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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14.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2)

印光 大師 嘉言錄 14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문은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으며,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않고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법문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하오. 그런데 염불 법문은 미혹을 끊은 자가 왕생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하고 미혹과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더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우뚝 올라서게 되니, 이 아니 수승(殊勝)하오?

 

하나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하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힘을 아울러 보태니, 두 가지 법문의 쉽고 어려움은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소?

 

의례히 보면, 총명한 사람들이 선서(禪書) 좀 섭렵하다 재미있는 걸 느끼고는 마침내 참선을 최고로 여기고 마치 사방으로 통달한 도인처럼 자처하는 경우가 많소. 대부분 참선과 염불의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과대망상에 잠긴 부류라오.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결코 따라서는 안 되오. 만약 이들을 따르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일은 티끌처럼 수많은 겁(劫)이 지나도록 전혀 가망이 없을 게요.

 

권(權)이란 여래께서 중생의 근기를 굽어보시고 거기에 맞춰 드리운 방편 법문〔臨機應變〕을 일컫고, 실(實)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증득한 도의(道義) 그대로 설법하심을 일컫소.

 

또 돈(頓)이란 점차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빠르게 한 번에 뛰어 넘어 들어감을 일컫고, 점(漸)이란 점차 닦아 나아가고 점차 증험해 들어가 반드시 많은 세월과 생명의 과정을 거쳐 바야흐로 실상(實相)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의 법문이야말로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불도를 이루게 하는〔見性成佛〕 법문으로 정말로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의례히 자랑하는구려. 설사 참선으로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본다〔明心見性〕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진리와 본성상의 부처〔理性佛〕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만약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확철대오하면서 증득하여 스스로 삼계고해를 벗어나 영원히 생사윤회를 벗어남과 동시에, 위로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복덕과 지혜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수 있겠소. 그러나 이러한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경우는 이른바 확철대오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백천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따름이라오.

 

그 나머지 근기가 조금만이라도 처지는 사람은 제아무리 미묘한 도를 확철대오했을지라도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思煩惱〕를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여전히 삼계고해에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한다오. 그렇게 생사를 되풀이하다 보면 깨달음에서 미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고 미궁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게 사바세계 수행의 현실이오. 이러한 즉, 참선법문이 비록 제아무리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근기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실(實)과 돈(頓)의 진짜 이익을 받지 못하고, 결국 권(權)과 점(漸)의 방편법문이 되고 마는 게 아니겠소?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힘이 백퍼센트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그러나 현실상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진리와 본성을 단지 깨달을 수 있을 뿐 몸소 증득할 수는 없게 되오. 지금 말법시대에 확철대오한 사람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인데, 하물며 확철대오한 바를 증득한 사람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여기에 비하면, 염불(念佛) 법문은 위로도 통하고 맨 밑바닥까지 통하며, 임기응변의 권(權)이면서 항상 불변의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단박에 뛰어넘는〔頓〕 수행법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리로 시비우열을 따질 수가 없다오. 위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아 익혀야 할 법문이오.

 

여래께서 중생에게 설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를 끝마치고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일 뿐이오. 다른 법문들은 최상의 근기를 지닌 자만이 그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 있으며 낮은 근기의 중생은 수많은 겁을 닦아도 해탈하기 어렵소. 오직 염불 법문 하나만은 어떤 종류의 근기와 성품을 타고난 중생이든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끝마칠 수 있다오. 이처럼 곧장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어찌 점차〔漸〕 수행법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소? 비록 제아무리 뛰어난 근기로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보통의 근기로 원만하고 곧장 닦아가는 염불만은 못할 것이외다. 겉보기에는 느리고 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법문의 위력과 여래의 서원이 평범한 중하근기 중생들도 막대한 이익을 단박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 그 이익은 완전히 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요.

 

무릇 참선하거나 강경(講經)하는 사람들이 정토 염불 법문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으면 너무 평범하고 쉽다고 여겨 가볍게 보거나 거들떠보지도 않기 일쑤라오. 만약 그들이 염불 법문을 한번만 제대로 깊이 연구해 본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널리 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런데 어찌 권(權)이네 실(實)이네, 돈오돈수네 돈오점수네 하는 잘못된 시비논쟁에 끄달려 스스로를 망치고 중생들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만 저지르고 있겠소?

 

‘집착하지 말라(不執着)’거나 또는 ‘집착을 놓아 버려라(放下着)’ 등의 말은 추상 이치로는 지극히 옳지만 구체 현실 상황은 보통 평범한 중생들이 행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오. 온 종일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사치스럽게 지껄이는 것은, 며칠 동안 물 한 잔 쌀 한 톨 얻어먹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허기져 금방 쓰러져 죽게 생긴 사람이 “나는 용의 간이나 봉황의 골수조차 더러운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판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물건들을 거들떠보기라도 할소냐?”고 허풍 떠는 것과 똑같은 빈말〔空談〕에 지나지 않소.

 

요즘 세상에 불교의 이치〔敎理〕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곧장 참선에만 파고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텅 빈 해탈 병〔空解脫病〕에 걸려 있소. 좌선 좀 하여 생각이 맑아지고 텅 빈 경계〔空境〕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잡념망상을 고요하고 맑게 가라앉혀 어쩌다 펼쳐지는 환상의 경계〔幻境〕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를 마치 무슨 소식(消息)이라도 얻은 것처럼 착각하여 크게 환희심을 내면 마음을 잃어버리고 미쳐 날뛰게 되어 부처님도 고칠 수 없게 된다오. 다행히 수행자가 이를 몸소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으면서 환상과 망상을 내버리면 마침내 모든 법문을 일관회통(一貫會通)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소.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걸은 뒤 문득 사통팔달의 큰 길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말법시대의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형편없는데다가 선지식조차 매우 드물다오. 만약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하여 정토염불 법문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서 단지 자신의 힘만 믿고 참선에만 매달린다면,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고〔明心見性〕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하는 이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환상을 진짜로 착각하며 홀림을 깨달음으로 오인하고 악마에 집착하여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정말 많아질 것이오. 그래서 영명(永明) 선사나 연지(蓮池) 대사 같은 선지식들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를 관찰하여 염불 정토법문을 적극 힘써 펼친 것이라오.

 

참선이라는 법문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겠소? 옛날 위대한 수행자 가운데 조주(趙州)의 염(念) 선사 같은 분은 어려서 출가하여 나이 여든이 넘도록 행각(行脚)을 계속 했다오. 그래서 그를 칭송한 시에도 “조주는 여든에 여전히 행각하였으니, 단지 마음자리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아서였네.”라는 구절이 있소. 장경(長慶) 선사는 좌선으로 방석 일곱 개를 닳아뜨린 뒤 돌아다녔으며, 설봉(雪峯) 선사는 세 번 투자산(投子山:舒州 소재)에 올랐고 아홉 번이나 동산(洞山)에 오르기도 하였소. 이처럼 위대한 조사들도 확철대오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거늘, 악마에 들린 무리들은 악마의 말을 한번 듣고서 모두 다 깨쳤다고 날뛰고들 있으니, 앞에 말한 조사들이 몸소 이들의 신발을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쓸 데가 없구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새김〔佛心印〕을 전하여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見性成佛〕 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보고 이룬다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불성(天眞佛性)을 가리켜 말함이오. 사람들에게 먼저 그 근본을 알아차리게 하면 수행과 증득의 법문은 모두 그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마침내 더 이상 닦을 게 없고 더 이상 증득할 것도 없는 궁극의 경지에서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깨달음과 동시에 곧장 복덕과 지혜가 함께 나란히 갖추어지고 궁극의 불도(佛道)가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오. 마치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어 넣으면〔畵龍點睛〕 용이 곧장 살아나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휘황찬란하게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 효용은 각자 몸소 받아 느낄 수밖에 없소. 그래서 그대로 곧장 마음이면서 부처인 도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법이 함께 나란히 온 세상에 쫙 퍼지게 되었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