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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18

118. 그리고 염불(念佛)도 부처님을 찾고자 해서 하는 것이므로 이름 -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똥 마른 막대기라는 화두(話頭)를 들고서도 마음을 통일시킬 수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마음을 집중 못시킬 까닭이 없겠지요. 가장 하기가 쉽지요. 이 세상의 개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이름이 부처님 명호입니다.


어느 공부 열심히 하시는 불자님 말씀이 제가 들었습니다만 그 이는 아직 나이도 젊은 분인데 이런 말을 했어요. '저의 평생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불러도 너무나 짧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한 평생 아무것도 안하고 '나무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만 해도 너무나 짧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주 젊은 사람이 참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습니다만 방편설(方便設)은 직통으로 바로 불성을 말씀 못하고 현상적인 문제에 의지해서 불성 쪽으로 가는 방법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편을 떠난 진실설(眞實說)은 수승한 근기가 있고 이론도 있고 교양도 있고 또 본체를 이야기해도 알아먹을 만한 정도가 되면 그때는 본체 성을 즉 불성을 바로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불교 말로 교외별전(敎外別傳),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敎) 밖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마음 딱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가 학식이 있고 그대가 몸도 있고 그대가 여러 가지 이론 체계도 많이 있지만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그대가 지금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그렇게 분별하는 그 마음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곧 직(直)자, 가리킬 지(指)자, 사람 인(人)자, 마음 심(心)자. 그 사람 마음 딱 집어서 그냥 그대로 이 마음 바로 부처다! 그런 법문이 고등 법문이지요. 수행법으로 너절하게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 체계가 많이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가 우리 중생들이 마음이 중요한 줄을 모르고서 항시 겉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이제 모두가 허깨비요, 꿈이요, 공이요 해가다가 중생 근기가 익어지면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고 합니다.


지금 나투어 있는 산도, 풀도 이렇게 누렇고 푸르고 한다 하더라도 누렇고 푸른 그것이 중생이 보아서 누렇고 푸른 것이지 그것도 역시 바로 보면 불성, 즉 부처입니다. 이른바 당체즉시(當體卽是)라! 산이면 산, 물이면 물, 또 티끌이면 티끌 그 당체즉시라. 당체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다만 중생은 잘 못 보지만 성자는 당체 그대로 부처로 봅니다. 이렇게 하는 법이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유(有)로 말하면 태양(太陽)의 체(體)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명(太陽光明)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선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에 해당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물질이 아니고 우주 가운데 텅 비어 있으니 공(空)이라 하고, 그 공 가운데는 일체 존재를 일으킬 수 있는 본 성품(性品)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충만해 있으니 성(性)이라 하고, 또 이 자리에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인 일체현상이 나오므로 상(相)이라 합니다.


앞서 천태지의 스님의 공(空), 가(假), 중(中)을 배대하면 정확히는 좀 문제가 있으나, 이것은 중도(中道)의 중(中)에 해당하고, 이것은 가(假)에 해당하고, 이것은 공(空)에 해당하지요. 이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배대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자리는 아미타불의 타(陀)에 배대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의 미(彌)에 배대하고, 일체존재 일체만유를 아미타불의 아(阿)에 배대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천백억화신 아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청정법신 공만 따로 있지 않고, 가사 우리가 하나의 불빛을 이렇게 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阿)인 불빛이지만 그 안에는 결국 성(性)과 공(空)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그 반대로 공 가운데도 공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과 상이 다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또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은 소박하니 방편적으로 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방편을 떠나서 제일의적으로 해석할 때는 아미타불은 천지 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천지우주인 아미타불의 자비(慈悲)의 상징입니다. 또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무엇인가? 천지우주 아미타불의 지혜(智慧)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름이 많지만 모두가 다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습니다.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릴 때는 약사여래(藥師如來)라. 또 하늘에 있는 각 성수들, 별들을 다스릴 때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여래(七星如來)입니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그와 같이 돌멩이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번에 말하면 바로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달마대사(達磨大師)의 관심론(觀心論)을 보면 마음을 맨 처음부터서 풀이 했습니다. 인간성이 무엇인가? 마음 그것이 기묘한 것이어서, 우리 마음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 별것도 아닌데 결국 마음 파고 들어가면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菴摩羅識)이고 결국은 부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결국은 들어가면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산이요, 냇이요, 티끌이요, 또 원소요, 소립자요, 내내야 들어가면 결국은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도 모두 이것이 똑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縱橫)으로 얽히고설키고 딱 묶여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틀림없이 그때는 무슨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지 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맞게 살려고 하면 될 것인데 우리 중생은 앞서 말씀과 같이 겉만 본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인줄을 본다고 생각하면 균형 있게 살수가 있을 것인데, 속은 못 보고 겉만 보니까 이놈의 모양만 보고, 자기 몸뚱이도 사실은 자기 것도 아닌데 권력이고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불경에서는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보리(菩提), 도(道),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상(實相), 여래(如來), 이것이 원래 우리 주인공(主人公)이기 때문에 주인공,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眞如), 극락(極樂) 모두가 다 결국 부처라는 하나의 별명에 불과합니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름은 다르고 뜻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경을 볼 때 이렇게 나오고 저렇게 나오고 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몰라버립니다만 결국은 다 불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어떤 때는 현상만 가지고 상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체만 말한 법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상만 말한 법문을 보면 성과 체는 잘 몰라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