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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불교중흥의 기수 다르마팔라(2)


실론 순례


1886년 2월, 올코트 대령과 영국 출신 신지학회원 리드비터1)는 불교 교육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스리랑카 전역을 순례할 계획을 세우고 콜롬보에 도착했다. 그 때 교육청 서기로 일하던 다르마팔라는 통역자로 그 여행에 동참할 것을 자원했다.


올코트 대령의 이층 마차를 타고 세 사람은 두 달에 걸친 역사적 순례의 길을 떠났다. 턱수염을 기른 대령과 젊고 패기에 찬 젊은이들의 여행은 가는 곳마다 숱한 화제를 남겨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다르마팔라는 여행 중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두려움, 미덕과 낙담을 접했고 올코트 대령의 당당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통해 서양인들의 심리적인 특성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통역자로서 그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었다. 통역해야 할 것은 언어만이 아니었다.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현대 지식, 늙고 노쇠한 사람들의 전통주의와 새 세대의 혁신적인 생동력 모두를 수용해야 했다. 내륙 깊숙이까지 파고 든 비불교적 서양 관습이 국민정신의 가장 고귀한 것들을 좀먹어 가고 있었고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과 규율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백인 불교도의 말을 듣기 위해 모인 농부들은 거의 문맹자들이었다. 불교를 옹호하고 전국적인 불교 운동을 전개하자는 대령의 열렬한 호소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르마팔라는 재치와 유머, 소박한 예증을 들어가며 있는 힘껏 통역했다. 이 여행은 다르마팔라의 내적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가 되다


다르마팔라의 활동 무대는 날로 넓어져 갔다. 그는 할아버지의 후원으로 올코트 대령과 함께 「불교출판사(The Buddist Press)」를 설립하여 리드비터가 저술한 불교도 교리문답을 스리랑카어로 번역, 간행했다. 그 밖에도 싱할리어 불교 주간지『산다레사(Sandare-


sa)』를 창간했다. 『산다레사』를 통해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항하여 더 많은 불교 학교를 설립하도록 교육기금을 모을 것을 설득하는 한편, 영어판 주간지『불교도』를 통해서는 서양과학과 심리학에 입각하여 담마[法]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영어판『불교도』는 영어 교육을 받은 상류층에 널리 읽혔을 뿐 아니라 유럽, 아메리카, 인도, 일본, 호주 등, 세계 여러 나라로 배포되어 부처님의 말씀을 이 지구상에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이 주간지는 뒤에 보다 유명한 잡지가 된『마하보디 저널(MahaBodhi Journal)』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출판 사업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다르마팔라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설법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올코트 대령의 우마차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지칠 줄 모르고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불교 인쇄물을 보급했으며 이미 신지학회에 의해 시작된 교육 사업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리드비터는 영어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후에 스리랑카 일류대학의 하나인 아난다(Ananda) 대학으로 발전했다. 그 외에도 리드비터는 콜롬보의 여러 곳에 많은 불교 일요학교를 설립했다. 데이비드 헤와위따르네가 다르마팔라, 즉 법의 수호자(Guardian of the Law)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이후 이 이름은 전 세계 불교도들의 존경과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방문


1889년 다르마팔라는 올코트 대령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태국과 더불어 유일하게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은 국가로 두 사람을 극진히 환대했다.


턱수염을 기른 미국인 신지학자와 깡마른 체구에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젊은 스리랑카 불교도. 이 두 사람은 여러 강연회와 환영식에 참가하면서 자신들의 방문이 현대 불교의 중흥이라는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며 불교계의 수많은 종파, 그 중에서도 남방 불교와 북방 불교라는 두 큰 강이 만나는 근 천 년 만의 공식적 해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수망갈라 나야카 큰스님이 보낸 친선 편지를 일본 종단 대표에게 전했다. 이 역사적 서찰은 아시아 불교도들이 붓다의 정신 아래 하나가 될 것을 제창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불교 도시 교토와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 대불(大佛), 그리고 밤이면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빛나는 500개의 금불상을 모신 사원 등을 돌아보며 이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그 후 그가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보여준 우호적인 태도는 이 당시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 승려들이 그들의 종교적 의무와 가정생활을 겸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고, 또한 불교와 군국주의와의 제휴는 적합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귀국길에는 일본인 승려 3명이, 빠알리어와 상좌부 불교를 배우러 같이 왔는데 이것은 1889년 6월 중순의 일로, 스리랑카에 온 최초의 근대 일본인 유학승이었다.


귀국 후에도 올코트 대령과 다르마팔라는 이전과 다름없이 불교 신지학회의 일에 몰두했다. 둘은 기차와 소달구지를 번갈아 타면서 스리랑카 섬의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일 년 이상을 누비고 다니며 기금을 모으고 학교를 열고 대중 강연을 했다. 뿐만 아니라 한편에서 그는 수행에도 전념했다. 「염처경(念處經 : Satipaṭṭhāna Sutta)」1)과『청정도론(淸淨道論 : Visuddhi Magga)』1)을 세밀히 연구한 후 매일 동트기 전에 일어나 규칙적으로 선 수행을 했다. 40년 이상 써 온 그의 일기에는 요가수행 뿐 아니라 완전한 정신적 청정을 이루기 위한 부단한 정진과 일체 유정물에 대한 자비심을 일깨우는 쉼없는 노력이 생생히 담겨 있다. 이 일기를 보면 그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불교에 바친 저 헌신적인 활동의 밑바탕에 한 수행자의 정지정념(正知正念)한 공부의 힘이 저변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지 순례


1891년 1월. 다르마팔라는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인 승려 코젠 구나라트나가 동행을 원해 두 사람의 여행이 되었다. 바라나시를 거쳐 사르나트, 즉 25세기 전 부처님께서 성도 후 첫 번째 설법을 하신 성스러운 곳에 도착했다. 그 날의 심정을 다르마팔라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애석하도다! 파괴자들의 손에서 사리탑과 조각품을 보존하기 위해 이 성지를 돌보는 불자가 한명도 없다니.” 


하지만 다르마팔라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현대 불교 역사 전부를 바꾸어 놓게 될 영감을 얻은 곳은 사르나트가 아니라 부다가야였다. 그 때 나이 29세. 오랫동안 꺼져 있던 인도 불법의 횃불을 다시 점화시킬 운명의 아들, 성지를 회복하고 전 세계를 향해 사자후를 토할 바로 그 사람이 지금 부다가야 대탑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 날의 일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월 22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두루가 바부와 채터지 박사와 함께 불교도에게는 가장 신성한 곳인 부다가야로 갔다. 가야에서 6마일을 달린 후, 성지에 도착했다. 성지 1마일 내에서 깨진 조각품과 불상의 파편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마한트(Mahant)1)의 소유가 된 사원1) 입구의 기둥 회랑 양면에는 명상하는 자세나, 법을 설하는 형상의 세존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장엄하구나, 보좌에 앉으신 세존의 모습이여! 주위 사방을 온통 신성한 분위기로 물들이는 저 장엄성은 참배자의 마음을 흔들어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기쁘도다! 부처님이 앉으신 금강보좌1) 에 내 이마를 댔을 때 나는 문득 원을 세웠느니 내 결코 여기를 떠나지 않고 성지를 돌보리라. 이 세상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이 성스러운, 석가 왕자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이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리라.


나의 생각을 코젠 스님에게 털어놓자 그는 놀랍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른 불교 승려들이 맡으러 올 때까지 거기에 머물 것을 함께 맹세했다.”


이런 중요한 결심을 했을 때 사찰의 소유권에 관한 문제를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은 다르마팔라의 특성 중 하나였다. 그는 다만 불교의 성스러운 성지가 수치스럽게 방치된 채, 불교 미술 조각품들이 도난당하고 불상이 모욕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며 한 불자로서 그 곳에 머물러 성지를 보호하는 것은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그는 20여 년 전에 버마의 민돈왕이 건축했다는 버마인을 위한 객사(Burmese Rest House)의 열쇠를 안내원에게 받고 짐을 풀자마자 부다가야 사원을 위해 첫 번째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이런 편지를 수천 장, 아니 수만 장은 썼을 것이다. 그 편지에서 스리랑카, 버마, 인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지가 얼마나 황폐해 있는가를 설명하고 불교의 중흥을 위해 거기에 승가를 재건하자고 호소했다. 또한 주간지 『산다레사』와 『불교도』에 싱할리어와 영어로 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얼마 동안 답신이 없었다. 자신의 호소가 무시되었을 뿐 아니라 수세기 동안 침체되어 온 불교계가 여전히 마하보디 사원의 운명에 냉담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팠다. 설상가상으로 수중에 돈도 떨어졌다. 그는 며칠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돈 밖에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더욱 굳은 마음으로 성지회복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굶어죽겠다고 결심했다.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보리수 잎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에 어린 사원의 장엄한 모습이 별빛 총총한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어 그에게 무한한 영감을 안겨 주었다. 그는 이 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17일 자정. 생애 처음으로 감동적인 평화를 체험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던가. 우리 세존의 삶이야말로 고귀하고 고매한 명상의 주제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그 분이 가르치신 사성제와 팔정도만이 헌신적 제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마침내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와 돈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는 냉담한 세상 속에 혼자라고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야지방의 세금징수원인 그리어슨을 만나고 비로소 그의 앞날에 놓인 크나큰 장애들과 마하보디 사원에 얽힌 이권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어슨은 마하보디 사원과 사원에서 얻어지는 총수입이 비하르주의 영주인 마한트에게 귀속되며 정부의 도움을 받는다면 불교도들이 마한트로부터 사원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부다가야에서 6주 이상을 체류한 뒤 다르마팔라는 버마로 가 사찰을 인수할 기금을 모을 생각으로 캘커타로 떠났다. 캘커타는 당시 인도의 정치적, 정신적 수도였다. 다르마팔라는 거기서 벵골인 신지학 회원 바부 닐 무케르지의 집에 머물렀다. 무케르지는 그 후 그의 변치 않는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인도 박물관과 벵골 왕립 아시아 연구원 등, 여러 흥미 있는 곳들을 방문했다. 아시아 연구원에서는 티베트 전문가인 사라트 찬드라 다스를 알게 되었다. 또한 『인디언 미러(Indian Mirror)』의 편집인 나렌드라 낫센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수년 동안 인도 불교의 중흥을 위해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온 신지학자였다.


바라던 만큼의 모금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버마, 랑군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성지 회복 계획을 알리고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스리랑카보다 버마인들이 더욱 더 불교적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불교 수행법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큰 희망을 가지고 아디아르를 경유, 콜롬보로 가서 부다가야 반환을 위한 협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마드라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뜻밖에도 블라바츠키 여사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그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참으로 크나큰 손실이다. 정신세계는 가장 소중한 기원자이며, 인도자인 스승을 잃었다. 누가 그 분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빨리 가시다니……. 신지학회가 존속해서 선을 행하려면 비전의 가르침이 중단 없이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있어 세상과 영적 스승 간의 중개인이 되겠는가?”


마하보디 협회를 설립하다


부다가야 마하보디 협회는 1891년 3월 31일 콜롬보에서 처음 그 문을 열었다. 이 날 다르마팔라는 그 유명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그가 신성한 성지를 불교도들에게 되찾아 주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수망갈라 나야카 큰스님의 축사가 있은 후 이 협회를 이끌어 갈 간부가 선출되었다. 수망갈라 스님이 회장이 되었고 이사장에는 올코트 대령이, 위라세케라와 다르마팔라는 간사로, 그 외 다른 20여 명이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협회의 탄생은, 당시에는 세인들에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는 불교재건 기운이 도처에 넘쳐 많은 모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다르마팔라는 부처님께서 첫 설법을 하신 아살하(āsāḷha- 6, 7월) 보름날에 몇 분의 스님들이라도 부다가야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태국 불교계와 버마 불교계에 부탁하자 스님 네 분이 7월 15일 부다가야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이 도착한 다음 날 저녁, 보름달은 밝고 장엄하게 떠올랐다. 7세기 만에 부다가야에 불교의 깃발이 다시 게양된 그 때의 감격을 다르마팔라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은은한 달빛 속에 휘날리는 저 깃발은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의 사명이 원만하게 성취되게 하소서. 승려들이 청정한 삶을 영위하여 중생의 빛이 되고 인도 사람들에게 우리 신성한 종교가 지닌 진가(眞價)를 보여 줄 수 있기 바란다. 또 그렇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지난 1월 이곳에 와서 이 신성한 곳을 우리 승려들이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7개월이 지난 지금, 성공리에 불교 포교단을 창설하게 된 것이 기쁘기만 하다.”


이처럼 그는 앞날을 밝게만 보았었다. 버마 객사에 네 승려를 배치하고 다르마팔라는 마하보디 사원 토지 구입에 대해 마한트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비하르(Bihar) 지방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대지주와의 어려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한 쪽은 불굴의 의지로, 다른 쪽은 야비함으로 맞섰다. 게다가 정부의 애매한 정책은 혼란을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불교도를 위해 그들이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는 성지에다 발판을 만들려는 다르마팔라의 외로운 투쟁 과정을 어찌 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마한트는 처음에 그 토지를 내주기로 약속했으나 나중에는 약속 자체를 부인했다. 그러고는 약속했던 땅보다 훨씬 작은 부분만을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어슨이 개입하여 마한트에게 매매 등기를 연기시킨 다음 다른 땅을 골라보라고 명령했다. 그리어슨의 개입에 화가 난 마한트는 다르마팔라에게 일단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문제를 토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한동안 팽팽한 의견 대립이 있었으나 다르마팔라는 마침내 마한트를 설득해 징세관이 암시한 땅을 끊어주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본래 제시했던 땅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변덕에 지친 다르마팔라는 「국제불교협의회(International Bu-


ddhist Conference)」를 구성했다. 1891년 10월 31일 부다가야에서 협의회는 역사적인 출범을 하게 되었고, 다음 날 벵골 부총독의 성지 방문을 받았다. 협의회 창립회의에는 스리랑카, 중국, 일본, 방글라데시에서 온 대표들이 참석했다. 일본 대표들은 일본의 불교도들이 마한트에게 사원을 살 의향이 있다는 것을 협의회에 통보했다. 이 문제를 논의한 협의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즉 협의회에서 대표단을 구성하여 마한트를 방문한 후 협상할 것, 거기에 불교 사원을 건립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불교 국가의 동의를 얻을 것, 그리고 불교 포교원을 설립하고 불교 경전을 인도의 각 지방어로 번역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일본을 좋게 평가했던 다르마팔라는 보리수 아래 불교기와 나란히 일장기도 게양했다. 부총독과 그 일행이 부다가야에 도착하여 이 광경을 목격하자 그들의 마음에는 러일(露日)전쟁의 악몽이 떠올랐다. 일본이 인도, 아니 아시아 전체에 그 야망을 뻗치기 위해 부다가야를 전초기지로 삼으려 하는구나, 하는 의구심이 일어났다. 결국 부총독은 불교협의회 대표들과 만나기를 거절하고 그리어슨을 통한 서신으로 사원은 마한트의 소유이며 정부는 불교협의회가 마한트로부터 사원을 되찾는 데 있어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마하보디 저널』을 창간하다


마하보디 협회 사무실은 1892년 초 캘커타로 이전되는데 그 곳 벵골 지식층들은 호의적으로 협회를 받아들였다.


다르마팔라는 그 해 5월 『마하보디 저널(Maha Bodhi Journal)』을 창간했다. 불교국들 사이의 정보교환을 용이하게 하고 세계적으로 붓다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매체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 잡지는 근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계속 발간되고 있다. 창간호는 4절판으로 빽빽하게 인쇄된 8쪽의 잡지인데 부처님이 최초의 제자 60명에게 주셨던 말씀을 그 제사(題詞)로 삼고 있다.


“가라, 너희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신과 사람의 이익,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떠나라. 오! 비구들이여, 영광된 진리를 전파하라. 청정하고 완전하며 순결한 삶을 설하라.”


                              『율장』「대품」  


이 잡지는 다르마팔라가 편집하였고 ‘하나된 불교세계’와 ‘대승불교 교단’이라는 제목의 글을 창간호에 실었다.


그 밖에 올코트 대령이 쓴 ‘아름다운 불교정신’이란 기사와 다르마팔라의 사료에 입각한 주석들, 일본과 버마의 불교활동 소식, 독자 투고, 그리고 ‘불교의 소멸 이후 인도에 불행이 찾아오다’라는 내용의 글을 『인디언 미러(Indian Mirror)』로부터 전재해 실었다. 또한 인도의 지식층들이 다르마팔라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는지도 다루었다. 다음 호에는 불경 번역과 불교 철학에 관한 논문, 그리고 동서양의 필자들이 쓴 불교에 관한 논설을 실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이 잡지는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과 미주 지역에 폭넓은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조롭고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금 압박으로 인해 협회의 유일한 일꾼인 그가 때로는 잡지를 송달할 우표를 살 것인지 저녁거리를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존재하니 희생도 능히 해낼 수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 위로하며 기쁜 마음으로 희생을 감수하곤 했다.


이 시기 다르마팔라는 바니아푸커 거리에 사는 무케르지 집안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보내며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불경공부도 하면서 막스 뮐러, 에드윈 아놀드 경, 윌리암 헌터 경의 저술을 읽곤 했다. 또한 신지학회와 함께 쓰고 있는 크릭 가(街) 2번지의 마하보디 협회 사무실에 나가 잡지를 편집하고 관리하는 데 열중했다. 방대한 양의 독자편지를 다루고 전 세계 불교도들에게 자금을 요청하고 매주 열리는 공식회의를 준비하며 마하보디 사원을 단지 수입원으로만 삼아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되찾는 성스런 임무에 사람들의 관심을 쏠리게 하는 등, 그는 자신의 생애를 걸고 헌신하였던 그 큰 목적을 위해 지칠 줄 몰랐다. 캘커타와 부다가야를 오가는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그는 아디아르에서 열리는 연례회의에 참석하는가 하면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온 티베트의 불교도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에게 부처님의 사리, 보리수 잎 및 불교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성지 부다가야의 운명은 아직도 혼미했다. 마한트는 더욱 완고해져서 버마 객사에서 조용히 경을 읽으며 수행 중이던 스님들을 습격하여 테러를 자행하고 부다가야 지역에 불교 순례자들을 위한 객사의 건립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황량하고도 치사한 상황 속에 피해자 스님이 보인 자비로움은 한 송이 꽃과 같이 향기로운 것이었다.


그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경찰에 편지를 보내 자신과 동료들은 이 사건에 증인으로 출두하지 않을 것이며, 가해자들이 처벌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탄원한 것이다.


이 편지를 읽은 지방 경찰국장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나는 요즘 인도 승려들을 보면서 스님도 먹고 살기 위해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스리랑카 스님들은 종교를 실천하고 있구먼.” 하고 말했다고 한다. 마한트는 그의 궁전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몇 주 후 다르마팔라는 고문 변호사로부터 그 토지에 대한 마한트의 임대 기간이 종료되었으며 영구 임대를 신청하여 갱신했다는 정보를 접했다. 언제나 낙관적이던 다르마팔라는 상대방이 요구하는 금액만 준비되면 이제 일은 더 쉬워질 것이며, 전 세계의 불자들은 기꺼이 단합해서 그 돈을 각출할 것으로 믿었다.


다르마팔라의 희망을 더욱 북돋는 일이 벌어졌다. 마하보디 사원은 실제로는 마하보디 동(洞)에 위치해 있으며, 마한트 측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마스타푸르 타라디 동네에 위치한 것은 아니라는 귀띔을 받았다. 다르마팔라 일행이 수세관 맥퍼슨을 찾아가 위치 문제를 설명하고 또 런던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실린 에드윈 아놀드 경의 부다가야에 대한 최근 논설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협조를 요청하자, 수세관은 다만 모든 문제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으며 협상은 다르마팔라가 시카고에 다녀온 뒤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제 그는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메시지를 바다 건너,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때가 온 것이다.


시카고의 ‘세계 종교 대회’


세계 종교 대회가 1893년 시카고에서 열렸다. 이는 19세기 말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50년 전만 해도 심원한 동양의 종교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일반인들의 무지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해 이런 모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 이와 같은 대회를 주관했던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사로부터 ‘삿된 종교와 놀아나는 것’이며 ‘예수에 반역한다’는 죄명으로 종교 재판소에 고발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학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알려질 기회가 무르익고 있었다. 그래서 콜롬비아 박람회 회장이 임명한 특별위원회가 세계 종교 대회 개최 안을 발표했을 때에는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위원회 의장인 버로우 박사는 이전에『마하보디 저널』을 몇 권 받아 보았으며 다르마팔라와 서신 왕래가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를 남방 불교의 대표자로 초청했던 것이다.


평소의 겸손함 그대로 다르마팔라는 자신이 과연 그런 엄청난 모임에 나가서 법을 설할  수 있을지 망설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가 꼭 가야 한다고 우겼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백 마디 학자의 말보다는 부처님 말씀의 진리성에 대한 살아 있는 확신이 더 무게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확신이야말로 다르마팔라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원천적 힘이었던 것이다.


고심 끝에 그는 초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는데, 여행길에 일본과 중국에 들러 협회를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작용했다. 다만 올코트 대령만이, 인도 내에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시간을 허송하는 짓은 하지 말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그 즈음에는 다르마팔라도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며, 오히려 대령은 자기주장을 거두고 이번 대회에 같이 참여하게 된 베잔트 부인에게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부처님 진신사리와 불상, 다섯 가지 계율(五戒)이 적힌 무료 배포를 위한 인쇄물 2만부를 준비하여 종려나무 우거진 해안을 뒤로한 채 스리랑카 항구를 떠났다.


시카고 대회에 가는 뱃길은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영국을 경유했다. 영국의 첫인상은 나뭇잎 무성한 경관 때문에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지학회의 사실상 본거지이기도 한 영국이었기 때문에 관계 인사들은 다르마팔라를 맞이하는 데도 세심한 사전준비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올코트 대령이 미리 귀띔을 해서 이 젊은 마하보디 협회 창설자가 이젠 신지학회의 통제를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통보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는 영국 땅에 상륙하면서, 그가 ‘영국 스승’으로 우러러보던 『아시아의 빛』의 저자 에드윈 아놀드 경의 영접을 받는 데서 시작하여, 그의 소개로 인도 식민성의 킴벌리 경을 만나는 등 환대를 받았다. 신지학회의 리드비터는 그를 베잔트 부인에게 소개시키고 그 밖의 많은 신지학회 지도자들을 만나게 해주었으며 런던 관광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빠알리어 대가인 리즈 데이비즈를 방문하고 대영박물관을 관람시키는 등, 빈틈없는 일정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히말라야의 스승이 다르마팔라를 위해 쓰라고 보낸 돈이 도착해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베잔트 부인은, 스승의 분부뿐 아니라 대의 때문에 자기도 블라바츠키 부인이 생전에 명확히 말했듯이 다르마팔라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젊은 다르마팔라는 자연 이런 말에 감명 받아 일기에 베잔트 부인이 어머님 같다고 쓰고 있다.


시카고에 도착한 다르마팔라는 이 대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연설은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가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혼잡한 첫 부분의 일정이 끝날 무렵이었다. 화려한 민족의상과 장엄한 제식복(祭式服)을 차려 입은 많은 종교 대표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콜럼버스 홀에 모인 4천여 명의 청중들에게 4억7천5백만 불교도를 대표하여 축원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에 관한 인상을 당시의 신문에서 엿볼 수 있다.


“넓은 이마, 뒤로 넘긴 굽슬굽슬한 검은 머리, 청중을 주시하는 예리하고 맑은 눈, 힘차게 울려 퍼지는 음성, 이야기를 강조할 때면 으레 치켜드는 갈색의 긴 손가락. 그는 바로 전형적인 전법사의 모습이었다. 청중은 이 사람이 바로 붓다의 모든 제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아시아의 등불을 온 문명 세계에 전파하는 운동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더욱 감동했다.


   (『세인트 루이스 옵저버』, 1893년 9월 21일자)


그의 연설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또 다른 종교 대표들처럼 수사적인 표현이나 현란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불경의 구절을 의도적으로 인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붓다의 겸손한 대변자로서 이들에게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전하려고 했을 따름이었다. 기교 없는 그의 연설에 청중들은 매료당했다. 철학과 비교종교학에 일생을 바쳤던 뉴욕의 스트라우스는 그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미국 최초의 불교도가 되었다. 이후 그는 다르마팔라의 헌신적인 친구로 마하보디 협회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대회 마지막 날 쯤에는 많은 관심이 다르마팔라에게 쏠렸다. 스리랑카에서 온 이 젊은 법사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렬하여, 힌두교를 대표한 비베카난다가 고상하지만 정열적인 오셀로에 빗대어진 데 반해 다르마팔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비견되었다. 어떤 기독교의 대표자도 이런 아낌없는 찬사를 받지는 못했다.


그의 부드러운 성품과 뛰어난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자 애시니움 빌딩에서 불교와 신지학에 관해 강연한다는 간단한 발표만 듣고도 강당이 넘쳐 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그는 미국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2년 후 다시 이곳에 와 불교를 자리 잡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폐회식에서 행한 연설을 보면 그가 서구인에게 전하기를 갈망한 메시지가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 메시지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편견 없이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사랑 그 자체를 위해 일체중생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확신을 주저 없이 말하고 청정한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진리의 빛이 그대로 여러분을 밝혀 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진리의 길을 신학과 교리가 막는다면 얼른 치워 버리십시오. 진지하고 부지런히 구원을 향해 노력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분명 청정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메어리 포스터 부인을 만나다


종교 대회는 9월 27일 폐회되었다. 다르마팔라는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러 차례 강연을 한 후 일본과 중국을 거쳐 인도로 가는 뱃길에 올랐다. 호놀룰루에 들렀을 때 마르케 박사와 두 명의 여성 신지학 회원들이 그를 맞으러 갑판에 올라왔다. 그들은 다르마팔라에게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꽃과 과일을 선물했다. 방문자 중 한 사람은 쉰 살 정도의 뚱뚱한 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성질이 너무 격렬하여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폭발하므로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어떻게 하면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불교 수행자로서 다르마팔라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법(觀法)수행을 일러주었다. 그 후 그녀는 이 방법대로 노력한 결과 마침내 자신의 성질을 완전히 고치는 데 성공했다.


메어리 포스터라는 이 부인은 그 가계가 하와이의 카메하메하 대왕의 직계 후손이었다. 단 몇 분밖에 안 되는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다르마팔라의 법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다르마팔라의 가장 아낌없는 후원자가 되었고 그녀의 기부금은 백만 루피에 달했다. 지금 캘커타에 있는 마하보디 협회 본부 빌딩의 구입을 위시하여 인도, 스리랑카, 그리고 영국에서 사원, 수도원, 학교, 병원, 포교당, 그 밖의 여러 기관들이 그녀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그녀의 이름은 부처님의 대시주였던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위사카(Visākha) 등의 이름과 더불어 가장 헌신적인 후원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다르마팔라의 이름만큼이나 오랫동안 불교도들의 마음에 남을 것이다.


일본, 태국, 인도 방문


10월 마지막 날 아침에, 다르마팔라는 요꼬하마에 도착했다. 저녁 쯤 동경에 도착하자 도구치와 호리우치, 그리고 백 명에 가까운 젊은 승려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역에 모여 있었다. 그는 일본 사람들에게, 부다가야 사원을 도둑들의 손에서 구해내는 사업이 불자들에게 얼마나 큰 사명인지를 인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그들이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며 지극한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옛날 걸어서 부다가야를 찾았던 동방의 순례자들은 지금 그가 스리랑카에서 시카고를 거쳐 모셔온 이 굽타(Gupta)시대의 불상 앞에서 넘쳐나는 신심을 가누지 못해 정신없이 엎드리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여러 종파의 고승들과 일본 귀족들이 보여준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 승려들은 회합을 가진 후 2년 후에나 2만엔을 모금할 수 있겠다고 그에게 알려 왔다. 그것은 그런 큰 나라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액수였다. 비로소 다르마팔라는 그가 일본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 굽타시대 불상의 관리권을 둘러싸고 승려들이 벌인 입씨름, 그 신성한 불상을 흙으로 모형을 빚어 독점 판매하기 위해 벌이는 실랑이 짓을 지켜본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인도가 그를 더욱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는 6주간의 체류를 끝내고 12월 15일, 일본을 떠났다.


곧 그에게 불교 왕국인 태국을 방문하여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이에서 그는 도움을 받아 중국 불교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썼다. 그리고 기독교 선교사인 티모시 리챠드 박사의 통역으로 오메이(Omei)산에 있는 사원에서 그 곳 승려들에게 강연을 하고 그들에게 보리수 잎과 불사리를 선물로 주었다. 태국에서도 일본에서나 마찬가지로 구체적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왕실의 몇몇 사람들이 관심과 열정을 보였고, 외무 장관 데바봉세 왕자(Prince Devavongse)가 호감을 나타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 문제에 냉담했고 포교에도 무관심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남방 불교 나라에서 진정한 불교 정신은 이미 사라졌고 생명 없는 시체만이 보일 뿐이다.”


태국에서 3주를 바삐 보내고 나서 그는 방콕을 떠나 싱가포르로 향했고, 2주 후 콜롬보에 도착했다. 그는 세계 일주를 한 첫 번째 스리랑카인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세계를 일주한 최초의 불교 포교사였다는 점이다. 뜨거운 환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두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그들의 영웅이 조국의 땅을 다시 밟는 순간, 하늘을 가르는 천둥소리로 “사두(Sādhu)1)!”라고 외쳤다. 코끼리, 고수(鼓手)들, 황색 승복 입은 승려들로 구성된 장대한 행렬에 떠밀려 그는 말리가칸다에 있는 비됴다야 강원으로 갔다. 그 곳에서 그의 스승인 수망갈라 나야카 마하 테라가 그를 축복 속에 맞아 주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그가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은 매우 짧았다. 인도에서의 사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롬보, 칸디, 칼루타나 등지에서 그의 시카고 방문 경험과 부다가야 회복 계획에 대해 연설을 한 뒤 그는 마드라스로 출발했다. 아디아르에서 그는 올코트 대령을 만났다. 그는 미국 신지학회원들의 지도자인 저쥐(W. Q. Judge)가 스승들(Masters)의 메시지를 위조한 이유로 탄핵될 것이라고 다르마팔라에게 일러 주었다. 화합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던 다르마팔라의 희망은 결국 어그러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저쥐와 그의 추종자들의 탈퇴는 종국에 가서는 신지학 운동을 적대하는 여러 그룹으로 분열시키고, 아디아르 본부가 베잔트 여사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기괴한 놀음판으로 전락하게 되는 시발이 되기 때문이었다.


3월 마지막 날, 캘커타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소식을 듣기 위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는 일기에 간결하게 ‘나는 그들에게 그의 영웅적인 활동과 미국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커다란 반향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라고 기록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다르게 다르마팔라는 경쟁의식이나 적대감이 없었고,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장점을 항상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4월 11일에 드디어 그는 가야에 도착했다, 그는 마하보디 사원 위층에 봉안하기 위해 7백 년 된 아름다운 일본 불상을 모셔온 것이다. 그런데 이 불상은 그 후 여러 해 동안 부다가야 소동에 있어 태풍의 눈이 되어 버렸다.


가야의 수세관인 맥퍼슨에게 힌두교인들의 여론을 끌어보라는 충고를 받고, 다르마팔라는 그들의 본거지인 바라나시를 찾아 그 곳 인도 바라문 학자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그들의 증오는 여전하여 부처님은 힌두교의 비슈누 신의 화신이기 때문에 부다가야 사원은 힌두교의 성지이며 따라서 불교인들은 그 곳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강조할 뿐이었다. 마한트도 물론 같은 생각이었으며 일본 불상을 그 곳에 두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더구나 그는 만일 다르마팔라가 부다가야로 그 불상을 기어이 가져온다면 5천명의 사람들을 매복시켜 그를 죽일 것이며, 이런 목적으로 10만 루피의 경비를 쓰겠노라고 위협했다. 충돌은 다르마팔라가 기금을 모으기 위해 스리랑카에서 몇 달을 보낸 1년 뒤에 기어코 벌어졌다. 다르마팔라는 1895년 2월 25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얼마동안 명상을 했다. 어제 보리수 아래에서처럼 나의 마음은 일본 불상을 마하보디 사원으로 가져가라고 독려했다. 승려들을 깨우고 한동안 앉아 명상을 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아침 일찍 불상을 가야에서 부다가야로 옮길 것을 결의했다. 침묵 속에 나는 일곱 번 거듭해서 부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동트기 전에 불상을 싸서 7시에 부다가야로 출발했다. 그 곳으로 가는 도중에 두 명의 회교도들을 만났다. 도착하자마자 불상을 담은 상자를 마하보디 사원 위층으로 모셔갔다. 우연의 일치로 그 두 명의 회교도들이 그 곳에 있었고 불상을 놓는 것을 목격했다. 나의 친구 베핀 바부(Bepin Babu)도 그 곳에 있었다. 우리가 촛불을 켜려고 할 때 마한트의 힌두교 수도사들과 회교도 무크티아르(Muktiar)가 올라와 위협하며 불상을 제거하라고 명했다.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불교도들이 자신의 사원에서 예불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다니. 큰 소동이 있었다. 마한트는 가야로 급히 떠나 버리고 저녁에 수세관 맥퍼슨이 경위를 조사하러 왔다. 몇몇 목격자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는 그 곳을 떠나며 크나큰 신성모독이 그 사원에서 저질러졌다고 말하며 우리 일행을 보호해 달라고 감시관에게 부탁했다. 우리는 사원 옆 버마 객사에 머물렀다.”


다르마팔라는 여기에 40, 50명이나 되는 힌두교 수도사들이 곤봉과 막대기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가 심하게 모욕당했다는 것, 그리고 고대 일본 불상이 곤두박질쳐 뜰 아래로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난폭한 행위에 대한 소식은 즉시 전 불교계에 퍼졌고 도처에 분노의 소리가 높아갔다. 드디어 맥퍼슨의 충고에 따라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맥퍼슨은 사원이 불교도들의 숭배 장소로 계속 이용되어 왔고 반면에 마한트나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힌두교도들은 그 곳에서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사실과 마한트가 사원의 소유주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판단 하에 사법권이 있는 가야행정 장관의 자격으로 피고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한 달의 금고형과 더불어 각 사람에게 100루피씩의 벌금을 선고했다. 이런 판결은 마한트의 부하들이 제소했던 지방 법원에서는 확인되었으나 고등 법원에서는 두 재판관 모두가 다르마팔라에게 특별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파기되고 말았다. 그 재판관들은 생색이나 내는 듯이 그 사원을 마한트가 소유하고는 있지만 그 곳이 불교 사원에서 힌두교 사원으로 이적된 일은 없다는 점을 인정해 주었으며, 이전에 불교 참배자들과 마한트 및, 그 부하들 사이에 권리문제로 서로 침해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위해를 가한 것에 더해 모욕마저 안겨주려는 듯 인도 정부는 다르마팔라에게 버마 객사에서 일본 불상을 치우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런 강압적인 조처에 대해 스리랑카와 버마에서 분개의 원성이 높이 일자 결국 그 명령은 철회되었다.


1897년, 마한트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강력한 대지주들의 조직인 영(英) 인(印)협의회를 통해 불상의 제거를 진정했다. 그것은 고등 법원에서 힌두사원이라고 판결된 부다가야 사원 근처에 그 불상이 있다는 것을 힌두교도들이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근거에서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청원을 인정하지 않고, 사원을 순수하게 힌두교의 성지로 취급하려는 어떤 주장도 인정할 수 없으며, 동시에 마한트의 위치에 대해서도 간섭할 의향이 없음을 밝혔다. 이후 몇 년 동안 그 불상은 그 곳에 안치된 채 수망갈라의 예불을 받으며 무사했고, 그 동안 다르마팔라는 외국에 부처님의 법을 널리 퍼뜨리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미국 방문(1896~1897)


1891년 다르마팔라의 출현과 1892년의 마하보디 저널의 창간, 그리고 1895에서 1896년까지 이어진 부다가야 소송 사건으로, 벵골의 식자층은 불교에 대해 더욱 호의적으로 변했다. 이런 기운을 타서 다르마팔라는 인도의 중심지 캘커타에서 마침내 웨사카 축제를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1896년 5월 26일, 그것은 인도에서 부처님의 법이 쇠퇴한 12세기 이후 무려 7백여 년 만에 최초로 거행된 조직적 불교행사였다. 따라서 몇 주 뒤 다르마팔라가 미국 마하보디 협회 설립자인 폴 캐러스(Paul Carus) 박사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떠났을 때 그는 비록 마하보디 사원이 아직 이교도들의 수중에 있긴 하지만 그의 노력이 전혀 결실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런던에서 그는 에드윈 아놀드와 함께 식사를 하고, 리즈 데이비즈 교수를 다시 만나 보았으며, 옥스퍼드 대학의 존경받는 동양 학자인 막스 뮐러 교수를 방문했고, 또한 신지학회와 하이드 파크에서 강연도 했다. 미국에서 보낸 일년은 더욱 바쁜 나날이었다. 그는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아이오와 시티, 그 밖의 여러 대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순수한 부처님의 법(法)을 전했고 불경을 보급했다. 또한 불교 심리학과 수행법의 깊은 뜻을 설명해 주어 미국 사람들이 그 당시 빠져 있던 상업화된 사이비 동양 신비주의의 정체를 드러내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청중에게 ‘신성하고 순수하며 청정한 생활’을 하도록 권했다.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격정의 노예들, 천박한 감관에 지배당하여 육욕에 빠진 자들. 이들 사이비 그리스도 교인들은 서로를 죽이고, 미워하고, 속이며, 술과 악을 모르고 지내던 곳에 이것들을 끌어들이는 짓거리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격정의 노예인 주제에 그들은 타인을 자신의, 그리고 자기네 악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르마팔라 자신도 미국 여행에서 전혀 유혹을 겪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몇 명의 미국 여자들이 이 멋있는 젊은 고행자의 마음을 끌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청정한 인품을 범하려는 시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그들은 듣고 싶었던 달콤한 말 대신에 그의 깨끗한 입에서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만 들었을 뿐이다.


1897년 5월에는 미국 땅에서는 처음으로 뉴욕에서 웨사카 축제를 개최했다. 그 의식은 임시로 마련된 불교 성전에서 거행되었고, 4백 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37조도품(助道品)1)을 상징하는 37개의 촛불이 불상 앞 재단에 밝혀지자 다르마팔라는 불교에 대한 설법을 하고, 옛 종려나뭇잎 경책을 펴고 ‘망갈라 경(Maṇgala Suttā)1)’을 독송했다. 미국에서 다양한 종교 활동을 실천한 가운데도, 그는 벵골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고 마하보디 기근 구제 사업 기금을 모으는 일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실제로 그의 에너지는 쇠진하는 법이 없었고 일 년 동안 그처럼 줄기차게 포교 활동을 벌이고 난 후에도 오히려 더 왕성한 계획을 세웠음을 일기에 적고 있다.


“11월에 미국을 떠나 런던으로 가고 그 곳에서 파리, 베를린, 로마를 거쳐 스리랑카로 가야겠다. 부모님을 만나 뵙고, 섬 전체를 돌며 청정한 삶을 전파하고, 모든 승려들에게 선정(禪定)수행을 행하도록 촉구하리라. 그런 후 캘커타와 카필라바스투를 지나 다르질링으로 가고 그 다음 성스러운 스승(Holy Masters)을 찾아서 티베트로 가리라. 가능하다면 거기서 북경으로 가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나는 이미 백만 번도 더 죽었고 앞으로도 백만 번은 죽을 것이다. 나는 이 위대한 사업을 해 낼 것이며 그래서 이 세상을 무지와 이기심, 욕망의 악에서 건져내리라.”


신지학회에서 탈퇴하다


파리에서 다르마팔라는 동양학자 회의에 참석했고, 1897년 9월 14일 기메 박물관에서 불교도 평화 축전을 열었다. 런던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그 곳 신지학 회원들은 다르마팔라가 이젠 그들의 지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잘난 체하는 사람을 보듯 그를 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취리히와 플로렌스를 거쳐 로마로 향했다. 로마 가톨릭의 미신의 본거지. 엄청난 부(富). 그는 성 피터 성당을 그렇게 일기에 표현했다. 왕자처럼 호화스럽게 생활하던 어떤 추기경이 그에게 로마 교황을 알현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태양이 그 빛을 감추지 않듯 속을 감출 줄 모르던 다르마팔라는 그가 교황을 만나게 되면 유럽 문명이 스리랑카에 선물한 술주정 버릇에 대해 얘기할 것이며 스리랑카의 천주교도들에게 불교도들과 화합하여 지내도록 타이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혼비백산한 성직자는 교황 알현을 취소해 버렸을 뿐 아니라 다시는 다르마팔라를 만나려 들지 않았다.


스리랑카에 돌아왔을 때, 이 외로운 투사는 신지학회의 한 파벌이 마하보디 협회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불교와 애니 베잔트의 신(新)바라문교가 양립될 수 없다고 느끼고 올코트 대령에게 실론 불교 신지학회의 명칭에서 신지학이란 단어를 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런 제안이 주제넘다고 생각한 올코트 대령은 몹시 화를 내어 스리랑카에서 다르마팔라의 모든 활동을 저지하려 시도했다. 그의 옛 제자인 다르마팔라는 유감스럽게도 노인이 그의 성공을 시기하고 있으며 아디아르에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해 보려는 초조감에, 애니 베잔트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 곳에서 몰아내는 것을 묵인하려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몇 년 후에야 그는 신지학회에서 탈퇴했다. 그리고 올코트 대령이 사망하고 애니 베잔트가 회장이 되었을 때, 그는 그녀와 리드비터가 학회 활동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에 가차 없이 공격을 가하곤 했다.


스리랑카에서 활동하는 동안 1898년 한 해가 지났다. 이미 실론 사람들의 인기 있는 영웅인 다르마팔라는 또 다시 우마차를 타고 마을에서 마을로 순례를 시작하여 마침내 그것은 전 섬에 이르렀다.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옹호하려는 그의 열정은 다시 한 번 나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파급되었다. 그는 서양의 대학 교육 체제가 장점도 있지만 윤리적 가치를 결하고 있으며, 마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부친을 설득하여 콜롬보 근처에 부지를 사 「실론 윤리심리학대학」을 설립했다. 교육 과정에는 참배와 명상, 그리고 비교종교학도 포함되었다. 또한 여성 불자들에게 사회 복지 교육을 시키기 위해 상카미타 여자 수행원도 건립했다. 실론까지 다르마팔라를 수행했던 미국인 불교 개종자 카나바로 백작 부인은 그 수도원과 부속 고아원, 학교의 관리를 맡았다.


인도 여행


스리랑카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르마팔라는 1899년 초에야 인도에 갈 수 있었다. 캘커타에서 두 달을 보낸 뒤 그는 장기 계획으로 인도 북부 여행을 떠났다. 넉 달 동안 1500마일 이상을 다녔던 그 여행은 이렇게 묘사되었다.


“그는 순례자로서 여행하며 편안 따위는 돌아보지 않았다. 고행자, 수도승, 힌두교 순례자, 그리고 3등차의 승객들과 중간 계층 사람들 틈에 섞여 때로는 가장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고 빈민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 가운데 그는 극심한 무지와 미신, 그리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빈민 계층의 특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동정심 많은 그가, 그와 함께 지냈던 대중의 고통을 얼마나 예민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사하란푸르에서 보낸 공개장 발췌문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눈을 뜨고 보라. 1억4천백만 명의 울부짖음 소리를 들어보라. 그들의 눈물이 그대의 메마른 가슴을 적시게 하라. ‘신의 섭리’가 그대들을 돌보리라 생각하지 말라. ‘전능자’는 그대들의 시계로 시간을 셈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천 년 세월이 한 시간’에 불과하니 합장하고 기다린들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깨어나라, 나의 형제들이여. 이생의 삶이란 정녕 짧으니 허망한 철학과 타락을 가져다주는 의식(儀式)을 버려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날마다 굶주림으로 고통 받으며 신음하고 있다. 숲 속의 동물들조차 마시지 않을 물을 마시고, 형편없는 집에서 잠자고 생활하며 매일 같이 독을 빨아들이고 있다. 인도에는 이 모든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충분한 부가 있다. 그러나 카스트와 썩은 종교의식의 추악한 짓거리가 수백만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다.”


펀잡에서 캘커타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남인도로 와 달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그 곳에서 그는 불교에 대한 강연 뿐 아니라 대중을 교육시킬 필요성과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자격박탈 철폐를 강조했다. 그리고 마드라스에 마하보디 협회의 지부가 설립되자, 카스트와 종파의 차이가 어느 지역보다 두드러졌던 남부지방에 부처님의 진리의 깃발이 확고히 세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