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호>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04
(Pure Zen Peace of Mind Cultivate Dharma Meeting)
1995년1월20일오전 8시 삼보사(三 寶 寺 : Sam Bo Sa)
4. 삼시교판<계속>
*제이시교(第二時敎)
*제이시교(第二時敎)...공교(空敎)...소승중(小乘衆)의 실법(實法)의 집착(執着)을 파(破)하기 위하여 제법공(諸法空)의 리(理)를 설(說)함.
<제부(諸部)의 반야경(般若經)>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의 한계를 알아 두어야 우리 공부를 그때그때 점검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일시교 처음에는 이와 같이 우리 중생 차원에서 있다 없다 하는 이른바 유교(有敎), 우리 중생의 유무를 따지는 그런 경계를 가르침인 것이고,
그 다음은 공교(空敎)라! 빌 공(空)자 공교는 참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교를 해석을 못하면 반야(般若)를 모른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모르면 중도(中道)를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공교를 알아야 합니다. 공교를 알아서 정말로 무상(無常)이 우리 몸에 배여야 합니다. 무상이 몸에 배여야 그래야 우리 행동이 빗나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 공교를 말씀한 경이 반야경(般若經)이라. 반야경 이것은 600부라.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본래로 공이라.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색(色)이 공(空)이라. 이런 것을 말씀하신 부처님 경전이 600부란 말입니다. 이렇게 방대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아주 집착돼 있는 그런 마음을 풀어서 모두 다 해방시켜야 할 것인데, 해방시키려면 본질대로 진실 그대로 말씀해야 할 것인데 사실 그대로 말하다 보니까 모두가 다 비었다는 그 말씀을 안 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째서 있는 것보고 비었다고 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 불교인들이 알기가 어렵습니다. 불교인 아닌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교인들도 불교를 제법 아는 소리를 하지만 말씀들 들어보면 결국 공도리(空道理)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공(空)일 것인가? 앞 시간에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연기법이란 인연(因緣) 따라서 모두가 다 잠시간 모양을 낸단 말입니다.
사실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강물 속에 비친 달그림자 같이 우리 중생들이 사실로 착각하여 있다고 집착하는 세계가 중생계입니다.
휘영청 밝은 달이 강물 속에 비친다고 생각할 때에 분명히 물속에 달이 있어 보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있지가 않은 그림자이듯이 우리 중생이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하고 밉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틀림없이 물속에 비치는 달그림자나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앞서도 누누이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흘러가는 흔적에 불과합니다. 흔적을 잡을 수가 있습니까.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입니다.
우리 어제 마음 오늘 마음이 같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순간 찰나(刹那)도 머물지 않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항상 이대로 같지 않는가? 몸뚱이도 역시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마지않습니다. 일초의 몇 억분의 일도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物質)이란 공간성(空間性)도 없고 따라서 시간성(時間性)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어야 인과도 있겠지요.
연기법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는 법문에도 있습니다만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법은 결국 모두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인연생’이라는 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비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흘러가는 것을 잘 파악을 못하니까 실재(實在)로 있다고 고집 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몇 천번 외운다 하더라도 이 공도리를 모르면 반야심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또 내 의식(意識)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다 공이라 했지 않습니까.
어째서 공일 것인가? 인연생이기 때문에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실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있는 것 같이 보일 뿐입니다.
젊은 나이에서는 사무치게 느끼기가 좀 곤란스럽겠지요. 나이가 60이 되고 70이 되면 젊은 시절의 청춘도 별것이 아닌 것이고 몇 년 안 지나면 무덤에 들어가겠구나. 죽어지겠구나. 죽어지면 또 뭐가 남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이렇게 인간의 경륜(經綸))으로 해서는 느낄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은 잘 못 느낀단 말입니다. 자기 청춘이 항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예쁜 얼굴이 항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무상을 느껴야 신앙의 문에 참답게 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무상을 못 느끼면 신앙의 문에는 못 들어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내 몸뚱이 그대로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대로 있고, 항시 이별도 없고, 재산도 차근차근 불어나고 이렇게만 생각하다가는 깊은 신앙에 못 들어옵니다. 기본적인 범주에서만 뱅뱅 돈단 말입니다. 복(福)이나 빌고 하는 정도밖에는 안됩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내 스스로 밝혀서 내가 참답게 나를 알고, 우주의 도리를 참답게 밝혀서 알려고 생각할 때는 싫든 좋든 간에 공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무상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상하지 않는 참다운 생명을 우리가 추구하고 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에도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을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은 그대에게 주어지리라’ 먼저 근본적인 진리를 구하면 다른 것은 따라 옵니다. 일반 중생들은 그냥 부스러기만 구하려고 생각합니다. 부스러기는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허물어지기가 알맞지요. 있다간 없고 없다간 있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저 생명 자체, 생명의 본체인 영생불멸(永生不滅)한 도리를 우리가 참으로 구할 때는 다른 것은 적당히 다 우리한테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남한테 봉사하고 남한테 바치고 하려는 경우 같으면 몰라도 정말로 우리가 영원적인 진리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는 필요한 만큼은 다 갖추어 집니다.
이 공 도리를 알아야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 참다운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우리 공부가 순풍에 돛단배가 됩니다. 우리 공도리를 모르면 항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항시 빡빡합니다.
‘이렇게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와야 된단 말입니다. ‘금쪽 같이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와야 그해야 공부가 되는 것이지 이 몸뚱이 이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가족만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만 소중하고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 정도로는 참다운 도덕(道德)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덕은 진리에 따라서 진리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다 허망 무상하다. 이렇게 알아야 참다운 도덕이 확립이 됩니다. 도덕은 참다운 철학(哲學)이 있어야 참다운 도덕이 됩니다.
이렇게 비었다는 것을 저는 항시 말씀드립니다만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물질의 기본적인 작은 알갱이가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떤 물질도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로 구성 안 된 것은 없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다 그렇습니다. 모든 물질이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이런 것들이 어떻게 모여있는가.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뭣이 되고 그럽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고 성분이 되고 우리 세포가 되고 다 그러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어떠한 것이고 모두가 다 기본적인 조그마한 알갱이는 내내야 전자, 양성자, 중성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를 구성한 물질의 근본 이들 알갱이는 위치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은 뭣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앞 시간에 말씀드린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그런 위대한 천재들은 그야말로 훌륭한 물리학자이면서 철학자입니다. 대 천재가 평생 동안 연구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전자현미경을 놓고, 또 그렇게 어려운 고등 수학과 사고(思考)로 풀어 봐도 결국은 물질의 알맹이는 측정할 수 없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란 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몰라버리니 그들로 이루어진 것 역시 무엇 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다만 물리적인 차원의 기본은 장(場)에너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의 본질에 대해서는 해답을 못 내립니다.
그 에너지가 좌편으로 진동하면 양성자가 되고, 에너지가 우편으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금진좌선자기(金塵左旋磁氣)요, 금진우선전기(金塵右旋電氣)라! 순수 장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느냐에 따라서 음양(陰陽)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역에서는 음양이 나오는 우주의 순수한 정기(精氣)를 태극(太極)이라 하지 않습니까.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음이 되고 양이 되곤 한단 말입니다.
이러는 것이지 고유한 물질은 없습니다.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벌써 공(空)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 에너지의 진동뿐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번복을 시키겠습니까. 수많은 우수한 과학자 철학자들이 다 결론을 내린 것이고 또한 동시에 부처님께서 다 밝혀 놓고 옛날 성인들이 다 밝힌 것입니다.
그리스의 「플라톤」도 역시 현상계(現象界)와 이상계(理想界)라. 참다운 이상계만 존재하는 것이고 현상계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느 철인들이나 대체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칸트」 같은 대 천재도 물(物) 자체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다.
이것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비었다는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있다는 차원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그렇습니다. 싸우고 아귀다툼하고 전쟁이고 다 그렇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다고만 생각해 버리면 그런 저런 것 다 풀려 버립니다.
그래서 반야사상(般若思想) 즉,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앞서 말씀과 같이 순풍(順風)에 돛단배와 같습니다.
이 몸뚱이 다 빈 것이건 고행 좀 하면 무슨 상관있겠는가. 내 몸뚱이 본래 빈 것인데 덜 먹이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명이란 것은 본래로 빈 공체(空體) 것이기 때문에 좀 덜 먹고 더 먹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꼭 몇 칼로리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우리가 있다는 것에 착(着)을 하니까 그런 것을 채우려고 막 먹는 것이지 본래가 비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몸무게도 본래 없기 때문에 이대로 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래가 빈 것이기 때문에 본래 사실은 무게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무게가 없다고 봐야겠지요. 무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인(道人)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하늘로 훌쩍 날라 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생각을 해도 신통(神通)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러면 그것은 재주나 부리는 것이지 참다운 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함경이나 기타 부처님 경전을 보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나 신통 말씀이 하여튼 수천 군데가 넘습니다. 성자의 말씀은 조금도 호리도 거짓이 없습니다.
이 공 소식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있다고 집착하는 중생의 번뇌를 쳐부수기가 하도 어렵기 때문에 600부나 되는 부처님 경전에서 공소식을, 이것도 비고 저것도 비고, 금강경(金剛經)만 보아도 아상(我相)인 나라는 상도 없고, 인상(人相)인 너라는 상도 없고, 중생상(衆生相)도 없고, 또 수자상(壽者相), 목숨이 짧다 길다도 없다고 설파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목숨은 80년이다. 70년이다. 그렇지만 그런 연한(年限)도 역시 물질이 있다고 전제(前提)할 적에 그런 시간(時間)도 있는 것이지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무슨 시간이 있겠습니까.
비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항시 느끼십시요. 느끼시고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는 내 몸뚱이도 본래 빈 것이고, 생명은 본래 무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생명은 본래 꼭 칼로리만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인도에서 어느 수행자는 120일 동안 물만 먹고살았어요. 120일 동안 옆에 분들이 모두 증명을 해 놨습디다.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잠재력은 우리가 정말로 마음만 굳게 먹으면 부사의한 힘을 다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밖에는 아니다. 나는 꼭 얼마를 먹어야 된다. 하루 세끼 먹고 간식도 먹어야 내 체중을 유지한다. 고기는 얼마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빈 소식을 알 수가 없지요. 그렇게 믿으니까 그렇게 안 먹으면 허기가 지고 영양실조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제삼시교(第三時敎)=중도교(中道敎)
*제삼시교(第三時敎)...중도교(中道敎)...소승(小乘)의 유집(有執)과 보살(菩薩)의 공집(空執)을 아울러 파(破)하기 위하여 비공비유(非空非有)의 중도(中道)를 명(明)함.
<해심밀경(解深密經),화엄경(華嚴經),법화경(法華經),열반경(涅槃經)>
제삼시교는 삼시교 가운데 마지막 시교인데 중도교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 비었다고만 해버리면 그때는 너무나 허망하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은 모두 비기는 비었는데 참다운 알맹이는 결국 부처님입니다. 이른바 중도교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는 그냥 아무것도 없이 빈 것이 아니라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이 우주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이 섭리(攝理)하시고 부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잘 못 아시는 분들은 기독교는 비과학적이고 현대에는 맞지 않다. 그렇게 말하지만 현대와 같이 이렇게 개명(開明)한 시대에 18억 인구가 믿고 있습니다. 예수가 가신지 1900년 세월 동안에 무수한 사람들이 믿어 왔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순 소박하게 말씀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이론적으로 체계가 별로 안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기가 곤란스러운 것이지 진리성으로 봐서는 모든 진리가 하나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어느 성자(聖者)의 말씀이나 다 존중하고 숭앙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다 그럴 때입니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전들은 천지 우주는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다.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가르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함경만 보신 분들은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소식만 말해 있으니까 꼭 그것만 집착해 가지고서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야심경, 금강경 같이 모두가 비었다고 가르치는 경만을 주로 보신 사람들은 모두는 비었으니까 허망하지 않는가. 허망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부처님 공부를 하실 때는 꼭 이 중도사상(中道思想), 본래 부처님께서 조금도 에누리 없이 진리(眞理)를 우리한테 보여주신 그 도리를 가르친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들을 보셔야 우리 마음이 허무에 물들지 않고 마음의 번뇌만 끊어 버리면 이대로 다 진여불성 중도실상이며 이 세상도 이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일수가 있는 것이고, 우리 마음도 바로 안심(安心)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되어서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시교를 부처님 비유담으로 삼수도하(三獸渡河)라 합니다.
삼수도하란 세 마리의 짐승이 냇물을 건넌단 말입니다. 토끼와 말과 코끼리 셋이 내(川)를 건너가는데, 토끼는 몸집이 가벼워서 냇물 위에 둥둥 떠서 방정맞게 건너간단 말입니다. 말은 덩치가 토끼보다는 크고 무게가 있으므로 잠기기도 하고 뜨기도 하면서 불안스럽게 건너갑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덩치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뚜벅뚜벅 강바닥에 발자국을 내면서 안전하게 건너갑니다.
그래서 유교는 모든 것을 중생의 상식 차원에서 ‘좋다 궂다’ ‘있다 없다’ 이런 것만 따지는 마치 토끼가 강을 건너가는 격이고, 우주의 진리가 깊고 심심미묘한데 깊은 진리까지는 음미를 못하고 그냥 겉만 피상적으로 흘려 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말(馬)은 조금 덩치가 크므로 가끔 깊이 잠기기도 하지만 또 역시 바닥을 미처 음미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공교라. 다 비었다는 소식만 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본 것이 비었지 참으로는 진여불성 으로 충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뚜벅뚜벅 진리의 바닥을 다 딛고 건너갑니다. 때문에 코끼리가 건너는 것을 중도교에 비유합니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그런 가르침은 모두가 중도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쁘셔서 어느 세월에 이와 같은 경들을 다 보시겠습니까. 안 보신다 하더라도 이 중도교의 도리를 아시게 되면 보신 것이나 똑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하신 최후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가르침입니다.
첫 시간의 안심법문에서 말씀드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질이나 우주 만유의 본바탕이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하신 것도 중도의 법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법문 같지만 그 하나 가운데 상식을 초월하고 또 모두가 비었다는 허무주의를 초월하고 부처님이 하시고 싶은 그 말씀을 그대로 표현한 가르침 입니다.
저는 신도님들이 오시면 반야심경을 드립니다. 반야심경을 드리는 이유가 뭐인고 하면 너무나 상식에만 끌려서 항시 ‘있다 없다’하는 그런 일상적인 가르침에만 머물러 버린단 말입니다. 이른바 세속적인 ‘있다 없다’ 하는 저속한데만 머물려 버립니다.
따라서 그것을 타파 하려면 모두가 다 비었다. 반야심경에 있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이루어진 색온(色蘊)도 공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온(四蘊)도 공이다. 따라서 육진 경계인 색(色)도 공이요. 소리(聲)도 공이요. 냄새(香)도 공이요. 맛(味)도 공이요. 내 감촉(觸)도 공이요. 내 뜻으로 짓는 제법(法)도 공이다.
이런 법문으로 해서 우리가 공 소식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반야심경만 봐 놓으면 그야말로 모두가 다 공인줄만 알고 참말로 진정한 알맹이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으로 해서 우선 우리 마음의 허망한 상을 다 쳐부수고 그 다음에는 중도실상 참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여불성 자리, 본래 부처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를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보리방편문’을 드리곤 합니다. 저희가 많이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한국서 인쇄를 해 가지고 짊어지고 미국까지 건너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 가실적에 듬뿍듬뿍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반야심경’ ‘보리방편문’ 말입니다.
제법 공도리, 반야사상 또는 중도사상, 참다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공과 중도가 같이 어우려 있어야 참다운 반야바라밀이 됩니다. 우리가 법문을 할 때에 항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을 봉송하지 않습니까.
5. 유식삼성(唯識三性)
1.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정유리무(情有理無)..실 무망유(實無妄有)...유(有)
2.의타기성(依他起性)...여환가유(如幻假有)...공 (空)
3.원성실성(圓成實性)..정무리유(情無理有)...실유 망무(實有妄無)..중도(中道)
그 다음 법문은 유식삼성이라, 오직유(唯)자 알식(識)자, 식 이것은 의식(意識)이란 식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식, 이것은 우리 의식만의 식이 아니라 의식보다도 더 깊은 이른바 말나식(末那識)이라. 또 그 바탕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그 다음 깊은 식은 암마라식(庵摩羅識)이라. 그리고 모든 식의 근본 바닥은 부처(佛)입니다.
우리 마음 바탕은 다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불교는 여기까지 알고 보면 알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지금 쓰고 있는 이 마음의 바닥은 ‘말나식’이라는 그런 마음인 것이고, 그 마음이 또 ‘아뢰야식’이라는 모든 종자를 갈무리하는 그 마음인 것이고, 그 바탕이 또 ‘맘마라식’이라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또 그 바탕이 부처님이라. 이른바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유식(唯識)이라할 때 이것은 다 통해서 천지 우주 모두가 다 오직 식뿐이다. 이런 도리입니다.
이때 유식은 물질이나 정신이나 어느 것이나 다 포함됩니다.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오직 식뿐이라는 이런 뜻입니다.
유식 삼성이라.
모두가 식뿐인 것인데 이것도 역시 나누면 세 차원이 있습니다. 식을 다 아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우리 인간의 의식밖에 모르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에 앞서서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라.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우리 중생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렇게 흘러가는 세계가 삼계 아니겠습니까.
삼계도 역시 오직 마음뿐입니다. 마음 잘못 먹으면 나쁜데 태어나고, 마음 잘먹으면 좋은데 태어나고, 그러나 실은 나쁜데나 좋은데나 모두가 식뿐입니다. 식물이고 무생물이고 자연계고 모두가 다 오직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단단한 금(金)이나 은(銀) 이런 금속은 유심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말으십시요.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이나 은도 역시 내내야 금의 원소 은의 원소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들 역시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걸로 된 것이고 따라서 어느 것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모두가 에너지뿐입니다. 장(場)에너지의 본질 마음 즉, 유심(唯心) 뿐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나와서 굉장히 편리합니다. 물리학이 모든 물질은 다 에너지다. 이렇게 부처님의 ‘색즉공’을 제대로 말해 있단 말입니다.
그 근본 바탕을 다 말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선 공도리는 말해 있습니다. 따라서 공도리만 알아도 굉장히 살기가 편합니다. 그냥 직속으로 가쁜 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우리 몸뚱이 간수하고 지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옷도 기왕이면 좋은 옷 입혀야 하고, 멋도 내주어야 되고, 음식도 영양 가치가 있어야 되고, 집도 살면서 이리저리 돌봐 주어야 되고, 저 같이 다 포기하고 지내다 보면 자기 몸뚱이 별로 관심을 안 두면 참 편합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고, 지내다 보면 어느 분이 생각한다고 뭘 갖다 주시면 좀 먹어 놓으면 몸만 무겁고 소화도 안 된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 인간만이 음식에 너무나 곪아 빠져 있습니다. 천상(天上)에 올라가면 음식이 없습니다. 귀신도 냄새만 맡습니다.
우리 생각으로 인간이 다인줄 알지만 인간은 저 지옥보다는 훨씬 높고 짐승보다 높고 아귀 귀신보다는 높다 하더라도 천상에 비해서는 저 밑이란 말입니다. 인간이 절대로 만물의 영장이 아닙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서 만물의 영장이지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 보다 높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그런 높은 세계는 음식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색계에만 올라가도 남녀이성도 없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남녀가 다 각각 쌍쌍인데 귀하게 살 것이지 중 돼서 뭘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세계나 다 남녀 양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욕계 내에만 남녀가 있습니다. 색계 이상은 남녀가 없습니다. 하물며 극락에서는 어디 남녀가 있겠습니까?
극락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을 깨달은 성자만 지내는 세계입니다. 정거천(淨居天)이라, 그런 청정한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다 부인해 버리지만 부처님 말씀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욕게, 색계, 무색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무색계에 올라가면 마음만 존재합니다. 모양도 없고 색계는 욕심도 없고 우리 몸은 훤히 빛나는 광명(光明)뿐입니다.
인간 세계만이 이와 같이 오염된 몸뚱이가 있습니다. 오염된 것을 많이 먹으므로 항시 오염될 수밖에 없겠지요.
태초(太初)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몸에서도 광명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행자재(飛行自在)라. 천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가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구에 내려와서 이것 저것을 먹다 보니 오염되고 무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남녀 차이가 생기곤 했습니다. 애초에는 남녀 차이도 없었습니다. 먹다 보니까 대사(新陳代謝)할 필요 때문에 차근차근 남녀 성(性)이 구별된 것입니다. 색계 이상 올라가면 남녀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부나 수녀나 비구나 비구니가 그렇게 독신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남녀 양성이 꼭 결합해서 같이 부부가 돼야 한다는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되어도 좋고 안 되면 더욱 좋고 말입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그래서 천지 우주의 성품이 모두가 다 식으로 되고, 마음으로 되고 한 것인데 그것도 역시 차원 따라서 구별하면, 번뇌(煩惱)에 때묻은 우리 중생이 쓰는 마음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합니다.
편(遍)을 ‘변’으로도 발음합니다만 음으로만 썼습니다.
변계소집성이라.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우리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서 치우치게, 모든 것을 두루 치우치게 집착 한다는 것입니다. 변계(遍計)라는 것은 모든 것을 치우치게 이리저리 억측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갑(甲)이 보면 밉지도 않은데 을(乙)이 볼 때는 밉단 말입니다. 별로 예쁘지 않은 사람도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면 예쁘게 생각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가 치우치게 보는 것입니다.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을 가르켜서 편계소집성이라 합니다.
따라서 편계소집성, 이것은 중생들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사물의 실상을 못보고, 사물의 실상은 불성 아닙니까. 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다 빈 것이고 참다운 실상은 불성인데 진여불성에서 봐야 바로 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보지 못하니까 업장에 가리운대로 고집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좀 베풀어주면 좋은 것이고, 자기한테 해꼬지하면 별로 안 좋고 그래가지고 항시 꼼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변계소집성입니다.
이런 것은 따지고 보면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원리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을 미워할 때나 지나치게 좋아하실 때도 꼭 이런 것을 생각을 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중생의 망령된 잘못 보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즉, 정(情)에 있는 것이지 원래 우주의 도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인들이 남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정유리무의 범부 소견이라. 진리를 모르는 우리 범부의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때그때 우리 스스로의 생활을 반조(返照)하고 돌이켜 봐서 바른 길을 나가기 위해서 하신 경책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 잘못 봐서 두루 집착하여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방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 비로소 있다고 하는 것이지 진리에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 궂다 하는 이런 집착은 원리에는 없는 어두운 범부의 소견일 뿐입니다.
불교는 가장 심오한 하나의 철학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고, 제가 아무리 쉽게 말씀드리려 해도 쉽게 말할 수도 없고, 특히 저는 말 주변이 없기에,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옮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하면 또 말이 안 되고, 그래서 제 말씀이 어렵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인생관적인 철학적인 문제이므로 해득을 각자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부처님 법은 우주의 보배입니다. 지금 세계의 석학들이 누구나가 말해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 인류를 구제하고, 동서 양 진영이 화합하고, 21세기를 참다웁게 이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나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철학에서는 역설하지 못한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가르침 이것이 이른바 중도(中道)입니다. 중도가 되어야 참다웁게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빌린 것이 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래야만이 세계의 문화 현상을 하나로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잘못하면 국가간에 문화의 골이 깊어질 수가 있습니다.
*의타기성(依他起性)
그 다음에는 좀더 차원이 높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즉,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성품이란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지고 또 내가 미워하는 마음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이 세상에 인연이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입니다.
그리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마치 허깨비같이 가짜로 잠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나 너라는 존재나 태양계(太陽系)나 뭣이든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이것은 허깨비같이 가짜로 모양을 나툰 것입니다.
저번 신문에 보니까 수억 광년의 은하계 속에서 별들이 충돌하여 하나의 빛으로 화해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지구도 오랫동안 몇 백 억년 지나면 하나의 광명(光明)으로 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천지 우주는 어느 것이나 다 가림 없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들은 헛깨비 같이 꿈 같이 허무한 것입니다. 가짜로 있어 보인단 말입니다.
소중한 내 몸뚱이나 그대 몸뚱이나 내 집이나 모두가 다 가짜로 잠시간 중생의 망식에 있어 보이는 것이지 실재로는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짜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존재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설사 집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원래 가짜로 있는 것 허망한 것이니까 무방하지 않겠는가. 집이 없어지면 모처럼 수행자(修行者)같이 내 공부 한번 해 보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훌륭한 백작으로 여러 사람들을 많이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라면 자기 집의 농노(農奴)를 다 해방시키고 토지(土地)를 다 나누어주고 싶은데 자기 아내가 반대한단 말입니다. 백작 부인 입장에서는 식구도 많고 하므로 역시 반대할 만도 하지요. 그러나 톨스토이 자기는 도저히 합당하지 않습니다.
본래 무소유(無所有)가 아닌가. 나라는 것도 본래 없는데 내 소유가 어데가 있는가? 농토(農土)는 농민들이 짓는 것이지 왜 내가 가지고 있을 것인가? 이렇게 해서 항시 아내와 싸웠단 말입니다. 아내는 놓치지 안으려 하고 자기는 남한테 다 분배하여 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다 겨우 87세가 되어서 비로소 자기 아내한테 편지를 써 놓고 집을 나셨단 말입니다. ‘당신이 나한테 반대한 것은 당신 차원에서는 다 옳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진리(眞理)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죽음에 임박해서 정말로 무소유, 아무것도 없이 다 버리고 진리만 따라간다’ 이렇게 써 놓고 오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내한테 마지막 하직의 글을 남겨 놓고 집을 홀로 나와 눈보라 속을 헤매다 결국 쓸어져서 죽지 않았습니까.
「톨스토이」 역시 진리를 믿고 스스로 집을 나와서 하나의 수행자가 되어서 죽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속으로는 행복스러웠겠지요. 그분한테는 죽음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위대한 분들은 그와 같이 다 통합니다. 어떠한 경우도 손해가 없습니다. 진리로 해서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자기 몸뚱이 아프면 아픈 대로...
여러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염불삼매보왕론)을 보셨습니까?
보왕삼매론에 보면 아프면 아픈데서 배우고, 배신하면 배신당하는데서 배우고, 만사(萬事)에서 배웁니다.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허깨비같이 가짜로 잠시간 있는 전변무상(轉變無常)의 소지입니다. 모두가 변화해 마지않는 무상한 존재입니다.
너무 행복스러운 사람들은 무상을 모릅니다. 부모님 덕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상을 모르기 때문에 항시 우쭐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나아가서 감투를 쓰게 되면 어쩔 줄 모르고 당황을 하지요. 그러나 시험에 떨어져도 보고 부모가 학비를 못 대줘서 고생도 해보고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구나 하고 허무를 좀 느끼고 무상을 알아차립니다.
어느 누구나 실패를 해봐야 무상을 느끼고 고생을 해봐야 인생을 좀 느낍니다. 자기 영혼이 보다 더 성숙되는 것입니다. 성숙이 되어야 비로소 진리에 눈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불행도 우리한테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서 우리 인간을 보다 더 영생해탈(永生解脫)로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뭣이 되고 안 되고 그런 것에 대해서 너무나 집착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최선만 다하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 어머니는 어머니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 기업하면 사업의 도리를 최선만 다하면 됩니다. 잘되고 못되고는 인연에 맡기시면 됩니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세 번째 가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이것 역시 앞서 진여연기(眞如緣起)나 중도(中道)에서처럼 원만하게 이루어진 참다운 우주의 실상(實相) 입니다.
인연 따라서 된 것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이지만 그러나 우주의 참다운 모습은 다만 공인 것이 아니라 결국 원성실성입니다. 자비, 지혜, 행복, 능력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춰진 그 자리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 생명(生命)은 그 자리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심(信仰心)은 나한테 모든 공덕(功德)이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믿어야 대승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 참다운 용기(勇氣)도 나오고 사업도 그때는 큰 사업을 할 수가 있겠지요. 장군이 되든 어느 분야로 나아가든 이와 같이 본래적인 영생불멸한 것이 나한테 갖추어진 무한의 가능성 무한의 에너지다. 이것을 분명히 믿어야 큰일을 합니다.
원성실성 이것이 우리의 본성(本性)입니다. 이것이 불성(佛性) 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원성실성 이것은 우리 망정으로는 없다고 보지만 진리에서는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불성이 지금 보입니까?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망령된 마음에는 없지만 영원한 우주의 도리에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진여불성이나 하나님이나 우주의 도리에서는 있습니다. 원성실성은 정무리유의 진여실상의 묘체(妙諦)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또한 모든 존재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이 창조(創造)의 신(神)이다.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우주(宇宙)의 묘체(妙諦)에다가 마음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염불도 실상염불(實相念佛)이 됩니다. 화두를 들 때도 ‘이뭣꼬’라고 단순히 의심하는 것만이 이뭣꼬가 아닙니다. 우주의 본체가 뭣인가? 생명의 실상이 뭣인가? 그 자리를 분명히 의심해야 참다운 화두란 말입니다.
달마(達磨)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뭣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뭣인가? 부처가 뭣인가? 이런 것들 모두가 본래는 원만실상(圓滿實相)을 우리한테 참구(參究) 의심케 하는 말입니다. 화두의 근본 목적 원인이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조선(黙照禪)은 화두 없이 수행하는 선(禪)이지만 그저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는 오직 부처님뿐이다’ 이 자리를 비춰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구제될 수 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영생불멸한 그 자리를 안 떠나야 우리는 구제를 받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란 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우리가 참다운 구제를 받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 본래 생명이요. 부처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나지 않는 것이 ‘오! 주여!’ 하는 것이고,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기분이 사나울 때나 그렁저렁 생각이 기쁠 때나 곤란스러울 때나 이런 생각은 모두가 변계소집성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잘못 보고서 고집 하는 경우 바로 그냥 ‘아차!’ 하고 ‘이것도 공(空)이구나’ 이렇게 해 가지고서 부정을 시켜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념참회(念念懺悔)라. 생각 생각에 우리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 생각에 회개(悔改) 하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 하나님 부처님한테 우리 마음을 돌려야 됩니다.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죽으나 사나 언제나 우주가 다 파괴되든지 말든지 간에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생명의 본 모습 원성실성(圓成實性) 즉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신도님들 오늘 저녁 바로 염불(念佛)을 하시더라도 그냥 염불이 아니라 불성 자리, 영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 자리에 마음을 두시고 염불을 하십시오.
잠자실 때도 실상 자리에 마음을 두시고 잠드시면 나쁜 꿈도 안꾸어 집니다. 그리고 잠자시는 동안도 우리 마음이 걸음걸음 차근차근 불성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창조(創造)의 신(神)입니다. 나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나빠지는 것이고 부처님 하나님을 생각하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우리가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부하시기 참 쉬운 것입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하셔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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