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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28

128. 물질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몰라 버리면 방황하여 헤매게 됩니다. 인간이 있고, 원자가 있고, 무엇이 이고 간에 근원적인 순수 에너지 이것은 바로 불성이다 하는 바른 견해가 앞서야 합니다. 불성은 앞서 말씀과 같이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입니다. 마음으로 표현하면 불심입니다. 불심, 불성, 부처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모두는 사실은 불성뿐입니다. 불심뿐입니다. 불심뿐이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불법을 이해 못하는 분들은 도저히 감이 안 잡힙니다. 분명히 물질적인 내가 있는 것이고,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여러 가지 원소가 있고 하거니 어떻게 마음 뿐 일 것인가? 불법을 너무 깊이 못 믿으면 '일체유심조'라 하는 '모두가 마음이다'란 말을 못 믿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조금도 흠축이 없이 모두가 다 마음 뿐 입니다. 불심뿐입니다. 불심 뿐 인 것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가 욕심을 내겠습니까? 모두가 다 불심뿐이라고 확실히 믿으면 우리가 권력에 탐을 내겠습니까? 불교를 믿는 다는 분도 여러 가지 과오를 많이 짓고 쇠고랑을 찹니다.


그런 것은 사실은 겉만 믿습니다. 겉만 형상을 믿고 현상을 집착하는 것은 불교를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특히 나이 많이 자신 보살님들 잘 보십시오. 현상을 믿는, 자기 몸뚱이, 내 남편 몸뚱이, 내 아내 몸뚱이 또는 많은 돈, 좋은 집, 이러한 현상을 믿는 분은 참다운 불교인이 못됩니다. 형상 이것은 결국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무상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사람이 죽어지면 끌려온 사람한테, 공부를 많이 하신 사람은 염라대왕이 안중에도 없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만 공부를 못한 분에게는 염라대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육도경계(六道境界) -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를 못 벗어나면 염라대왕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염라대왕한테 끌려갔단 말입니다. 끌려온 중생한테 염라대왕이 하는 말이 '그대가 살아생전에 내가 보낸 세 사람의 천사를 보았는가?" 이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무릎을 꿇고서 죄의 심판을 받는 영가 중생이 못 봤다고 대답을 한단 말입니다. 내가 보낸 천사는 노(老)가, 병(病)가, 사(死)가니라. 늙음이라 하는 천사, 늙은 사람들이나 자기 늙음 그것이고, 또 한 천사는 자기가 아프기도 하고 남이 아픈 것도 보는 그런 병이라는 천사, 또 한 천사는 죽어서 가는 주검이라는 천사, 노, 병, 사 이것이 내가 보낸 세분의 천사이니라. 이와 같이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 중생은 어느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천지우주의 정칙(正則)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보통 다 이런 천사를 못 봅니다. 늙어 가는 것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저 같은 사람도 환갑, 진갑을 넘었습니다마는 젊은 때가 어제와 같습니다. 젊어서 파릇파릇 중 될 때가 어제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온갖 황혼 길입니다. 또 아프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몸이 건강하여 자기는 아프지 않더라도 자기 주변 사람이 아프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안 죽습니까? 머리가 영리한 사람들은 이것 보고서 집착을 별로 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늙어 가서 죽거니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과연 내 몸뚱이가 소중한 것인가? 또 재산이 소중한가? 권력이 그렇게들 소중한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소중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선재대장부(善哉大丈夫) 능요세무상(能了世無常)이라!


착하도다 대장부여, 능히 세상의 무상함을 깨달았으며, 대장부(大丈夫)라 하는 것은 기운이 세어서 장부가 아닙니다. 대장부라 하는 것은 무상을 느껴야 만이, 일체만법이 허망무상한 것을 느껴야 만이 대장부입니다. 비록 지위는 어떤 지위에 있더라도 무상을 못 느끼면 대장부가 못 되고 그 사람이 인간적인 참다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을 참다웁게 느끼면 그때는 저절로 마음도 비워지고 남한테 궂은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탐욕도 못 부리는 것입니다. 우선 앞서 말씀과 같이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우리 범부들은 독심에 가려 있습니다. 어두운 탐욕심에 가리고, 또 분노하는 진심에 가리고, 어리석은 치심에 가린 그런 삼독심에 가려 있습니다.


범부인 한에는 독스러운 독심이 다 있습니다. 가장 억울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범부를 벗어나 성자가 못되는 일이 가장 억울한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성자가 못되는 것인가? 제 방금 말씀과 같이 삼독심에 가려서 못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할 일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급선무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원수인 삼독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불교 의식을 밤마다 합니다.


그렇게 해서 더러는 병이 낫는 보살님들을 보시고서 여기 오셔서 불교 의식을 하려고, 또 기도를 하시려고 들 많이 오십니다마는 제가 병을 낫게 하는 기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다. 마음이 주인이고 몸은 그 종에 불과하다. 몸은 사실은 텅 빈 공취(空聚)라, 빌 공자, 모을 취자, 공취다.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 몸이라는 것은 공취입니다. 공 기운이 모여 있습니다. 물질이 아닌 마음기운, 물질이 아닌 에너지 기운이 모여서 진동하는 현상을 몸뚱이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업장에 알맞게 몸을 받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사람 정도로 우리가 업장이 무거우면 그때는 사람으로 화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였다가 흩어지고 맙니다. 황야(荒野)에 집을 지으면 집을 지을 때는 없었던 집이 생기지만은 또 뜯어버리면 텅 비어 원래 그대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몸도 역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를 비롯한 각 원소가 업장 따라서 끌어 모아서 그것으로 만듭니다. 죽어지면 어디가 무엇이 남습니까?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집착합니다. 자기 손이 소중해서 손을 가꾸고 반지를 끼고 별 짓 다 합니다 만은 생각해 보면 사실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반지도 자기 손가락도 아끼는 자기 몸매도 간 곳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비록 삼독심에 가려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는 오직 모두가 불성뿐이다. 바로 보면 다 부처님뿐이다. 이와 같이 바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서 그 다음에는 우리 행위가 달라져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맑은 것이고, 또는 그 반대로 우리 몸이 청정하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도 따라서 청정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계행을. 계율(戒律)을 안 지키면, 계율이 없으면 살생도 하고, 또는 훔치기도 하고, 또는 삿된 음란한 짓도 하기도 하고, 이와 같이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에 끌려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다 보면 그때는 우리 마음은 안정이 안 됩니다. 안정이 안 되면 우리 마음의 근본번뇌를 못 녹입니다.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탐욕심이나 분노나 또는 성내는 마음이나 이런 마음을 못 녹입니다. 못 녹이면 그때는 이제 우리 불성을 못 봅니다.


본래는 부처이건만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견해와 바른 법으로 우리 행위를 다뤄야 합니다. 말을 급하게 하면 따라서 우리 마음도 그냥 파동을 일으킵니다. 파동을 일으킨 마음으로 해서는 우리 번뇌가 더욱 치성을 돼서 근본 불성을 못 봅니다.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라. 본래 여러분들 마음은 명경지수와 같습니다. 밝을 명자, 거울 경자, 그칠 지자, 물 수자, 여러분 마음은 지금 밝은 거울과 같이 티끌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명경지수와 같이 맑지를 못합니다. 조금 기분이 나쁘면 그냥 순식간에 악을 뻗칩니다. 이런 파동 치는 마음에서는 우리 번뇌가 녹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근본성품 불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행동을 우리가 주의하고, 말도 부드럽게 하고, 그렇게 하려면 먼저 선행적으로 앞서 말씀과 같이 바른 견해가 딱 앞장서야 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의 파동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없고, 남이 없고, 좋은 것이 없고, 궂은 것이 없고, 천지우주가 내내야 다 불성뿐이다. 이와 같이 자주 느끼고 자기 마음을 달래고 하는데서 우리 마음의 파동이 잔잔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업장을 녹이고 우리 마음의 파동을 자게 하는 이러한 수행법, 이것이 참선이고, 염불이고, 주문인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분들이 꼭 자기 하는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 티베트 사람들은 '옴마니 반메훔'만 합니다. 그러나 옴마니반메훔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사도(邪道)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티베트의 고승(高僧)들이나 티베트 불교는 다 사도입니까? 또 염불만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염불이 가장 수승한 것이고 딴 것은 하면 안 된다. 이런 논법은 지금 같은 시대에는 통용 될 때가 아닙니다. 원효대사(元曉大師)나 대각국사(大覺國師)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나 정통적(正統的)인 그런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그러기에 회통불교(會通佛敎)를 하셨습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인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 도인들 말씀은 모두가 다 불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한테 보다 빨리 그런 번뇌를 녹일 것인가? 자기 원수인 그런 탐욕심을 버리고, 또는 진심, 성내는 분노심을 버리고 어리석은 무명심을 버릴 것인가? 어떤 방법, 즉 방편이 보다 더 빨리 효과적으로 삼독심을 버리는 그런 행법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지 어느 것만 옳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행법은 모두가 다 성불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