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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큰스님은 이 시대 마지막 수행자”

“큰스님은 이 시대 마지막 수행자”

 

연일 계속되는 폭우에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이 지친 심신을 쉬게 해 주는 곳을 운영하며 직원들과 24시간을 같이 하고 있는 조계종 전통불교문화원장 혜오 스님, 전통불교문화원은 조계종이 공주 마곡사 인근 태화산에 마련한 불교계 최초의 연수시설이다. 스님은 2009년부터 2년여 가까이 전통불교문회원의 운영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또 조계종 중앙종회위언이자 부안 개암사 주지로 숨 돌릴 틈 없이 소임을 보고 있다.

7월14일 공주 전통불교문화회원 본부장실에서 혜오 스님을 만났다. 전부터 취재 등을 통해서 여러 번 뵌 적이 있기 때문에 스님과 인터뷰는 부담 없이 진행됐다.

다만 스님은 “큰스님의 유지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며 청화스님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전통불교문화원 일로 많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사무실 일정표를 가리키며) 보는 바와 같이 7월과 8월 일정이 꽉 찼습니다. 이제 신청을 해도 문화원시설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처음 본부장 소임을 맡았을 때만해도 빈방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고 있는 직원들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전통불교문화원 운영 성과를 밝혀 주실 수 있을까요?

“전통불교문화원은 2009년 6월11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해 11월에 본부장으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2010년 전체 연수숙박연인원이 16,032명이었는데, 올해 상반기에만 벌써 10,000명을 넘어섰습니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과 단체에서도 이제는 전통불교문화원을 찾아옵니다. 앞으로 좀 더 노력해서 더 내실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전통불교문화원 운영과 관련한 계획이 있다면 전해주시죠?

“문화원은 종단 최초의 중앙연수원입니다. 전통문화속의 불교를 알리고 또 시민들이 와서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종단에서 행하는 각종 교육을 여기서 많이 하기 때문에 그 일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앞으로 불자와 일반시민, 외국인들이 이곳에 와 공부하고 수행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바쁘시면 절에도 자주 못가시겠네요?

“제가 1992년부터 부안 개암사주지를 맡고 있습니다. 본부장 소임을 맡고 부터는 2~3주에 한 번 절에 갈까 말까 합니다. 사제들이 절 살림을 맡아주고 있어 그나마 전통불교문화원일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혜오 스님이 처음 개암사 갔을 때는 대웅전이 유일한 전각이었다고 한다. 스님은 부임 직후부터 불사를 시작해 15개에 가까운 전각을 복원했다.

혜오 스님의 근황에 대한 말씀을 듣고 본격적으로 청화 큰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여쭈었다.

 

청화 큰스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큰스님께서 아마 50대 후반의 연세였던 것 같고 저는 20살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큰스님을 처음 만난 곳은 경기도 광명의 성도사라는 절입니다. 출가 초기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아는 스님이 전라도 도인이 성도사에 오신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도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상태로 성도사에 찾아갔습니다. 1980년경으로 기억합니다. 성도사에서 처음 뵀을 때 정말이지 큰스님의 인상이 강했습니다. 그간 만났던 분들에 비해 수행자의 품격과 기상이 느껴졌습니다. ‘카리스마’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실상사에서 큰스님을 다시 모신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성도사에서 뵌 뒤 인연이 있었는지 실상사 백장암에서 큰스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수좌는 정진을 해야한다’, ‘참선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큰스님께서 백장암에서 환갑을 맞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환갑을 맞이하신 날 큰스님과 인연 있는 스님과 신도들이 하나 둘 백장암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바랑을 메고 어딘가로 가버리셨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중이 무슨 생일이냐? 세속의 가치관으로 환갑잔치하는 것은 범부의 행위지 출가수행자의 모습이 아니다’는 것이 큰스님의 생각이셨습니다. 큰스님이 계시지 않았지만 백장암에 있던 스님들은 ‘큰스님 덕분에’ 미역국도 먹고 간단한 잔치도 했습니다. 주인공 없는 잔치를 치른 셈입니다. 30여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큰스님 모습은 아직도 저에게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때 저는 큰스님께서 출가자의 탈속(脫俗)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후 큰스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었나요?

‘큰스님께서 해남 대흥사 남미륵암에 계실 때 저는 대흥사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큰스님께서 안성 칠장사로 가셨는데,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칠장사에 먼저 가 살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칠장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내 큰스님께서 오셔서, 당시 칠장사에서 반년 정도를 사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칠장사에 오시자마자 선원부터 열었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을 제접하셨습니다. 그렇게 계시다 큰스님께서는 곡성 태안사로 가셨습니다. 물론 저도 태안사로 따라 갔습니다.

 

태안사에서 결제를 한 시기가 그때였지요?

“맞습니다. 칠장사에서 태안사로 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년 결사를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큰스님께서 정진을 하면서 수행의 분위기를 일으켰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워낙 철저하게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당시 대중들은 힘 있게 정진했습니다. 오늘날 태안사도 큰스님으로 인해 사격이 일신 되었다고 합니다.”

 

큰스님께서 개암사 일주문 현판을 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1992년부터 주지를 하면서 개암사로 큰스님을 몇 차례 모셨습니다. 한 번은 제가 큰 스님께 개암사 일주문 현판을 써 달라고 청을 드렸습니다. 지역에도 유명한 명필이 있었지만 큰스님께 청을 드려 글씨를 받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행자께서 내려주신 글씨를 받고 싶어서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평소 중간 크기의 붓으로 글씨를 쓰셨는데, 현판의 큰 글씨를 쓰시느라 고생을 좀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칠장사에 계실 때도 글씨를 잘 쓰지는 않았지만 신도들이 부탁하면 가끔 글씨를 내려주시곤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글을 배워보니 글씨 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큰스님께서는 개암사 지장전 현판도 써 주셨습니다. 지금도 큰스님께 너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혜오 스님을 잘 아는 한 스님은 “큰스님의 혜오스님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며 “그래서 혜오 스님이 청을 드리면 큰스님께서는 흔쾌히 응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큰스님을 모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은 당신 스스로에게 굉장히 엄격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계율에 관해서는 빈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겨울에 김장을 하는데, 이것저것 양념을 넣어 맛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 김장김치를 보시더니 오신채가 들어가 있다고 사람들을 혼내셨습니다. 그 전에 큰스님께서 오신채는 넣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또 넣었습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 야단을 친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큰스님께서는 당신 처소에서 직접 불을 때고 빨래도 직접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큰스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시자나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해 놓으면 ‘하지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 일을 직접 하신다는 원칙 때문에 아마 그러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1990년대 초반에 총무원 규정부(지금의 호법부)에 있을 때 큰스님을 모셔와 사진을 찍었던 일입니다. 처음에는 찍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여러 차례 간곡하게 말씀드렸더니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나중에 큰스님께서도 흡족해 하셨습니다.

 

큰스님을 모시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습니까?

“큰스님께서 대중들을 이끌고 태안사에서 3년 결사를 할 때도 그렇고, 미국에 계실 때도 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를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었더니 큰스님께서 많이 서운해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저는 큰스님께 가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 더 죄송했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입적하시기 보름 전에 찾아뵙고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저에게 ‘어디서나 정법의 당간을 세우고 문도들을 외호해 달라’는 말씀을 저에게 남기셨습니다.

생전에 큰스님께서는 저에게 ‘조금만 정진하면 순풍에 돛을 단 것과 같이 될 텐데 왜 공부하지 않느냐? 3년만 정진하면 일취월장할 것인데, 왜 안하느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큰스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큰스님의 당부를 꼭 실천하려 합니다.”

 

평소에 큰스님께서 강조하신 가르침은 무엇이었나요?

“수좌들은 정진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출가했으면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출가자의 본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평생 종단 소임을 살지 않은 분입니다. 그래서 조계사 근처에도 자주 오시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스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볼 때 큰스님께서는 통불교를 가장 강하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하나가 옳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하셨지요. 원효스님의 회통사상, 화쟁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이와 함께 큰스님께서는 불교의 원천은 불성자체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을 모실 당시 ‘염불선’에 대한 제방의 인식은 어떠했습니까?

“예전에는 지금처럼 수행법이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위빠사나라는 말도 잘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문화나 환경이 많이 변했습니다. 염불선의 경우만 하더라도 지금은 유용한 수행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당시 주류 수행법이 간화선이었기 때문에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법에 대한 오해가 다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염불선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월명암에 월인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월명암에서 오랫동안 주석하신 숨은 도인입니다. 큰스님께서 하루는 월인 스님을 만나러 월명암에 가셨습니다. 두 분은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루 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 생은 정토세계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헤어지셨습니다. 월인스님은 염불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봤던 분입니다. 그런데 월인스님께서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서 수행을 해보니 염불선이 맞더라’고 하셨습니다. 월인스님은 후학들에게 염불선을 권하기도 하셨고요. 월인스님은 또 염불선에 대한 비난은 간화선을 하던 스님들의 편견에서 비롯됐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큰스님께서 한국불교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큰스님은 이 시대 최고의 수행자입니다. 출가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큰스님만큼 엄격하게 자기 절제와 통제 속에서 정진을 하신 분은 못 봤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수행에 관해서는 너무 냉정했습니다. 수년 간 큰스님을 모셔봤지만 누워서 자는 모습을 못 봤습니다. 큰스님께서 눕지를 않으니 같이 있는 사람도 잠을 자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고충을 아셨는지 큰스님께서는 눕는 척 하다 사람들이 잠들면 다시 가부좌를 하고 밤을 보냈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큰스님께서 진짜 장좌불와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에 구멍을 뚫고 봤을 정도였습니다. 또 큰스님께서는 스님이든 재가자든 찾아와 인사를 하면 앉아서 절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에게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다른 이들에겐 너무나 따뜻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큰스님을 다시 모실 것입니까?

“큰스님은 나의 정신적 귀의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했고 또 뵙게 된다면 당연히 스승으로 섬길 것입니다. 다음 생에는 큰스님께서 당부하셨던 것들 중 제가 실천하지 못한 것을 해낼 수 있도록 정진할 것입니다. 수행자로서 스승으로서 청화큰스님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광륜 2011년 가을호(통권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