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보리방편문 설법(3)
3. 나는 누구인가?
지금 우리 인간 생명의 전생만 생각해 봅시다. ‘나’란 대체 무엇인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엇이었으며 어디서 나왔는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왔겠지.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무엇인가? 엄마의 그런 태胎에 의지해서 뱃속에 들어가서 나오는 것까지는 아는데 엄마에 의지해서 나오기 전에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부모한테 의지해서 나왔는가? 잘 모릅니다.
이렇게 소급해 올라가고 올라가서 뚫고 나가니까 결국은 우주의 끝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서 올라가면 갈수록 즉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산란스러우면 항시 상대적인데 머물고 마는 것인데 마음이 하나로 딱 모이면 집중력集中力이라는 것이 생겨서 지금은 의식 차원이지만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제9암마라식第九菴摩羅識으로 이렇게 쭉쭉 들어갑니다.
정신집중精神集中이라는 이것은 원래 우리 정신의 근본 뿌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한 번 집중만 딱 시키면 그 집중하는 힘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깊이 스스로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전생이 무엇인가? 무엇인가? 이렇게 파고 들어가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훨씬 더 명상暝想하시는 힘이 강했겠지요. 과거세過去世의 선근善根도 많기 때문에 그렇게 천재 같은 분이 이렇게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일념一念으로 해서 확 열려버렸습니다. 그때는 바로 과거가 열려버렸던 것입니다.
도인道人들이 공부해서 마음이 열려 올 때 맨 처음에 나오는 신통이 숙명통宿命通입니다.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압니다. 자기 전생도 압니다. 과거를 알고 보니 그야말로 도솔천兜率天에 있는 하나의 영체靈體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선량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부모의 그런 생명의 파장波長에 걸려서 왔습니다.
우리도 모두가 하나의 영체로 해서 이렇게 헤매다가 아버지 어머니의 인연 파장에 걸려서 온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그렇게 돼서 어머님 태 안에서 스스로 영양을 섭취해서 결국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것은 가화합假和合이라 산소, 수소, 질소, 탄소, 이런 것들이 세포의 성분이 돼서 이와 같이 모여 있습니다. 중생의 업력기관業力機關으로 해서 종중연생從衆緣生이라, 뭇 인연 따라서 이렇게 생겨났는데 이것이 사실은 실체가 아닙니다. 가짜인 각각의 원소가 임시로 잠시간 화합된 것이고, 화합돼서는 잠시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번뇌煩惱가 무엇인가 하면 이 몸뚱이 이것이 소중하다는 번뇌입니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학을 회상回想을 해 보십시다. 대체로 내 몸이 무엇인가? 내내야 각 분자分子가 합해서 되었습니다. 또 우리가 죽어진 다음에는 어떨 것인가? 이것은 결국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다 흩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때는 영靈을 부인합니다.
엄마의 태안에 안착할 때도, 그것을 하나의 물질로만 생각한 사람들은 들어오는 영혼이 안 보이는 것이므로 영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부모님의 피가 결합되어서 하나의 생명이 나왔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보는 것입니다. 도인들이 물질 저쪽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는 그렇게 안봅니다. 분명히 하나의 생명이 있다가 생명이 과거에는 사람이 되었다가 무엇 되었다 했겠지요. 즉 말하자면 헤매다가 마치 지금 귀신이 헤매듯이 말입니다. 헤매다가 마침 부모님의 그런 생명의 파장과 맞닿으면 인연 파장이 서로 맞으면 그때는 걸려서 온단 말입니다.
와서 살다가 죽어지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몸뚱이는 결국은 다 각 원소로 이렇게 분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때는 다시 영체는 남습니다.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던가, 금생에 얼마만큼 내 영혼이 성숙되었는가, 성숙된 정도만 그것이 남습니다. 저희들은 매일 지금도 구병시식救病施食을 합니다. 어디가 아프고 하면 부처님 법으로 해서 귀신들을 떼 내는 것도 하고, 될 수록 보조해서 낫도록 하고, 또 인연이 닿으면 즉각 약을 쓰지 않아도 낫기도 합니다.
대개 젊어서 죽은 혼신들은 총을 맞아 죽었다든가 갑자기 교통사고 만나서 죽었다든가 이런 혼신들은 바로 못 갑니다. 나이가 많이 먹어서 자기가 사생관死生觀에 투철하고 자기 갈 곳을 아는 사람들은 그냥 바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가는 곳은 영혼의 성숙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나쁜 영혼들은 저 밑으로 뚝 떨어져서 그야말로 참 지옥 같은 대로 분명히 가는 것이고, 지금은 불교를 믿는 분들도 지옥地獄, 아귀餓鬼 그러면 부처님께서 하나의 방편으로 말씀했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안 보이는 인간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에 분명히 영체靈體로 해서 지옥중생이 있는 것입니다. 귀신鬼神이 분명히 있듯이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귀신이 의심스러우면 점치는 분들을 몇 사람 만나서 이야기해 보십시오. 일반 점치는 분들은 분명히 귀신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은 뒤에 몸을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四大로 흩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심식心識은 남습니다. 앞서 말한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암마라식은 남습니다. 불성佛性은 가장 본질이기 때문에 조금도 중단이 없지요.
마음이 생명의 본질
그 몸뚱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인간이 여러 가지 고난도 많이 받고 시비도 많이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 몸뚱이를 보배로 생각하기 때문에 - 보차아고寶此我故 즉기탐진치등삼독卽起貪瞋痴等三毒 삼독격의三毒擊意 발동신구發動身口 조일체업造一切業 - 모든 죄악의 씨앗이 생깁니다. 자기 몸을 보배같이 아낀단 말입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몇 개나 끼는 것도 몸뚱이를 아끼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여튼 몸뚱이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뻔한 것이고, 영양을 좀 잘 먹여 주면 힘이 더 날 것이고, 덜 먹여주면 덜 나오고 하겠지요. 몸뚱이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의 외피外皮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몸뚱이에 애착을 못 버리면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절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 다 같이 고행苦行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무슨 필요로 요단강 하반 그 광야에서 40일이나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했겠습니까. 밥 한 끼도 굶기 어려운 것인데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은 좀 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 몸뚱이 꼭 칼로리calorie를 얼마를 먹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단식을 해보면 짐작이 갑니다. 월남越南의 메디콩 스님은 반체제反體制에 저항하던 중 정부로부터 구속당해서 옥중에서 100일 동안을 단식을 했습니다. 옥중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옥중에서 물만 먹고 100일 동안 살았는데 그것도 그냥 지내는 것이 아니라 조석朝夕으로 2시간씩 하루 4시간 염불念佛을 했습니다.
우리 생명은 우리 마음 식識에가 있습니다. 몸뚱이는 하나의 보조에 불과합니다. 영양도 보조에 불과합니다. 저도 40대에 광주 동광사 지도법사로 몇 개월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보름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법문을 했었습니다만, 법문에 갈려고 하면 옆에서 만류를 한단 말입니다. 보름동안 단식하고 가서 쓰러져버리면 어쩔거냐고 합니다. 제가 평소에 말더듬이 였습니다만 보름동안 단식하고 나서는 제 평생에 말 한번 처음으로 잘 해 보았습니다. 한 번도 말이 더듬지 않고서 잘 나온단 말입니다.
어떤 누구나 단식을 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생명 자체 본질은 마음, 즉 식에가 있지 육체에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몸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몸이라. 몸이 건전하면 마음도 건전하고 몸이 취약하면 마음도 취약하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둘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몸은 우리 마음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눈썹 하나, 치아齒牙 하나 모두가 다 우리가 지은대로 생긴 것입니다. 관상觀相을 보는 사람들은 치아의 모습만 보고도 성품을 압니다. 머리 색깔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압니다. 그렇게 중요하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말이 너무나 빗나갔습니다. 우리 마음 이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마음 이것이 우주의 본바탕이고 우리 인생의 본바탕이고, 몸 이것은 거기에 한시적으로 50년, 80년 인연 따라서 쓰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이에 우리가 너무나 봉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에 너무 지나치게 봉사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몸뚱이는 좋고, 남의 몸뚱이는 허수히 여긴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는 좋으므로 자기 권속인 아내, 남편, 자식의 몸뚱이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싸움의 바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종에 불과한 것이고, 다시 말하면 소리에 따르는 메아리,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이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지나친 집착執着을 안 합니다. 지나친 집착을 말라는 이것이 불교의 이른바 고행생활苦行生活입니다.
따라서 저희 같은 수행자修行者는 무얼 만이 먹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옷도 제일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일 높은 중이 아닙니다. 될수록 골라서 누더기를 입습니다. 가장 못 먹고, 가장 못 입고, 가장 못살면서 정신적인 면만 최고도最高度로 생활하는 것이 그것이 이제 출가 수행자의 본분本分인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행사의行四依라! 가장 알찬 행동 4가지를 보면 첫째 분소의糞掃衣라, 우리 옷은 똥 밑씻개나 할 수 있는 그런 누더기를 주어다 깨끗이 빨아 누벼서 옷을 해 입고, 수하좌樹下座라, 집 가운데서 자지 말고 항시 나무 밑에서나 돌 위에서 자고, 상걸식常乞食이라, 항시 얻어서 먹고, 얻어서 먹더라도 많이 먹지 말고 주먹밥으로 하나나 되게 먹습니다. 부란약腐爛藥이라, 병이 생겼을 때는 길거리의 소똥을 발효시켜서 만든 약만 먹습니다. 그것이 수행자의 표본입니다. 그와 같이 청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근기가 같지 않기 때문에 또 집단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절이 생기고 했지요. 그러나 기본 정신만은 잃지를 말아야 수행자가 청빈과 경건한 생활을 할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우리 마음 이것이 하나의 우주 본체이고, 비록 이렇게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의 불성이 그때그때 연 따라서 우로 선회하면 전자가 되고 좌로 선회하면 양자가 되고 그런다 하더라도 전자면 전자, 양자면 양자,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전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불성이 좌로 진동해서 양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역시 양자, 중성자 그걸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파동이기 때문에 찰나도 머물지 않고 전변하고 있습니다. 고정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성 차원에서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순금으로 가락지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순금의 성품은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불성 이것은 산소가 되나 무엇이 되나 또는 성분이 되어서 우리 몸을 구성하나 또는 빛도 안 나는 쇠뭉치가 되나 무쇠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 차원에서는 변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천차만별로 모든 것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사람도 예쁜 사람, 미운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변질이 없으므로 불성까지를 볼 수 있는 명확한, 아주 영롱한 안목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다 그때는 하나의 불성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돼도 불성은 변함이 없고, 무쇠가 돼도 변함이 없고, 가사 아주 더러운 똥이 되어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여느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한테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똥 마른 막대기(간시궐乾屎橛)라! 부처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는 그야말로 초월적이고 존귀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물었겠지요. 그런데 운문스님 도인이 보았을 때는 부처는 존귀한 것만이 아니라 똥이나 무엇이나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똥 마른 막대기라 했습니다.
이렇게 탁 내 쏘아 버렸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듣는 사람은 부처라는 것은 그렇게 아주 위대한 것인데, 왜 똥 마른 막대기일 것인가? 이렇게 의심하는 그걸로 해서 마음이 모아집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집중돼서 마음이 트입니다. 마음이 트여서 더욱 집중해서 모아지고 깊이 파고 들어가면 불성佛性까지 미도尾大難掉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확 트이는 것입니다. 확 트이면 그때는 깨달아 버립니다. 그러면 그때는 불성이 훤히 보이니까 똥이나 먼지나 모두가 불성으로만 보이므로 똥 마른 막대기를 부처라고 했구나, 그때는 확연히 알 수가 있게 되겠지요.
아무튼 이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 산하대지山河大地, 두두물물頭頭物物,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가 다 불성 아님이 없습니다. 이것보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이 문구는 꼭 외워 두십시오.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 일一자, 조각 편片자. 오직 우주를 하나의 걸로 딱 통일시켜 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굉장히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전자電子는 무엇이고, 양자陽子는 무엇이고, 또 소립자素粒子는 무엇이고, 너무나 정보情報가 많으니까 죽을 지경인데 다 하나로 모아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나의 걸로 통일시켜 버리면 참 편한 것입니다. 하나의 걸로 통일시키는데 어줍잖은 것으로 통일시키면 사나울 것인데 가장 좋은 불성佛性으로 통일시키니 그것이 참 좋지요. 불성 그것은 그렇게 행복幸福도 충만하고, 진여眞如,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도道, 열반涅槃, 극락極樂, 중도中道, 각覺, 주인공主人公 다 완전무결한 하나의 불성이므로 그야말로 모두가 다 통일이 됩니다.
* 자성원 부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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