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12.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2)

印光 大師 嘉言錄 12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2)

 

                                                                        글 :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과거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이기도 하지요. 온갖 방법을 강구하며 보호하고 구제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해야 할 판에, 어찌 한순간 우리 입과 배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몸을 죽인단 말이오?

 

우리는 물뭍이나 허공을 기고 날고 헤엄치는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영명(靈明)한 지각(知覺)과 의식을 갖추었으나 단지 숙세의 업장이 몹시도 깊고 무거워 우리와 다른 모습의 몸을 받은 걸 알아야 하오.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먹을 것을 찾고 죽기 싫어 피하는 꼴을 보면, 그들 역시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소?

 

우리는 다행히도 전생의 복덕에 힘입어 인간으로 태어나 지혜로운 마음까지 받았으니, 마땅히 만물이 모두 우리와 같이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겨난 동포임을 알고 형제의 우애를 도탑게 다해야 할 줄 아오. 그래야 인간이 하늘 및 땅과 함께 삼재(三才)로 자부하며 천지자연의 생장변화 이치〔道·眞理〕를 참구하고 보필하는 대의명분이 부끄럽지 않게 되오. 인간과 중생이 각각 자기의 자리를 얻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며 타고난 천수(天壽)를 다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천지자연이 만물의 생명을 낳아 기르는 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의 입맛이나 즐기고 뱃속이나 채우려는 생각만 품고, 자기가 좀 강하고 재능 있다고 약한 그들을 마음대로 잡아 그 고기를 먹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전생에 쌓아 둔 복덕이 다하고 살생의 죄업이 눈앞에 나타나는 날이 닥칠 것이오. 그 때는 인간의 얼굴과 모습을 바꾸고 싶지 않더라도 업력(業力)에 따라 그들과 서로 자리를 바꾸어 잡아먹히는 꼴이 될 것이오.

 

하물며 육식은 독성(毒性)이 강한데도 즐겨 먹고 싶단 말이오? 피살될 때 원한의 마음이 내뿜는 독기(毒氣)가 엉기기 때문이오. 그래서 무릇 전염병이 나돌 때에도 채식하는 사람은 감염되는 일이 몹시 적다오. 또 고기는 아주 더럽고 혼탁한 물건으로, 이를 먹으면 피가 흐려지고 정신도 맑을 수 없게 되오. 발육성장은 빠른 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일찍 노쇠해지고, 특히 질병에 가장 쉽게 걸리는 취약 체질의 화근이기도 하오.

 

반면 채식은 맑고 정갈한 식품으로, 채식을 하면 기혈(氣血)이 맑아지고 정신도 또렷해지며, 자양분도 풍부하여 건강장수하고 잘 늙지 않게 되오. 이는 비록 보건위생에서 늘상 거론하는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을 다하는 지극한 이론이기도 하오. 다만 속세의 관습이 잘못 이어지면서 그만 미혹과 사견이 갈수록 두텁게 쌓여 본래 성품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오.

 

어진 사람은 반드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죽이는 자는 결코 어진 사람이 아니오. 이는 습관(업습)과 천성 때문이라오. 그래서 성왕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길짐승이나 날짐승은 물론 물고기와 미물까지 모두 즐거워하며, 대도를 밝혀 백성을 교화하기에 활이나 창, 낚시 같은 살상무기를 모두 없앤다오. 옛 부터 지금까지 두루 살펴보면, 잔인하고 재물과 음식에 탐닉한 자들은 집안이 대부분 끊겼으며, 어질고 자비와 사랑으로 만물을 구제한 이들은 자손이 반드시 창성하였소. 그래서 산 사람을 차마 순장(殉葬)시킬 수 없어 대신 인형(俑:진시황릉에서 출토된 兵馬俑 같은 附葬品)을 만들어 쓴 창시자에 대해 공자는 결코 후손이 없을 것이라고 단죄하였으며, 제멋대로 고기를 먹는 사람에 대해 여래는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라고 수기(授記)를 내리셨소. 단지 푸줏간(도살장)만 멀리하면서 도살의 모습과 비명을 보고 듣지 않으면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적당히 자신과 타협하지 않기를 바라오.

이는 유가에서 세속의 풍습에 따라 할 수 없이 내세운 임시방편의 교화일 따름이오. 진실로 비린내와 매운 맛을 영원히 끊어야 바야흐로 부처의 가르침과 진리에 부합한다고 일컬을 수 있겠소.

 

옛날 노(魯)나라에 용감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피차 이름만 익히 듣고 서로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였소. 그러다가 어느날 서로 만나 술을 사서 함께 마시게 되었다오. 한 사람이 “고기 안주가 없으면 맛과 멋이 별로 없으니 가서 고기를 사오자”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그대와 내가 모두 고깃덩어리인데 어찌 달리 구한단 말이냐?”고 대꾸하였다는 거요. 이 말을 듣고 그 식견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침내 옷을 걷어 부치고 각자 살을 떼어 서로 상대방과 맞바꾸어 먹었다오.

 

그들은 의기양양하여 자신들의 교유야말로 마음과 뜻이 서로 진지하게 들어맞는 친구 사이라고 여기며 각자 살까지 베어 내어 먹었지만 마침내 죽고 말았소.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어리석음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바로 육식 때문에 끝없는 살생의 죄업을 지어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자리를 뒤바꾸어 가면서 살생으로 보복하고 있으니, 이들 노나라의 용사들보다 더욱 비참하고 혹독한 셈이오.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후세의 과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득의양양하게 육식을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채식하는 사람들을 미신이나 박복(薄福)의 소치로 덮어씌우고 비방하기 일쑤요. 세인의 습속이 오래 이어져 내려와 잘못조차 모르고 있는 게요.

 

그래서 석가여래께서 『범망경(梵網經)』과 『능엄경(楞嚴經)』·『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에서 살생과 육식의 과보로 초래되는 재앙을 지극하게 설법하셨으니, 이는 재앙을 발본색원하려는 진정한 대자대비심에서 나온 것이오. 근래 살육의 참상은 만고에 듣지 못했을 정도라오. 게다가 홍수와 가뭄, 전염병, 폭풍, 지진, 화산 폭발 등 천재지변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소. 이들 모두 결국 살생의 죄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인과응보일 뿐이오. 세상인심과 윤리도덕이 갈수록 타락해 가고 있기 때문에 천벌과 인재(人災:사고)가 줄지어 일어나니, 이는 거울 앞에 서면 본래 모습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아 피하거나 속일 수 없는 것이오.

 

그런데도 세속의 미혹은 막심하여 악을 저지르면서 선으로 착각하고 죄업을 지으면서 복을 닦는다고 잘못 믿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오. 그 가운데 가장 눈 뜨고 보기 어렵고 마음 아프게 하는 처참한 광경은 아마도 천지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일일 게요. 부자와 재벌은 소, 돼지를 잡아 제사 지내며 한편으로는 많은 복 받기를 기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오. 살림 규모가 작고 가난한 집안도 하다 못해 닭이나 오리를 잡아 신명의 보우로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만사가 뜻대로 형통하기를 기원하기는 매일반이오.

 

천지는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일이 자연스런 덕성이고 신명은 천지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직접 주재하는 존재인 줄을 모른 채, 사람들의 마음은 천지신명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오.

 

만약 천지신명이 자기 혼자를 위해 바치는 제사를 기쁘게 받아 누리면서 그 대가로 수많은 생명들이 도마 위에 칼로 난자질 당하는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어찌 총명하고 정직하면서 선행을 상주고 죄악을 벌하는 올바른 신명〔正神〕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사실인즉 원래 입맛에 탐닉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특별히 신명께 제사지낸다는 명분을 빌어 짐승을 살육하여 자기 뱃속을 채우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습관이 되고 풍속을 이루게 된 것일 따름이오. 커다란 악업을 짓는 줄은 모르고 신명께 제사 지낸다고 말하지만, 과연 천지신명이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희생물을 받아먹겠소?

 

하물며 명색이 신명이라면 반드시 총명하고 정직한 덕성을 지니고, 마땅히 사람들이 지은 선악대로 화복을 공평히 내리는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가축을 죽여 자기에게 제사 지낸다고 죄악을 지은 자라도 복을 내려 주고, 반대로 자기에게 희생을 바쳐 제사 지내지 않으면 선행을 행하는 이에게로 재앙을 내릴 수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그 신명의 심성과 덕행은 시정(市井) 잡배와 다를 게 뭐가 있겠소? 그런 존재를 어떻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면 결코 이러한 요괴(妖怪)나 마귀(魔鬼) 같은 짓은 하지 않으며, 오직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 따른 일만 행할 것이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단지 육식이 좋은 걸로만 여기고, 마침내는 자기가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음식을 탐닉하는 것처럼 신명 또한 그러할 줄로 잘못 미루어 짐작하는 게요. 그래서 서로 본받아 아무도 잘못인 줄 모르는 게오. 비유하자면 고자리가 똥을 먹으면서 하늘의 신선도 당연히 자기처럼 그렇게 훌륭한 맛을 즐기리라고 착각하고, 늘 그 똥을 신선에게 바쳐 복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과 같겠소.

 

사실 지금 도살당하는 저 짐승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두 과거 전생에 다른 희생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내던 자들로, 지금 자기 살을 먹는 사람들이 당시 자기가 저지른 살생의 과보를 갚아주기만 바라는 처지라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일반 대중은 아직도 짐승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소문을 들으면 곧 기뻐 날뛰면서 큰 복덕을 짓는 일로 여기는구료.

 

장래에 자신들이 이러한 짐승으로 바꾸어 생겨나 사람들에게 도살될 때는 이미 입은 있지만 말은 할 수 없고 죽음을 피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처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모르는 게요.

 

하물며 불법(佛法)에 깊숙이 들어가 부처님의 가장 큰 기본계율을 받아 지내고 평생토록 채식하기로 결심한 출중(出衆)한 고매한 사람이 아무 까닭도 없이 육식을 탐닉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써가면서까지 수없는 생명을 죽여 신명께 제사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겠소? 그러한 짓은 천리(天理)에 어긋나고 성현을 모독하는 패역무도한 죄악으로, 미래 영겁토록 매 생애마다 그렇게 피살 당하는 짐승이 되는 과보를 받을 것이니, 어찌 몹시 슬프지 않겠소?

 

세상사람들은 질병이 있거나 위험과 재난 등이 있는 경우 염불로 기도하고 선행을 닦을 생각을 안 하고, 망령되이 귀신에게 제사 지내 도움을 청하려 들기 일쑤요. 그래서 산목숨을 죽이니 본디 재난을 초래한 업장에 살생의 죄업을 새로 덧보태는 셈이니 실로 불쌍하기 짝이 없소.

 

인간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만나는 외부 환경의 인연〔境緣〕은 대부분 전생의 업장 때문에 말미암는 것이오. 그래서 질병이나 고난이 생기면 곧 염불과 선행을 닦고 숙세의 죄업을 참회하는 게 최상의 해결 방편이자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오. 그렇게 하여 업장이 소멸되면 질병도 낫고 재난도 점차 사라지는 거지요. 귀신들은 자기들도 아직 업장의 바다〔業海〕 가운데 잠겨 있는 형편인데, 어떻게 사람들의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있겠소?

 

설사 막대한 위력을 지닌 정직한 신명〔正神〕이라 할지라도 그 위력은 부처나 보살에 비하면 마치 반딧불을 햇빛에 견주는 것과 같다오. 불제자(佛弟子)로서 부처와 보살께 기도하지 않고 귀신에게 기도하는 일은 부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사견(邪見)이라는 걸 알지 않으면 안 되오.

 

또 일체의 중생이 모두 과거의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들이므로, 이치상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모든 중생의 목숨을 아끼고 사랑해야 마땅하오. 세속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따라 부모에게 진수성찬을 봉양하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은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되오. 불법을 들어보지도 못한 일반 속인들이야 육도윤회와 인과응보의 사리를 모르기 때문에 부모에게 진수성찬 바치는 것이 효도라는 사견과 망언을 일삼을 수 있고, 또 그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소. 그러나 이미 불법을 들어 이치를 안 사람이 과거의 부모 친척을 살해하여 현재의 부모를 봉양하거나 장례 또는 제사 지내는 행위는 단지 효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곧바로 천리(天理)와 불법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패역무도가 된다오.

 

그래서 통달한 선비와 지혜로운 사람들은 불법의 진실한 이치를 들으면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한결같이 세속의 임시방편적인 절충법문에 따르려 하지 않지요. 이러한 임시방편의 절충법문은 아마도 세속 중생의 미혹된 감정에 잠시 따라주는 타협안으로 세워진 것이 분명하며, 삼세의 인과법칙을 통달하는 여래의 정도(正道)는 결코 아니라오.

 

세상의 모든 악업 가운데 살생이 가장 무겁소. 온 천하를 통틀어 살생의 죄업을 전혀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마 씨도 종자도 없을 게요. 설사 평생토록 산목숨을 몸소 죽인 적이 결코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매일같이 육식을 하면 곧 매일같이 간접 살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오. 살생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고기를 얻을 수 없지 않소? 사실 백정(도살업자)이나 사냥꾼, 어부들은 모두 육식하는 사람의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대신 살생을 하는 것에 불과하오. 그러니 육식을 하느냐 채식을 하느냐 문제는 실로 우리의 성품과 정신이 향상 승화하느냐 타락 침몰하느냐에 직접 관련되고, 나아가 천하통치가 태평성대를 이루느냐, 혼란무도에 빠지느냐에도 근본원인이 된다오. 따라서 이는 결코 사소한 일로 하찮게 여길 수 없소.

 

요컨대 자기 목숨을 자중자애하고 천하 백성을 두루 사랑하여 모든 사람이 안락하게 건강장수하며 뜻밖의 재난과 사고에 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은, 마땅히 살생을 끊고 채식을 몸소 실천하며 널리 권장해야 할 것이요. 채식이야말로 천재지변과 사고를 예방하거나 줄이는 제일 신묘한 법문이기 때문이오.

 

모든 중생의 심성과 한순간 생각은 부처와 다를 바 없고 또 우리 사람들과도 전혀 다르지 않소. 불행히 전생의 악업으로 축생에 떨어졌으니 정말 더욱 큰 자비심과 연민의 정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아무 것도 모르는 속인들은 오랜 습속에 젖어 살생으로 육식하는 것을 식도락(食道樂)으로 즐기면서, 도살되는 짐승들의 고통과 원한이 얼마만한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구려.

 

인간은 약육강식을 당연한 자연법칙으로 여기지만, 전쟁이나 난리가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으면 짐승들이 도살되는 처지와 똑같은 상황이 되지 않겠소? 가령 적군이나 폭도들이 그대의 집을 불사르고 그대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며 그대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대의 목숨까지 죽이는데도 감히 욕설 한마디 퍼붓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는 것은 자기 힘이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오. 짐승들이 도살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 힘으로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만약 그들이 대적할 힘이 있다면 틀림없이 당장 사람을 물어뜯고 들이박으며 대행할 것이오. 인간이 자기 입맛과 뱃속을 채우기 위해 살생한 죄업으로 말미암아 맺히고 쌓인 짐승들의 원한과 분노가, 인간끼리 서로 총칼을 들이대고 살육하도록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 화근이라오.

 

물론 홍수와 가뭄·기근·질병·폭풍·지진·해일 따위의 천재지변도 모두 그러한 살생 죄업의 여파로 끊임없이 계속 발생하지요. 마치 사람들이 명절 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소. 내가 선물을 보내면 상대방도 답례를 해오는 것이 도리이듯 말이오. 선물이 갔는데 답례가 오지 않거나, 거꾸로 인사가 왔는데 답례를 보내지 않는 법은 결코 없소. 만약 답례가 없다면 이는 반드시 별다른 인연(사정)이 있어 상쇄하기 때문이며, 알고 보면 정말로 왕래 보답의 예법을 벗어나는 경우는 하나도 없소. 하늘(자연)이 상벌을 내리는 인과응보의 법칙도 이와 똑같거늘, 하물며 인간사회에서 서로 보답하고 보복하는 이치야 그렇지 않겠소?

 

그래서 서경(尙書)에는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로움이 내리고, 악을 지으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는 말씀이 전해 오고, 주역(周易)에는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아도는 경사가 있고 악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아넘치는 재앙이 있다.”는 가르침이 적혀 있소.

 

하늘(자연)의 도〔天道〕는 도는 것(순환)을 좋아하여, 가면 간만큼 되돌아오기(반복) 마련이오. 나쁜 결과를 받지 않으려면 먼저 나쁜 원인을 끊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먼저 좋은 원인을 심어야지요. 이것이 천리(天理)나 인정(人情)에 모두 딱 들어맞는 지극한 법칙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