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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4. 염불삼매

4. 염불삼매

 

 

 

 

우리가 공부할 때 무진 애를 쓰고 공부는 하는데

그럴만한 인연이 성숙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앞이 확 열려서

부처님이 분명히 앞에 나오십니다.

 

 

 

 

염불삼매(念佛三昧)에는 인(因)과 과(果)의 두 경계가 있습니다.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을 하거나 또는 일심으로 법신의 실상을 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거나 혹은 일심으로 부처의 명호를 외우는 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명(佛名)을 외운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법신자리를 믿어야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닦아갈 때 염불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견성하기 전에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서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의 실상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에 계합되는데 이것을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따라서 염불로도 견성(見性)하고 천수경으로도 견성하고 마음에서 업장만 녹아지면 다 견성합니다.

 

그러나 “시방불이 현전한다, 부처가 앞에 나온다.” 말이 표현될 때는 또 의단을 품습니다. 부처란 상(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부처가 상이 있으면 참다운 부처가 못 되겠지요. 우리는 이러한 때도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해야합니다. 부처님은 상이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이 허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의 화신으로 육도중생(六道衆生)이 나오지 않습니까? 본래 실상은 색즉공(色卽空)이라, 본래의 몸뚱이 그대로 바로 공이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따라서 부처님도 역시 필요한 때는 바로 부처님 상호를 우주에 가득 차게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부처님의 몸은 크기가 60만억 나유타신(那由陀身)이라 합니다. 나유타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큰 몸이 부처님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바로 시방여래(十方如來) 시법계신(是法界身)이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경을 볼 때도 경의 말에 너무나 집착을 말고서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는 작게는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부처님은 들어가신다고 말합니다.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세계란 것은 그냥 공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량의 공덕을 갖춘, 상이 없는 세계가 바로 허공입니다. 보통으로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허공이라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은 그것이 아닙니다. 무량공덕을 갖춘, 상을 떠난 무량무변의 경계를 바로 허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모공중(一毛空中)에 무량불찰(無量佛刹)이 광연안립(曠然安立)이라, 조그마한 터럭 가운데도 한없는 부처님 세계를 다 원만히 갖추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작고 적은 것으로 부처님 법은 비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장무애란 것은 작고 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자리, 무량공덕을 갖춘 그 생명자리가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에 가득 차있는 그것은 작다 크다를 초월해 있습니다. 따라서 티끌 가운데나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나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性品)으로는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성품으로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 무진 애를 쓰고 공부는 하는데 그럴만한 인연이 성숙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앞이 확 열려서 부처님이 분명히 앞에 나오십니다. 더러는 부처님 상호가 방안에 가득 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영상(影像)에 집착하고 맙니다. 그러면 공부가 그냥 악화가 됩니다.

 

실상무상(實相無相)이라, 실상은 상이 없습니다. 또한 일정한 고유한 상이 없다고 해서 허무가 아니라 만상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모신다거나 그런 분들은 경험을 더러 하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금색으로 훤히 빛나는 부처님도 보이는 것이고 어떤 때는 밤인데도 훤히 밝아서 방안이 다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부처가 그뿐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선 닦아나가는 수행법인 인행(因行) 공부를 하다가 좀 하기 싫거나 빨리 성취하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오래 못 닦습니다.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독지옥(孤獨地獄)이라, 우리가 외로운 것도 지옥같이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니체(Nietzsche) 말대로 '고독은 그대 고향이다. 고독한 가운데 그대의 고향을 가라' 이런 말은 우리한테 감동을 줍니다. 고독을 못 참으면 삼매에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독을 못 참으면 무슨 필요로 승려가 되겠습니까?

 

도반(道伴)이 좋기는 좋으나 너무나 밀착하면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관심을 두어야 되겠지요. 대중이 좋으나 공부가 익은 다음에는 또 방해가 됩니다. 달마의 9년 면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석존의 6년 고행상을 상기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짐짓코 우리가 선택해서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니까 습기 때문에 고독한 때는 친한 사람도 만나고 싶겠지요. 그러나 냉철하게 자기를 추슬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