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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31.성륜사 대웅전 상량식 법문

성륜사 대웅전 상량식 법문(大雄殿上梁式法問:1990年 5月6日)


두 가지 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불가에서 분류한 법입니다마는 이 가운데는 세간법이라 우리 인간세상에서 통용되는 그런 법이 있고, 또는 인간세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는 보다 심수 오묘한 본질적인 법이 있습니다. 이법은 출세간법입니다. 이른바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이 있습니다. 세간적인 여러 가지 도덕이나 또는 기타 철학이나 과학이나 또는 예술이나 이런 학문은 모두가 다 소중합니다 만은, 이런 법은 세간법, 세간법의 범주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사 예술이 아주 훌륭해서 그 창조적인 작품을 배우고 또는 과학이 우주 만물의 모든 문제를 분석도 하고 체험도 한다 하더라도 또는 세간적인 법, 세간적인 법률이나 그런 법들이 제아무리 좋으리라 쓰고 치밀하다 하더라도 이런 것의 본바탕을 모르면 이런 이념을 또는 창조를 한다 하더라도 보다 더 우리 인간은 유익한 창조를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진리라 하는 진이요 또는 선이라 하는 인류도덕을 나타내는 선이요. 또는 예술에 나타나 있는 그 아름다운 미요. 이러한 진선미의 상대 문학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통합적으로 통일 할 수 있는 참다운 법, 이러한 법을 통합하는 참다운 법 이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출세간법입니다. 출세간법이라. 세간을 초출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보통은 출세간법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질 않습니다. 따라서 상대 유한적인 그러한 예술이라든가 또는 법률이나 또는 윤리 도덕이나 이런 것이 완벽을 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령불, 아주 풍경 절가한 연기입니다. 연기에 오늘 부처님 인연이 도래해서 부처님의 청정도량인 대웅법전을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부처님 법은 어떠한 것 이건데 이렇게 모든 지방에 계시는 그런 여러 가지 관공서의 그런 어른들, 또는 각 일터지를 불문하고서 참여해주신 사부 대중들 이렇게 모여 들으셨는가. 이런 것은 부처님 법이 부처님 법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냥 과학이나 또는 일반적인 그런 도덕이나 또는 예술이나 이런 것을 통합적으로 모두를 다 종합적인 그러한 체계를 갖춰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절대적인 진리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모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참다운 영생의 행복이라던가 또는 인간의 생사를 초월한 그런 어떠한 깊은 문제라던가 또는 세간적인 문제라던가 모든 것을 불교의 진리는 다 갈마해 있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불교는 과학인 동시에 또는 철학이고 또는 종교인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불교는 철두철미하게 인과법이라 어떤 말과 인과 연 따라서 이루어졌다 하는 이른바 지금 현대적인 말로 하면 상대성원리 이러한 인연적인 법을 불교에서는 철저히 투철하게 도파해있는 것입니다. 또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 문제를 불교는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제간이나 다른 어떤 종교도 불교와 같이 인생과 우주 문제, 인생은 대체로 어떤 것이고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또는 인생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우주 만유의 본래적인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것을 불교와 같이 철저하니 밝힌 가르침은 없습니다.


사람도 또는 일반의 다른 동물도 또는 무생물도 천지 천체도 모두가 근본이 있는 것인데 이런 근본을 확실히 모르면 현대란 이런 고도의 문명 가운데서는 우리 생활을 바르게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인생과 우주 근본 문제를 불교는 철저히 밝혔기 때문에 불교는 철학 가운데 가장 고도한 철학입니다.


또는 설사 우주와 인생의 그런 근본 진리를 밝혔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행복 우리 인간은 그런 우주와 인생의 그런 본질을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치로만 해서는 그런 것을 추상적으로 안다하더라도 우리 힘이 못되고 우리 생활로 그냥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 수행으로 해서 인간이 비록 지금 현재 자기는 번뇌가 많다 하더라도 철저한 수행 방법으로 해가지고서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주의 그런 본질, 우리 인생의 본질을 훤히 깨닫는 이른바 성불한다는 그런 가르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종교 가운데도 가장 고도한 종교인 것입니다. 철학 가운데 가장 철저한 철학 또는 과학 가운데 가장 치밀한 그런 과학 또는 종교 가운데 인간의 구경적인 인간의 병고라던가 인간 유한적인 모든 상대적인 그런 갈등을 초월해서 영생으로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맡아있는 참다운 종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는 이와 같이 그러한 불법을 빛내기 위해서 이러한 전당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 전당을 지을 때 전당을 지을 때는 포금매이라 마땅히 성지를 골라서 집을 지어야 쓰겠지요. 그 당시 수달 장자가 수달장자가 사리불 존자의 그런 교시를 받고서 하나의 성지를 구했단 말입니다. 전당을 짓는 참다운 불법을 빛낼 수 있는 전당을 짓는 그런 성지를 구했으나 그 성지가 피다 태자라 하는 그 태자의 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돈의 아쉬운 점이 없는 그런 태자가 그런 성지를 팔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수달장자가 몇 번이나 팔라고 종용을 했지만 팔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너무 조르니까 할 수 없이 피다 태자가 하는 말이 “그 땅을 절을 지을만한 그 땅을 황금으로 깔면 팔겠다.” 이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피다 태자는 ‘이렇게 말하면 땅을 팔라고 않겠지.’ 이렇게 생각하고서 말을 했는데, 수달장자가 정말로 그러면 팔 테냐고 팔거냐고 그러면 내가 황금으로 절집을 내가 깔겠다. 이렇게 해서 땅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포금매이라 펼 포자 황금 쇠 금자 말입니다. 또는 살 매자 땅 이자 황금을 땅에 깔아놓고서 그래놓고서 부처님 법을 펼 수 있는 전당을 지을 땅을 샀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성령불 성륜사를 건립하는데도 그와 못지않은 우리 불심 있는 우리 불자들이 희사를 했습니다. 다 같이 들어 아시는 바와 같이 아산 아산화백 아산 조방연 거사께서 이 성지를 조금도 아낌없이 희사를 하신 것입니다. 아산화백은 돈이 많이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 청빈한 분인데 그림을 그려서 한푼 두푼 모아서 여기 이 땅을 사신 것인데, 우리 이 땅을 사시는 여러 가지 연기유서라던가 인연은 또 복잡해서 여러분들이 힘을 합했습니다마는 그래도 주로 아산화백이 그와 같이 자기 신념을 겸비해서 자기 필생의 사업으로 사신 것인데 이것을 부처님한테 바친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이렇게 오늘 이와 같이 집을 지을 수가 있는 것은 어떠한 인연이 있는고 하면은 삼정거사 임창욱 씨 임창욱 거사 또는 박현주 여사 이 두 분 내외분이 부처님 전당을 짓도록 까지 조금도 아낌없이 두말도 않고서 그냥 희사를 했기 때문에 이 땅위에다 이와 같이 장엄스러운 전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 법당뿐만 아니라 또 선방을 지을 비용, 또는 요사체를 지을 비용, 또는 욕실이라던가 여러 가지 부대시설을 지을 비용까지도 희사를 하신 겁니다. 이 자리를 통해서 우리 사부대중 우리 여기에 오신 내빈들께서 이 아산화백 조방연 씨하고 또는 삼정거사 임창욱 씨 또는 부인되는 박현주, 이 분들의 거룩한 사심이 없는 오직 진리를 위하는 그런 마음에 대해서 찬탄의 합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해서 부처님 전당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런 것이 사사로운 사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러한 것은 참다운 시주요 참다운 보시가 못되는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 두 세분 어른께서는 조금도 사심 없이 이와 같이 부처님한테 또는 사회에 대해서 모든 자기의 정성을 다 바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또는 예술이라 하는 하나의 회화라하는 그런 것까지도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그런 넓은 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모여든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선 저부터도 그냥 전통적인 어떠한 껍데기에 가려서 과거와 같이 자기만 옳다하는 즉 다시 말하면 불교 아닌 것은 다 배타해버리는 또는 불교 가운데도 자기 식이 아닌 것은 모두가 다 옳지 않다하는 그런 것을 우리는 싫어하는 입장에서 모인 것입니다.


불교도 이른바 통불교라 각 종파를 초월하고 또는 각 문중을 초월하고 그뿐만 아니라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는 다 종교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불교만이 옳고 딴 종교는 비방한다고 생각할 때는 거기에 같이 공존도 못하고 또는 사회의 참다운 화합도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여기서 모여 있는 우리 법 도반들은 그러한 불교의 그런 구구학(?)도 초월해서 불교나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교나 또는 도교나 그런 것을 모두 다 수용해서 오직 진리만 구하는 도법무이라 원래 진리는 둘이 아니고 성인문심이라 원래 성자는 두 마음이 아닙니다. 다만 그때그때 역사적 배경이나 사람들의 개성 따라서 다르게 표현 되는 것이지 절대로 진리는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대의 추세에 맞추어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딴 종교도 모두 다 수용해서 이른바 통종교라 통진리라 이러한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서 오늘 이와 같이 전당을 일으키는 그러한 우리들의 원대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간법과 출세간법이라 세간법은 제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상대 유한적인 인간의 분별지혜에서 나온 법이기 때문에 이것은 항시 부족이 있는 것이고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세간법은 현재나 또는 과거나 또는 미래나 이런 삼세를 초월해 있는 것이고 또는 생사를 초월해 있는 것이고 하기 때문에 출세간법은 불교 외에도 기독교나 또는 딴 종교도 출세간법입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장 원만 무결한 출세간법은 불교 아닌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전인수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철두철미한 철학인 동시에 또는 원만한 종교고 또는 거기다가 현대 과학을 능가하는 훌륭한 과학인 것입니다.


현대 과학은 물질의 근원이 무엇인가 모릅니다마는 불교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일체 존재의 근원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라 하는 순수 생명입니다. 이러한 순수 생명은 우리 불교만이 뚜렷이 밝힌 것입니다. 진여불성 자리가 인생과 우주의 순수 생명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태양이요 별이요 하지만은 이런 것은 현상적인 상대적인 그런 현상 상뿐인 것이지 사실은 본래적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또는 천체요 모두가 다 본래 모습은 순수제일인 순수 생명인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부처님이요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공자 말에는 하늘 천자 천이요 또는 기독교가 말하는 또는 주님 하느님이요 우리 불교가 말하는 그런 부처님이요 모두가 다 천지우주의 근본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는 둘이 아닌 것인데, 시대 배경과 그때그때 중생 교화의 연 따라서 그때그때 표현이 달랐단 말입니다. 표현이 다르지만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장 철저하니 밝힌 것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래는 천지우주와 더불어서 같은 불성인데 천지우주와 더불어서 모든 중생이다 같은 불성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불교 외엔 없습니다. 지금 현대는 나와 남이 따로 있고 또는 딴 존재와 내가 따로 있고 이렇게 나눠 생각하는 이른바 이분법이라, 나눠서 생각하는 그런 걸로 해서는 인간이 참다운 화합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가장 절실한 우리 인간의 모든 그런 모순의 원인이 무엇인고 하면은 나와 남이 둘이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있다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화합은 못됩니다. 나한테 좋게 하면은 기분이 기쁠 것이고 나쁠 때는 반드시 나쁜 마음 미운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증오하지 말라 또는 분별하지 말라 또는 남을 미워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해라 이런 말을 합니다마는 사실은 원래 정신이 원래 우리 인간이 모두가 다 근본 생명이 같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없으면 원수는 원수대로 남고 미운 사람은 미운대로 남습니다. 불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인고 하면 비록 지금 못났다 하더라도 비록 지금 강도라 하더라도 또는 사람이 아닌 독사라 하더라도 모두가 근본 본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은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느끼는 것이 현대 실존 철학의 가장 깊은 이것이 본질인 것이고 아까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불교나 기독교나 모든 종교의 본질인 것인데 이런 것을 철저히 밝힌 가르침은 불교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말씀을 아전인수로 듣지 말으시고서 염불을 해 보시면은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세계적인 석학들은 다 이구동성으로 다 공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 본질 우주의 본질이 불성인 것이니까 어떤 누굴 보던지 간에 먼저 선행적으로 다 본질은 같구나!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참다운 화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금생에는 못 간다 하더라도 석가모니나 공자나 예수나 그런 분들은 다 그런 우주의 본바탕인 진여불성은 되신 겁니다. 진여불성까지 가신 것입니다. 인간이 갈 고향은 누구나가 다 금생에 못가고 몇 만 생 배회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진여불성자리 우주의 본질 자리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거기에서 인간으로 또는 각 동물로 산이요 냇이요 이렇게 화현되는 것이고 또는 결국은 다시 그 자리로 다 가고 마는 것입니다. 만법이 진여불성이 하나에서 만법이 이루어지고 다시 만상만법이 다시 오랜 세월이 거치면 인과를 따라서 다시 만법의 길을, 근원인 하느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 금생에 게으른, 게으름 부린 사람들은 금생에 못가겠지요. 그러나 금생에 정말로 철저하니 게으름 안 부리고서 정진수행한 사람들은 금생의 석가와 예수와 같이 근본 자리에 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째서 못가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한테 있는 자기만 옳다하는 자기만 소중하다 하는 그런 마음 자기만 소중하니까 자기한테 좋으면 욕심을 내는 것이고 자기한테 좀 불리하면은 성이나 진심을 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 가운데서 가장 근원적인 어리석음이 무엇인고 하면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주생명은 하나인 것인데 하나인줄 모른단 말입니다. 비록 지금 일반 세간적인 상대 유한적인 세간법에는 무식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 자세가 출세간법으로 모두가 다 근본은 부처구나 이 마음을 가지면은 그것이 굉장히 도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에 가리어서 번뇌의 가장 중요한 그런 용업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탐욕심이요 또는 성내는 불룩거리는 흥분하는 마음이요 또는 우주의 본바탕 자기 본질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그러한 것을 생각한다 할 적에 이른바 우리한테 있는 가장 중요한 보배 우리가 자기 본래 고향자리 영생하는 자리 생사를 초월하고 모든 인생의 고난을 초월해서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자리를 어떻해서 갈 것인가? 이런 것을 성인들은 일곱 가지 제물이라 이렇게 해서 칠성제라 또는 칠덕제라 일곱 칠(七)자 큰 덕(德)자 또는 제물 제(祭)자 칠덕제(七德祭)라 횡설수설한 제 말씀 가운데서 다른 것은 못 외우시더라도 칠성제, 칠덕제만은 꼭 외우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자가 갖는 보배인 동시에 우리 중생이 누구나가 다 칠성제를 가져야만이 우리 근본 본 성품인, 근본 본래면목 자리인 부처라 하는 하느님 자리로 들어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칠성제 칠덕제는 무엇인고 하면은 첫째인 이것은 바른 믿음이라 정신이라 바른 믿음, 세간 사람들은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행동도 바르게 못 살아갑니다. 바른 믿음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록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만유는 모두가 다 만유는 모두가 다 근본은 부처구나 이와 같이 믿는 이것이 바른 정신인 것입니다. 성자가 아니면 증명을 못한다 하더라도 성자가 말한 것이니까 꼭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어야 이른바 바른 정신 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바른 계율이라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리의 행동이 발라야 쓰겠지요. 바른 말 바른 행동해야 쓰겠지요.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거니 자기 때문에 남을 희생시킬 수 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비로운 말, 사랑스러운 말 이런 말을 해야 쓰겠지요. 표정도 다 같이 모두가 다 근본이 부처인지라 나쁜 사람을 보나 좋은 사람을 보나 또는 당장 사형을 받을 그 사람을 보나 부드러운 표정, 자비로운 표정으로 연민의 그런 표정을 내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계율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괴라 뉘우칠 참(慙)자 뉘우칠 괴(愧)자 말입니다. 영원적인 진리, 원래 부처님 진리는 모두가 근본이 다 하나인 하나의 불성이기 때문에 원래는 나와 남이 없는 것인데, 꼭 나만 생각해서 자기 권속, 자기 일, 자기만 생각해서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성을 낸단 말입니다.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그때그때 참회해야 합니다. 참회, 부끄러운 마음을 품어야 씁니다. 부끄러운 마음을 품으므로 해서 다시는 않게 되겠지요. 그와 같이 참회를 해야 쓰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일반 중생들한테 부끄러운 마음을 낸단 말입니다. 당신도 모두가 부처요, 천지 우주가 부처거니 내가 어떻게서 나만 위하겠습니까? 여태까지는 내가 ‘나만 위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 사람한테 마음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고 그와 같이 부끄러움을 가져야 쓴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다문(多聞)이라 공자나 또는 노자나 또는 예수나 석가나 이러한 성자의 가르침을 우리가 많이 듣는단 말입니다. 많이 못 들으면 금생에 나와서 잘못 생각하고 잘못 배운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간법으로 배운 것은 모두가 다 사실은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상대법은 허망무상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법, 절대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그런 공자, 노자 또는 예수, 소크라테스, 또는 마호메트 또는 석가모니 이런 분들 가르침을 우리가 많이 듣는단 말입니다. 많이 들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차근차근 정화가 되어 출세간 적으로 우리 마음은 이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문이라.

 

또는 그 다음은 지혜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지혜, 우주 만유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그런 근본에서 보는 우리 중생들은 상대에서 상대를 보기 때문에 바로 못 봅니다. 우리가 시야도 저 산 밑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시야가 좁아서 멀리 못 봅니다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사방이 다 보입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이나 또는 하나님이나 또는 각 위대한 성자의 지혜는 모두가 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것을 산봉우리에서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봐야 만이 다 완전히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근본에서 보는, 저 봉우리에서 이것저것을 다 볼 수 있는 그런 영원의 자리에서 보는 이런 지혜, 이런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행사라. 행할 행(行)자 버릴 사(捨)자란 말입니다. 비록 자기가 무슨 어떠한 것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남한테 시주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남한테 베풀었다 하더라도 그냥 잊어버려야 쓴단 말입니다. 내가 했거니 하는 상을 내면 이것은 참다운 보시 참다운 베풀은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본래 나와 남이 없거니, 본래 재산이나 자기 몸뚱아리까지도 내 것이 아니거니 말입니다. 어느 것도 사실은 자기 철저한 소유는 못되는 것입니다. 다만 임시간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지 어떠한 것도 참다운 자기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우리가 다 모두가 우주 인생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이것이 참다운 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가사 이런 땅이라 하더라도 태초 이후에 태초 이후에 내 것이니 니 것이 있을 수 가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인류 공유의 것인데, 따라서 어떠한 것이나 따지고 보면 어떠한 재물이나 모두가 다 인류 공유의 것인데 다만 세간법적으로 그때그때 한계에 따라서 자기가 관리한다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행사입니다.

 

다시 제가 말씀드립니다. 맨 처음에 바른 믿음이요, 바른 믿음 정신이요, 또는 그 다음에는 바른 행동 바른 계율이요, 그 다음에는 뉘우칠 참자 자기 불심 영원적인 그런 진리에 뉘우치는 그런 참회의 말, 그 다음에는 뉘우칠 괴자, 남한테 대해서 자기 허물을 서슴없이 말해가지고 용서를 빌고 사실은 성자가 아닌 한에는 모두가 다 허물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한테 부끄러움을 느끼고 뉘우치고 또는 그 다음에는 각 성인들의 가르침을 많이 듣는 다문이요, 또는 그 다음에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참다운 지혜, 좁은 견해에서 자기의 소견 자기가 배우고 느끼고 그런 좁은 소견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자의 지혜를 우리 지혜로 한단 말입니다. 성자만이 바로 보았기 때문에 성자의 지혜를 우리 지혜로 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지혜 이것은 만유가 모두가 다 근본이 같다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 되든지 간에 다 근본은 같구나, 근본은 같은 생명이구나, 자타가 없구나, 무아무소유구나 말입니다. 왜 내가 없고 내 소유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야 이것이 참다운 성자의 지혜인 것입니다. 또는 한 가지는 우리가 남한테 베풀고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상을 내지 말고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의 어떠한 권력을 내지 말고서 조금도 마음을 흔들어 두지 않는 이 마음이 행사입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 덕제요, 칠덕제 또는 칠성제 성자가 이러한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은 이런 덕제가 없기 때문에 사실은 빈궁한 것입니다. 우리는 차후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법 가운데서 출세간법이라 우리 세간적인 법, 상대 유한적인 법은 세간법인 것이고, 상대 유한적인 법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를 통틀어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치 않는 그런 불변의 진리는 이것은 출세간법입니다. 출세간법의 그런 보배 이것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 칠덕제, 칠성제입니다. 부디 우리가 몸은 세간에 있다 하더라도 비록 자기가 지금 어떠한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자리에 있던지 간에 우리의 가장 보배, 가장 보배로운 칠성제가 없으면 우리는 빈궁한 것입니다. 이런 칠성제가 가장 적은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빈궁한 것입니다. 비록 자기 지위가 설사 대통령을 한다 하더라도 이런 칠성제가 없으면 그 사람은 빈궁한 사람인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지위고하 입장 이하를 불문하고서 인생과 우주의 가장 중요한 보배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노자나 세계의 그런 철인과 성자가 다 칭송하는 또는 지킨 그러한 칠성제를 가지고서 금생에 한사코 부처님한테 하나님한테로 가까이 다가서서 부지런하게 닦은 사람들은 금생에 성불할 것이고 금생에 못하면 가까운 생에 꼭 성불하셔서 영생의 행복을 향사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상량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