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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스크랩] 전남 곡성 설산 성륜사 청화스님 답사 ..

마음의 고향 곡성 설산 성륜사

 

성륜사는 신령스런 설산(설령산,523m)동쪽 시슭 널찍한 설령골에 자리잡

고 있다. 설령산은 남으로 흘러드는 백두의 장업한 기상이 호남정맥의 능

선에서 부드럽게 솟았다가 담양 삼성산에서 받은 맥을 광주의 진산 무등산

으로 이어주는 곡성의 명산이다.   

 

멀리서 이산을 바라보면 산꼭대기가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얗게 빛나보이기

때문에 ‘설산‘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근고청중(謹告淸衆) 삼가 청정대중에게 고함

* 생사사대(生死事大) 삶과 죽음이 가장큰일인데

* 무상신속(無常迅速) 덗 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 촌음가석(寸陰可惜) 짧은 시간도 한 껏 아끼며

* 신물방일(愼勿放逸) 방심하고 게으리지 말라.-글내용)

 

 

성륜사는 1988년 6월4일 전남 곡성 군청의 허가를 시작으로

‘사찰창건불사’가 시작되었다.

아산 조방원 선생이 기증한 10만여평의 땅과 대상그룹의 시주로 불사가

준비되었다. 1990년9월9일 대웅전완공에 이어 1991년2월 지장전,1992년 9월

에는 금강선원,요사채, 정운당, 일주문 등 불사가 이어졌고, 2000년7월

종무소, 2001년10월 사천왕 조성을 마지막으로 주요 불사가 마무리 되었다

 

성륜사(聖輪寺) 역사는 대략 20여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청화큰스님께서 창건한 절로써 큰스님의 법향(法香)이 묻어나는 곳입니다.

2002년5월16일 전남일보와의 회견 대담에서 큰스님께서는 앞으로

하시고자 하는 불사에 대해 이렇게 들려주셨다.

 

“마음 닦아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과도 더불어서 깨달음의 길로 함께

가는 것 이상의 훌륭한 불사는 없습니다. 이른바 유위법적인 불사는 그때

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겠

습니다만 가능하면 우리 성륜사가 본산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고 그런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성륜사가 어떻게 하면 본산의 규모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쪽에서 우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서울도 이제 광륜사가 생겼는데 서울

불자님들을 위해서 교화의 한마당을 마련한 셈이지요. 불사에 대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더불어서 우리가 공부한다는 불사에 비중을 두고 보다 더 광범위 하게

공부할 수 있는 마땅한 틀을 마련하고자 본산 규모로 나간다는 계획인

것입니다.무슨 형상적인 확장이라든가 그런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보다 많은 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그때그때

실천하는 장소로 보다 더 규모가 크고 또 환경역시 더 넉넉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불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교춘추 1997년 11월호 통권 8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 최석환(불교춘추 발행인) -청화 큰스님 그는 누구인가?  (요약합니다)

1923년 전남 무안군 운남면에서 태어난 청화스님의 속명은 강호성이다.

청화라는 법명은 그의 스승인 금타스님에게서 받았다. 14살 되던 해에 일본

으로 건너가 5년제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국내에 들어와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들과 함께 고향에 망운중학교

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대를 1년간 다니다가 징병으로 국내에

끌려왔다.진해에서 얼마동안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평소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좌우익의 대립된 양사에 심한 갈등을 느꼈다. 그의

출가는 무엇보다도 좌우익의 대립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출가를 결심한

뒤에도 심적 갈등은 여전했다.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

청화스님은 출가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청년시절부터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서적을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다보니

자연히 불교서적을 접하게 되더군요. 불교입문서를 보고 나름대로 윤곽을

잡았었죠. 그런 뒤 절에 있던 집안의 육촌 동생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바로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금타 화상을 보는 순간 미련 없이 출가를 해버렸지요."

 

40년간 토굴생활

하루 한 끼 공양과 장좌불와의 수행법에 대해 청화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좌불와의 수련법은 나뿐만 아니라 수행자라면 모든 사람들

이 취하고 있는 수행법입니다. 또한 단식이란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최소한의 수단일 뿐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적당히 먹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청화스님은 염불선의 주창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통적인 지적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 걸맞을 공안선이나, 의지력이

많은 사람에게 걸맞을 묵조선을 모두 긍정합니다. 그러나 정통선 즉

염불선이란 내 마음이 곧 부처이고 천지우주가 역시 부처요,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이 빈틈없이 틀어쥔 상태의 수행인데 지, , 의 모두를 요하는

회통의 방법이지요."

 

염불선의 실체

우리의 선불교에서 염불선이란 생소한 말이다. 청화스님은 염불선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그 마음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염불은 원효대사에서부터 서산대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위대한 분들은

참선과 염불을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보고 실행하셨습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곧

염불이죠. 그러므로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단순히 복을 비는

방편 염불에 지나지 않지만 대상을 떠나 본체를 부처로 설정하고서

그것을 안에서 구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 되지요."

실로 13백년 만에 청화스님을 통해 염불선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회통불교의 길

 

염불선뿐만 아니라 회통불교와 통불교를 주창해 온 청화스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파성을 지양한 원융한 원통불교는 우리 불교가

앞으로 마땅히 지향해 가야 할 부분입니다. 진리 자체가 둘이 아니고

원통무애한 것이기 때문이죠. 정통조사라고 하는 분들은 다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신라의 원효, 의상, 고려의 보조, 나옹, 조선의 서산, 사명

등 시대를 주름잡은 분들이 모두 원통불교를 부르짖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회통이 안 될 수 없었는데, 원통불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입

니다. 앞으로 불성의 체험에 역점을 두어 정진한다면

원통불교로 회귀될 것입니다."

 

청화스님이 연 선의 세계

청화스님이 열어젖힌 선의 세계는 염불선을 바탕으로 한 통불교사상이다.

"우리가 '천수다라니'를 외우든 이뭐꼬의 문자화두를 들던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보살을 하든지 구경 목적은 진여불성 자리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청화스님은 "무문관"이나 "육조단경"을 들어 보이시면서 진정한

불성자리를 깨달으려면 청빈한 마음자리를 발견해야 된다고 말했다.

"선이란 우리의 마음을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란하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입니다. 우리가 선을 닦아 삼명육통이 되면 과거나

현재, 미래를 알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신통력을 모아 최상의 영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그것이 바로 불타의 경지입니다."

 

 

염불선을 통해 일가를 이룬 청화스님의 선 수행은 불성체험에 역점을 두는

'선오후수'로 정진해 불성에 안주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계사 부처님

오신 날 고승초청 법회에서 청화스님은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진리로

통합을 지켜야 합니다. 회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불교가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도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안정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참다운 깨달음의 날이고, 참다운 행복의 날이요,

영생할 수 있는 우주 해방의 날입니다.

누구나 부처님 광명의 등을 켜는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미주포교의 시작

 청화스님은 956, 태안사 중흥불사를 마감하고 미국을 건너가

묵언정진 결사에 들어갔다. 청화스님이 일군 490에이커(60만평)

미국 금강선원(Diamond Zen Center)은 서구인들에게 한국의 선을

전하는 요람이 되고 있다. 청화스님이 미국으로 건너간 뜻은 달마가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전한 것과 같이 한국 땅에서 미국

땅에 선을 전하기 위한 구도의 여정이라고 술회했다.

 

"미국 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해서 왔습니다. 미국에는

각국 불교들이 들어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한국불교가 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면서 각 종파간의 여러

집착과 갈등 해소를 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그런 뜻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 청화큰스님

 40년간 장좌불와, 하루 일중식, 우리나라 처음 염불선 제창 등 수많은 이력이

청화큰스님을 뒤따르고 있지만, 필자가 지켜본 청화 큰스님은 '무아무소유'

실천적 삶을 산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다. 뿐만 아니라 폐사 일로에 있던

동리산 태안사를 중흥시킨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뉴스 홈 > 한국일보 기사목록

[속보, 생활/문화, 연예] 2003년 11월 13일 (목) 19:30 

전남 곡성 성륜사 조실 청화(淸華)스님이 2003년11월12일 12일

밤 10시30분 입적했다. 세납 80세. 법납 56세. 스님은 24세에 출가한

이래 40여년 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과 오랜 동안의

묵언(默言) 수행을 한 당대의 선승으로 꼽힌다. 스님은 특히 “음식이란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최소한의수단일 뿐 배를 불리기

위한 게 아니다”며 하루 한끼만 식사를 하는 원칙을 지켜왔다.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스님을은사로 승려 생활을 시작한 그는 대흥사,

사성암, 벽송사, 백장암, 상원암, 칠장사 등 선원과 토굴에서 수행 정진했으

며 60세가 넘어서야 대중 설법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린 곡성 동리산 태안사를 198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중창 복원, 구산 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재건했다. 1992년 말 미국에

금강선원을, 지난해 도봉산에 광륜사를 열었으며 ‘정통선의 향훈’‘원통불법

의 요체’등의 저서를 남겼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입적 사실을 알리지 말고 최소한 간소하게

다비식을 치를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님은 입적에 앞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이 세상 저 세상/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큰데/은혜를 값은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 할 뿐이네.

(此世他世間去來不相關 蒙恩大千界 報恩恨細澗))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憶佛念佛) 현생당래(現生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 릉엄경(楞嚴經)

만약중생(衆生)의 마음이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을 외우면

현생(現生)과 래세(來世)에 반드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오리라.-글내용)

 

바로 옆에는 아산 조방원 화백의 도립 전남 옥과 미술관이 있다.

 

글 출처:

마음의 고향 성륜사

 

불교춘추 -청화스님 그는 누구인가 원문보기

 

사진 츨처: 다음카페 된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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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 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출처 : 된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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