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32

132. 내 본래 마음이 청정무구하다, 이렇게 알지 못하면 참다운 불자가 못됩니다. 나는 별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나는 거짓말도 많이 했는데 나는 더러는 파계(破戒)를 많이 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 과거에 어떻게 지냈던 이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나한테 갖추고 있는 것은 내가 금생에 태어나서 제 아무리 못된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내가 갖추고 있는 본래의 마음은 조금도 오염(汚染)이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청정이라, 모두가 본래 청정합니다.


또는 내가 설사 금생에 인연이 다해서 목숨을 마친다 하더라도 내생(來生)까지 가더라도 역시 금생에 잘 못 살아서 내생에 지옥을 간다 하더라도 본래 청정한 그 마음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청정은 어떠한 것인가? 다만 텅텅 비어서 때가 묻지 않은 것에 그치지 않고, 본래 청정하므로 석가모니 마음이나 달마 스님 마음이나 서산 스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똑 같단 말입니다. 부처님 마음이 훤히 맑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는 마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 청정하므로 그 마음 가운데는 일체 공덕이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아무것도 아니 배웠다 하더라도 또 어린 동자라 하더라도 그 마음 가운데는 석가모니와 똑같은 만 공덕(萬功德)을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내 마음은 그와 같이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청정한 것인데, 그 청정한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마음자리는 내 몸뚱이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우주와 더불어서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永生)합니다. 또 그 자리는 인연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우주가 인연이 다 해서 텅텅 비어지는, 파괴(破壞)가 되어 버리는 그런 때가 온다 하더라도 그 청정무구한 그 마음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믿는 것, 이것이 참다운 대승신앙(大乘信仰)입니다.


내 마음도 그렇고, 저 사람 마음도 그렇고, 내 마음도 역시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언제나 어디에나 충만해 있고, 이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이 다 차 버렸으니까 다른 사람 마음은 찰 틈이 없겠지만, 마음은 물질이 아닌지라 내 마음이나 저 사람 마음이나 모두 마음이 똑 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다, 너다, 밉다, 곱다 하는 분별 망상하는 그 마음 이것은 거품 같은 메아리 같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실 실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참다운 마음은 그와 같이 물질이 아니고, 거품 같은 것이 아니고,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니고, 이것은 실존적인 우주의 실상인지라 모든 존재의 마음 이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고 자기를 너무나 아끼고 이런 사람들은 소중한 내 마음과 저 미운 사람 마음과 같다고 생각할 때는 좀 섭섭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절대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것입니다. 다른 동물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다른 식물에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어떠한 것이나 생명 자체로 들어갈 때는 똑같아 버립니다. 이런 소식을 알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고, 이러한 도리를 알고 참선 공부를 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이런 도리를 모르면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우리가 참선할 때에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또 염불선(念佛禪)도 하고, 염불 화두도 합니다. 훤히 밝은 마음자리는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한 것이므로 그 가운데는 석가모니나 예수가 갖춘 무한의 공덕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 공덕은 이루 다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공덕을 다 말할 수가 없으므로 간추려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이릅니다. 삼명육통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지난 과거를,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끝도 갓도 없는 과거를 훤히 알고, 다른 사람 과거도 알고, 미래도 훤히 알고, 또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훤히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아는 것이 숙명통(宿命通)이요, 미래를 알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통달하는 것이 이른바 천안통(天眼通)이요, 또 일체 존재에 대한 모든 번뇌를 끊어 버리고 진여불성을 증명하여 부사의(不思議)한 능력을 갖춘 누진통(漏盡通), 이러한 것들을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마음도 헤아리고, 이런 등등 무한의 능력이 우리 마음에는 온전히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 보고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무루공덕(無漏功德)이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때 묻지 않은 일체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의 근본 마음 가운데는 무루공덕이 원만구족 되어 있습니다. 어느 성자의 말씀에나 이런 말씀이 다 있습니다. 지금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신통(神通)은 외도(外道)들이나 하는 것이지 정도(正道)에는 신통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이것은 부처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외도인들도 신통을 합니다. 그러나 외도인들은 바른 견해가 없습니다.


번뇌를 미처 떼 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는 아상(我相)을 못 떠나 있습니다. 외도는 재주는 제법 부리지만 나라는 아상을 못 떠나 있으므로 그 재주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 재주로 자기 욕심을 부립니다. 욕심을 내면 신통은 어디 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성자(聖者)의 신통은 자기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신통은 조금도 줄어듦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자기한테 갖추고 있습니다. 성인들뿐만 아니라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 이른바 그 자리가 진여불성입니다. 나한테 있는 것도 진여불성, 저 사람한테나 누구한테나 있는 근본 성품은 진여불성입니다.


나무한테나 어디에나 언제나 불성은 우주에 가득 차 있고 사실은 우주는 진여불성뿐인 것입니다.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별이요, 식물이요, 동물이요, 이러한 것들은 진여불성 위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가짜 모양을 나툰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위에 인연 따라서 잠시 같이 이루어진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꼭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