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호>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06
(Pure Zen Peace of Mind Cultivate Dharma Meeting)
1995년1월20일 삼보사 저녁 (三 寶 寺 : Sam Bo Sa)
7. 육즉불<중복>
그런데서 불교 말로 ‘우리 범부는 모도범부(毛道凡夫)라’ 터럭모(毛)자 길도(道)자, 마치 터럭이 바람이 없어도 항시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 소중한 법문 ‘모두가 다 오직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지속(持續)이 잘 안 됩니다. 지속이 안 되면 우리 버릇은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염주(念珠)를 헤아리고, 철야정진(徹夜精進)도 하고, 정근(精勤)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그러는 것은 다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그런단 말입니다. 백일 동안 기도(祈禱) 하는 것도 모두가 다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스님네가 앉아서 90일 동안 결제(結制)하는 것도 모두가 다 바른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 우주가 오직 부처뿐이다’ 이 생각을 빈틈없이 지속시키는 것이 일행삼매 입니다. 한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통털어서 대의(大義)가 무엇인가? 그렇게 말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이것이 생소하므로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가 곤란스럽겠지요.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는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상삼매인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지속을 시킨단 말입니다. 염주를 헤아리고 그런 것도 모두가 부처라는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냥 덮어 놓고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부처님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내 몸에도 충만해 있고, 이 공간속 어디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어리석어서 그 빛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공부가 되면 된 만치 우리는 그 빛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다가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말로 그 빛이 정작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구경즉불(究竟卽佛)
그러다가 묘각(妙覺)이라. 다 성취해 버리면 그 때는 우리가 이젠 자기 스스로 빛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바로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의 광명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의 중요한 대목에서도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14장에‘나는 빛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것은 ‘참나’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인 나, 하나님인 나, 이것이 참나란 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하고 우리 중생하고 같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의 광명을 상상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빨리 광명을 보게 됩니다. 본래가 광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은 어둠과 광명의 싸움입니다. 남 미워하는 것은 어두운 마음입니다. 욕심내는 마음도 벌써 어두운 마음입니다. 남을 사랑하고 베풀고 자비심(慈悲心)을 내면 이것은 벌써 밝은 마음입니다. 한 평생 동안 광명과 어둠과의 싸움입니다.
그 광명으로 가는 길을 보다 촉진시킨단 말입니다. 보다 더 가속화시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하는 것입니다.
팔만장경(八萬大藏經)을 다 더듬어 봐도 모두가 이 두 뜻으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두 뜻으로 귀일이 됩니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 그와 동시에 그 생각을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운전대를 잡으나 항시 그 생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본래가 부처인지라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갑니다.
육조단경의 마지막 대문에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성취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 지니라’ 마치 땅에다가 종자를 뿌려서 오랫동안 잘 가꾸고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어 가듯이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오랫동안 닦고 있으면 저절로 부처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끝내는 열매를 맺어 성불(成佛)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금생에 하직하고 가는 마당에도 가장 큰 자산은, 아무것도 가지고 못 갑니다. 자기 몸뚱이도 가지고 못 가는데 다른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자기 남편하고 같이 가겠습니까? 누구와 같이 가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공부한 것, 그 부처님 공부 가지고 갑니다. 업(業)을 지어 놓으면 그 업을 가지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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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게송(偈頌)
맨 나중에 장을 넘겨보십시오. 그냥 보셔도 아시겠습니다만 제가 설명을 존 드리겠습니다. 순선안심탁마법회 유인물 21 페이지입니다.
유심정토유심현(唯心淨土唯心現)
자성불타자성개(自性佛陀自性開)
억모자종봉자재(憶母子終逢自在)
염향인자대향래(染香人自帶香來)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유심정토유심현’이라. 정토(淨土)란 것은 극락세계를 말합니다. 극락세계가 어디가 있는고 하면 천지 우주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바로 오직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이 마음이 어두워지면 지옥이 되고, 이 마음이 맑아지면 극락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극락을 만듭니다. 오직 우리 마음의 그러한 순수한 상태 이것이 정토이기 때문에 유심현이라. 우리 마음으로 정토를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본래는 다 정토인데, 우리 마음이 어두워서 잘못 보다가 마음이 정화되면 스스로 정토를 마음으로 이룩한다는 것입니다.
‘자성불타자성개’라. 부처가 어디 있는가 하면 내 자성, 내 본래 면목이 바로 부처입니다. 때문에 다른 걸로 부처가 못되고서 내 스스로 부처가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부처가 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내 본래면목, 나한테 원래 부처가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닦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억모자종봉자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깊은 사랑은 역시 어머니와 자식 입니다. 어느 사랑 어떤 사랑하지만 어머니와 자식 같이 순수한 사랑은 없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이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우리의 참다운 근본은 부처님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 생각하는 것이 마치 어머님이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이 어머님 생각하듯이 그렇게 한다고 할 때는 자비롭게 언제나 같이 만난단 말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거니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가 안 되겠습니까.
부모님과 자식 간은 10겁이라! 열 겁이란 것은 무량 세월입니다. 무량겁동안 서로 자식이 되고 부모 되고 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이 어머니 생각하듯이 부처님을 생각한다고 할 때는 자재롭게 언젠가 설사 금생에 못 되면 내생에 가서 꼭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염향인자대향래’라. 마치 우리가 향을 지니고 있으면 스스로 향기가 풍기듯이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고 부처님 생각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한테서는 부처님 남새가 풍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이것은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 이 분은 참선 법안종(法眼宗)의 제3대 조사입니다. 이 분은 그야말로 부처 같은 분입니다. 자기 평생 청정하니 맑게 사신 분입니다.
‘유심정토유심현’하니, 오직 마음이 본래 정토거니 우리 마음을 닦음으로 해서 비로소 스스로 정토를 이룩하고,
‘자성불타자성개’로다. 우리 자성이 우리 본래면목이 본래 부처거니 우리 스스로 부처를 성취할 수밖에는 없다.
‘억모자종봉자재’라,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그리워하듯이 우리가 부처님을 흠모하고 동경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유자재로 부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염향인자대향래’라, 그것이 마치 우리가 향을 지니고 있으면 향내가 스스로 풍기듯이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만큼 부처님 기운이 빛나 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게송은 불교의 시(詩)입니다.
장경혜능(長慶慧稜) 선사, 이 분도 중국 당나라 때의 위대한 선사입니다.
설봉스님의 법제자인데 굉장히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12년 동안이나 자기 스승도 방문 하고 또 제방도 방문하면서 어떻게 열심히 공부를 했든가 좌복을 12개나 떨어뜨렸습니다.
하루 종일 앉자 있으니까 좌복이 빨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좌복이 그와 같이 많이 떨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안 통한단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것이 쉬운 길은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금 천리만리입니다.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분도 위대한 선사이지만 그렇게 12년 동안이나 자기 스승한테나 제방에 다니면서 그냥 좌복이 12개나 떨어질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허나 말이 안 통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확철대오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에 친 발을 걷는 순간, 발을 걷고서 풍광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확 트였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순간은 찰나인 것입니다. 깨닫는 순간까지 가기가 어려운 것이지 깨닫는 순간은 찰나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읊은 시입니다.
야대차의야대차의(也大差矣也大差矣)
권기염래견천하(捲起簾來見天下)
유인문아해하종(有人問我解何宗)
염기불자벽구타(拈起拂子劈口打)
“장경혜릉선사(長慶慧稜禪師)”
‘야대차의야대차의’ 깨닫기 전의 자기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차이로다. 큰 차이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견성오도(見性悟道)한 사람이나 범부나 비슷하지 않는가? 모양이나 얼굴이나 별 차이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차이로다. 큰 차이로다.
‘권기염래견천하’하니, 발(無明)을 걷으니 온 천하가 다 보인단 말입니다. 온 천하가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발을 걷는 순간에 깨달아 버리니까 이제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인문아해하종’을, 어떤 사람이 나한테 당신의 깨달음은 어떠한 것인가? 당신의 종지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어 오면,
‘염기불자벽구타’라. 불자는 총채로, 이것은 먼지떨이도 되고, 또 큰 스님들이 위의를 풍기기 위해서 들기도 합니다. 총채로 그 사람의 입아리를 냅다 짜개 버린단 말입니다.
당신의 깨달음이 어떠한 것인가? 당신의 종지가 어떠한 것인가? 이렇게 누가 나한테 물어 온다면 총채로 그 사람의 입 아가리를 때려서 날려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깨달음이 쉽게 그냥 말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생명을 걸고서 죽을둥살둥 모르고 공부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냥 분별 시비로서 알아 버리려고 한단 말입니다. 도인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그 ‘방(棒)’을 하고 내려치고 하는 것도 다 그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고생고생 해 가며 오랜 세월 동안에 그렇게 얻어서 그와 같이 본래면목을 통한 것인데 그냥 말 몇마다로 알아 버리려고 합니다.
따라서 똑같이 참구자득(參究自得)이라. 어느 누구나 다 똑 같이 참구해서 혜릉(慧稜) 스님 모양으로 그야말로 좌복을 몇 십개나 떨어뜨리고, 신명(身命)을 걸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냥 당신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말로 알아 먹으려고 하면 화가 나겠지요.
청산불착취시해(靑山不着臭屍骸)
사료하수굴토매(死了何須掘土埋)
고아야무삼매화(顧我也無三昧火)
선전절후일퇴시(先前絶後一堆柴)
“석옥청공선사(石屋淸珙禪師)”
이것은 석옥 청공화상의 게송 입니다. 고려말엽 태고스님께서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받으신 선사가 석옥청공화상입니다. 청공화상이 열반에 들으실 때 읊은 게송입니다.
‘청산불착취시해’요. 그 푸른 산은 이 냄새나는 시체를 붙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맑은 푸른 산이 썩어서 문드러지는 시체를 묻는 것을 좋아 하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명당을 찾아서 묻고 옮기고 하지만 푸른 산도 하나의 생명인데 다 썩어가는 몸뚱이를 파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료하수굴토매’로다. 내가 죽어서 하필이면 꼭 땅에 묻어야 할 것인가? 그 맑은 푸른 산도 냄새나는 내 시체를 붙이기를 싫어하니 내가 죽어서 하필이면 꼭 산에다 흙을 파고서 묻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고아야무삼매화’언을, 내가 나를 돌아보니 내 몸을 태울만한 산매의 불이 없구나!
저는 가끔 얘기를 합니다만 과거의 위대한 도인들은 자기가 공부로 해서 자기 삼매의 불로 스스로 몸을 태웠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부터서 육조혜능 스님까지 그 분들 가운데서 대체로 7할 정도는 모두가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불 화(火)자 빛 광(光)자, 자기 몸의 심장에서 불을 내어 스스로 몸을 태웠던 것입니다.
다른 스님들도 할 수 있었지만 인연 따라서 안 하셨고, 정말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할 수 있는 참다운 깨달음에 있어서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에서 불을 내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서 바람내려면 바람내고, 불을 내려면 불을 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런 경계는 아직도 천리만리이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고 지금 죽음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스님 모양으로 한탄하는 노래나 부를 수밖에 없겠지요.
나를 돌아보니 삼매로 내 몸을 태울 불이 없단 말입니다. ‘고아야무삼매화’라, 내가 나를 돌아보니 내 공부가 아직은 선정이 부족해서 삼매의 불이 없구나!
‘선전절후일퇴시’로다. 다만 지금 곧 있다가 사라질 이 몸뚱이와 화장할 나무 한 무더기만 앞에 있구나! 시체를 화장하고 나면 다 사라지고 말겠지요. 선전절후(先前絶後)라는 뜻은 지금은 있지만 곧 잠시 뒤에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꼭 삼매의 불을 내어서 자기 몸뚱이를 보란 듯이 중생한테 보일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공부를 잘 했다하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새같이 신앙심이 부족할 때 정말로 그렇게 의젓하게 열반에 들어서 자기 심장에서 불을 내어 화장할 수 있다면 중생들의 신심을 얼마나 붇도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꼭 그런 정도의 참선을 많이 한 분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만세계화(設滿世界火)
필과요문법(必過要聞法)
요당성불도(要當成佛道)
광제생사류(廣濟生死流)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그 다음에는 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설만세계화’라도, 설사 온 세계가 불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필과요문법’이라, 꼭 반드시 통과해서 법을 들을지라.
요(要)자는 ‘꼭’ 이라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반드시 통과해서 꼭 법을 들어라! 그냥 놀러 가듯이 법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불로 가득 차 있을 지라도, 그러면 가다가 못 가고 불에 타 죽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꼭 통과해서 법을 들을 지니라.
‘요당성불도’라, 요긴할 요(要)자는 굉장히 중요하게 쓰입니다. ‘꼭’이란 말도 되고 ‘한사코’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한사코 마땅히 불도를 성취해서, 한사코 부처가 되어서
‘광제생사류’라. 널리 생사에 헤매는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하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설령 온 세계가 훨훨 타오르는 불로 가득차 있을 지라도 반드시 통과해서 불법을 듣고 그래서 한사코 우리가 부처를 성취하여서 무량 중생을 제도 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 저녁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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