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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자유게시판

[스크랩] 우리에게 오셨던 자비의 聖者요 참수행자의 表象 청화스님을 그리워합니다


 
① 마음의 고향 곡성 성륜사 공식 사이트 ② 마음의 고향 곡성 성륜사 공식 카페 [1] 청화스님 (上) : 플라톤 著 '공화국' 등 철학서 섭렵 : 나무아미타불 ▲ 스님은 1년에 한번씩 신약성서를 읽기도 했다. 청화 스님은 출가 전 상당히 진보적 의식을 갖고 있었고, 동양철학을 비롯한 동서고금의 철학사에도 관심이 지대해 상당량의 철학서를 탐독했다. 스스로도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 철학서적을 이것저것 약간 섭렵했다. 동양철학을 보면서 물론 불교서적을 보았고, 그래서 '불교입문서' 도 보고 '법화경' 도 보며 승려가 되기 전에 나름대로 불교의 윤곽은 있었다" 고 회고하기도 했을 정도다. 때문에 스님의 법문에서는 어렵지 않게 서양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불법을 설하면서도 언제나 서양철학자들의 말과 사상을 곁들였고, 대중이 알기 쉽게 그 뜻을 펼쳤다. 그 중 어느 법문에서는 "정치가든 누구든 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한다" 는 점을 강조하면서 "성자가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가 성자의 길을 닦기 전에는 인류의 해악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 고 표현한 플라톤의 책 '공화국' 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공화국(Politeia)' 에는 철학적 담론이 여럿 들어있다. 사회정의가 실현되기 위한 정체는 어떤 것인가, 정의로운 국가에서 인간 개인들의 삶은 어떤가, 한 개인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등의 사회실천과 개인의 함양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 또한 건전한 인격의 함양을 위한 교육의 형식들과 단계들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논제들이 스님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었기에 스님 역시 직접 책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아끼지 않았을까 싶다.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하고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미 철학서를 탐독, 불교에 관한 공부가 익어갔던 스님은 24세에 백양사 운문암을 찾아 송만암 스님의 상좌인 금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하루 한 끼의 공양과 장좌불와, 그리고 청빈과 통불교사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아 수행했던 스님은 사성암에서 홀로 삼동 한철을 나면서 수행처 앞에 '근고청중(謹告淸衆)' 이라 하여 이른바 '삼가 청정대중에게 알림' 이라는 푯말을 내걸고 수행에 전념하기도 했다. 이때 내건 글이 '생사사대(生死事大,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인데) 무상신속(無常迅速,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촌음가석(寸陰可惜,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신물방일(愼勿放逸,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 는 것으로 수행자라면 누구나 지남으로 삼아야 할 내용이었다. 어느 시인이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향훈의 큰스님" 이라고 칭송했듯, 말과 삶이 같았던 스님은 종교에 있어서도 결코 터부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와 관련해 "깊이 연구해서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이블을 정성껏 보기도 했다" 고 한 스님은 "톨스토이와 같이 순수한 진리성으로 기독교를 믿는 쪽으로 지낸 분들의 책이 좋아서 읽기도 했다" 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부안 실상사 복원불사 기공식 자리에서는 "진실한 불교인은 진실한 기독교인이며 진실한 기독교인은 진실한 불교인이다" 라며 진리는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기도 했다. 특히 스스로도 "신약성서를 일 년에 한 번씩은 읽는다" 고 했던 스님은 "편견 없이 허심탄회하게 읽는다면 어느 종교나 그 핵심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설명하며 상대를 비판하기에 앞서 이해하고,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했다. [2] 청화 스님 (中) : '반야심경' 공空 사상이 불법 핵심 : 나무아미타불 무아·무소유의 삶을 살아간 우리시대 큰 스승 청화 스님은 언제나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스스로도 출가 이래 단 한 번도 수선안거를 어긴 일이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스님의 평생 화두는 '중도실상(中道實相)' 이었다. 그래서 "선이란 우리 마음을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수행법이다. 중도실상에 입각하면 회통이 된다. 중도실상의 안목을 가지고 바른생활을 해야만 바른 깨달음이 가능하다" 고 했다. 뿐만아니라 돈점(頓漸) 논쟁에 대해서도 입장이 분명했다. "돈오돈수는 성철 스님이 만들고 돈오점수는 보조 스님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돈오돈수란 성철 스님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니라 '육조단경' 에 명문으로 나와 있으며, 돈오점수도 보조국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불교의 흐름이 다 돈오점수" 라는 입장이었다. 스님은 선 공부를 하면서도 선어록이나 선서를 자주 찾아봤고, 특히 '육조단경' 은 여러 곳에서 인용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읽고 익히기를 권했다. 그리고 "참선이나 염불, 무슨 공부나 다 하나의 공부" 라며 "'육조단경' 에 내 법은 본 성품을 안 여읜다는 말씀이 여러 군데 있는데, 본 성품을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참다운 공부이고 그래야 참선이 된다" 고 설명했다. 이처럼 선 공부에 전념한 선승이지만 교학이나 외전에 있어서도 대단한 박학이었다. 외전에 있어서는 철학서나 과학서를 가까이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매년 한번씩은 '신약성서' 를 본다고 했을 만큼 다른 종교 경전 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님은 "기독교인이라도 '반야심경' 이나 '법화경', '화엄경' 등 중요한 불경을 연구해야 불교사상의 핵심을 알 수 있고, 불교인도 기독교 성전인 '바이블' 이나 이슬람의 '코란' 도 공부해야 한다" 며 "예수와 마호멧의 본뜻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잡을 수 있을 것" 이라고 종교간 소통을 위해 상대 종교의 경전을 읽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불교 교학에 있어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참구가 들어와도 즉문즉설을 펼칠 만큼 그 깊이가 남달랐다. 그 중에서도 '반야심경' 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이 적지 않다. 스님은 "'반야심경' 공부가 굉장히 중요하다.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대승이라고 하셨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듯이 반야를 떠나는 것은 마치 물밖에 난 고기와 같다" 고 할 정도로 '반야심경' 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스님이 '반야심경' 을 통해 공(空)한 도리를 알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반야심경' 을 즐겨 독송하는 것은 이 경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제법공이 바로 부처님 법문의 핵심이기 때문" 이라고 했던 스님은 "'반야심경' 은 출가하고 12년이 되도록 몇 천 번은 읽었으나, 그래도 제법공(諸法空) 도리가 와 닿지 않았다" 고 토로하기도 했다. 스님이 이렇게 반야심경의 공 사상에 천착한 것은 "반야사상이 모든 철학의 기조가 된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것을 '무(無)의 자각적 한정'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3] 청화 스님 (下) '정토삼부경' 은 생명의 경전 : 나무아미타불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강조하며 염불선을 널리 보급했던 청화 스님은 언제나 법문에서 '정토삼부경' 인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말씀을 인용했다. 그리고 직접 아미타불을 신앙하고 모든 선근공덕을 닦아서 극락세계에 태어남을 내용으로 하는 '정토삼부경' 을 번역하기도 했다. '정토삼부경' 번역과 관련 스님은 "'정토삼부경' 은 말법시대의 중생이 반드시 불 속을 뚫고라도 뛰어 나가 반드시 들어야 할 생명의 경전인데, 어떤 저명인사까지도 극락세계의 존재를 만화로 알고 있기에 너무 죄스러워 책을 내게 됐다" 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스님은 "말법시대 중생은 근기가 약해 부처님 본원력의 가피를 받아서 성불하고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 며 '정토삼부경' 말씀을 고구정녕하게 일러줬다. 현대인들에게 '정토삼부경' 의 필요성을 역설한 스님이 읽고 외우기를 권한 또 하나가 '보리방편문' 이다. '보리방편문(普提方便門)' 은 스님의 은사인 금타 스님이 선정삼매 속에서 용수보살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수행법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보리방편문' 은 "심은 허공과 등할새, 편운척영이 무한 광대무변한 허공적심계를 관하면서, 청정법신 일달하여 비로자나불을 염하고 (중략) 삼신일불 인달하여 아미타불을 상념하고, 내외생멸상인 무수중생의 무상제행을, 심수만경전 인달하여, 미타의 일대행상으로 사유관찰할지니라." 라는 길지 않은 전문에서 우리 마음이 부처라는 '심즉시불(心卽是佛)' 을 고스란히 드러낸 법문으로 전해진다. 청화 스님은 이 '보리방편문' 대하기를 부처님 친설처럼 여기며 대중들에게 읽고 또 읽어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알고 쓸 것을 당부했다. 벽산문도회가 엮은 청화 큰스님 염불선 법문집 '생명의 고향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에서 스님은 '보리방편문' 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보리방편문' 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여실히 밝힌 법문입니다. 그 연원은 제2의 석가라고 하는 용수보살에게 올라갑니다. 금타 대화상이 깊은 선정, 즉 삼매에 들어 있는 중에 과거의 용수성자로부터 감응을 받아 전수받은 현대에 가장 알맞은 고도한 수행법이 바로 '보리방편문' 입니다." 라고 '보리방편문' 의 연원을 밝힌 스님은 '내 마음이 부처님' 임을 설파한 '보리방편문' 을 설명했다. 스님은 이 책에서 "'보리방편문' 은 우주의 모든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확실하게 묶은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 읽어보고 생각해볼수록 하나의 아미타 부처님으로 통일돼 갑니다. 한 번 외면 한 번 왼 만큼 내 마음이 부처구나! 내 마음 속에는 이와 같이 무량의 공덕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조그맣고 답답한 '나' 라는 것에 옹색하게 폐쇄된 마음이 해방됩니다." 라며 읽고 또 읽어 외우기를 거듭 당부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수행하고 도를 증득한 선승이면서도 다양한 교법을 서로 걸림 없이 회통하는 원통불교를 주장했던 스님은 '정토삼부경' 이외에도 '정통선의 향훈', '원통불법의 요체', '마음의 고향', '가장 행복한 공부' 등의 저서를 남겨 스스로의 마음을 부려 부처로 살 것을 가르치다 2003년 11월12일 성륜사에서 세수 80세, 법랍 56세로 입적했다.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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