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스님은 한 성깔 하시는 분인데, 사시는 것은 처음 출가 하실 적에의 마음과 몸을 그대로 지니고 철저히 무소유로 사시는 분입니다. 선방에서 정진하나 주지소임보고 나오나 항상 살림살이는 걸망하나입니다. 제법 큰 절소임보고 소임 끝났다고 걸망하나만 메고 나오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들리는 바람결에 그 분이 원적(圓寂)하시였다 하고 병명은 암이 이었다고 하는데. 평균나이로 보아서 입적할 연세가 아닌데 “그 한 성깔이 생명을 단축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바람결에 들리는 말이 그 동안 살면서 원수를 다 용서했는데 “아버지는 용서하지 못하겠다.” 하였다고 합니다. A.스님하고도 안면도 있는데 그 소리를 듣고 항상 궁금한 것이 출가사문이 왜 세속에 아버지를 숨이 넘어가면서도 용서 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서 A.스님을 잘 아시는 분으로부터 A.스님이 어릴 적에 계모(繼母) 밑에 고생하고 자랐다는 말을 듣고, 짐작하기를 어릴 적에 계모 밑에서 혹독한 용맹정진을 하고 그 한(恨)이 아버지에 미치고 결국은 출가사문이 되어서 숨이 넘어가도 그 인연을 못 녹이고 갔다는 생각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할 적에 어릴 적의 마음의 상처는 평생 간다고 합니다. 어릴 적의 마음의 상처는 평생을 정신적 장애자로 산다는 것인데, 부처님 법 만나서 재물 욕과 명예욕은 극복했어도 의붓엄마의 한은 극복 못했다 하는 생각에 안타깝습니다.
옛 글에 까마귀가 날면서 배를 떨어트렸는데, 마침 배나무 밑 바위위에서 오수(午睡)를 즐기던 뱀 머리에 맞아 뱀은 죽고 뱀은 다시 멧돼지 몸 받고 까마귀는 꿩의 몸을 받아 멧돼지가 칡뿌리 캐먹는다고 땅을 헤집다 돌을 굴려 그 돌이 꿩의 보금자리를 덮쳐 꿩이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까마귀가 뱀을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닌데, 과보 역시 멧돼지가 꿩을 어떻게 할려 한 것이 아닌데 꿩이 사고로 죽게 된 것이지요 인과는 이렇듯 정확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과(因果)는 돌고 돌아 끝이 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돌고 도는 인과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은 반조(返照)를 통하여 용서하고 거두어 주어야 인과(因果)가 멈추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만나 사소한 시비로 멱살잡이 하는 것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계모로 전실 자식으로 만나 한 지붕에서 사는 것이 보통 인연이겠습니까? 그것인 악연(惡緣)이던 선연(善緣)이던 만나서 빚 탕감한 것인데 또 한(恨)을 갖는 다면 다음 생에도 이어지겠지요.
부처님같이 삼명(三明)육통(六通)하신 분들이 사바세계를 꿰뚫어 바라보았을 적에 머리카락하나 다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또 사바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하여 숙명통이 열리신분들이야 이 사실을 눈앞에 바로 보이겠지만 우리 같은 중생들은 이런 사실을 통찰하고 감내(堪耐)하고 용서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어디 사바세계 살면서 전생 빚 없이 사는 사람 있습니까? 그러기에 결정적일 적에 고춧가루 뿌리는 사람도 만나는 것이고 추운 날 담요 덮어주는 사람도 만나는 것입니다. 수월스님 같은 분도 만주에서 소치며 받은 새경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지나가는 길손에 베푸는데 주먹밥에 흙 뿌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3년을 애를 먹여도 언짢은 표정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데, 결국은 그 사람은 비적단(匪賊團)따라 갔다고 합니다.
모든 현상, 존재라는 것이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 소멸하는, 모였다 흩어지는 공성(空性) 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