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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불교 중흥의 기수 다르마팔라(1)

불교 중흥의 기수       출처: 고요한 소리 http://www.calmvoice.org

다르마팔라


Anagārika Dharmapala

Bhikkhu Sangharakshita

상가라크쉬따 스님 지음

류시화․이경숙 역편


(The Wheel Publication No. 70-72.  1964)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The Anag?rika Dharmapala

1864 - 1933


▲ 차례

머리말                                     6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                       9

부록                                      111

어록                                       112

『佛敎』지를 통해본 韓國佛敎와의 因緣     118

그의 護身眞身舍利를 남기고 가다               118

담마팔라의 편지                            121

담마팔라의 逝去에 붙여                      123

弔哭詩 (大隱스님)                          131


* 본문의 주는 모두 역주(譯註)임


머리말

스리랑카는 BC 3세기경 아쇼카 대왕에 의해 불법이 전파된 이후 천오백여년 간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듯이 각 왕조의 비호 아래 번창하고 세속보다 더한 영화를 누리던 승단은 스스로 타락하고 분열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져갔다. 16세기 이후 나라의 운명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손에 차례차례 넘겨졌고 이들 국가로부터 수세기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아오면서 접하게 된 근대문화와 앞선 경제에 바탕을 둔 기독교는 국민들에게 차라리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점차 전통문화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불교의 운명은 교육받지 못한 계층이나 산간 오지의 비문화권 사람들이 믿는 열등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는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싱할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 생애를 바쳐 불교 중흥운동을 국민 계몽운동과 함께 전개하여 부처님의 위대한 정신을 되살리고 땅에 떨어진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시켜 스리랑카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근대 독립국가를 이루는 데 정신적 문화적 기틀을 마련한 애국자이다.


그는 또한 인도에서 힌두교도와 지방 토호들의 사유물이 되어버린 불교 성지를 회복하고 인도 땅에 불법을 재건하겠다는 큰 원을 세워 범세계적 불교기구이며 자선단체인「마하보디 협회」와 세계적 불교잡지 「마하보디 저널」을 창설하여 성지 회복의 기금을 모으고 부처님의 법을 세계적으로 포교하였으며 아쇼카 왕 이래의 대 원력 보살이라 불릴 만하다.


또한 그는 카스트 제도로 피폐된 인도와 스리랑카 국민들의 나약하고 게으른 정신에 활력과 창의력을 불어넣고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실업학교와 불교 교육기관을 세우기도 한 사회개혁가였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 움이 돋고 꽃이 피는, 생성의 활기찬 교향악을 연주하는 이 좋은 계절에 이 분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비록 시간과 공간은 달리 하지만 그 분의 행원(行願)이 지니는 의미가 오늘의 한국 불교에도 매우 실감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오늘의 한국 불교가 처한 현실을 살펴 모든 책임을 ‘너’에게 미루지 말고, 진리니 정의니 하는 명분 어느 구석에 ‘나’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숨겨놓고 있지나 않은지 철저히 밝히고 닦아 부처님 뜻을 바르게 시봉하자는 데 이 책을 펴는 의의가 있다.


                                       옮긴이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

(Anagarika Dharmapala)

20세기 불교 중흥운동의 선구자


어둠 속 한 줄기 서광


망망한 인도양 한가운데 보석처럼 떠올라 있고 일 년 내내 향기로운 꽃냄새가 산들바람을 타고 섬 전체를 감도는 나라, 스리랑카. 하지만 스리랑카의 1860년대는 참으로 암담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잇따른 침략으로 전통문화가 수없이 파괴되고 짓밟혔다. 마치 하늘을 덮으며 밀려오는 거대한 메뚜기 떼처럼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 구릿빛 섬나라로 쳐들어온 것이다. 온갖 기독교 교파들이 밀려들어와 불교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불교 집안의 자녀들에게 성경책을 나누어 주면서, 이 나라 국민들이 역사 이래로 간직해 온 종교, 문화, 언어가 아주 미개한 것이며, 심지어는 인종과 피부 색깔마저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가르쳤다.


당시 선교사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헤버(Heber)라는 유명한 영국 성공회 주교가 지은 다음과 같은 찬송가에 노골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 찬송가는 처음 작곡되었을 때처럼 자주 불리지는 않지만 오늘날 영국 전역의 교회에서 심심찮게 울려 퍼지고 있다.


향긋한 산들바람이

실론 섬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네.

섬의 어느 구석 기쁨을

주지 않는 곳 없건만

거기 사는 인간들만은 정녕

견딜 수 없구나.


아낌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전해 주어도

헛되어라

이교도(異敎徒)들은 눈이 멀어

나무와 바위에 대고 끝없이

절만 하네.


네덜란드는 스리랑카를 점령한 뒤 전국의 불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법률로써 강요했다. 이 법률은 이후 영국 통치 기간 중에도 70년 동안이나 강제로 시행되었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마저도 출생과 동시에 의무적으로 교회에 등록하고 성경에서 따온 이름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가톨릭에 강제 등록하여 소위 ‘개종자’가 된 사람은 영어 식 세례명과 포르투갈 식 성을, 영국 국교도에 등록한 경우는 영어 식 세례명과 스리랑카 성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수치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불교도임을 밝히는 것마저 꺼렸다. 다만 내륙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마을에서 부처님의 법(法)이 종전의 위세와 신망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조차 한 달에 20루피씩 받고 기를 쓰며 조상 전래의 종교를 모욕하고 짓밟으려 드는 현지인 출신 전도사들의 등살에 시달려야 했다. 체계적인 개종 정책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 각 종파는 각기 학교를 세웠고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들 학교에서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당했다. 교회에 다녀야만 하는 것은 물론 결혼 신고도 교회에 했다. 그 뿐 아니라 불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한편, 승가(僧家)의 구성원들은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절집의 계율은 해이해지고 선정수행도 소홀해져 갔다.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있던 사람들마저 불교가 국민들의 심금을 사로잡아 왔던, 저 광휘롭던 2천 년 이상의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 이 땅에서 인연이 다하여 사라져 버릴 운명에 놓인 것이 아닌가, 저 의기양양한 전투적 기독교 군단에 의해 아라비아 해의 푸른 바닷물 속으로 쓸려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이렇듯 법(法)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민족의 앞날에는 서광이 비췄다. 장차 불법을 높이 선양할 거대한 힘이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애국자의 어린 시절





혼탁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조상 전래의 믿음을 굳건히, 그리고 당당하게 지키던 사람들이 있었다. 명문가(名門家) 중에 스리랑카 남부 마타라의 헤와위따르네(Hewavitarne) 가(家)도 그 중 하나였다. 헤와위따르네 딩기리 아뿌하미(Hewavitarne Dingiri Appuhamy)는 농민계급 출신이지만 부귀와 명망을 누리는 유지였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아버지 못지않게 불법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한 아들은 출가하여 힛따띠예 아타다시 테라(Hittatiye Atthadasii The-


ra)가 되어 힛따띠예 대사원에서 중임을 맡고 있었다. 다른 아들 돈 카롤리스 헤와위따르네(후에는 서구식 이름을 버리고 무달리야르 헤와위따르네 ‘Mudaliyar Hewavitar


-ne’라 불렸다)는 콜롬보로 나가 페타 지구에서 가구 제조업을 했고, 콜롬보 사업가의 딸 안드리스 뻬레라 다르마구나와르데네(Andris Perera Dharmagunawardene)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일찍이 말리가칸다에 있는 얼마의 땅을 시주하여 그 곳에다 스리랑카에서 처음으로 불교 승가대학을 세운 신심 깊은 분이었다. 비됴다야 피리베나로 불리던 이 학교(지금은 비됴다야 국립대학이다)는 유명한 초대 학장 히카두와 시리 수망갈라 마하 나야카 스님의 이름과 함께 세계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무달리야르와 그의 젊은 아내 말리카는 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차에 마침내 아이를 갖게 되었음을 알고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나 이 부부가 자식을 원하는 까닭은 서로가 아주 달랐다. 남편은 집안 사업을 계승할 아들을 원한 반면, 아내는 아들이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스리랑카의 자손들을 팔정도(八正道)로 다시 이끌어 줄 승려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직 10대를 채 벗어나지 못한 아름다운 말리카는 매일 아침 동트기 전에 코코넛 기름램프와 향을 준비하고, 쟁반 가득히 향기로운 꽃을 담아 집안에 차려진 법당의 불상 앞에 바쳤다. 그리고 그녀는 기원했다. 암울한 이 나라에 법(法)의 등불을 다시 켜줄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저녁에도 불상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원했다. 이 불상은 스리랑카인들의 가슴에 지나간 옛 영광을, 세속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찬란했던 그 옛 시대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도(古都)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거대한 석불의 하나를 본뜬 목각 불상이었다. 그 옛사람들의 해탈한 마음에서 나온 신비한 영적 감화력이 불상을 통해 스리랑카 여인의 민감한 정신에 스며들었던 걸까. 온정과 평화, 그 신선한 향에 취해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이 몸과 마음을 끝없이 청정하게 닦으리니,

이 몸 위대한 인물을 위한 알맞은 그릇이 되게 하여

꿈속에서조차 감히 그려볼 수 없는

대업을 이루게 하옵소서.”


출산 백일을 앞두면서부터는 매 보름마다 초대받아 온 스님들이 해질 무렵에서 동트기까지 신성한 빠알리 경을 독송하며 아기의 건강과 순산을 빌어 주었다.


마침내 1864년, 부겐빌리아의 아름다운 꽃 넝쿨이 창문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9월 17일 저녁, 잠자던 이 나라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부처님 법의 광명을 온 세계에 비추게 될 운명의 아기, 용맹한 사자, 싱할리의 자손 데이비드 헤와위따르네가 폭풍 치는 밤하늘에 번득이는 번갯불처럼, 우렁찬 첫 울음소리를 냈다. 어린 데이비드 헤와위따르네는 경건한 전통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매일 아침저녁 부모와 더불어 불당 앞에 무릎 꿇고 부처님과 법과 승가의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오계1)를 지킬 것을 서약하며, 인류에게 처음으로 열반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께 지난 이천오백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감사와 찬양의 게송을 암송하곤 했다. 그가 어쩌다 오계를 조금이라도 어기게 되면 어머니는 그것이 어떤 점에서 계율에 어긋나는지를 상냥하고 차근차근하게 타일러 주어 오계를 모두 잘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아이가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이 그 후의 인생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교육심리학의 상식이다. 다르마팔라(데이비드 헤와위따르네의 법명)의 생애야말로 바로 그 훌륭한 예라 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깊고도 자연스런 헌신, 복잡하고 유혹 많은 현대 생활 속에서 평범하고 소박한 계율에 대한 본능적 준수, 부정하고 악한 모든 것에 대한 가차 없는 힐책, 순수하고 선한 모든 것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 이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어린 마음의 비옥한 땅에 뿌려진 어머니의 사랑스런 충고와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이라는 씨앗이 꽃을 피운 결과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종교적 교육이 없었다면 다르마팔라도 그 시기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실크햇에 양복바지를 입고 그의 가족에게는 영어를 쓰고 시종에게는 스리랑카 말을 했을지도 모르고, 스리랑카 불교의 총아 다르마팔라는 아예 태어나지 못 했을는지도 모른다. 옛날 스리랑카 식의 경건한 신앙심이 다르마팔라의 모든 인격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비록 종교 교리에 정통했지만 학자는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글을 썼지만 문필가도 아니다. 40년 이상을 일하고 민심을 흔들었지만 그의 신비로운 인품을 풀 열쇠는 찾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그는, 수세기에 걸친 사회적 억압과 종교적 박해가 있던 그 시기에 자신의 종교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스리랑카인일 뿐이었다. 그에게 종교는 지적 신념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그는 남방 불교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존재했다. 남방 불교 역시 수세기에 걸친 침체 끝에 그의 마음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며 존재했다. 여기에 스리랑카 사람들을 움직이는 그의 신비스런 힘이 담겨 있다. 그는 스리랑카인의 심오한 신앙심을 외부로부터 내려다보는 초연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이 느끼는 대로 느끼고, 믿는 대로 믿는 자였다. 그는 자기 민족이 지니고 있는 모든 선한 요소를 드높게 승화시킨 분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지난날 자신들의 모습뿐 아니라 다시 존재해야 할 미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었다.


헤와위따르네 부부는 스리랑카의 전통에 따라 비됴다야 승가대학의 고명한 스님 시리 수망갈라 마하나야카 테라를 모셔와 이미 범상치 않은 소질을 나타내던 아들의 교육을 최초로 위탁했다.


마침내 말리카의 미래의 꿈인 이 아기가 5세가 되었다. 소년은 이제 바깥세상의 공기를 접해야 했다. 감미로우면서도 미묘한 향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것에 배어 있는 가족생활에서 떠나 기독교 계통인 유치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계통인 이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소년은 이 세상이 부처님의 진리를 숭배하는 그의 부모와 같은 불교신자들과, 부처님의 진리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드는 그의 학교 선생님들 같은 기독교인들로 나누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섯 살이 되자 페타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다가 다시 스리랑카 계의 사립학교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했다. 훗날 스님이 된 다음 다르마팔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첫 수업은 스리랑카의 옛 관습에 따라 선생님께 인도산 후추를 바치고 인사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또한 ‘그 선생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정갈하게 하고 많은 물을 사용하여 몸을 깨끗하게 할 것을 학생들의 예민한 마음에 심어준 엄격한 분이셨다’고 적고 있다. 그 교훈은 잘 받아들여진 듯싶다. 일생을 마칠 때까지 다르마팔라는 자기가 쓰는 물건과 자기 주변을 정갈히 하고 정돈하는 데 각별한 신경을 썼다.


이 학교에서 그는 스리랑카 사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재를 배울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모국어와 문학에 철저한 기초 지식을 얻었다. 이 스리랑카 계 사립학교를 떠나자 그는 성 베네딕트 학교의 최 하급반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서는 매일 30분 동안 성 처녀 마리아를 칭송하는 짧은 기도를 반복해야 했고, 그가 불교도였기 때문에 목요일마다 수사가 가르치는 특별반에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 축제일에는 그의 부친의 정원에서 향기로운 꽃다발을 만들어 학교 교회당을 장식하곤 했다. 그즈음 가족들은 페타에서 푸른 논과 우아한 종려나무가 있는 코타헤나의 새 집으로 이사했다.


어느 날 한 신부가 그에게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다르마팔라는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학교 당국은 뚜렷한 이유 없이 그에게 성 베네딕트 학교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후에 그는 가톨릭의 세력이 콜롬보에서 그토록 맹렬했던 그 시절에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것이 참 신기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모와 조부모의 영향이 자신이 불교의 영역 안에 머물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일 예불에 참석하고 어머니와 함께 정기적으로 코타헤나 사원에 가는 것, 혹은 서늘한 저녁에 자타카[본생담] 이야기를 큰 소리로 읽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보다 더 깊은 인상을 그의 마음에 심어준 다른 종교적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따라 사원에 가서 「브라흐마짜리야[梵行]」 서약을 하고 무엇을 먹든 그것으로 만족할 것과 잠을 적게 자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이 때 받은 인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훗날 아나가리까(Anagārika: 집 없는 자)라는 불명으로 불리던 그는 이미 어떤 음식으로도 배고픔을 때울 수 있고 잠을 두세 시간만 자고도 잘 견디었다. 이런 점을 보면 그가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업적도 많이 이루어 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금욕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고독, 명상, 연구를 진정 사랑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그의 생에서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성향 탓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후 다르마팔라는 콜롬보에서 6, 7마일 떨어진 코떼에 위치한 성공회 계통 기독교 기숙학교의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2년을 보냈다. 여기에서는 매일 오전 6시 30분에 시작하는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수업시간에는 창세기나 마태복음의 구절들을 암송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10세가 되기도 전에 출애굽기, 신명기, 여호수아, 네 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을 줄줄 욀 수 있었다.


이 학교의 사감 선생은 술을 몹시 좋아하는 데다 나무에 앉은 새를 총으로 쏘아 잡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술에 취해 흐트러진 그의 모습을 보거나 나뭇가지에 앉은 가녀린 새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떨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어린 소년은 경건한 생활을 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모든 생명을 가진 자, 죽기를 싫어한다.’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말씀이 생각났다.


어느 일요일, 그는 조용히 사성제(四聖諦)에 관한 소책자를 읽고 있었다. 그 때 사감 선생이 그에게로 다가와 그의 손에 있는 책을 빼앗아 훑어보고는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런 일은 사춘기로 접어든 그의 마음에 더욱 예민한 충격을 주어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반항의 불길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기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을 살펴보면 다르마팔라가 평생 지니고 있던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언젠가 다르마팔라의 한 급우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은 숨을 거둔 친구 주위에 학생들을 모이게 하고 기도하게 했다. 이 때 다르마팔라는 옆 친구들 얼굴에서 불안을 읽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시체를 보니 이는 또 그렇게 조용히 누워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이 때 그의 마음속에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기도는 결국 공포에서 나온 것이구나. 그러자 그 즉시 그의 몸과 마음 전체가 무엇에 대해서든 두려움을 품는다는 것에 관해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극적인 체험으로 그는 공포로부터 영원히 헤어날 수 있게 되었으며 가장 확실한 정신적 승리의 징표인 불굴의 용기를 지니게 되었다.


다르마팔라는 한편으로 성서의 시적 운율과 야고보서의 율동적인 아름다운 문장에 매혹되곤 했으며 선한 마음을 고양시키는 성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어린 마음에 분노를 야기시킨 것은 기독교인들의 광신적인 행위와 그들이 주장하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교리였다.


이 학교에서도 다르마팔라 소년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이번엔 학교가 그를 쫓아내서가 아니라 그가 학교에서 주는 고기와 기름투성이 음식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이 너무 여위어 부친은 학교를 그만두고 두 달 동안 집에서 쉬도록 배려했다.


1878년 9월에 그는 북부 콜롬보에 있는 성공회 기관인 성 토마스 학교 (St.Thoma's Collegiate School)에 입학했다. 이 학교의 와든 밀러 교장은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격언을 굳게 믿고 철저히 실행하는 고지식한 교육자였다. 덕분에 성 토마스 학교의 학생들은 매를 면치 못했고 버릇없는 행동은 꿈도 꿀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학생들은 밀러 교장을 몹시 두려워하여 복도에서 울리는 그의 발소리만 듣고도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어느 화창한 5월 아침, 마른 몸집의 스리랑카 학생이 교장실로 들어와 교장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 날이 부처님께서 탄생하고 깨치고 열반에 든 웨사카 축제일이니, 불자인 자기가 이 날을 집에서 경건하게 보내고 봉축행사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교장은 짐짓 위엄을 나타내며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학교 공휴일이 아니며 성공회의 공립학교장으로 단지 불교도의 축제 의식 때문에 휴가를 준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잠시 후, 다르마팔라는 우산과 책을 집어 들고 아무 말 없이 학교를 나와 버렸다. 다음 날 그 어린 말썽쟁이는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에 찬 꾸중을 들었을 뿐 아니라 와든 밀러의 딱딱한 막대기로 엉덩이를 몇 차례 얻어맞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고통스럽고 혐오스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와 그 다음 해에도 웨사카 축제일에는 여전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물론 그 때마다 그는 똑같은 벌을 받았다. 학우들은 그의 이런 행동을 재미있어 해야 할지 대담한 용기를 감탄스러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기독교를 신봉하는 친구들은, 자기들이라면 와든 밀러 선생의 채찍을 맞으면서까지 크리스마스를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찌 보면 당돌하고 괴팍스럽기까지 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계층의 친구들과 더불어 폭넓은 우정을 나누었다. 아직도 카스트에 의한 계급의식이, 심지어 불교국인 스리랑카에서조차도 현저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런 것을 무시하고 여러 부류의 친구들과 사귀었다. 그는 부처님의 모범, 즉 계급차별이 그토록 엄격하게 존재하던 시대에 가장 천대 받던 거리의 청소부조차 바라문과 똑같은 제자로 받아들였고, 다만 입문의 순서대로 서로에게 예의를 차리게 하여 바라문이 청소부의 발에 이마를 대고 경배하게 만들었던 정신을 즐겨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또한 논쟁에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논쟁의 주된 공격 목표는 말할 나위 없이 독선에 찬 기독교 교리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상대방의 정신을 혼란시키고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한 번은 칸단 지방 출신 불교도인 학급 친구가 선교사에게 설득당해 조물주가 있긴 있나 보다고 그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우리의 어린 토론자는 대뜸 그에게 응수했다.


  “조물주는 신이 만들었니?”

  “신이 곧 조물주야.”

  친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신은 누가 만들었지?”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칸단 친구는 더듬거리며 신은 분명 스스로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다르마팔라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신은 불교도임이 틀림없어. 모든 불교인은 자신이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잖니.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하는 거야. 즉,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신이지. 이처럼 사람이 각기 자신의 조물주이긴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야. 신과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 수는 있지만 남들은 만들지 못해.”


다음 일요일 칸단 친구는 다르마팔라가 일러준 질문으로 무장하고 주일학교에 갔다.


“신부님, 죽이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인데 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지요?”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던 스리랑카인 신부는 고지식하게도 그것은 하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신부의 대답을 전해들은 다르마팔라는 이미 반론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기독교도에게는 모든 전쟁이 하나님의 계시군요. 그럼 왜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계명을 사람들이 깨트리도록 고무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르마팔라는 바로 그 신부로부터 종교 수업을 받았다. 신부는 소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학급에서 성적이 제일 뛰어나면 시계를 선물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다르마팔라는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모두가 탐내던 상을 받아냈다.


그가 기독교인들과의 논쟁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곤 하던 성경 지식은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선교사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용 방법을 그에게 가르쳐 준 이는 불교 승려였다.


파나두라에서의 대(大)토론회

성 토마스 학교를 오가는 길에 다르마팔라는 매일 코타헤나 사원을 지나다녔다. 그 사원의 주지 스님은 근대 스리랑카에 있어 가장 위대한 웅변가이자 토론자인 메게투바테 구나난다였다. 토요일 저녁만 되면 사원은 신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노란 장삼을 갈색 어깨 위로 멋지게 휘감고 집게손가락을 쳐들어가며 기독교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붓는 스님의 명연설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불교의 정연한 논리의 대포를 창조설에 조준하는가 하면 기독교의 영혼 불멸설에 조준하는 등, 독단적인 기독교 교리의 요새가 잿더미로 화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스님의 명성은 섬 전체로 퍼져 나갔고 기독교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을 야기했다. 수세기에 걸친 식민 지배에 대항하는 최초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급기야 기독교인들은 스님의 콧대를 꺾고 불교의 위신을 추락시키기 위해 1873년 콜롬보 근교 파나두라에서 대규모 공개 토론회를 개최했다. 단합된 기독교 각 교파의 세력에 맞서는 단 한 명의 연사였지만 스님의 능변은 너무도 인상적이고 논법은 강력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과는 기독교의 참패로 끝났으며 이는 실론 섬의 기독교 세력에 조종을 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다시는 구교나 신교가 그들의 독단론으로 불교의 지혜와 겨뤄 토론하려 들지 않았다.


올코트 대령과 블라바츠키 여사를 만나다


파나두라 대 토론회 소문은 구나난다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널리 퍼져 나갔다. 이삼 년 후 구나난다 스님은 한 미국 대령과 귀족 출신의 러시아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토론회의 승리를 축하하며 1875년 뉴욕에서 그들의 주도하에 설립된 신지학회1)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편지와 함께 『베일 벗은 현자들 (Isis Unveiled)1)』이라는 두 권의 책도 부쳐왔다. 구나난다는 그 두 외국 지지자들과 서신 교환을 시작했고 『베일 벗은 현자들』을 스리랑카어로 번역 출간했다. 이 번역물은 좋은 반응을 얻어 오래지 않아 올코트 대령(Colonel Olcott)과 블라바츠키라는 이름은 불교도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원을 자주 방문하여 구나난다 스님의 총애를 받고 있던 다르마팔라는 어느 날 스님에게 신지학회의 설립자인 올코트 대령과 블라바츠키 여사가 불교 중흥을 돕기 위해 스리랑카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14세 되던 해 다르마팔라는 구나난다 스님이 갖고 있던 『신지론자(Theosophist)』라는 책을 읽은 이후 신지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0년 5월, 마침내 신지학회의 두 설립자가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5월 21일 수천 명의 불교도들이 갈레(Galle)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던 이전 백인과는 달리 두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고승 앞에 무릎을 꿇고 귀에 익은 삼귀의와 오계의 구절을 반복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올코트 대령과 블라바츠키 여사가 불교로 개종한 것은 파나두라 토론회의 승리와 함께 스리랑카 불교 역사에 신기원을 연, 실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후 남부 스리랑카에서 수도 콜롬보까지 순례여행을 하며 곳곳에서 강연회를 갖고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다. 담마[法]의 횃불이 타오르는 힘찬 서곡을 연주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 해 6월에 그들은 수도에 도착하여 첫 강연회를 가졌다. 존경하던 두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다르마팔라의 가슴은 설레었다. 그는 성 토마스 학교에서 강연장까지 내내 걸어 다녔다. 강연회가 끝나고 그는 부친, 삼촌과 함께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뒤에 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은 데이비드 헤와위따르네, 후일의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집을 떠난 법의 수호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성 토마스 학교의 와든 밀러 교장은 다루기는 힘들지만 진실성이 있는 다르마팔라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밀러 교장은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우리는 자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이 섬에 온 것이 아니네. 우리의 목적은 자네 같은 젊은이를 개종시키는 것이라네.”

다르마팔라는 신약의 내용은 좋지만 구약은 믿을 수 없다며 교장의 제의를 거절했다.


1883년 3월, 코타헤나의 성 루시아 성당을 지나 구나난다 스님이 있는 사원으로 향하던 불교도의 행렬이 가톨릭교도에게 무자비한 테러를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다르마팔라의 아버지는 기독교 학교를 그만 두게 했다.


이것으로 다르마팔라와 기독학교와의 인연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학교를 떠날 때 밀러 교장은 다르마팔라에게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 후 얼마 동안 다르마팔라는 페타 도서관에서 역사, 철학, 심리학과 윤리학 등, 다방면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내적 교양을 쌓아나갔다. 그는 또 시를 좋아했는데 특히 쉘리와 키이츠의 시를 애송했다. 쉘리의 시는 대부분 이태리의 화창한 푸른 하늘 아래서 쓰이지 않았던가. 별빛 가득한 열대 지방의 밤, 달빛을 받은 나뭇잎은 잔잔하게 흔들리는데 종려나무 밑에 앉아 절에 핀 꽃의 향기를 맡으며 쉘리의 시를 읽는다고 상상해보라. 삼촌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읽게 된 쉘리의 「마브 여왕(Queen Mab)」은 이후에도 언제나 즐겨 읽는 시가 되었다.


그는 “나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끝없는 횡포와 불의에 대해 그 시가 그리고 있는 서정적인 의분과, 시 전편에 흐르는 개인의 자유를 향한 열정을 언제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회상한 적이 있다. 10대의 민감한 시절에 읽은 「풀려난 프로메테우스」가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억지일 것이다.


어떻든 그는 정통 기독교의 완고한 독단론에 저항했던 학생시절의 시인에 대해 묘한 유대감을 느끼면서 쉘리와 키이츠가 죽어서 다시 태어난 곳은 천상일까, 지상일까, 그들을 찾아내어 불교로 개종시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을 상상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여기서 우리는 소년 시절에 형성되었던 다르마팔라의 가치관에 대해 잠시 언급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는 분명 신심 깊은 불자였다. 그러나 그 불심은 권위의 갑옷으로 무장한 속물적인 불교 교단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그런 신앙심과는 달랐다. 당시의 승단이 대부분 진실을 추구하는 열정을 상실한 나머지 정신적 향상에 의한 아라한과의 성취를 의심하면서 열반의 실현은 이젠 불가능하다고 치부한 데 반해, 그는 비상한 영적 발전의 세계를 제시하는 부처님 메시지의 진실성을 글자 그대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더없이 높은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이상주의적 기질은 당연히 타협에 대한 완강한 거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년 시절부터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실존의 전통불교 가치관과 제국주의적 서구 기독교 가치관의 첨예한 대비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자라온 다르마팔라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을 견지해 내는 능력을 쌓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업상에 있어서나 어떤 윤리적 문제점에 직면하더라도, 사랑하는 자기 섬나라의 인습이라는 완강한 장벽과 맞닥뜨리거나 낯선 서구와 극동의 갈피를 잡기 힘든 이색 문화와 만나더라도, 언제나 흔들리는 일 없이 확고한 자세로 이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물을 불법의 빛에 비추어 판단하려 했으며 자신이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은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훗날 부다가야의 성지 보존 문제로 재판을 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뇌물을 쓰면 승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생각을 경멸하며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당시 그에게 부다가야의 승소는 세상에서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런 역겨운 방법으로 목적을 성취하느니 차라리 재판에서 지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또 하나, 그의 가치관 형성의 과정에 있어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소년 시절부터 몸에 익힌 명상 공부라 할 것이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을 때, 수백만 톤의 물이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며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장관을 향해 “이것이야말로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생생한 인생무상의 사례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긴 세월을 두고 불법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해 깊이 숙고해 왔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그의 인격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그 때문에 담마의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면적인 고결성이 속세의 비굴한 인습과 천박한 위선에 부딪칠 때 어떤 양상을 보일지는 불문가지의 일이라 하겠다. 다르마팔라의 생애는 자연스럽게 갖가지 양태의 부정, 비리, 불의, 그리고 무지와의 끝없는 투쟁이었다. 어떻든 쉘리에 공감하던 사춘기의 소년은 또래의 일반적인 친구들과는 달리 늘 경건하고 금욕적인 삶을 동경하고 있었으며, 아라한의 길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참 수행자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신지학회와 인연을 맺다


다르마팔라는 마침내 히말라야의 달인파(達人派)에 가입하기로 마음먹었다.


1884년 1월 콜롬보 신지학회의 요청에 따라 올코트 대령이 스리랑카에 다시 왔다. 평화적인 불교도들의 시위에 가톨릭교도들이 살인적이고 온당치 못한 테러 공격을 감행한 것에 대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대령은 그 때 학회에 가입신청서를 낸 다르마팔라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통보해 주었다.


입회 의식은 말리반 거리에 있는 신지학회 임시 본부에서 행해졌다. 이 학회의 회장으로 있던 다르마팔라의 할아버지가 10루피의 입회비를 대신 지불해 주었다.


큰 뜻을 품은 이 젊은 지망자는 고귀한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점차 신비주의에 매료당하기 시작했다. 올코트 대령과 동행한 블라바츠키 여사가 특유의 묵직하고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면서 저 먼 히말라야로부터 신지학회의 운명을 지시하는 신비로운 달인 형제단과 대 스승 K. H.와 M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붓다의 제자들이라 여겨지는 그 보이지 않는 초인들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곧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사는 다르마팔라에게 대 스승 K. H.가 시네트(Sinnett)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종종 인용해 주곤 했다.


“궁극적인 완전함을 열망하는 자가 유일하게 귀의할 대상은 부처님 단 한 분뿐이다.”


이 말은 그의 일생을 통해 흔들림 없는 좌우명이 되었다.


당시 다르마팔라는 이 러시아 예언자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K. H.에게서 온 편지를 보여주며 함께 신지학 본부가 있는 아디아르1)로 가서 자신의 제자가 되어 달라고 하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그것이 히말라야 고승들과 접하면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해 12월, 반대하는 가족들을 설득하여 간신히 허락을 받은 다르마팔라는 신비주의를 보다 밀도 있게 공부하기 위해 블라바츠키 여사를 따라서 아디아르로 갔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그녀는 신비주의를 향한 그의 열정을 고무시키기는커녕 그의 관심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버렸다.


어느 날 블라바츠키 여사는 그를 방으로 부르더니 “그대의 운명은 신비주의를 공부하는 데 있지 않아요. 앞으로는 빠알리(Pāli)경을 공부하도록 해요.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그리하여 앞으로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일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일생을 붓다의 법을 수호하고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하였노라고 후일 그의 회상록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당시 신지학회의 분위기를 “부처님을 향한 히말라야 스승들의 헌신적 향기로 가득했다.”고 전했다.


한편 마드라스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올코트 대령과 블라바츠키 여사가 그들이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나머지 그녀에 대한 비열한 공작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여사의 인격을 비난하고 그녀의 영적 능력을 속임수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녀가 해고시켰던 고용인인 코우럼즈 부부를 매수하여 여사의 필적을 모방한 거짓 편지를 쓰게 한 후 히말라야의 스승에게서 온 편지가 가짜라고 했다. 그 증거라면서 편지를 그들 잡지에 실었다. 이를 반증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히 확보되었는데도 올코트 대령과 일부 회원들은 신지학회의 존립에 말썽의 소지가 될까 두려워 여사를 설득하여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서둘러 그녀를 아디아르에서 떠나게 했다. 일단 여사가 떠나자 그들은 갖가지 구실을 붙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손을 썼다.


블라바츠키 여사를 태운 배가 콜롬보에 잠시 정박하였을 때 다르마팔라는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는 여사의 영적 능력과 인류를 향한 순수한 봉사정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만남은 다르마팔라의 삶의 노정에 실로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일생 동안 그는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녀가 타계한 다음, 다르마팔라는 신지학회가 베잔트 부인1) 지도하에 들어가면서 불교에서 멀어진 채 처음에는 바라문교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저급한 사이비 종교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안타까움과 비탄에 찬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후일 다르마팔라는 앨리스 라이튼 클리더로 하여금 『블라바츠키, 인류를 위한 삶과 활동(H. P. Blavatsky, Her Life and Work for Humanity)』이라는 책을 쓰게 했다. 이 책은 『마하보디 저널』에도 연재되었는데 여기서 표현된 블라바츠키 여사에 대한 견해는 다르마팔라 자신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집을 떠나 브라흐마챠리(Brahmachari)가 되다


다르마팔라는 20세가 되었다. 당시 그는 대다수의 스리랑카 불교도들처럼 불교와 신지학회의 관심사는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블라바츠키 여사가 떠난 몇 달 후 그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드려 자신이 불법의 수호와 번영을 위해 일생을 바쳐 브라흐마챠리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니 이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또한 신지학회가 불교를 위해 활동하고 있으니 신지학회 본부에 남아 있도록 허락해 줄 것도 부탁했다.


장남으로서 집안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였으나 아들의 단호한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새로운 삶을 격려해주며 돌봐야 할 어린 두 아들만 없다면 그가 택하려는 새 삶에 자신도 동참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일생을 붓다의 정신에 따라 인류에 대한 봉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신지학회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죽은 후 한 숭배자가 이 시기의 다르마팔라 삶을 생생하게 그린 다음과 같은 조사를 그의 영전에 바쳤다.


“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지나치게 사소하거나 지나치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리를 개고 방을 정돈하고 출근하여 편지를 쓰고 손수 우체국에 갔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통역을 하고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계획서를 짜주고, 혹은 연설문을 작성해 주기도 했다. 신문에 실을 원고를 작성하고 편집장과 신문의 방침을 토의했으며 사무실을 찾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스리랑카 구석구석까지 편지를 내어 신지학회 본부를 찾아줄 것을, 그래서 착한 뜻[善意]을 바쳐 대의를 살리는 데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나이가 많거나 젊거나, 학식이 있거나 무식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함에 상관없이 모두가 그에게는 똑같았다. 그는 어느 사람이 공동선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아냈다. 그는 하루 15, 16시간씩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또한 성격이 쾌활하여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 그의 말과 글은 웅변적이면서도 진실성이 담겨 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심금을 울렸다. 이런 정열과 미덕으로 신지학회 불교 본부에서 5년 간 유익하게 보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교 설립과 불교 포교를 도왔고 새로운 조직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마침내 불교 신지학회는 스리랑카에서 유력한 단체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다르마팔라의 50여 년 경력 중 그 어느 때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었다. 선을 행함에 있어 지칠 줄 모르는 정력, 불법의 포교에 쏟는 쉼 없는 열정은 해가 거듭함에 따라 커져만 갔다.


방일(放逸)한 사람들 가운데 방일하지 않고

모두 잠든 세상에서 홀로 깨어 있는 현자는

둔한 말들을 뒤로 제치고

준마처럼 앞으로 나아가네.

                               『법구경』29 게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