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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부모님보다 더 큰 사랑 주신 분”

“부모님보다 더 큰 사랑 주신 분”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따가운 햇볕에 몸을 맡길 수가 없다. 특히나 온갖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도시에서의 생활은 더 그렇다. 조계종이 외국인들의 간화선 체험을 위해 설립한 국제선센터는 그래도 청량제와 같은 존재다.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다양한 수행, 문화프로그램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11일 국제선센터를 찾았다. 여기서 국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광전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스님은 국제선센터에 오기 전에는 조계종 교육원에서 연수국장 소임을 보며 스님들의 재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광전스님은 청화 큰스님을 10년 넘게 모셨다.

광전스님은 “고등학교 때 처음 스님을 뵙고 난 이후 출가를 결심했고, 어떻게 보면 속가 부모님보다 더 많은 가르침과 정을 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청화 큰스님과 광전스님의 인연이야기를 들어봤다.


청화 큰스님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86년입니다. 저는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당시 광주 금륜회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금륜회는 큰스님을 따르는 신도 모임입니다. 저는 그 당시 광주 금륜회 고등학생부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정기법회가 있을 때면 큰스님을 뵙곤 했습니다. 큰스님은 1985년부터 곡성 태안사에서 주석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1989년 5월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큰스님께 출가를 했습니다. 큰스님께 공부를 배우면 제가 꿈꾸던 모습을 제대로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출가하겠다는 광전스님의 말에 부모님은 “대학과 군대를 마치고 나서도 결심이 변하지 않으면 출가해도 좋다.”고 아들을 말렸으나 스님은 바로 구도자의 길에 나섰다.


당시 고등학교 불교학생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불교학생회나 대학교 불교학생회 활동이 꽤나 활발했습니다. 그때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과 함께 자체 재작한 교재로 불교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금륜회에 나가며 광주 원각사 학생회에서도 활동을 했는데, 당시 지도법사가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입니다. 그때 금강스님은 20대 초반의 나이였습니다. 금강스님과는 1991년도에 중앙승가대에 같이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출가하신 직후부터 큰스님을 모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행자생활을 하면서부터 큰스님을 시봉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스님들이 모셨는데, 제가 행자 생활을 하면서 시봉했습니다.”


행자생활은 어땠습니까?

“큰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 사찰에 크고 작은 행사가 많았습니다. 특히 큰스님이 절에 계시면 유독 제사를 많이 지낸 것 같습니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2~3번의 제사를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제사를 모시러 오거나 아니면 큰스님을 만나러 오는 신도님들을 큰스님께 안내하고 시봉하며 지냈던 기억이 많습니다. 그때 큰스님이 머무시던 토굴이 태안사 개울너머에 있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직접 불도 때고 청소도 하고 빨래를 하셨습니다. 손수 모든 일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심부름 정도만 한 것 같습니다.”


광전스님은 1991년 승가대 입학 직전까지 청화 큰스님을 모셨고 승가대에 가서도 방학 때면 무조건 태안사로 내려가 큰스님을 시봉했다.


그럼 스님이 승가대학을 다니던 도중 큰스님이 미국으로 가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큰스님께서는 1993년 동안거를 미국 팜스프링 근처 하일랜드 스프링 리조트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때 큰스님과 노장님들 여덟 분이 함께 정진하셨습니다. 저도 1993년 12월에 큰스님을 시봉하러 뒤늦게 미국에 들어갔습니다. 동안거를 끝내고 나서는 큰스님과 어른스님들 모시고 미국 곳곳을 다녔습니다. 당시 큰스님의 광주사범학교 동창이 유타대 교수로 계셨는데, 큰스님께서 그 동창의 초청으로 유타교민들에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청화 큰스님은 그때부터 미국포교에 나섰다고 한다. 광전스님은 큰스님을 모시고 다니며 미국포교를 뒷받침했다. 광전스님은 큰스님을 모셔야 했기 때문에 승가대 수업에 잘 듣지 못했다. 1993년 가을부터 졸업을 할 때까지 한국과 미국을 오갔고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는 수업에 잘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큰스님께서 1994년에 삼보사를 인수하셨지요?

“맞습니다. 큰스님은 1994년도에 샌프란시스코 근처 카멜에 있던 삼보사를 인수하셨습니다.

삼보사는 불교신문 사장을 지낸 덕산거사가 창건한 미국 최초의 한국사찰입니다. 덕산거사의 부인이었던 흥륜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삼보사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절에 빈 방이 많아 하숙생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큰스님께서 비구니 스님의 청을 받아들여 삼보사를 맡으신 것입니다. 큰스님이 삼보사에 주석하시면서 대중들이 모여들어 10여명이 같이 살았습니다. 지금 보성 대원사 주지인 현장스님이 당시 입승소임을 봤고 나중에는 송광사 일철스님도 입승을 살았습니다. 향천사 선원장 효성스님도 같이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큰스님께서는19995년 봄까지 미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한국에 오시면 거의 매일 전국을 다니시며 법회를 열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삼보사에 계시다가 1995년 봄에 팜스프링 근처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60만평의 절터를 마련해 금강선원을 창건하셨습니다. 거기서 3년 결사에 들어갔고 모두 5명이 함께 정진했습니다. 3년 결사는 1998년 봄까지 계속됐습니다.”


청화 큰스님은 1998년 봄 미국에서 3년 결사를 회향하고 다시 한국에 와 전국을 순회하며 법회를 여셨다. 그러던 중 청화 큰스님의 건강이 쇠약해졌다.



그때 큰스님 건강은 어땠습니까?

“1999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안거를 한철 나시고, 큰스님께서 건강에 이상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1999년 가을에 다시 미국 금강 선원으로 가셨습니다. 석 달간 정진을 하시면서 건강이 더 안 좋아졌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큰스님은 연세가 많으심에도 평생 동안 하루 한 끼 적은 공양과 장좌불와를 하시면서 해외포교에 너무 열정적으로 나선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습니다. 금강선원에서 3년 결사를 할 때 큰스님은 누룽지만 드셨습니다. 육체적 노동도 많이 하셨습니다. 큰스님은 금강선원에 계시다가 다시 삼보사로 옮겨 가셨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의 건강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 당시에 ‘내가 이러다가는 한국에 다시 못가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큰스님께서 한국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혹시 큰일이 생기지나 않을 까 하는 걱정이 됐지만 다행이 무사히 한국에 모시고 올 수 있었습니다.”


1999년을 지나 2000년이 되자 조금씩 조금씩 큰스님은 놀랍게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무서운 정진력으로 육조단경을 번역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점차 법회 횟수도 줄이고 후학들도 많이 제접하지는 못했다.


큰스님이 건강을 회복하실 때까지 모신 것인가요?

“그런 셈입니다. 제가 2000년까지 모셨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주로 미국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2004년까지 미국에 있다가 한국으로 들어와 곡성 성륜사에서 재무소임을 보다가 서울 광륜사 주지를 살았습니다.”


10년 넘게 큰스님을 모시면서 많은 일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16살에 처음 큰스님을 친견했습니다. 큰스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출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큰스님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주신 분입니다. ‘저 분이 과연 사람일까?’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스님은 철저한 수행생활을 하셨습니다.”

광전스님은 청화 큰스님의 건강이 악화된 것을 보고 ‘큰스님도 사람이 맞긴 맞구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큰스님께서는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보통 스님들의 경우 당신 몸이 피곤하시면 신도들 만나는 것을 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큰스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찾아오는 신도들을 계속 만났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 일과를 소화하셨습니다.”


큰스님은 제자를 많이 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은사셨나요?

“지금까지 남아있는 분만 5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큰스님은 당신 몸 생각 안하시고 모든 사람들한테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겐 엄격하시면서도 자상하신 분이셨습니다. 제자들도 큰스님을 뵙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여기저기 법회에 많이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큰스님께서는 계율에도 엄격하셨지요?

“계율에는 철저하셨습니다. 제가 큰스님을 모시면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납니다. 큰스님께서 40대에 광주 추강사에 계실 때입니다. 당시 절에 있던 상좌 한 명이 큰스님이 절에 계심에도 저녁에 몰래 외출도 하고 그랬나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큰스님께서 상좌를 야단치신 끝에 쫒아냈습니다. 그 상좌님이 짐을 싸고 나가면서 큰스님께 편지를 남겼습니다. 편지에는 ‘은사스님은 바다와 같은 존재인데, 스님이 우리 같은 중생을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라고 써있었다고 합니다. 큰스님께서 그 편지를 보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청화 큰스님은 선방보다 토굴을 많이 다니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큰스님은 강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선방도 지리산 벽송사와 실상사 백장암등 몇 군데만 가셨어요. 그 뒤로는 토굴을 많이 다니셨습니다. 그런 큰스님께서도 토굴은 아무나 가서는 안 되고 대중처소가 자신의 공부에 방해가 될 정도의 사람만 토굴에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중생활은 하루의 일정이 일정한 시간표에 따라 운영되기에 밥을 먹기 싫어도 때가 되면 먹어야하고, 더 정진하고 싶어도 대중을 배려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못하게 되므로 초심자(初心者)는 대중생활을 통해 수행에 필요한 자량(資糧)을 기르고, 깊은 삼매에 들기 위해선 홀로 토굴에서 오로지 정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큰스님은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시며 간단하게 밥에 김가루와 간장 깨소금으로 공양하셨다고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미숫가루 한 되로 한 철을 나기도 했다고 하구요, 또 어떤 때는 생쌀을 물에 불려 생식으로 한 철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고행을 해서 인지 큰스님은 치아가 좋지 않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정진할 때 너무 무리하지 마라’는 말씀을 가끔 하시곤 했습니다.”


계속 토굴만 다니다 보면 그래도 좀 외롭지 않았을까요?

“큰스님께서 그런 말씀도 몇 번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해남 대흥사 상원암에 계실 때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사람을 피하려고 등산로를 폐쇄하고 정진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멀리서 사람 그림자만 봐도 반가웠다고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사람을 피해 깊은 산에 들어가 지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그리운 것이 사람이었다.’고 고백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강조하신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큰스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한국불교는 모든 불교를 포용하는 통불교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런 전통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스님의 은사인 금타스님께서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염불선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초조달마부터 육조 혜능까지의 불교를 ‘순선(純禪)’시대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우리 한국불교가 순선시대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순선시대의 공부가 바로 염불선입니다.”


한 때 조계종에서는 큰스님의 가르침을 ‘외도’라며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출가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큰스님의 상좌라고 하면 선방에서 방부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의 사형(師兄)스님들은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그래도 1990년대를 거치며 다양한 수행법이 포용되면서 큰스님의 사상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화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염불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부처님처럼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부처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부처님을 감성적으로 그리워하며 그 분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참된 염불이요 염불선입니다. 염불선이 다른 선법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부처님을 생명으로 인식하고 감성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어머니나 고향이라는 단어를 한 번 머리에 떠 올려 보세요. 보통은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우리의 마음이 편안해짐과 유연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을 바꾸게 하고 감동하게 하는 것은 논리적이고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감성입니다. 이렇듯 우리 중생의 지적인 측면과 정서적인 측면을 모두 활용해 수행하는 것이 염불선의 특징적인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염불선 사상의 기반은 4조 도신스님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능가사자기』에서 도신스님은 ‘염불이란 바로 자기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식(識)이란 형체가 없고, 부처란 무슨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도리를 안다면 바로 안심(安心)이다’라고 설법했습니다.

 안심법문으로 설해진 염불법문이 큰스님이 설파하신 염불선의 사상적 연원이며 염불하는 것이 바로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구족하는 것이라 해 선과 염불의 회통을 꾀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됩니다.”


광전스님은 “염불선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고 마음이 부처라는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일상삼매, 그 마음이 순간순간 이어지면 일행삼매이며 이것이 바로 참선”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또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가 선의 요체이며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것이 선”이라며 칭명염불(稱名念佛)과 관상염불(觀相念佛)을 넘어선 실상염불(實相念佛)이 바로 염불선이라고 덧붙였다.


염불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략하게 말하자면 결국 염불선은 모든 존재가 부처라는 일상(一相)을 생각 생각에 끊어지지 않게 일행(一行)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은 안목처럼 모든 존재, 우주가 ‘부처다, 마음이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부처나 마음이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라 무턱대고 믿음으로 생각을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근본을 볼 수 있는 안목, 부처님께서 보는 청정한 인생관을 내 안목으로 하게 도와주는 방편이 있으면 좋겠지요. 고민 고민하다 큰스님께 구체적인 방법을 여쭈면 ‘보리방편문’을 천번만번 외우라 하셨습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을새......’로 시작되는 보리방편문은 우리 마음이 곧 부처인 동시에 우주의 모든 존재가 부처임을 이미지화 해 결국 감성과 이성적으로 천지우주가 부처뿐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행법입니다. 고요한 곳에 앉아서 생각 생각을 이어가면 더욱 깊어지겠지요. 쉴 새 없이 끼어드는 잡념이나 망상이 방편문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고 서서히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인식에 자리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수행이 진전되면 마음도 몸도 환하게 가벼워집니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된다면 큰스님을 모실 생각이 있습니까?

“큰스님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당연히 다음 생에도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은사스님한테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사람의 도리이겠지요.”


청화 큰스님의 말년을 함께 했던 광전스님의 말씀에서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나왔다. 쉽게 없어지지 않을 스승에 대한 존경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 2011년 광륜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