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실스님 모시고 사는 도량에 연 말에 동지팥죽에 넣을 새알 울력을 큰방에서 사부대중이 모여서 만들었습니다. 저도 큰 절에 살적에 선방스님, 강원스님, 종무소 스님, 어른스님들이 모두 큰 방에 모여서 새알 울력하면서 덕담 나누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알 만들던 A.보살님이 절에 오는 길에 곡차 한잔 걸치고 거리에서 휘청하는 스님을 본 것입니다 아마 그 스님은 연말에 마음이 좀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A보살님 “오늘 절에 오면서 곡차하신 스님을 보았다” 하고 말을 꺼내니 B보살, C보살, D보살 등 한 가지씩 나도, 나도 하고 스님의 허물을 보았다 하다가 다음에는 “누가 그러는데 스님이 어떻게 했다고 하더라” 로 발전 정신없이 구업을 짓는데,
가만히 한쪽에서 말없이 새알 빗던 조실스님이 갑자기 큰 소리로 “A보살!!! 밧나” “보았냐!!!” 하니 보살님 네들이 조실스님도 계신 큰 방에서 이야기에 정신 팔린 것이 부끄러워 조용해지고 큰 방 분위기가 찬바람이 불었는데,
새알 울력이 다 끝나고 조실스님께서 보살님들에게 “개천에서 사는 스님하고 매일 목욕재계 하고 새벽에 절에 올라와 기도하는 보살하고 성불(成佛) 가능성을 본다면 그래도 개천에 사는 스님이 더 낫다 현재는 개천에 살지만 이미 다 버렸기에 한 마음 돌이키면 되지만 새벽기도 나오는 신심 있는 보살에게 다 버리고 출가하라고 하면은 다 머리를 가로 흔든다” 이런 요지의 소참 법문을 해 주시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절에 와서 스님 허물을 말하는 신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절에서 하는 말이 도인되는 것보다 중노릇하기가 더 힘들다 하는 말도 합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는 스님, 독신생활하며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고(3시-4시) 공양시간에 공양하고 잠자는 시간에 잠자고(저녁9시) 예불시간에 예불 드리며 재물과 이름에 헐떡거리지 안이하고 검소하고 소박하게 정진하며 사는 삶이 선근이 아니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근이 있는 분들은 출가하여서 첫 걸음부터 반듯이 걷지만 이번 분들은 현실적으로 이런 분은 소수에 속하고 대부분 처음에는 지그재그로 걷을 며 이리저리 깨지고 세월이 가야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어느 큰스님은 젊은 스님네들의 거친 행동을 “놔두어라 중 옷 입고 버티면 결국은 중 된다” 하고 개의치 안으시었다고 합니다. 마음을 깨치는 공부는 이론이나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과 인격이 정비례가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아(自我)성찰(省察)인데 자신을 살펴보는 일은 시행착오도 겪어야 하고 세월도 흘러서 많이 깨져야 되는 것입니다.
구참 스님들로부터 “금생에는 인간되기 틀렸다” 판정받은 한 도반스님이 지금은 강원도 어느 선방에서 밖에 나오지도 안고 정진만 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참 대책 없이 살던 스님내들이 지금 열심히 사는 것 보면 예전에 구업 진 것이 미안하고 나 자신이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절집에서 하는 말이 중과 과부는 내일을 모른다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무화과 열매입니다 남부지방 바닷가에 잘 자라는 무화과 맛이 일품입니다 이곳에 와서 기념식수한지 2년 올해는 좀 따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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