, 거짓 가假자 가입니다. 그러나 텅 비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라 무엇인가 일체 존재가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가운데 중中자 중입니다. 중中 이것은 공과 가를 다 포함해 있습니다.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고, 그와 같이 다 통하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천태지관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지의선사의 마하지관법은 굉장히 난해한 법문입니다. 그래서 깊이는 안 들어갑니다만,

 

보리방편문은 마하지관과 약간 비슷합니다만, 그러나 천태지의선사의 공가중空假中은 불성을 논리화論理化 시켜서 보았기 때문에 생명적生命的인 역동성力動性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생명生命을 화석化石 시키지 않고서 생명 그대로 공부하는 법이기 때문에 더 우수하다는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 빨 가게 익어가는 피라칸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