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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30. 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제주불교신문)

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 - 무주당(無住堂) 청화 스님(1923~2003)
“일상서 佛法 실천 통해 참다운 해탈 이뤄야”


[그림1] 부처님 법의 요체는 청정한 계율, 참선염불하는 선정, 인간의 본질과 우주만유의 근본 성품인 본체를 아는 지혜 등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야말로 우리 마음과 몸을 편하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나 모든 것을 순탄하게 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 같이 합리적인 것은 없습니다.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계명 등 세계 종교의 우수한 도덕률도 다 불교의 계율에 들어 있습니다.

계율만 제대로 지키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마음도 편해지고 주위도 편해집니다. 우리가 참선염불을 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려 하더라도 계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명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흉내만 낼뿐이지 마음이 정화되지 않습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계율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명상을 해서 이루는 마음 정화는 올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반야(般若)의 지혜입니다. 세속적인 분별지혜, 차별적인 지혜, 이런 것은 우리 인간 의식의 범위 내에서 분별하는 것이지, 초월적인 모든 존재 본질의 지혜는 못 됩니다. 따라서 재주가 조금 있고 학문적인 수련이 깊어서 분별적인 지혜는 어느 정도 익힌다 하더라도, 이른바 분별을 떠난 현상적인 문제라든가 초월적인 문제를 통틀어서 제일의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른바 무위법(無爲法)입니다. 또는 무루법(無漏法)이라고도 합니다. 무위법은 인연 사이의 모양이 아닌, 그 모양을 지양한 생명 자체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른 종교의 교조가 전혀 모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처님처럼 명확히 구분하지는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 물질이라든가 여러 가지 것을 보시도 하고, 봉사활동도 한다고 합시다. 하지만 유위법(有爲法)의 범위 내에서는 ‘나’라는 관념과 ‘너’라는 관념을 떠날 수가 없고, 내가 물질을 많이 보시한다, 적게 보시한다는 그러한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 동시에 우리 인간의 본래적인 도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흡합니다.

상을 떠나는 행위, 이것은 그 생각으로나 행위로나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상을 떠나서 행해야 그것이 도업(道業)이 됩니다.

우리 불자들은 도업과 세간에서 착한 일을 해서 쌓는 선업(善業)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선업입니다. 욕계․색계․무색계와 같은 곳에 가는 것은 선업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선업만으로는 우리의 번뇌를 모조리 소멸시켜서 영생해탈로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욕계를 초월하고, 색계를 초월하고, 또 무색계를 초월하고, 천상도 다 초월해서 정말로 대자유인, 참다운 자기인 대아, 진아의 존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업을 쌓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생활하며 욕계의 굴레에 있더라도 오염되지 않은 불성 알아차려 수행정진해야”


“성자들은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지만 중생은 형상을 본질로 잘못 인식 분별심 생겨”


부처님의 가르침은 참다운 해탈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은커녕 아직 선업도 못 닦은 이가 많은 것을 볼 때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인간의 몸으로 욕계의 굴레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의 불성 자체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대사 같은 도인들과 비교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만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불지(佛地)에 오른 유마거사의 말씀을 모은 《유마경》 가운데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마거사가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불, 목건련을 위시해서 32아라한에게 설한 법문입니다.

둘이 아닌 그런 수승한 법에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둘이나 셋이나, 이원론도 삼원론도 아니고 오직 일원론이라는 말입니다. 일원론은 나, 너, 달마, 석가, 우리 모두가 본체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현상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아니, 나 같은 중생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왜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라고 의심을 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차이가 있는 모양에서 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야말로 구체화하여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또는 우리 수명이나 시간이 짧다고 하는 상을 다 떠나버린 경지에서 본다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을 어떻게 여윌 것인가 중요합니다. 상을 여의는 법문이 바로 유마거사의 입불이법문입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성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데, 중생들은 모든 것을 업장이라는 안경을 쓰고 천차만별로 본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은 평생 분별만 합니다.

불자들은 겉을 꾸미는 데 집착하지 말고, 속절 있게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상에 끄달려 행하는 모든 것은 부처님 법을 자기 것으로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이른바 상을 떠나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의 본체인 불심(佛心)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상으로 봐서는 제아무리 많은 현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자리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근본자리와 현상의 것을 물과 물결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근본자리는 물에, 현상적인 문제는 바람 따라 일어나는 파도에 빗댄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업장의 현상만 볼 뿐, 나의 본질도 너의 본질도 못 보고 만유의 본질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 모두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고, 일체 존재의 본질이기에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법성, 실상, 도, 열반, 여래장 등도 같은 뜻입니다. 표현은 비록 다르더라도 근본은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은 불심자리, 불성자리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자는 그 자리가 하나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아직 그 자리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부처님 같은 성자들의 가르침이 있기에 마음의 본질이 불심임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처럼 편하고 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가 순식간에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면 당체즉공(當體卽空)이기 때문에 이 세계 그대로가 모두 ‘공(空)’입니다. ‘공’의 실체가 바로 불성입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내 행복을 위해, 우리 민족의 응비를 위해,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해 어렵고 힘들수록 부처님 가르침을 지극하게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마음 법뿐 아니라 우리 몸에도 제일 좋은 묘방입니다.

2009-10-14 오후 3:53:01
/제주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