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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27

127. 부처님 법을 믿는 사람도 역시 그냥 피상적으로 믿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교를 믿는 분도 법에 맞게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바른 생각과 행동이 같아야 할 것인데 보통 그렇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바른 견해를 세우지 않으면 바로 못살아 갑니다. 즉, 말하자면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나라나 또는 세계가 바른 사상이 확립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사상이 확립되었다면 인간은 언제나 화평이 넘치는 화장세계(華藏世界)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른 사상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항시 갈등과 분열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른 사상, 바른 견해는 무엇인가? 대체로 윤곽은 아시지만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저와 더불어 재인식하시길 바랍니다. 바른 견해는 어떤 견해인가?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천차만별로, 자타(自他)가 있고, 시비(是非)가 있고, 여러 가지 그러한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보면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진리로 귀일(歸一)되는 것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모든 법(法)이 천차만별로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오직 근원 바탕은 하나뿐입니다. 근원이 하나 인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 하나가 되는 것이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분별된 이대로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면 나중에 죽어서 저 몇 억년 뒤에 하나가 된다. 이렇게 생각 한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범부의 견해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또는 여러 가지 중생의 천차만별로 무수(無數) 만인의 그런 중생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대로 지금 분별된 체로 이대로 하나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이 분별만 보고서 하나인 것을 못 봅니다.

 

물위에 뜬 파도나 거품만 보고 물 자체는 못 봅니다. 성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봄과 동시에 그런 근본바탕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저 사람 강(姜)씨다, 또는 김(金)씨다, 잘났다, 못났다, 남녀다, 여(與)다, 야(野)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범부가 보는 즉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또는 수자상이나 상을 여의지 못하고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상을 여의고 보면 그때는 무두가 다 하나로 보입니다. 하나로 어떻게 보일 것인가? 모두가 그때는 불성으로 보입니다. 불성이 인연 따라서, 조건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는 했습니다. 그 차이뿐입니다. 산이 되었거나 냇물이 되었거나 또는 하나의 원자가 되었거나 간에 근본실상, 근본실성은 역시 불성뿐입니다.

 

천지우주는 불성뿐입니다. 그런 불성이 가지가지의 인연 따라서 이와 같이 만다라화(曼陀羅華) 바로 훌륭한 여러분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을 제가 이렇게 뵌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과거 전생에 무수 생(無數生) 동안에 부처님 법을 만나기 위한 그런 선근(善根)을 쌓으신 것입니다.

선근을 안 쌓았으면 부처님 가르침 같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금생에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사실은 사람의 허물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허물을 쓰고 있던 개의 허물을 쓰고 있던 간에 내내야 우리의 본바탕은 똑같은 불성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비록 지옥 들어가서 그 지옥의 그런 모진 세계의 껍질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내내야 알맹이는 불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그런 것에 가려서 껍질만 보고서 알맹이를 못 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나 또는 공자나 그런 성자들은 알맹이를 보는 것입니다. 성자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존재의 실상을 봅니다. 우리 중생은 실존을 못 보는 우리는 하나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에 가린 소경인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제아무리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고 또는 웅변이 그야말로 무생물(無生物)인 돌이나 하늘에 있는 꽃이 감흥(感興)을 해서 고개를 끄덕끄덕할 정도로 말을 잘 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해서는 불성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을 못 보기 때문에 제아무리 웅변을 잘하고, 야당(野黨)이나 여당(與黨)이나 여러 가지 그런 훌륭한 말씀을 많이 하지만 그분들이 부처님을 믿고 참다운 성자가 못되는 한에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참다운 본바탕인 진리는 못 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스스로의 참 자기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 못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회는 혼란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 플라톤도 말을 했습니다만 참다운 성자가 사실은 정치인 되고, 참다운 성자가 정치를 해야 만이 인류 사회는 비로소 참다운 평화스러운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그런 세계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범부의 경우에는 - 범부라 하는 것은 마음을 비웠다 또는 무엇을 비웠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 몸뚱이에 걸리고 맙니다.

자기 껍데기에서 걸리고 또는 자기 권속에 걸리고 맙니다.

 

 상대 유한적인 여러 가지 물질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 제한된 견해로 해서는 참다운 진리를 모를 뿐만 아니라 남을 이끌 자격도 사실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말로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닦고 바로 믿어서 우리가 보다 더 많은 수의 성자가 많이 나오고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성자가 되고, 우리가 성자가 못되는 한에는 우리 본바탕이 바로 성불이기 때문에 우리 본 생명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까지 우리가 못 갈 때는 우리는 몇 만생이나 껍질만 쓰고 헤매는 것입니다.

 

지옥의 껍질을 썼다가 또는 축생의 껍질을 썼다가 사람의 껍질을 썼다가 말입니다. 그와 같이 껍질만 쓰고 우리는 텀벙거리는 것입니다. 잘 닦아서 성자가 되어야 만이 비로소 껍질을 벗고서 알맹이 그대로 부처님 그대로 우리가 자기의 생명의 본 목적과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주라 하는 것은 내내야 모두가 다 성불의 길로 지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불의 길을 가는 것은 사실은 우주의 목적에 따른 것이고 우주의 도리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더 자기의 본 생명을 깨달은 것인가?

우리 마음은 지금 사람이 되어서 사람의 정도로 오염이 되어서 사람의 껍질을 쓰고 있으나 우리 마음의 불성은 조금도 때 묻지가 않았습니다. 우리 가사(袈裟)를 또한 연화복(蓮華服)이라, 연꽃 연자, 꽃 화자, 연화복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진리는 마치 연꽃 모양으로 진흙탕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진흙에나 흐린 물에 물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의 불성, 마음도 역시 사람이 되나 구름이 되나 또는 지옥을 가나 축생이 되나 우리 불성의 차원은 조금도 물들지 않습니다.

 

마치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높이 일어나고 낮게 일어나서 거품이 되고 또는 파도가 되나 즉 물 기운은 조금도 변치가 않듯이 우리 사람도 역시 그런 불성 기운이 인간이 되 든 무엇이 되 든 간에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잘 안보입니다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 성품(性品)은 조금도 변동이 없이 여여한 불성 그대로 찬란한 성품 뿐 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은 미쳐 자기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성자의 흠축이 없는, 조금도 흠이 없는 교훈 따라서 바로 보면, 바로 있는 것은 모두가 다 불성뿐이구나. 그와 같이 느껴야 됩니다. 이러한 느낌을 갖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습니다만, 이런 공부가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이 되고자 해서, 빨리 하나가 되고자 해서 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인식적으로 모두가 다 불성뿐이다. 이와 같이 느끼는 것이 선행적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비로소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옛날 미련한 때는 애써 닦아 가지고 나중에 겨우 알음알이를 얻지만 지금은 총명한 때라서 그럴 때가 아닙니다. 또는 지금은 다들 너무나 바삐 돌아갑니다. 외도(外道)도 많고, 잡설도 많고, 여러 가지 주의, 사상이 많아 놔서 우리는 바쁘고 너무나 복잡해서 바른 견해를 못 가지면 사실은 단 한 걸음도 바로 못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