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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정통불법의 재천명 제5차 세미나(3)

제2발표



원통불법의 기반으로서 도신의 선사상

-청화 스님의 ‘순선’, ‘안심’, ‘일상’‧‘일행’ 삼매 고찰-


최동순(동국대 불교학술원)



목차



Ⅰ. 머리말


Ⅱ. 원통불법의 성립

1. 청화 스님 생애사에 나타난 원통불법의 성립

2. 원통불법에 내재된 교판적 특징


Ⅲ. ‘순선안심’ 및 ‘일행삼매’ 채택의 배경

1. ‘순선’의 채택 배경

2. ‘일상삼매’‧‘일행삼매’의 수용 과정

3. 도신과 청화 스님의 사상적 영향관계 고찰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원통불법의 요체������은 청화 스님(1923~2003)의 법문을 엮은 책이며, 여기서 교판(敎判)의 지향점이 드러난다. 스님의 법문에는 통섭과 조화에 따른 대립해소가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미래 방향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원통’사상의 연원은 혜능 이전의 순선(純禪) 시대에 활동했던 조사들의 가르침이며, 특히 도신 선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에 본 논문의 논구 대상으로서 청화 스님의 ‘원통불법(교)’의 교판적 규명, 그리고 수행 목표로서 ‘순선안심’, 그 과정으로서 ‘일행삼매’의 세 가지이다.


첫째 ‘원통불법’의 성립에 대한 연구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긍정하면서도 하나로 ‘會通’되는 불법을 말한다. (원)통불교가 한국불교의 특징임을 지적하는 청화 스님의 논리는 제종포섭에 이어 제 행상의 수용에 있음을 논구하고자 한다. 스님의 글로벌적(global)적 사고는 단순한 물리적 통합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무한 긍정과 조화에 근저하고 있다. 원통불법의 배경을 그의 생애사와 오늘날의 불교 현실, 그리고 도신이 활동했던 시대의 선사상에서 찾고자 한다.


둘째, ‘순선안심’의 목표성에 대한 연구이다. 청화 스님의 전법 목표는 정토 구현에 있다. 이를 위해 안심에 도달할 수 있는 각종 행법들을 안내하고 있다. 화두 참선자나 염불자, 혹은 다라니 기도자 일지라도 이 안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제시한다. 청화 스님의 안심은 ‘깨침’과 같은 의미이며 상하근기를 넘어 제 종파는 물론 이교도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을 문을 열었다. 이 안심 사상이 특히 도신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의 영향관계에 있음을 논구한다.


셋째, 일행삼매의 수용과 활용이다. 청화 스님은 ‘안심’에 이르기 위한 논리적 토대로서 선교일치, 행해(行解)상응, 선오후수(先悟後修), 선정(禪淨)일치를 상정하고 있다. 그 실천적 토대는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이며, 제 수행법들이 결국 실상염불로 귀결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 근거와 기반은 순선 시대 조사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 받았으며, 또한 스승인 금타 스님(1898-1948)의 가르침에 의해 선법을 정립시켰다. 이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청화불교(원통불법)로 지명되는 그의 불교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청화 스님의 내면을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생애사 연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개인의 생애사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대의 상황을 고찰하며, 그의 성향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그가 참여했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청화 스님의 법문에 대해 불교적 역사적 분석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Ⅱ. 원통불법의 성립

1. 청화 스님 생애사에 나타난 원통불법의 성립

먼저 청화 스님의 불교적 관점이 드러나게 된 생애사에 주목하고자 한다. 크게 ‘원통(圓通)불법’, ‘순선(純禪)시대’, 그리고 ‘안심(安心)법문’과 ‘일상(一相)’․‘일행(一行)’ 삼매 등으로 청화 스님의 불교적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생존 시에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입었지만, 입적 이후에도 청화 스님의 법문이 편집되어 유통되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특징이 나타난 배경으로서 먼저 청화 스님의 생애에 주목하고자 한다.

 

청화 스님이 제시한 ‘원통불법’은 한국불교의 특징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그 ‘원통’의 배경은 먼저 청화 스님의 행적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남긴 교의의 지향점이나 수행의 목표와 그 방법을 논하기 이전에 조망해야 할 일이다. 청화 스님에게 투영된 개인의 생애사를 되돌아본다면 격동의 한국사와 함께 당시 배태된 한국 근현대 불교사를 떠올려야 하는 이유가 대두된다.


청화 스님에 대한 생애가 정리된 자료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청화 스님이 잡지 ������불교춘추������와 인터뷰한 내용이 있으며, 둘째는 대주 스님이 정리한 생애 연보, 그리고 셋째는 청화스님 탑비명에 나타난 생애이다. 청화 스님의 생애사 통찰을 통해 시대적 상황의 이해는 물론, 이로 인해 원통불법이 성립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또한 순선시대를 주목했던 내용과 함께 염불선을 통해 정토를 구현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생애의 시기를 구분하고 청화 스님 관련 저술과 연구자료 등을 활용하여 그의 불교적 특징의 배경을 고찰하기로 한다.


연도

연령

활동 내용

제1기

1923-1947

(출가이전)

01세-24세

-유년기 儒書 섭렵

-동경 대성중학교 유학 5년 졸업

-광주사범학교 편입, 졸업

-교사 생활

-망운중학교 설립

-대박산에 혜운사 창건, 운영

-메이지대 유학 중 징병, 귀국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대립

제2기

1947-1985

(수도기)

24세-63세

-1947년 백양사 운문암 금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

-금타 스님(1948년 입적)

-지리산과 대흥사의 암자와 토굴, 남해보리암 등지에서 40여 년 간 수도 생활

-안성 칠장사 주석(무상 제자 얻음)

제3기

1985-2003

(전법기)

63세-81세

-태안사 3년, 동리산문 복원, 會相 이루다

-전법, 미주 지역 포교활동 등

-성륜사, 광륜사 창건

-2003년 입적


위와 같이 청화 스님의 연보를 활용하여 그의 생애를 3기로 구분하였다. 제1기는 출가 이전의 생활이며, 제2기는 수도에 매진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제3기는 회상(會相)을 이루어 원통불법을 펼쳤던 기간이다. 먼저 ‘원통불법’ 태동과 관련하여 청화 스님 생애 제1기와 제2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청화 스님이 살다 간 시대적 상황을 보면 ‘대립’이라는 낱말로 표현할 수 있다. 소년 강호성(청화 스님)이 일본 동경 대성중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37년 여름에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그가 4학년이었던 1939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며,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1941년에는 일본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또한 청년 강호성은 일본군에 징집되어 경남 진해에서 군생활을 경험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한반도는 해방되었지만, 다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청화 스님은 이웃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이념 대립에 회의를 느끼고 출가하였지만, 또다시 동족끼리 살상을 서슴지 않았던 6.15전쟁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 청화 스님은 교단 내에서 시작된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극심한 대립 과정을 목격해야 했다.


강호성(청화 스님)이 태어나 성장했던 시기는 우리 나라의 역사적으로도 매우 불행했던 시대였다. 해방공간의 이념 대립을 목격하고 출가했지만, 그가 출가했던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러 요인에 의한 대립의 연속이었다. 극렬한 대립과 대비되는 청화 스님의 온후한 성격 혹은 성향은 이러한 대립들을 혐오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출가동기는 훗날 원통불법을 성립시키는 주요 요인으로서 작용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스님이 대립이나 논쟁을 지양하고 회통과 원융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배경은 출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는 또한 청화 스님의 성격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고 하겠다.

스승인 금타 스님을 만나기 전 강호성은 유년기에 유학을 두루 배웠던 경험을 가졌으며, 철학적 사유에 빠져들기 좋아했다.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 청년은 이미 불교 교리들을 해박하게 꿰뚫고 있던 터였다. 이 때문에 금타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낼 토대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원통불법이 성립한 요인 가운데 청화 스님의 교육 이력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儒書 섭렵에 이어 일본 동경의 대성중학교 5년 과정을 졸업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다시 광주사범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다는 점에서 당시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했음이 확인된다. 더구나 망운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망운중학교(구 청운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는 점에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일본 메이지대학 수학 과정에서 중퇴했지만 당시로서는 엘리트였음을 알 수 있다.


청화 스님의 고등교육 과정을 수학했던 이력은 불교학 전반을 아우르는 회통적 기제가 작동했음을 알게 된다. 출가했을 당시부터 이미 한문과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따라서 講院에 나아가지 않았더라도 금타 스님의 메모를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원 이력이 없었을지라도 스스로 불교학과 관련되는 서적이나 자료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화 스님이 수도 과정에서 이동한 사암은 주로 총림이나 큰 사찰보다 토굴이나 암자가 많았다. 성륜사에 조선당 옆에 세워진 「무주당 청화대종사 탑비명」에는 스님이 정진했던 도량들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五十餘星霜을 慧雲寺 四聖庵 碧松寺 百丈庵 眞佛庵 上院庵 南彌勒庵 龍湫寺 上見性庵 扶蘇台 七長寺 泰安寺 內藏寺 等 諸方禪院과 土窟에서 一種食과 長坐不臥의 淸淨持戒로 琢磨精進하여 成就大道하셨다.”


청화 스님은 총림이나 규모가 큰 사찰을 두고 암자나 토굴을 중심의 도량으로 이동했다. 스님은 홀로 주석하거나 보다 조용한 곳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것은 불교학연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실제 청화 스님의 법문집인 ������원통불법의 요체������(2009)를 내용을 살펴볼 때 불교학 전반에 대한 이해는 물론 이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정통선의 향훈������(1989)에는 교의적 요소와 함께 선(禪)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들이 훌륭하게 구비되어 있다. 이에 따라 교관겸수의 실천을 위한 장소로서 작은 규모의 수행도량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종식을 유지하거나 장좌불와를 위한 자신만의 공간으로서 암자나 토굴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화 스님의 생애 연보에 따른 행적을 되돌아본다면, ‘원통불교’가 성립된 세 가지의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중일 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 좌우익의 이념대립과 6.25전쟁 등 대립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경험한 요인이다. 둘째는 한국불교의 종파주의와 비구와 대처승 간의 대립들을 경험했던 요인이다. 셋째는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수선(修禪)에 따른 불교 교리적 기반을 구비할 수 있었던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청화 스님은 격동의 불교현대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청화 스님은 당시 한국의 대립적인 상황과 한국불교의 실상을 바라보며 겪었을 심적 고뇌를 유추할 수 있다. 이를 ‘원통불법’ 탄생의 배경으로 보는 것이다.


2. 원통불법에 내재된 교판적 특징

교판 즉 교상판석(敎相判釋)은 불설에 대한 교파적, 종파적 판단이다. 중국인들은 불교 경론(經論)이 한역(漢譯)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교설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불설의 참뜻을 이해하고자 판단의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천태종 뿐만 아니라 선종이나 화엄종이나 법상종 등 제 종파는 불설에 대한 판단과 입장이 다르다. 청화 스님 역시 교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며 또한 이는 원통불교의 탄생의 기저라고 할 수 있다. 청화 스님은 법상종, 천태종, 화엄종, 진언종의 교판과 그 교리, 그리고 이에 따른 행상들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중국 唐․宋 시기 종파불교가 발달하면서 자파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교판이 이루어졌다. 선종 역시 그러하며, 한국의 조계종 역시 종파이므로 종파적 입장이 명확하다. 그러나 청화 스님의 원통불교(법)은 종파적 시각을 지양한다. 스님은 ‘원통’의 의미를 ‘원융(圓融)’과 ‘원통무애(圓通無碍)’ 또한 ‘회통(會通)불교’라고 하였다. 원통불교는 청화 스님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원효대사를 비롯하여 대각국사, 서산대사 등 한국의 역대 조사들의 입장이었음을 강조한다.

 

청화 스님은 원통불교의 교판에 입각하여 종파성이 없는 ‘순선 시대’ 조사들의 법문을 채택하였으며, 행상으로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에 주목하였다. 더불어 그 세부적인 수행론으로서 ‘염불선’을 제기하였으며, 이에 의하여 ‘안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원통불교는 종파나 교파와의 융섭은 물론 제 종교와 여러 사상, 즉 인문학과 이학이나 공학과도 교류하는 통섭을 시도한다. 따라서 본 교판적 입장은 청화 스님의 모든 법문 내용에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원통불법의 교판이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지와 부합되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을 비롯하여 여러 종파가 공존하고 있으며, 해당 종파는 고유의 종지(宗旨)를 갖는다. 종파 간에는 차별적 관계가 형성되거나 비판적 입장을 갖게 된다. 그러나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 제1장를 살펴보면, 오히려 청화 스님의 원통불법과 부합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래와 같이 종헌 제 1장 부분을 적시하고, 종명과 종지를 청화 스님의 원통불법의 입장에서 살펴본다.


第 1 章 宗名 및 宗旨

第 1 條 本宗은 大韓佛敎曹溪宗이라 稱한다.

本宗은 新羅 道義國師가 創樹한 迦智山門에서 起源하여 高麗 普照國師의 重闡을 거쳐 太古普愚國師의 諸宗包攝으로서 曹溪宗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宗脈이 綿綿不絶한 것이다.

第 2 條 本宗은 釋迦世尊의 自覺覺他 覺行圓滿한 根本敎理를 奉體하며 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함을 宗旨로 한다.

第 3 條 本宗의 所依經典은 金剛經과 傳燈法語로 한다.

其他 經典의 硏究와 念佛 持呪 等은 制限치 아니한다.


첫째, 종명으로서 ‘원통불법’과의 부합되는 지 여부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명은 합성어이다. 비록 ‘조계종(선종)’의 종명을 갖지만 ‘대한불교’가 부가됨으로써 종파적 지향점과 함께 불교 전반의 교의와 실천(수행)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더불어 보조국사의 사상과 실천, 그리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을 받들어 계승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이는 청화 스님이 제시한 ‘원통불교’의 의미와 부합된다는 점이다.


둘째, 종지로서 원통불법과의 부합이다. 종지에는 ‘자각각타’ 및 ‘전법도생’이 있다. 이는 종파를 초월하여 ‘불교’라는 불교가 종교로서 나아가야할 목표이며, 원통불법 역시 그러하다. 이어 각행‘원만’ 역시 ‘원통’불법이 갖는 어의와 일치한다. 종헌의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청화 스님의 본시성불(本是成佛)론과 일치한다. 청화 스님은 ‘본래면목’ 즉 ‘본래 성불해 있는 자신을 본다[견성]’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종헌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 반드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지향하는 화두참선을 가리킨다는 것을 적시하지 않는다.


셋째, 소의경전과 수행법의 다양성 인정 부분이다. 비록 조계종 종헌의 소의경전이 ������금강경������이지만, 다른 경전에 대한 연구의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또한 수행법으로서 화두참선뿐만 아니라 염불 수행이나 주문을 지니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수행법에 대한 청화 스님의 지향점과 일치한다. 염불이나 주문, 기도, 예배(예경) 등 다양한 행법들을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원통불법에 부합된다. 나아가 원통불법은 불교 제 종파의 교의나 행법들을 포섭한다. 또한 유․불․선을 포함한 제 사상과의 융섭을 지향하며, 더 나아가 원통불법은 인문학적 융섭을 넘어 인문과 자연이 불성으로서 원융되는 이치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등 여타 종교와도 교류가 가능하다는 점이 그의 법문 중에 드러나 있다.


조계종 종헌은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고 있다. 이는 제 종파 포섭과 통섭의 정신인 청화 스님의 ‘원통불법’과 일치한다. 원통불법의 정신에 따라 청화 스님의 법문은 천태종의 가르침인 교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정토교 理想인 정토의 구현, 그리고 그 4종 염불수행법을 수행법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2012년 불교 수행법 채택에 있어서 조계종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 화두참선을 위주로 수행이력을 인정했던 관례를 깨고 염불수행 역시 안거의 수행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청화 스님의 원통불교는 현 조계종 종지와 일치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Ⅲ. ‘순선안심’ 및 ‘일행삼매’ 채택의 배경

1. ‘순선’의 채택 배경

청화 스님이 ‘순선’을 채택하게 된 배경 요인으로서 과거와 현실의 종파불교가 갖는 대립적 인식이다. 스님은 제종포섭의 대안으로서 ‘원통불법’ 그리고 ‘순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는 대립 해소와 화해라는 불교가 갖는 본령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순선 시대 즉 청화 스님이 주목한 것은 보리달마로부터 혜능 입적에 이르는 기간이며, 이 시기야말로 종파적 색채가 없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선학자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초기 선종’, 혹은 ‘선종의 성립기’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화 스님은 순선 시대라고 단언할 뿐 (선종) 종파의 성립기라는 용어나 술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님의 시각은 종파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단어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혜능 이후의 선을 ‘순선’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청화 스님의 법문 어디에도 누카리야가 사용한 ‘禪機’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스님의 법문에는 혜능 이후 벌어진 남종과 북종의 구분에 대한 내용이 없음도 마찬가지이다. 혜능 이후의 선종 성립에 대한 내용에 대해 청화 스님은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법문집에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돈․점 논쟁 등 禪관련 논쟁들을 거의 상정하지 않았다. 이는 종파적 논쟁 자체를 배격하며 또한 배제하는 청화 스님의 성향이기도 하다.

 

혜능의 제자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는 732(開元 20)년 하남성 활대(滑臺)의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宗論을 제기하였다. 신회는 “신수계의 북종선은 방계이다. 조계 혜능이야말로 보리달마 남종의 정법을 이은 조사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활대의 종론’이며 중국선종사에 있어서 남종과 북종으로 구분되는 분수령으로 보는 것이다. 그 종론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이다. 또한 종밀은 이 ������시비론������의 내용을 자신의 저술인 ������선문사자승습도������에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청화 스님의 법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청화 스님은 당과 송 시기에 발달했던 선종의 ‘5가7종’의 분화와 대립에 대한 내용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쉬움의 표현일 뿐이다.


근세의 선사인 백파긍선(1767~1852)이 일으킨 선 논쟁에 대한 언급 역시 청화 스님의 법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스님은 또한 현대에 들어 발생한 ‘돈오’와 ‘점수’에 대한 논쟁 내용이나 그 전개 과정 역시 배제하고 있다. 다만 先師들이 언급한 돈오나 점수에 대한 역사적, 자료적 근거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는 돈오행이나 점수행의 차별이 논쟁으로 비화되어야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청화 스님 스스로 그러한 논쟁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있다.


한국불교의 현실에 이어 청화 스님의 생애사에서 ‘순선’ 채택에 대한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스님은 한국의 격변기에 성장하고 활동했다. 스님이 겪은 것은 이념대립과 전쟁, 그리고 근대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질곡의 연속이었다. 시대적 소명으로서 청화 스님은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는 ‘원통불법’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 근거로서 ‘순선’을 선택한 것이다.


청화 스님이 제시한 ‘순선’ 용어는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 일본의 선학자 누카리야 가이텐이 자신의 저술인 ������선학사상사������(1925)의 목차에서 구분한 것에서 비롯된다. 혜능의 입적을 중심으로 그 이전을 ‘순선시대’로 명명하였으며, 이후를 ‘선기(禪機)시대’라고 한 것이다. 누카리야가 활동하던 당시 돈황에서는 ‘순선시대’에 성립된 고문헌들이 발견되었고 또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돈황석굴 문헌의 유출은 1907년 탐험가인 영국인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국적의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동굴관리인 왕원록으로부터 유물들을 사갔다. 1천년이 넘도록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던 문헌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일본인 학자들도 문헌 수집에 나섰고, 중국인들도 이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 문헌들은 런던과 파리, 페테스부르그, 북경 등 각국 박물관에 분할 소장되어 있다. 이들 문헌군에 대한 학자들의 깊은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 문헌 중 돈황 출토 선적(禪籍)인 ������단경������이나 ������능가사자기������, ������전법보기������, ������역대법보기������ 등은 선학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일본의 불교학자인 柳田聖山(야나기다 세이잔)에 의해 ������初期の禪史������ Ⅰ이 발행되었다. 1971년 ������능가사자기������와 ������전법보기������에 대한 역주가 초판 발행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야나기다는 또 그의 저술인 ������純禪の時代������의 「서문」에서 ‘純禪’ 용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을 밝히고 있다.


순선 시대에 활동했던 조사들의 법어가 1,300여 년을 넘어 청화 스님의 손에도 들려지게 된 것이다. 특히 ������능가사자기������에 수록된 道信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 내용이 청화 스님으로 하여금 순선 시대에 주목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이야말로 청화 스님이 구상하고 지향했던 ‘원통’적 교판과 부합되었던 것이다.

 

비록 산중에서 수도에 매진했던 청화 스님이지만 세속 나이 50(1972)세가 넘으면서 그의 지도편달을 바라는 납자들이 증가했고, 이를 위해 교의와 선법 연구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당연하다. 누카리야의 ������禪學思想史������나 宇井伯壽(우이 하쿠쥬)의 ������禪宗史硏究������ 시리즈를 열람했을 것이다. 더불어 柳田聖山의 ������능가사자기������ 주석서를 읽어보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는 청화 스님의 일본 유학생활과 관련이 깊다. 그는 일본에서 대성중학교를 졸업했으며, 훗날 메이지대학에서 1년을 수학했던 터였다. 이에 따라 청화 스님은 일본어에 능통했고, 선학자들의 저술들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특히 ������능가사자기������에 담겨진 순선 시대의 선사상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화 스님이 ‘순선’을 채택한 의도는 종파적 인식의 배제에 있다. 스님은 종파불교 즉 ‘禪機時代’가 가리키는 바와 같이 화두참선 위주의 선이 禪者 위주의 전문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이는 화두참선만으로는 선의 대중화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순선’이라면 대중들은 보다 쉽게 염불과 염불선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청화 스님이 ‘순선’시대를 부각시키고자 한 점은 ‘누구나’ 근기의 차별 없이 선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통’ 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한다. 이는 화두 참구의 전통적인 선법을 계승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따라 대중들을 포용하기 위한 ‘원통’적 인식인 것이다.


2. ‘일상삼매’‧‘일행삼매’의 수용 과정

앞의 장에서 청화 스님의 ‘순선’ 채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본 장에서는 순선 시대에 수용된 일상삼매 및 일행삼매에 대하여 고찰한다. 순선시대 조사들의 일상․일행, 특히 도신의 사상이 청화 선사에게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논구한다.


1) 경론에 나타난 ‘일상’‧‘일행’ 삼매

이 두 가지 삼매가 처음으로 등장한 자료는 구마라집 역 ������대품반야경������과 이를 해석한 ������대지도론������으로 볼 수 있다. 구마라집은 ‘일행삼매’를 일컬어 ‘畢竟空에 相應하는 三昧’라고 번역하였다. 이후 순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일상․일행에 대한 경론이 번역되었고, 여러 조사들이 이를 인용하거나 응용하였다.

먼저 ������문수설반야경������(2권)의 번역과 ‘일행삼매’에 대해 알아본다. 이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梁(502~557) 시기 만다라선(曼陀羅仙)이 번역하였고, 그 ‘일행삼매’는 여기에서 연원한다. 그 행법 내용은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般若波羅蜜을 듣고서 修學하여 三昧에 들고 그리고 不退와 無碍, 無相을 얻는다. ② 空閑의 處에 亂意를 버리고 相貌를 취하지 않으며 마음으로써 오로지 一佛의 名號를 稱하며, ③부처를 향하여 端身正坐하고 念中에 三世諸佛을 보며, 法界가 差別相이 아닌 三昧에 든다.”

이어서 ������기신론������의 ‘일상’과 ‘일행삼매’이 있다. 양의 만다라선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眞諦(499-569)의 번역인 ������기신론������(1권)에도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法界一相을 諸佛法身과 衆生身의 平等無二로 해석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일행삼매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상’과 ‘일행’이 나타나 있으며 이는 ������문수설경반야경������의 내용과 연계된다.


2) 순선 조사들의 일상과 일행삼매

모두 다섯 명의 조사들에 의해 두 가지 삼매가 인용되거나 활용되었다. 첫째, 수 천태대사(538-597)의 일행삼매 분류를 알아본다. 중국인으로 최초로 일행삼매에 주목한 인물은 천태대사로 여겨진다. 그는 ������마하지관������에서 사종삼매로 구분하면서 ������문수설반야경������의 내용을 전제하고 있다. 일행(一行)삼매를 그의 선관체계인 사종삼매 중 상좌삼매에 포함시키고 있다.

둘째, 천태 대사 이후에 활동한 당 도작(道綽, 562-645)은 ������안락집������(2권)에서 ‘일상’‧‘일행’ 두 가지 삼매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일상삼매는 가리켜 ‘專念一佛 不捨是緣’이라 하였으며 이는 ������花首經������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행삼매는 ������문수설반야경������에 의거한다고 하였다.

 

셋째, 선도의 ‘칭명’과 ‘일행삼매’이다. 善導(613-681)는 ������왕생예찬게������(1권)에서 口稱과 일행삼매를 강조하고 있으며, ������문수설반야경������에서 밝힌 ‘칭명’의 해석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에는 一行三昧를 통해 念中에 阿彌陀佛과 一切佛을 볼 수 있음을 시설하고 있다. ������왕생예찬게������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淨土敎에 있어 ‘稱名念佛’의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넷째, 혜능(638-713)의 법문에는 일상, 일행 두 가지 삼매가 함께 나타난다. ������육조단경������ 덕이본에서 볼 수 있다. 일상삼매‘는 미움이나 애착이 생기지 않으며 버리거나 취하지 않고, 안락으로 고요하며 비움으로서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만일 일체처에서 행․주․좌․와로 純一直心이며, 不動道場이면 참다운 淨土를 이룬다.”고 하여 이것을 가리켜 ’일행삼매‘라고 하였다.


다섯째, 도신의 ‘일상’ 및 ‘일행’삼매의 적극적 활용이다. 당 도신(580-651)은 ������입도안심요방편법문������에서 ‘일상’과 ‘일행삼매’를 수록하고 있다. 일행삼매에 들어가는 방법의 두 가지를 그대로 설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로서 일행삼매는 ‘卽念佛心是佛’로서 망념이 없는 삼매에 들어 법계와 여하여 불퇴, 불괴, 부사의, 무애 무상을 얻는 것이다. 그 두 번째는 空閑의 처소에서 어지러운 마음을 버리고 결가부좌하여 相貌를 취하지 않고 마음에 일불을 계연하여 名字를 전칭하며, 부처님의 방소에 端身正向하여 념념상속하면서 念 중에 삼세 제불을 보며, 그 법계의 무차별한 모습을 알아 삼매에 드는 방법임을 설명한다. 도신은 「나의 이 법요는 ������능가경������의 ‘諸佛心第一’에 의지하며, 또 ������문수설반야경������의 ‘一行三昧’에 의지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도신이 천태지의의 분류인 ‘상좌삼매’, 그리고 도작의 분류인 ‘일상’과 ‘일행’을 계승하고 있다.


 도신은 ‘법계일상 계연법계’라 하여 ‘일상’을 정의하고 있으며, ‘일행삼매’를 가리켜 ‘마음을 한 부처님에 엮고 오로지 그 명호를 칭한다[繫心一佛 專稱名字].’라고 밝히고 있다. 도신이 활용한 일상 및 일행삼매 법요는 그의 제자인 홍인의 ������수심요론������에 반영되었으며, 「신수(神秀)」장에도 언급되어 있다. 또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청화 스님의 선법 성립에도 영향을 끼친다.


3) 청화 스님의 수용

위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순선시대의 조사들이 일상․일행 삼매에 주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청화 스님이 자주 인용하는 일상․일행 삼매 역시 순선 시대에 활약했던 조사들의 법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스님은 또한 스승인 금타 스님의 법문을 활용하여 ‘일상’과 ‘일행’의 삼매를 독자적인 수행법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청화 스님은 일상삼매에는 ‘止’와 ‘定’의 의미가, 그리고 일행삼매는 ‘觀’과 ‘慧’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스님은 지관쌍수와 정혜균등의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청화 스님의 법문 중에 나타난 ‘일상’ 및 ‘일행’과 관련된 내용을 추출하여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일상’

‘일행’

통합 명칭

전거(典據)

一相三昧

一行三昧

眞如三昧

������원통불법의 요체������ p.248

慧(觀)

定(止)

定慧均等

������안심법문������p.229

진여불성 관찰

일상삼매 지속

 

������안심법문������p.229

천지우주가 불성

一相의 念念相續

一切種智

������마음의 고향������3 p.40

如猫捕鼠

如鷄抱卵

啐啄同時

������원통불법의 요체������ p.248

理入

行入

二入

������원통불법의 요체������ p.248

觀: 見性

念: 悟道

定慧均持

������금강심론������p.58

實相三昧

普賢三昧

 

������원통불법의 요체������ p.248


청화 스님은 ������안심법문������(2010)에서 ‘一相’을 가리켜 ‘천지 우주가 오직 부처뿐’이라는 하나의 도리로 보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一行’이란 이 ‘一相’을 빈틈없이 지속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一行을 가리켜 ‘부처의 경계를 보림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스님은 이 一相과 一行을 가리켜 참선수행이든 염불이든 또한 다라니 기도 등 불교의 모든 행법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3. 도신과 청화 스님의 사상적 영향관계 고찰

순선 시대에 활동한 도신은 수행자들을 위하여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을 지었고, 그 내용은 ������능가사자기������에 정리되어 있다. 그는 ������문수설반야경������ 내용 중에서 삼매행법을 인용하였으며, 또한 여러 경론에 나타난 문구들을 인용하여 독자적인 선법으로 성립시켰다. 그 주요 내용은 ①‘반야’, ②‘칭명’, ③‘견불’에 이은 ④‘안심’의 네 가지이다. 청화 스님은 저술이나 법문에서 도신의 가르침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네 가지의 선법들을 중심으로 도신과 청화 스님의 영향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청화 스님의 ①‘반야’법문은 도신이 설한 본불(本佛) 사상과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갖는다. ������능가사자기������ 「도신」장에는 ‘반야’가 발견된다. 도신은 ‘諸法皆空의 無分別智’를 강조하였으며, ‘實相으로서 無相不相의 一切智’에 이를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안심’을 ‘반야’와 함께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안심’은 다른 말로 “‘여래 진실법성신’이며, ‘정법’이며, ‘불성’이며, ‘제법실상 실제’이며, ‘정토’이며, ‘보리 금강삼매 본각’이며, ‘열반계반야’ 등으로서 그 모두가 동일체”라는 것이다. 이에 도신은 ‘염불심이 부처요, 망념이 범부’라고 하였다. 즉 지혜로서 깨친 상태이며, 미망으로서 중생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중생 누구나 내면에 ‘佛’을 내재한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청화 스님 역시 안심을 반야(깨침)와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 깨침[佛]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도신의 ������능가사자기������에서 볼 수 있듯이, 청화 스님의 ������원통불법의 요체������(2009)에서도 도신의 법문을 인용하고 있다. 청화 스님은 금타 스님의 「보리방편문」을 인용하면서 ‘佛’의 명호를 14가지로 부르고 있다. 佛을 달리 부르는 명호는 ‘여래’, ‘진여’, ‘법성’, ‘실상’, ‘보리’, ‘道’, ‘大我’, ‘진아’, ‘열반’, ‘극락’, ‘一物’, ‘중도’, ‘覺’, ‘주인공’의 14가지이다. 이러한 불타론에 대한 인식으로서 스님은 그의 설법집인 ������안심법문������(2010)에서는 이보다 증가된 18가지 명호로 대체하고 있다. 결국 ‘안심’이라는 ‘깨침’에 이르기 위해 다양한 ‘방편’들, 즉 여러 가지 행상(行相)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청화 스님 여러 법문에서 본래면목을 강조하였으며, 본시성불론을 제시하고 있다. 스님은 ‘本來無一物로서 무량공덕을 갖춘 淸淨寂光이 충만한 것을 생각하여 마음을 매는 實相觀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특히 청화선사탑비명에는 “一切衆生과 萬有의 體性은 本是眞佛인데 是諸衆生이 迷惑業力으로 끊임없이 生死輪廻하는 故로…”고 하였다. 즉 인간은 본래부터 행복을 갖추고 있으며, 진여불성과 자비, 그리고 지혜와 능력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본성의 자리를 찾아야 ‘安心立命’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능가사자기������ 「도신」장에 수록된 그의 법문은 禪者 누구나 ‘반야’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그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다. 청화 스님 역시 도신의 반야 사상을 법문 중에서 활발하게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②‘칭명’에 있어 도신과 청화 스님의 사상적 영향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능가사자기������에 의하면 도신은 ������문수설반야경������이 가리키는 ‘專稱名字’를 인용하여 선자들을 가르쳤고, 이를 위해 ‘염불심’을 강조하였다. 그 염불수행이 ‘안심’으로 귀결됨을 논증하고 있다. 도신은 안심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守一不移의 오문선의 방편을 세웠다.


도신이 가르친 염불 방법은 먼저 ‘반야’에 기반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行’과 ‘念’은 두 반야경에 의거 하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즉 ������문수설반야경������에 의한 일행삼매, 그리고 ������대품반야경������에 의한 ‘무소념의 념’을 자신의 법문에 적시하고 있다. 이와 달리 도신의 행적 기록에서도 ‘반야의 념’에 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속고승전������에는 도신이 吉州寺에서 도적 떼들을 물리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길주 刺史에게 모두 함께 ‘오로지 반야를 염하라(但念般若)’ 및 ‘함께 소리 내어 반야바라밀을 외쳐라(同時合聲)’라고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반야+구칭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결국 도신의 일상과 일행, 그리고 안심에 이르는 과정이 ‘반야의 념’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화 스님은 역시 법문에서 도신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專稱名號라, 우리가 초심일 때는 이름을 자꾸 외우고 하나만 생각해야 마음이 모아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로만 외워야 마음이 계속되어 통일이 잘 되는 것이지 … 기왕이면 부처의 상호를 상상하면 좋겠지요.”라고 하여 초심자 혹은 근기가 낮은 이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청화 스님의 이같은 입장은 도신설과 연계된다. 도신은 ‘上上人은 行과 解를 구비함으로써 수증이 이루어지며, 中上人이나 下下人 등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역시 청화 스님이 하근기의 행자를 상근기로 인도하는 과정과 같다. 이 때 청화 스님은 가르침[解]과 수행[行]이 일치해야 하는 ‘行解相應’을 그의 법문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비유하듯이 나그네가 지도를 보고 길을 알고 떠나야 하듯이 먼저 불교와 수행법을 이해하고 닦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先悟後修’임을 강조하였다. 이 역시 도신의 칭명으로부터 비롯되어 청화 스님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셋째, ������문수설반야경������의 ③‘견불’을 수용한 도신의 법문과 청화 스님의 정토사상 역시 분명한 영향관계를 갖는다. 도신은 염불에 의한 견불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이 안심으로 귀결됨을 설하고 있다. 도신은 스승 승찬을 찾아 「了了見佛性」의 耭緣으로부터 인가받았으며, 이를 제자인 홍인에게도 傳授하고 있다. 이로써 ‘견불성’을 수행의 지표로 삼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보현관경������을 인용하여 ‘관심(觀心)염불’을 말하고 있으며, ������대품반야경������을 인용하여 ‘무소념의 念心이야말로 念佛이며, 그 心이야말로 安心’이라는 것이다. 그 ‘안심’은 ‘如來眞實法性之身’이며, ‘정토’와 같은 말[同名]이라고 하였다.


도신은 또한 ‘본래 心이 불생불멸이며 구경으로 청정함을 안다면 곧 청정불국토이다.’라고 하여 유심정토를 추구한 점이 확인된다. 도신이 坐禪看心을 강조하거나 念佛을 통해 부처님을 본다는 점, 그리고 염불자 자신이 부처임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청화 스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이에 청화 스님은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활용한다. 그것은 ‘이 마음이 부처를 짓고(是心作佛), 이 마음이 부처일지니(是心是佛)’의 문구이다. 이는 염불자가 ‘작(作)’과 ‘시(是)’를 통해 佛을 구현하게 되는 ‘자성미타 유심정토’의 전형이다. 이로 인해 중생들은 이미 ‘보신불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이며, 염불자는 결국 그 부처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청화 스님의 법문에는 여러 번 ‘見性’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스님은 염불자가 염불 수행을 통해 자신의 본래면목이 곧 부처[見性]임을 확인하는 실상염불을 주창하였다. 스님은 우주만유가 곧 불성이며, 중생 모두가 본래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본래불’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중생이란 다만 잠시간 미망과 번뇌에 의해 본래면목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수행이 깨침을 향하며, 그 ‘깨침은 자신이 본래부터 성불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제 수행법을 ‘일상‧일행’으로 회통시키고 있다. 이 때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행법들이 노정되는데, 이들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화두참선 역시 행법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 행법들은 결국 실상염불[염불선]로 회통되며 결국 ‘안심’에 도달하게 된다.


 

경론: 반야경, 문수설반야경, 관무량수경 기신론

도신

반야․칭명․견불

순선

안심

염불선

선오후수

청화

행해상응

 

행상: 일상삼매․일행삼매, 사종염불, 간화선 등


넷째, 위에서 도시한 바와 같이 도신과 청화 스님의 교의와

 행상의 목표는 ④‘안심’으로 모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안심’에 이른다는 것이 반야(깨침)의 완성이며 그것이 곧 정토의 구현이라는 점을 앞에서 강조하였다. 청화 스님은 깨침에 대한 가르침은 ‘안심’에 기반한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은 우주의 도리대로 본래 내가 없는 無我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분명히 생각해야 하고 내 집이나 내 소유물이나 내 절이나 내 종단이나 이런 것도 본래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참 편합니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무아와 무소유로서 안심법문을 설하고 있다. 이와 함께 벽산문도회의 이름으로 출판한 ������안심법문������에서 스님은 ‘순선안심탁마법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여기서 스님은 안심법문은 안락(安樂)법문이며 안상(安詳)삼매로서 선오후수(先悟後修)를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이 안심은 혜능 이후에 성립된 조사선의 ‘돈오선(화두선)’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구별을 위해 스님은 ‘순선시대의 안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가리키는 안심의 ‘심(心)’이 어느 경론에 기반하고 있을까. 물론 ������육조단경������(덕이본)의 “그대들 스스로의 마음이야말로 부처일지니…”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관무량수경������의 “이 마음이 곧 32상 80수형호라.”의 인용하는 빈도가 높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나 우리 본래적인 인간성은 똑같습니다.”에서 보듯이 모든 중생 역시 석가와 동일하다는 점, 즉 비록 중생의 마음일지라도 그것은 본래 부처였음을 알리고 있다. 그것을 스님은 ‘당체즉불(當體卽佛)’이라고 표현한다. 당체인 자신이 미혹한 중생이 아니라 본래 성불한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을 두고 ‘실상염불’이라 하였으며, 청화 스님은 그 염불선 수행을 통해 정토를 구현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염불선의 목표는 ‘안심’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유심)정토’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 ‘순선안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염불선 뿐만 아니라 화두선이나 묵조선을 포함한다고 스님은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기도나 주문, 예배, 명호를 부르는 구칭 등의 단계적 실천에 의한다면 안심 경계에 들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안심에 이르기 위해 불교의 모든 수행방편들을 會通하므로 청화 스님의 행상(行相) 판단(교판)은 원통불교(법)인 것이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원통불법’이 성립된 배경으로서 청화 스님의 생애사, 순선 시대, 그리고 도신의 선사상과 그 영향관계를 고찰하였다. 본 연구 결과와 의의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현대사 격변기에 성장하고 활동했던 청화 스님의 생애와 원통불교의 연관성에 대하여 논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탄생한 청화 스님은 2003년 입적할 때까지 격변기의 한 가운데 있었다. 국제적으로 제2차 세계대과 동서 간의 이념대립, 그리고 국내에서도 좌우익의 대립에 이어 전쟁을 겪었다. 전후 이어졌던 국내의 혼란상은 물론 불교계 역시 정화운동의 바람이 거셌으며, 10.27(1980)법난을 목도해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대립과 질곡을 해소하고자 청화 스님은 원통불법의 기치를 든 배경이다.


둘째, 한국불교의 특징으로서 (원)통불교임을 확인하였다. 원효, 의천 등 한국의 고승들이 이미 원통불교를 지향했다고 주창하였다. 그런데 청화 스님은 최상승선인 간화선은 누구나 향유하기 어려운 선으로 보았다. 스님은 제종파를 포섭하는 원융과 회통의 불교로서 선자들 뿐만 아니라 근기의 차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수행법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원통불교의 취지가 조계종의 종지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논증하였다.


셋째, 삼매로서 ‘일상’‧‘일행’의 행법이다. 청화 스님은 혜능 이전의 순선시대 조사들이 설정한 일행삼매에 주목했으며 특히 도신의 선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님은 도신의 일상과 일행을 ‘止’와 ‘觀’, ‘慧’와 ‘定’에 배치하여 선법을 체계화하였다. 그 수행의 목표는 安心으로 귀결되도록 하였다. 안심은 곧 불교의 깨침과 동등한 의미를 가진다. 조사들의 고원(高遠)한 선기(禪機)의 세계라기보다 범부들도 불법 실천에 의해 ‘안심(편안한 마음)[깨침]’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전했다.


넷째, 정토(불국토) 구현이다. 청화 스님은 철저하게 유심정토를 주창하였다. 구칭염불이나 관상(觀想)염불 모두가 (실상)염불선으로 회통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화두참선 역시 염불선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결국 청화 스님의 목표는 정토구현이며, 이는 대중들이 ‘안심’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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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쌍봉도신의 일행삼매에 대한 연원」(������한국불교학������ 31집, 2002)




토론


최동순 교수의 「원통불법의 기반으로서 도신의 선사상」에 대한 토론문


손병욱

경상대학교


본고는 청화선사의 불교사상을 요약하는 핵심적인 용어인 ‘순선시대, 원통불법, 안심법문, 실상염불=염불선,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등의 개념을 설명하고 이들 용어들이 청화선사의 사상 속에서 어떻게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순선시대 조사들 가운데서 특히 4조 도신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선사상이 청화선사의 불교사상을 총괄하는 용어인 원통불법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지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논평자는 논자인 최동순 교수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서 보다 명확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보아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논자의 답변을 들음으로ㅆ 청화선사의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좀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질문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선사의 원통불법이 무엇을 원융회통(圓融會通) 시키고자 했던가에 대하여 본고에서 각주의 형식을 빌려서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논자는 그것을 公案禪과 默照禪, 그리고 念佛禪의 회통이라고 본다. 나아가 “법상종 교판과 천태교판을 수용하고 있으며, 계율론을 개진하고 있다. 『안심법문』에서는 유식론은 물론 연기설을 설하고 있어 제 종파나 교파들을 융섭하고 있다. 그리고 인문학과 자연학은 물론이고, 기독교 등 다른 종교와의 융섭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원효대사가 귀일심원(歸一心願)의 관점에서 십문(十門)을 화쟁시키고 있는 것에 비견해 비견해 볼 때, 청화선사는 그의 독특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선오후수(先悟後修)적인 실상염불(實相念佛)로서의 염불선’에 입각하여 원통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덧붙여 논평자는 두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선사가 원융회통 시키고자 했던 대상으로는 위에 든 것들 외에도 조사선과 여래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자력과 타력 등도 포함된다고 본다. 이 가운데서 특히 최근세에 불교계에서 논란이 되었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회통에 대한 선사의 견해가 무엇이었다고 보는지에 대해 논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둘째, 선사의 원통불법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4조 도신의 사상이 어떤 영향을 미쳤던가가 좀 더 명확하게 제시되었으면 한다. 여기에 대해 보충적인 설명을 부탁드린다.

2. 논자는 본고에서 ‘원통불법의 교판(敎判)’이란 말을 수차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목차 중 ‘원통불법에 내재된 교판적 특징’에서 청화선사가 주창하는 원통불법의 교판이 무엇인지가 먼저 분명히 제시된 후, 이러한 교판이 갖는 의미가 탐구되어야 하는데, 그 교판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못했다. 그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교판과 비교하여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지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교판이라면 본고 주11)의 법상종 교판. 천태종 교판에 나오듯이 그것이 화의사교, 화법사교 등으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이런 관점에서 교판을 설명해 주셨으면 한다.

3. 본고 주4)의 아랫부분 본문에서 논자는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실천을 위한 장소로서 작은 규모의 수행도량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언 뜻 이해가 안 된다. 왜냐하면 교관겸수란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주창한 슬로건으로.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아우른다는 의미를 갖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천태종에서 이러한 교관겸수의 입장이 잘 나타난다. 천태종의 삼대교리를 보면 그것은 일념삼천설, 일심삼관, 마하지관인데, 앞의 둘이 교종의 입장을 드러낸다면 뒤의 마하지관은 선종의 지관병수(止觀幷修)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졌듯이 의천의 시대에는 교종을 토대로 선종을 포용하여야 할 시대적인 요청이 있었다. 이에 그는 천태종을 중심으로 한 교관겸수를 주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청화선사는 어디까지나 조계종에 소속된 선사(禪師)이다. 그가 교종적 관점을 도외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용하려고 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사가 직접 교관겸수라는 말을 쓰고 강조하지 않은 이상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에 대한 논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4. 청화선사가 강조하고 주창한 염불선이란 “반야바라밀에 입각하여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무념으로 수(修)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우리가 선사를 통해 알고 있는 일상상매, 일행삼매 중 여묘포소(如猫捕鼠)에 비유되는 일상삼매에 대한 도신의 견해가 무엇인지가 약간 불분명하다. 도신이 말하는 일상에 대한 언급인 “법계일상 계연법계”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선사가 말하는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뿐이라는 하나의 도리로 보는 것’ 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을 부탁드린다.

5. 본고 3장 2정 항목 3) ‘청화스님의 수용’에서 “청화스님은 일상삼매에는 止와 定의 의미가, 그리고 일행삼매는 觀과 慧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하면서 여기에 주)를 달아서 다르게 보는 경우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언급은 선사의 원통불법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오해할 수 이쓴 여지를 제공한다. 비록 책에 따라 언급이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선사의 본래입장을 본문에 넣고 여기에 주)를 달아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언급하는 것이 논문의 흐름상 맞는다고 본다.

6. 본고에서 논자는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에 대한 명칭이 청화선사의 사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조사, 정리하여 도표로써 제시하였다. 여기서 보면 여묘포서는 일상에, 여계포란은 일행에, 줄탁동시는 통합명칭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때 여묘포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선사의 법문을 정리한 책인 『원통불법의 요체』를 보면 ‘고양이 주 잡듯이 하라’의 여묘포서를 “화두를 참구할 때나 염불할 때나 눈도 깜짝 않고서 마음이 한 눈 팔지 않고 그 자리만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뒤에 나오는 일행삼매에 해당하는 여계포란의 의미, 즉 닭 알 품듯이 하라는 말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되고 만다. 청화선사에 있어서 일상삼매는 先悟요, 理入이요,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다. 이럴진대 이것은 위의 여묘포서 풀이와 맞지 않다. 어떻게 설명하면 여묘포서의 본래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논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3.정통불법의 재천명 제5차 세미나(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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